어느 늙은 민중신학자의 편지[각주:1]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I

형. <민중신학>이 출범한지 어언 40년 가까이 되어갑니다. 함께 했던 선배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저는 이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어 젊은 신학자들이 내뿜는 패기와 열정에 놀라고, 우리 때와는 다른 그들의 재기 발랄함, 능숙하고 유려한 매체 적응력, 그리고 현란하고 아찔한 공감각적 감수성에 탄복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세상은 우리가 살았던 시절과는 많이 변했고, 이런 시대의 변화는 당연히 신학하는 우리들에게도 체질개선을 요구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던, 신자유주의, 세계화, 다문화….등등의 용어들을 풀이하면서 그 말들이 지닌 사회학적 의미에 대해 하나씩 이 자리에서 장황하게 늘어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와 한국신학은 발 빠르게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면서 수요자 중심의 교회, 그 수요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신학을 양산해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벌써 10년도 휠씬 지난 일이네요. 이제는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된 듯합니다.
세계화되고 다원화된 오늘날의 현실에는 그 다양성만큼의 편견과 억압과 폭력이 잠재해 있습니다. 전 시대와는 비교가 안 되는 세련된 방식으로 그것들은 교묘히 은폐된 채 자신들의 모습을 숨기고 있지요.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영토화 된 것이든 탈 영토화 된 것이든,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이 제도에 의한 것이든 관습에 의한 것이든, 우리의 삶의 방식은 이제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종의 매트릭스 안에 갇힌 듯 합니다.
그 매트릭스 안에는 체제에 대한 냉소와 체제를 향한 분노를 분출할 수 있는 장치까지 다 마련되어 있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과정이 전과 같은 체제의 강제가 아닌 인민들의 자발적 동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 체제가 옛날 독재정권과 같은 막가파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아주 폼 나고 우아하게, 아주 부드럽고 나이스하게 체제는 인민들을 스스로 낭떠러지 끝으로 걸어가게 만듭니다.
뉴타운을 조성시켜 집값을 올려주겠다는 공약에 속아, 4대강 사업으로 땅값을 올리겠다는 공약에 넘어가 우리는 자발적으로 이명박을 찍었고, ‘잘 살아보세!’라는 박정희의 주문은 약발이 다한 그때의 추억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딸을 통하여 엄연한 현실의 질서로 아름답고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그것도 5.16을 연상시키는 51.6%라는 국민적 동의를 등에 업고 말입니다. 이를 어찌 해석 해야 할까요? 


II

이런 씁쓸한 현실 속에서 저는 지금 지난날 우리가 함께 일구어냈던 <민중신학>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민중신학을 전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난날 있었던 많은 사건들을 회고하게 되는데,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네요. 혁명의 시대를 건너오면서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함성과 환희를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 핍박의 시대 골방에 갇혀 쓰고 또 쓰고 하면서 다듬어진 민중신학의 언어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는 분명 행복한 세대였습니다.
형도 기억하듯이, 우리가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을 선언할 즈음, 이미 우리 앞에는 유수한 신학적 전통과 권위들이 상존하고 있었습니다. 20세기 서구신학을 장식했던 거장들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그들이 이룩해 놓은 풍부한 신학적 토대 위에 많은 후학들이 신학적 담론들을 왕성히 토해내던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죠. 과정신학, 세속화 신학, 희망의 신학, 신 죽음의 신학 등이 서구신학의 전통 내에서 발생한 자기갱신의 목소리였다면, 페미니즘 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은 서구신학의 방계전통에서 일구어낸 혁혁한 공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고수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그런 권위들에 주눅들지도 않았지만, 물론 살짝 엿보기는 했었겠지만서도, 그렇다고 그들을 밟고 뭐 기막힌 신학을 만들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우리의 방식대로,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상황 속에서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학에 시비를 걸고 싶었던 것 것뿐이죠. 그 결과 <민중신학>이라는 나름 엣지있는 신학적 영토를 구축했다고 저는 자부합니다.
하지만, 현재 민중신학은 더 이상 광장의 아우성도 아니고, 고독한 독방에서의 고투도 아닙니다. 피를 끓게했던 광장의 언어는 이제는 서늘히 식어버려 죽은 놈 뭐 만지는 식의 불임의 언어가 되어버렸고, 독방에서 만들어낸 영감의 언어는 더 이상 소통하지 못하는 밀폐의 언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민중신학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고 조건이라고 한다면 너무 큰 자학일까요.  
미국에서 10년 가까이 공부하면서 여러 차례 세계에서 온 친구들 앞에서 민중신학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놀라하고 무척 흥미롭게 민중신학에 대해 관심을 보이다가도 얼마 안 있어 금방 지루해하며 이렇게 묻더군요: we don’t want to know the past of minjung theology any more because we had heard enough of this. My question is that; “what is the influence of minjung theology on Korea and the Church today?” “How minjung theology can continue to be relevant and functioning in the present age called as global-capitalism, postmodernism?” “Please, tell me about the present and future of minjung theology”
저는 이런 질문들을 받으며 두 가지 점에서 놀랐습니다. 하나는 저의 미국친구들이 이미 민중신학에 대한 개론적 지식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그다지 민중신학의 현재 내지 미래에 대해 그들에게 해 줄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는 점입니다. 새삼 저의 민중신학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과 무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그 자극이 저의 논문 제목을 최종적으로 <The Turn to the Other: Minjung Theology in a Dialogue with Levinasian Ethics and Derrida’s Deconstruction Ethics>으로 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III

요즘 논문을 핑계 삼아 다시 기독교 2천년 역사를 읽으며 새삼 깨닫는 사실은 올곧은 신학이란 언제나 시대의 위기 속에서 비상을 꿈꾸다가 마침내 도약해서는 시대의 아픔을 부등켜안고 추락하고 마는, 마치 봄날 화려하게 피었다가 처연히 흩날리며 낙화하는 목련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개별적인 사건들과 현상들은 하나의 절대적 관념, 즉 신으로 복속될 것이라 주장하고, 서로 상이한 진리들이 언젠가는 더 큰 진리로 통합되고 그 안에서 극적인 화해를 이루게 될 것이라 믿는 전통적인 신학은 위에서 언급한 신학의 남루하고 초라한 위상을 부정하겠지만, 신학적 진리란 기존의 신학에서 말해왔던 것처럼 복음 안에서의 화해나 종합보다는, 복음을 들고 시대와의 부조화를 선언하고, 복음을 근거로 시대의 균열을 조장하며, 복음과 함께 시대를 가로지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번영을 담보로 차이의 소멸에 공조하는 신학이 아닌, 은폐된 차이와 모순을 드러내고, 시대의 위기를 발설하며, 그 모순과 위기를 향한 구체적 praxis속에서 발견되는 그 무엇, 그것이 바로 온갖 쭉정이 같은 신학들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교회와 세상을 지켜냈던 신학의 참 모습 이라 믿습니다.
저는 이러한 신학적 전통을 요즘 유행하는 지젝의 말을 인용하면서 ‘부정성과 함께 머무는 것!’ 이라고 말하려 합니다. ‘부정’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negative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不定(Infinite,정해지지 않음 혹은 한계없음)’의 의미입니다. infinite는 현실에서는 deferrable(연기할 수 있는) 혹은 difference(차이), 아니면 emptiness(비어있음)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지젝이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Tarrying with the Negative)’라 했을 때, 얼핏 보면 전자의 ‘부정’을 사용하고 있는 듯 하나, 지젝 사상의 핵심인 실재(the Real)를 이해하려면 오히려 후자의 ‘부정’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참고로, 21세기 윤리학의 지형을 새로 짜고 있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 데리다의 ‘해체의 윤리학’, 그리고 지젝으로 대변되는 슬로베니아학파의 ‘실재의 윤리학’이 서로 상이한 지적 전통에서 시작되었고, 그래서 각자가 노리는 바가 다르다 할지라도, 셋은 공히 부정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민중신학 안에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형태의 부정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부정성을 이론적 토대로 삼는 현대의 사상가들과 민중신학이 함께 공모할 수 있는 대목이라 여겨집니다. (이 부분이 논문의 핵심이 될 텐데, 아직 연구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나름 정리가 되고 어느 정도 맥이 잡히면 그 과정과 성과에 대해서 다시 의견 나누겠습니다) 
하지만, 민중신학이 간직하고 있는 부정성에 대한 자각과 그 부정성의 계기들을 어떻게 발화시킬 수 있을지를 둘러싼 모색은 서로 다른 성질의 문제입니다. 즉 ‘부정의 방식으로 말을 건네는 어법을 민중신학이 산출할 수 있을지?’ 가 관건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말하고자 하는(타도의) 대상에만 관심이 있었지,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몰지각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민중신학은 말을 건네는 대상에 집중했던 과거의 방식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의 개선을 통해 민중신학의 새로운 준거점을 확보해야 할 때입니다. 저는 그 실마리를 윤리에서 찾으려 합니다. <다음 웹진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졸고는 현재 진행중인 필자의 학위 논문 [The Turn to the Other: Minjung Theology in a Dialogue with Levinasian Ethics and Derrida’s Deconstruction Ethics]중 서론의 일부를 번역 각색한 원고입니다. 글의 제목으로 사용된 ‘어느 늙은 민중신학자’는 특정인이 아니라, 논문을 웹진 원고로 번역 각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중화자임을 밝힙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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