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적 읽기로서의 '종교'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Ⅰ. 세속과 분리된 것으로서의 ‘종교’


     익숙한 어떤 것들과 관련해 사람들에게 당신이 당연시하는 그것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기원했고 또한 사용되어 왔는지를 아느냐고 물으면 곤혹스러워 한다. 말이 꼬이기 시작하고 급기야 왜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며 화를 내기도 한다. 그래서 당연함 혹은 상식은 습속인 동시에 한 문화의 지배전략으로서의 권력이라는 주장은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하지만 간혹 어떤 이들은 과감히 깨고 새로운 사고를 개척한다. 대홍수의 이야기를 번역하고 있던 자신에게 줄루족의 응기디가 역사적으로 정말 일어난 것으로 믿느냐고 물었을 때, 자신이 겪었던 일을 소개한 콜렌소의 이야기는 한 예일 것이다. 문화적 습속에 얽매여 자신들의 종교적 이야기를 당연시하고 강요하기까지 하는 종교인들과 달리 그는 "만일 한 명의 천진난만한 줄루인에 의해서 성서의 역사적 정확성이 의문시될 수 있다면, 어찌하여 기독교 선교가 이를 문제시하지 않은 채 다만 절대적인 진리로 성서를 선전하는 데에만 급급할 수 있단 말인가?"[각주:1]라고 되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콜렌소처럼 익숙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에 관해 되물을 용기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여러 가지 것들이 있겠지만, '종교'라는 용어가 오늘날엔 비서구 세계와 관련한 서구문화의 지배와 실천을 보여주는 하나의 용어로서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한번쯤 되짚어 보는 일은 꽤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

     우선, 구글에서 종교라는 용어를 검색하면, 신이나 조차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라고 나온다. 만일 이 설명을 접한 사람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아브라함 종교들 중 하나를 믿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곳에선 종교란 규정된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와 그들이 가진 신앙체계나 문화적 체계를 말한다라고 나온다. 이것은 신을 전제한 앞의 설명보단 낫지만 그럼에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세계의 모든 종교가 신앙체계로 설명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종교학자 러셀 맥커천은 『종교연구 길잡이』라는 자신의 책 맨 앞에 "현실을 그 일상성 그대로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도 없다. …사회학자들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문제에 마주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일상성을 비일상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일상성이라는 게 얼마나 비일상적인 것인지를 알게 될 그런 방식으로 일상성을 환기시킬 수 있을까?"[각주:2]라는 부르디외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책의 마지막 「연구자들」이라는 부분에서 학자들이 종교를 어떻게 정의해 왔는지와 관련해 13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실어 놓았다. 맥커천의 이런 편집은 무엇을 의미할까? 과거와 달리 오늘날 종교에 대한 정의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 실린 학자들 가운데 조너선 스미스와 토모코 마스자와의 논의는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스미스의 논의를 들어보도록 하자.[각주:3]


종교를 위한 자료 같은 것은 없다. 종교란 다만 연구자의 연구가 창조해 낸 것일 뿐이다. 종교는 비교하고 일반화하는 연구자의 상상적 활동에 의해, 연구자의 분석적 목적을 위해 창조된다. 종교는 학문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좀 더 특정하게는 종교사학자는 끊임없이 자의식적이어야 한다. 자료는 오직 그것이 종교를 상상하는 것에 관련된 어떤 근본적인 문제의 사례 역할을 하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


     경건한 신자들에게 스미스의 이런 논의가 안겨줄 충격은 상상할 만하다. 물론, 우려와 달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학자들이란 다 그렇지. 종교를 가슴이 아닌 머리로 배운 탓에 그런 것이지 라고 할 수도 있고, 게다가 오늘날 종교라는 개념에 대해 기독교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들이 부정적인 레토릭을 써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미스의 이런 논의를 단순히 지적인 허영심으로 치부하거나 각 종교들은 원래 종교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해서 해결될 문제일까? 장석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각주:4]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 연구자의 주장이 맞았는지 아니진 해당 종교의 신자들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이 지(조나단 스미스)는 그런 생각이 도대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보겠다는 것인가? 그 누가 대표성을 가진다고 여긴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이가 스스로 자신을 그 종교의 대표자라고 주장한다면 과연 그런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런 식의 질문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그럴 듯해 보이는 이 관점이 얼마나 허황된지 금방 드러나게 된다.


     나아가, 인간 개념에 대해 의문을 표했던 푸코와 마찬가지로 "인간,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구인이 종교를 상상해 온 것은 지난 몇 세기에 지나지 않는다"[각주:5]는 스미스의 주장을, 그리고 이에 대한 반론으로 등장한 "그래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종교의 역사를 다루는 모든 개론서에서 종교가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등장하여 심지어 구석기 시대에도 종교가 존재하였음을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호모 렐리기오수스라고 널리 알려진 말은 이미 인간의 선천적이고 보편적인 종교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각주:6]하는 질문을 소개한다. 그런 후 스미스의 논의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각주:7]


언어학에서 말하는 언어, 그리고 인류학에서 말하는 문화와 마찬가지로 종교라는 것이 경험적인 범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종교라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총칭하는 이차적인 추상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은 존 모리얼과 타마라 손에 의해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들에 따르면 "삶 속에서 종교적인 것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 그 범주에 속하지 않은 여타의 것들과 구별될 수 있다."[각주:8]고 보는 관점은 1500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역사학자들에게 "종교라는 개념은 1500년대에 유럽에서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영역을 구분하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처음 도입"[각주:9]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라는 말에 해당하는 라틴어 렐리지오는 이전에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삶 속에 종교적인 것이라는 범주가 따로 구별되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1500년대에 이르러서는 정치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종교는 사람들이 주교나 교황에게 바치는 충성과 봉사의 일부를 차지하고 싶어 했던 국왕이나 황제의 정치와 대조를 이루었다. 그들은 현실세계 곧 세속 세계에 관한 일들을 완전히 지배하고자 했다. 따라서 교회 공직자들의 활동을 내세, 즉 영원한 세계를 다루는 일로 제한하고자 했다. 또한 교회공직자들이 권력정치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랐다."[각주:10] 그리고 이로 인해, "정치와 다른 것으로서의 종교에 관한 새로운 개념"[각주:11]이 정착되었다.

     불행히도, 이런 서구적 개념은 비서구세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일종의 식민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구는 자기와 다른 종교들에 직면하여 새로운 개념을 발견해내야 했다. 이와 관련해 모리얼과 타마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들어보도록 하자.[각주:12]


유럽 기독교도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종교를 적용하여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같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생물 분류상 사자panthra leo와 호랑이 panthera tigiris를 표범속genus panthera에 속하는 종으로 분류하듯, 그들은 그 지역의 전통들을 수많은 다른 전통들과 함께 종교라는 속genus에 속하는 종들로 분류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별 탈은 없을 듯하다. 즉, "영국인들이 인도를 식민지화하기 전에는 인도인들에게 종교와 힌두교라는 개념이 없었다. 인도에는 원래 힌두교도라는 말이 없었고, 1800년대까지는 힌두교라고 말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각주:13]고 말이다. 한데, 인도만 이러했을까? 그렇지 않다. 다시 이들의 말을 참조해 보자.[각주:14]


불교 역시 무수한 사람들이 2500년 넘게 활동하며 생각한 것들을 종합하여 종교로 분류한 유럽식 개념이다. 불교라는 다양한 수행의 공식 창시자는 고타마인데 그는 부처, 곧 깨달은 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 신들, 영혼, 천국, 지옥, 구원, 종교에 관한 서양식 개념들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오늘날 대학교 철학과에서는 불교를 가르치기도 하는데 부처의 방법들 중 일부는 자기계발 심리학으로 분류된다. ……유교는 종종 사회관계와 통치제제에 관한 일종의 철학으로 분류된다. 부처와 마찬가지로 공자는 신들이나 영혼, 사후세계 같은 내세의 일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데 기독교 선교사들과 학자들은 종교라는 속屬에 속하는 일종의 종種으로서 유교라는 범주를 만들었다. 그들은 중국의 여러 잡다한 사상과 풍습을 도교라는 범주로 함께 묶어버렸고, 그것을 종교라는 속에 속하는 또 다른 종으로 다루었다.


     따라서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발견하기 위해, 프런티어 이론가들은 하나와 여럿,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 그리고 낯선 것과 친숙한 것 사이에서 비교를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효과적으로 새롭게 창출되었다."는 치데스터의 말은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2. 분리에 따른 인종차별담론으로서의 종교


     그래서일까. 장석만 역시 “종교 개념이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나타났으며, 일정한 편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고 썼다. 사실, 종교학의 기원이 공간적으로는 서구이고 시간적으로는 19세기라면, 이런 문제제기가 괴상한 것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 종교학은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현존재가 가진 선입관을 깊이 간직한 채 시작한 학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과학을 표방하면서 그 연구를 시작했지만 종교학의 역사는 이 연구가 진화론에 물들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 예로, 샤프도 『종교학: 그 연구의 역사』라는 책에서 진화론은 종교학에서도 하나의 만능열쇠였다고 말한 바 있다. "진화론자들의 가설은 1880년 즈음 이미 사실상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스펜서는 인간문화의 전반에 대한 이론을 정립했고 이제는 하나하나의 세목에서 그의 통찰을 확인하는 일만 남은듯 했다. 진화론자들의 눈에는 종교가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쳤다. 종교를 일단의 계시된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발전하는 유기체로 보게 된 것이다."[각주:15]

     하지만 종교를 발전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자 했던 이러한 진화론적 연구방식이 처했던 맥락은 단순하지가 않았다. 푸코의 다음과 같은 논의는 폐부를 찌른다. 다소 길지만 들어보도록 하자.[각주:16]


19세기의 기본적인 현상 중의 하나는 소위 생명에 대한 권력의 관심인 것 같다. ……그것은 열등한 인종이 좀더 사라지고 비정상의 개인들이 좀 더 제거된다면 종의 퇴화를 좀더 잘 막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나는 좀더 강하고 좀더 활기차게 살아남아 많은 후손을 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는 식의 관계다. 그러니까 군사적이거나 전투적 혹은 정치적인 관계가 아니라 생물학적인 관계이다. ……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수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19세기의 생물학 이론과 정치 담론 사이에 재빨리 맺어진 관계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넒은 의미의 진화론-다윈의 이론 자체보다는 그의 개념들을 한데 합친 전체로서의 진화론-은 아주 자연스럽게 19세기의 몇 년 동안 단순히 정치적 담론을 생물학적 용어로 옮겨 놓거나 과학의 외피 밑에 정치적 담론을 숨겨 놓은 방식이 아니라 식민정책의 관계와 전쟁의 필요성, 범죄와 광기·정신병의 현상, 다양한 계급으로 구성된 사회의 역사 등을 사유하는 진지한 방식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생물권력의 양식으로 기능하는 근대사회에서 왜 인종주의가 발전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때문에, 앞서 언급한 러셀 맥커천의 책 마지막 부분인 「연구자들」에 실린 마스자와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꽤 타당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각주:17]


사회과학에서든 인문학에서든 똑같이 종교라는 범주는 대체로 비역사회 되고, 본질화 되어 왔으며, 비판적 분석의 영향을 받지 않거나 태생적으로 이를 거부한다고 은연중에 전제되어 왔다. 학문의 입장에서 이런 실패, 분석적 관심의 이런 결여, 그리고 종교라는 주제와 관련된 고집스러운 맹목, 이런 것들의 원인은 의심할 바 없이 많고 복잡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런 담론의 형성 전체에 관해 다른 종류의 면밀한 검토를 꾸준하고 다소 구불구불한 역사적 분석을 한다면, 그 복잡성은 비판적 압력에 굴복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튼, 이제 종교라는 개념은 지극히 서구적인 것이었고, 게다가 인종적인 범주에 속하는 문제였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확실히, 치데스터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종교연구에 있어 푸코가 지적한 생물권력이 어떻게 활성화되었고, 또한 인종담론으로 수렴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각주:18] 물론, 눈치 빠른 독자라면 앞서 언급했던 모리얼과 타마라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바였겠지만 말이다. 들어보도록 하자.


학문적 고찰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고찰이 드러내는 유사성과 차이의 유희 안에서 남부 아프리카에서 행해진 프런티어 비교종교는 제종교간의 비교를 위한 범세계적인 전략들도 동시에 개발하였다. 여기서 세 가지의 기본적 유형의 범세계적인 비교전략-분류법, 계보론, 유형론-을 다시 검토해 볼 수 있겠다. 박물학의 분야에서 스웨덴의 과학자 린네는 동식물과 인간을 속 및 종의 차이로 체계화하기 위한 기초적인 비교원리로서 분류학의 체계를 확립하였다. 이와 흡사한 방식으로 18세기 유럽인 비교론자들은 종교를 또한 종의 차이들에 의하여 나누어질 수 있는 하나의 유개념, 즉 특별히 유대교, 이슬람교, 이교라는 종들로 나뉘어질 수 있는 유개념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남부 아프리카 프런티어에서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와는 또 다른 분류법이 출현하였다. 다수의 프런티어 비교론자들은 하나의 시원적 고대종교로부터의 역사적 퇴화론을 선호하였다. 아프리카 종교들이 특정 시원적 계시종교로부터 퇴화하였다는 이론은 남부아프리카에 기독교 문명을 진척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강구하기 위한 전력적인 논쟁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블리크의 진화론적 작업은 아프리카인의 종교적 계보를 추적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보다 일반적으로 인류전체의 종교적 계보를,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문명화된 유럽인의 종교적 계보를 구축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이었다. 그저 우리네 인종의 초기발전을 조사하는데 있어서 아프리카에 널리 퍼져 있는 인종들의 분파들을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긴요한지를 입증하고자 하였다.


     결국, 치데스터는 종교연구에서 서구의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 간의 "유사성이 붕괴되었을 때 그 기저에 깔려 있었던 것은 종교가 아니라 인종이었다."[각주:19]고 직격탄을 날린다.

     한데, 이쯤에서 몹시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과연 신학은 대체 이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었을까 하는 점 말이다. 흥미롭게도, 스미스는 생물학적 분류가 종교학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언급하면서 "서구종교를 상상하는 커다란 틀 안에서 볼 때 유대교가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각주:20]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장석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각주:21]


유대교는 가깝지만 멀고, 비슷하지만 괴상하며, 서구적이지만 동방적이고, 또한 평범하지만 이국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낯익음과 낯섦 사이의 이런 긴장은 유대교를 상상하는 데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인식을 환기하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긴장은 비교할 필요성을 불러일으키며, 비교를 요청한다. 유대교는 비교와 해석이 필요할 만큼 이국적이다. 반면에 유대교는 비교와 해석이 가능할만큼 가깝기도 하다. 가까운 것과 먼 것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교의 긴장 덕분에 유대교는 정의와 비교와 같은 핵심적인 방법론적 문제를 다루는 데 중요한 시금석이 된다. 게다가 유대교는 종교학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상상력, 자기의식, 그리고 선택과 같은 보다 포괄적인 영역을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사례를 제공해 준다.


     유대인의 이러한 유용함은 신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인종을 분류하는 담론으로서의 생물권력이 종교연구에 적용되기도 했다는 치데스터의 말을 참조한다면, 신학에선 홀로코스트 이후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반유대주의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알다시피 이미 사이드도 지적한 바 있지만, 에른스트 르낭은 이에 해당되는 최적의 인물이다. 사이드에 따르면, 종교문헌의 비교를 수행함에 있어 르낭은 셈어를 인도 유럽어에 비해 윤리적으로· 생물학적으로 타락한 것으로 보았다.[각주:22] 그의 유명한 『예수의 삶』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는 결단코 유대인으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 또한, 결코 예수가 유대인일 수가 없었기에 유대인과 그 종교에 대한 그의 독설은 짙었다. "당시의 예루살렘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현학적인 태도, 신랄함, 증오, 그리고 영혼의 왜소함 등으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그곳에서는 광신이 극에 달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결국 궤변가의 문제로 귀착되어 버리는 율법연구가 유일한 공부였다. 유대 박사와 율법학자들의 지식은 완전히 미개한 것이었으며, 도덕성이 완전히 결여된 보상없는 부조리였다."[각주:23] 사실, 르낭의 이런 인식은 우연히 태어난 게 아니었다. 19세기 분류체계의 정식화를 따랐고, 사이드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비교하면서라는 말에 의해 셈어와 인도-유럽어 간에 통용되는 복잡한 패러다임적인 관계의 네트워크를 의도"[각주:24]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생물분류학과 비교, 그리고 그에 따른 인종이라는 19세기의 배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그는 “그리스 문명 이외의 다른 모든 문명을 하나같이 조악하고 야만적으로 간주”[각주:25]할 수 있었고, 유럽인을 다른 어떤 인종보다 고상한 종족으로 볼 수 있었는데, 그의 예수는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대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르낭만 유별난 하나의 예외적인 그런 인물이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근대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에게서도 이 점은 어렵지 않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의 유명한 책, 즉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에서 슐라이어마허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각주:26]


유대주의는 이미 오래 전에 사멸된 종교이기 때문에 나는 이제 종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유대주의는 어린아이 같은 아름다운 특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나쁜 것과 함께 모두 버려졌으며 여기서 전체는 예전에 그를 믿던 대중들로부터 완전히 사라지고 부패된 희귀한 예가 되어버렸다.


     이에 비해, 기독교는 “그 고유한 근본 직관을 통해 종교와 종교사 가운데서 우주를 가장 많이 가장 아름답게 본 종교”[각주:27]로 이해되고 있다. 한 마디로, 기독교는 "종교 자체를 종교를 위한 소재로 변형하고 조작하며 이로써 종교의 최고능력"[각주:28]인 것이다. 유한자 가운데서 무한자를 직관하는 것이 종교라는 그의 정의를 참조한다면, 기독교는 무한자를 가장 잘 직관하는 종교인 반면 유대교는 퇴화하고 부패한 사멸된 종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점은 그의 책, 『기독교 신앙』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에서 유대교나 이슬람교로 이행하는 것을 오로지 퇴행과 병적인 예외로 간주할 수 있다.”[각주:29] 따라서 그는 “유대교 예언자의 예언은 오로지 기독교를 위해서만 증거력을 가질 수 있는”[각주:30]것이라고 쓸 수 있었다.

     이쯤이면, 유럽의 다른 지성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레너드는 자신의 책, 『소크라테스와 유대인』에서 칸트 이후 유럽의 여러 지성인들이 어떻게 유대인과 그 종교를 이해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슐라이어마허 못지않게 헤겔 역시 그러했음을 알 수 있다. 레너드의 말을 들어보자.[각주:31]


헤겔은 유대인들에게 미가 없으며, 심미적 영역과 관련된 이런 결핍은 자유의 결핍을 수반한다고 여겼다. 헤겔은 그 안에서 진리, 미, 자유, 그리고 정신성이 각각 상호 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강력한 등식을 구축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영속적인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다. 모세의 법이라는 도덕적 명령이 유대인들을 노예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오직 새로운 종교의 출현만이 그들을 거기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고 보았다.


     때문에, 르낭도 그러했지만 헤겔 역시 예수를 유대교와 대립되는 것으로 놓을 수 있었다. 레너드는 “헤겔은 그리스도교의 출현을 유대교의 실증성을 외면하는 것으로 특징지었다. 예수는 순전히 객관적인 명령들과 그것들과 완전히 이질적인 것, 즉 일반적으로 주관적인 것과 대립시킨다.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그 운명>은 예수와 유대인들의 연관성을 전혀 추적하지도 않은 채 예수를 유대인 신앙의 대척점에 놓았다.”[각주:32]고 적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일은 유럽 이외의 식민지에서도 일어났다. 물론, 지금까지 본 것처럼 유럽의 맥락에서 발생한 반유대주의와는 다른 성격의 반유대주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1914년 <남아프리카 원주민이 지니는 유대인 혹은 셈족의 전설과 관습>이라는 시드니 멘델손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치데스터가 "멘덴솔은 유대인과 남부 아프리카의 모든 토착민 사이에서 발견된다는 형태적 유사성과 공통의 혈통에 대해서 그것도 상당히 세부적으로 주장할 수 있었다"[각주:33]고 말했다는 것을 유념하도록 하자. 게다가, 아프리카인들을 보면서 멘델손이 "이들 검은 얼굴들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나는 저 착각을 불허하는 유대인적 용모를 보았고, 그러한 연유로 그들을 이 기묘한 땅의 이방인들로 거의 환영하고 싶은 충동이 일 뻔하였다."[각주:34]고 썼다는 점도 말이다. 확실히, 유럽인이 타자인 비유럽인을 정의할 때 유대인과 그 종교를 동원했듯, 비유럽인 역시 다른 누군가와 관련해 자신을 정의할 필요가 있었을 경우엔 유대인과 그 종교를 동원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반유대주의를 논하면서 유대인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나라에서 유대인이 출몰한다는 노만 콘의 말은 참조할 만하다.[각주:35]


절멸적인 반유대주의가 맹렬히 불타오르는 현상은 대중이 유대인이라는 존재가 그들 이외의 인류를 섬멸하고 지배하고자 획책하는 집단적인 악의 화신이라고 상상하는 경우로만 한정된다. 이런 종류의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이 현실 생활에서 수행하고 있는 사회적 역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실제로 이러한 반유대주의는 한 번도 유대인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수백 년도 전에 유대인이 사라진 나라들에서도 출현한다.


     알다시피, 일유동조론은 이에 해당하는 적절한 한 예다. 타츠루는 “언제 유대인이 일본에 출현하게 됐는지, 우리는 그 날짜까지 알 수 있다. 그럼 소개하겠다. 일본에 유대인을 존재하게 만든 사람은 스코틀랜드인 선교사 노먼 매클러드라는 인물이다. 그는 일본에서 행한 현지 조사의 결과 일본인은 유대인의 잃어버린 10부족의 후예라는 기상천외한 설을 1875년에 발표했다. 이것이 그 후 현재까지 전해지는 일유동조론의 기원이 되었다.”[각주:36]고 소개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유대인이 하나의 대립항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역설한다.[각주:37]


낮과 밤, 남과 여, 평화와 전쟁, 이러한 대립은 그 밖에도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립은 현실적인 세계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립은 현실 세계에 골격과 축과 구조를 부여하고, 현실 세계를 조직화하고, 인간에게 현실이 존재하게 하고, 그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게 만드는 그러한 대립입니다. … 유대인과 비유대인이라는 대립은 현실적인 세계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대립이 아니다. 반대로 이 대립은 현실 세계에 골격과 축과 구조를 부여하고, 현실 세계를 조직화하고, 인간에게 현실이 존재하게 만드는 대립이다.


     그리고 이런 대립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이렇게 적었다. “반유대주의란 꼭 유대인을 배척하라는 명시적인 박해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이 일종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매개로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사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유대인에 대해 친화적인 태도나 경의를 표한다고 해도, 반유대주의자와 기본적인 세계인식의 도식을 공유한다는 말이다.”[각주:38]라고 말이다.

     한데, 타츠루의 책을 번역한 박인순의 말은 이보다 더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39]


북왕국이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하면서 10부족은 아시리아로 끌려가 나머지 2부족에 의해 잃어버린 10부족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기록이 남지 않아 이들의 행방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게 되었다. 10부족의 일부가 아프가니스탄, 인도, 미얀마, 중국, 일본, 한국, 영국, 미국, 스키타이, 아프리카 등으로 이동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10부족의 일부가 이동했다는 지역으로 언급되고 있는 지역 가운데 우리나라가 들어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그리고 잃어버린 10부족 중 하나인 단지파가 바로 한국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들어보도록 하자.[각주:40]


삼성기 하편에 의하면 환국의 12국 중 하나인 수밀이국은 단군 족, 곧 백두산족의 일파이다. 기독교의 12지파 중에 단지파가 있다. 체형, 언어, 생활습관이 수메르인과 이스라엘인과 한국인이 유사하다이스라엘이 말하는 선민(選民)은 그 뜻을 선택받은 민족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원어는 chosen people로써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조선 사람」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단군 민족이라는 의미다. 세계를 방황하던 이스라엘이 유엔에 청원할 때 만주를 달라고 했다고 한다. 고향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인 아브라함은 수메르 인으로써 함께 천신제(天神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한민족과 이스라엘의 동질적 역사와 문화(文化)를 보면 너무나 유사점이 많이 있다.


     사실, 이런 말은 누가 봐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허무맹랑하여 정신병자가 지껄이는 말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인이 이 가상의 유대인을 반복하여 호출하는 까닭은 자신들의 사정 때문이었다. 일유동조론부터 시오텐의 반유대주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에 공통된 점은 국민국가의 정치적 위기와 국민적 정체성의 동요라는 두 가지 정치적 요인이다.”[각주:41]라는 타츠루의 말을 참조하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주장은 아니다.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유대인의 지혜를 배우자는 소리가 한국 개신교 내에서 호응을 얻는 이유는 최근 침체한 한국의 경제적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를 살해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유대인이라고 말해야만 하는 개신교인들의 신앙적 고백과 모순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이러한 모순을 뚫고 한민족이 단지파라는 망상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이런 망상 뒤에는 현실적으로 막강한 전세계적인 힘을 누리고 있는 현재의 유대인의 기원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한민족이라고 말함으로써 지금의 위기상황을 타계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한데, “반유대주의란 꼭 유대인을 배척하라는 명시적인 박해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이 일종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매개로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사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유대인에 대해 친화적인 태도나 경의를 표한다고 해도, 반유대주의자와 기본적인 세계인식의 도식을 공유한다는” [각주:42]타츠루의 말을 대입하면, 이런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해진다. 반유대주의가 유럽 및 비유럽을 가리지 않고 출몰한다는 콘의 지적은 여기서도 핵심을 찌르고 있다고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1. 데이비드 치데스터, 『새비지 시스템: 식민주의와 비교종교』, 심선영 옮김, 경세원, 2008, p.247 [본문으로]
  2. 러셀 맥커천, 『종교연구길잡이』, 김윤성 옮김, 한신대학교 출판부, 2015 [본문으로]
  3. 러셀 맥커천, 같은 책, p.299 [본문으로]
  4. 조너선 스미스, 『종교상상하기』, 장석만 옮김, 청년사, 2013, pp.14~15 [본문으로]
  5. 조너선 스미스, 같은 책, p.15 [본문으로]
  6. 조너선 스미스, 같은 책, p.15 [본문으로]
  7. 조너선 스미스, 같은 책, p.16 [본문으로]
  8. 존 모리얼·타마라 손, 『신자들도 모르는 종교에 관한 50가지 오해』, 이종훈 옮김, 휴, 2015, p.22 [본문으로]
  9. 존 모리얼·타마라 손, 같은 책, p.22 [본문으로]
  10. 존 모리얼·타마라 손, 앞의 책, p.23 [본문으로]
  11. 존 모리얼·타마라 손, 같은 책, p.24 [본문으로]
  12. 존 모리얼·타마라 손, 같은 책, p.24 [본문으로]
  13. 존 모리얼·타마라 손, 같은 책, p.25 [본문으로]
  14. 존 모리얼·타마라 손, 같은 책, pp.26~27 [본문으로]
  15. 에릭 샤프, 『종교학: 그 연구의 역사』, 윤이흠·윤원철 옮김, 한울아카데미, 1998, pp.71~72 [본문으로]
  16. 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박정자 옮김, 동문선, 1998, pp.277~295 [본문으로]
  17. 러셀 맥커천, 앞의 책, p.259 [본문으로]
  18. 데이비드 치데스터, 앞의 책, pp.405~410 [본문으로]
  19. 데이비드 치데스터, 앞의 책, p.450 [본문으로]
  20. 조너선 스미스, 앞의 책, p.24 [본문으로]
  21. 조너선 스미스, 같은 책, p.24 [본문으로]
  22.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옮김, 교보문고, p.257 [본문으로]
  23. 에른스트 르낭, 『예수의 삶』, 박무호 옮김, UUP, 1999. p.189 [본문으로]
  24.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책, P.255 [본문으로]
  25. 미리엄 레너드, 『소크라테스와 유대인』, 이정아 옮김, 생각과 사람들, 2014, p.300 [본문으로]
  26. 슐라이어마허,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 최신한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2, p.235 [본문으로]
  27. 슐라이어마허, 같은 책, p.239 [본문으로]
  28. 슐라이어마허, 같은 책, p.239 [본문으로]
  29. 슐라이어마허, 『기독교 신앙』, 최신한 옮김, 한길사, 2006, p.92 [본문으로]
  30. 슐라이어마허, 같은 책, p.131 [본문으로]
  31. 미리엄 레너드, 앞의 책, p.148 [본문으로]
  32. 미리엄 레너드, 같은 책, p.148 [본문으로]
  33. 데이비드 치데스터, 앞의 책, p.450 [본문으로]
  34. 데이비드 치데스터, 같은 책, p.451 [본문으로]
  35. Norman Cohn, Warrant for Genocide, London: Eyre & Spottiswoode, 1967, p.252 [본문으로]
  36. 우치다 타츠루, 『유대문화론』, 박인순 옮김, 아모르문디, 2011, p.65 [본문으로]
  37. 우치다 타츠루, 같은 책, p.39 [본문으로]
  38. 우치다 타츠루, 같은 책, p.75 [본문으로]
  39. 우치다 타츠루, 앞의 책, p.65 [본문으로]
  40. http://www.dailywrn.com/sub_read.html?uid=5775 [본문으로]
  41. 우치다 타츠루, 같은 책, p.96 [본문으로]
  42. 우치다 타츠루, 같은 책, p.7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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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사회적 분열과 "비시민"의 출현에 대한 고찰(3)


- 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의 결합을 통하여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서론


    2. 한국 전쟁 이후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라는 사회적 합의의 형성과 붕괴

     (1)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의 형성

     (2) 남한 국가의 형성과 근대화에 미친 미국의 영향 

     (3) 남한 사회의 사회적 균열의 시작 – ‘민중’의 출현

     (4) 남한 사회의 내부합의의 동요와 붕괴

     (5) 남한 민족주의의 분화와 분열


    3. 남한 사회에서의 ‘무능력자’와 ‘무자격자’ 형성의 구조

     (1) 민주화 시대 ‘시민’의 출현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성취되기 이전에는, 남한 사람들 대다수는 자신들을 ‘국민’이라고 정의했다. 이 말은 이따금 민주화운동을 정당화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했으나, 대체로 국가에 대한 복종의 함의를 갖고 있는 말이었다. 그 경우, 국민은 개인의 집합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단일한 실체로 이해되었다.  

   1987년 민주화 성공 이후에는 ‘시민’이란 용어가 출현하여 ‘국민’과 공존하게 되었다. ‘시민’의 출현은 민주화과정을 통해 시민사회의 제도적 기능이 정상화되었다는 한 증거이다. 김진호에 따르면, 그러한 정상화로 인하여, 남한 ‘시민’은 이제 각자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와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각주:1] 이 ‘시민’은 일반적으로 ‘국민’과는 다르게, 개인 각자의 혹은 개인들의 집합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민중’이 일반적으로 하층 계급 사람들이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사회운동의 지평에는 종종 반자본주의적 성향을 담지하는 것으로 이해된 반면, ‘시민’은 국민국가 내부의 자유민주주의의 주체로 이해된다. 민주화의 진전과 사회주의 붕괴가 겹치면서, 남한 사회에서 ‘시민운동’은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류가 되었다. 

   남한 사회에서 ‘시민’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부터,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은 분리불가능한 상태로 사회적 정당성을 담지하는 명분이 되었다. 이 두 명분 중에 어느 쪽에 중점을 둘 지를 놓고 보수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간에 심각한 논쟁이 있긴 하지만, 이 두 명분을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민주화 이후 남한 국가의 기본 합의 중 하나가 되었다. ‘한국병 치료’와 ‘문민정부’를 함께 내걸었던 김영삼 정부의 슬로건은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의 두 명분이 공존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의 슬로건을 앞세워 경제개혁을 시도했다가 심각한 실패를 겪었고, 민주주의를 추구하던 정책들이 경제정책에 의해 제어당하면서 시민사회의 저항을 불러와, 민주주의에 대한 헤게모니를 상실했다.[각주:2] 김영삼 정부가 IMF 구제금융과 함께 마감되면서, 그 이후 정부들의 목표는 경제개혁과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정부도, 경제에 의해 민주주의가 제어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앞에서 논의한 대로, IMF 구제금융 이후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변화를 가속화시킨 것은 자유주의적 입장을 가진 정부들이었다. 금융/산업/노동 영역의 구조조정의 결과로 상당수의 기업과 은행이 사라졌고, 정리해고와 파견 노동 등이 일반화되는 신자유주의적 노동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우나 현대 등의 일부 재벌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삼성과 LG 등의 대재벌, 특히 삼성은 IMF 이전보다 더 강력한 경제적/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은행이 산업 자본의 이해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실물 경제 바깥에서 자립하는 금융자본으로 자신을 재구축하게 되었다.[각주:3]  

   이런 모든 변화로 인해, 남한 사람들의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종신고용 시스템에 기반을 둔 라이프스타일이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90년 초부터 시작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화는 계속 가속화되어, 비정규직 노동이 고용의 주류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대부분의 청년 노동자들이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청년빈곤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중년 노동자들은 상당수 정리해고되거나, 정리해고를 모면한 경우라도 그들의 고용주들이 과거와 같은 이윤이 나오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정리해고를 단행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살게 되었다. 국가 경제 지표가 향상되고, 김대중 정부가 예상보다 일찍 IMF 구제금융을 상환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경제적 양극화 상황은 심화되고 노동계급의 삶은 더 불안정해졌다. 

   IMF 구제금융 이후의 남한의 자유주의 정부들은 경제적 양극화로 인해 초래된 대중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 복지 시스템과 경제 구조의 동시 개혁을 시도했다. 이 정부들의 사회복지 개혁의 노선은 ‘생산적 복지’였는데, 이는 복지 수혜자들이 구직활동에 적극적일 것을 요구하는 등의 ‘생산적 태도’를 갖출 것을 요구하는 노선이었다. 한편, 이 정부들은 신자유주의적인 외부의 충격을 경제 구조 개혁의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정책을 폈다. 

   외부 충격을 경제 구조 개혁의 지렛대로 활용한 예로 노무현 정부가 시도한 한미 FTA를 들 수 있다. 노무현 정부는 ‘선진통상국가’가 되겠다는 기조 하에, 이를 동시다발적인 FTA 체결로 성취하려 했다.[각주:4] 한미 FTA는 중국의 빠른 산업화에 대응하여 경제 구조를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명분 하에, 원래 계획되었던 시기보다 당겨서 추진되었다.[각주:5] 이 때 정부의 논리는, 가장 발달된 서비스 산업을 구축한 나라인 미국과 FTA를 체결함으로써 그에 따른 외부 충격이 남한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 향상을 가속화한다는 것이었다.[각주:6] 자신을 ‘실용적 진보주의’의 추구자라고 정의했던 노무현 정부는, 한미 FTA가 담지하는 ‘글로벌 스탠다드’의 적용이라는 외부 충격을 활용하여 재벌과 노동계급의 저항을 극복하고 재벌과 정규직 노동자들의 특권(물론 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는 노무현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각주:7] 하지만 삼성과 같은 대재벌들 역시, 한미 FTA가 초래할 영미적 자본주의 노선으로의 격변 속에서 일어날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잡고자 하는 의도 속에 FTA 체결을 지지했으며, 심지어 삼성의 경우, 노무현 정부의 일부 관료들이 증언한 대로, 한미 FTA 체결을 앞장서 제안하기까지 했다.[각주:8] 

   한미 FTA에 대한 수많은 찬반 논란은 대체로 민족주의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졌다. 한미 FTA 반대 담론의 대부분은 협상 결과의 대부분이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는 쪽으로 편향되었다는 주장을 근거로, 한미 FTA가 ‘미국의 경제 침략’의 수단이 될 것이라고 단정했는데, 이는 이 반대 담론들이 남한 사회운동의 전통적인 반미 경향 속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 준다. 반면, 한미 FTA 찬성 담론의 대부분은 한미 FTA가 “1조 7천억불 상당의 미국 시장”에 “한국의 경제 영토를 확장”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당시 노무현 정부에서 만들었던 한미 FTA 추진 관련 광고를 보면, 한국 기업을 상징하는 기마부대들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 영토를 행진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이 장면들은 한미 FTA를 추진하는 정부 지도자들의 민족주의적 욕망을 보여 줌과 동시에, 남한 대중들의 민족주의적 욕망을 한미 FTA 추진에 동원하려는 의도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렇게 동원된 민족주의적 욕망이 제국주의적 욕망으로까지 나아간다는 것도 보여준다. 이 때 그 욕망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은 한미FTA를 비롯한 갖가지 FTA를 통해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장면들은 미국에 대한 식민주의적 선망을 통해 내면화된 남한의 “제국의 눈”[각주:9]을 보여 주며, 이는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협력하는 하나의 양상을 보여 준다. 이 지점에서, 이 한미 FTA를 추진한 노무현 정부가 사회운동 일각의 지지와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리버럴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자신을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실용적 진보주의’의 추구자로 정의했음을 짚어 본다면, 이는 민주화운동 지지의 입장에 선 리버럴들의 대다수도 제국주의적 욕망을 공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하겠다. 

   2007년 보수주의 정부가 재집권하면서, 이명박과 박근혜가 이끈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이끈 10년 동안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주장했다. 이 정부들은 이전 자유주의 정부들의 경제개혁 정책을 전면적으로 이어받지는 않았지만, 신자유주의적 경제 시스템 변화를 지속하고, 4대강 등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통해 내수 경제를 진작하려는 정책을 폈다. 하지만 이 정부들은 이전 자유주의 정부 이상의 경제 지표 향상을 이루어내지 못했고, 경제적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의 수립에 참여한 일부 보수주의적 지식인들이 ‘선진화’[각주:10] 등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리버럴들을 포섭하려 시도하기도 했으나, 2008년 촛불 시위 이후에는, 보수주의 정부는 반정부적 입장의 대중들에 대한 설득을 포기하고, 그들을 불순하다고, 더 심하게는 ‘종북’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서는 시민들과의 소통을 포기했다는 반대쪽의 비난이 뒤따랐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이러한 소통 불가능성과 경제적 양극화 등으로 인해, 지금의 남한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 웹진 <제3시대>



  1. 김진호, “시민, 민주화-시장화 사이에서 ‘자기분열’”, 2010년 4월 14일자,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6128.html. [본문으로]
  2. 그 한 가지 예로, 김영삼 정부는 1996년 신자유주의에 근거한 노동법 개정을 시도했다가 노조의 총파업과 야당의 반대에 부딪쳐 개정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는 김영삼 정부가 헤게모니를 상실하는 결정적 지점이 되었다. [본문으로]
  3. 지주형,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서울: 책세상, 2011), 276 [본문으로]
  4. 앞의 책, 398 [본문으로]
  5. 앞의 책, 400 [본문으로]
  6. 앞의 책, 403 [본문으로]
  7. 앞의 책, 400 [본문으로]
  8. 앞의 책, 400 [본문으로]
  9. Chen, Kuan-Hsing, Asia as Method: Toward Deimperialization.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0, 17 [본문으로]
  10. 박세일.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서울: 북21, 20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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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사회적 분열과 "비시민"의 출현에 대한 고찰(1)


- 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의 결합을 통하여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서론



    왼쪽의 만화는 2012년 12월 10일, 그러니까 제 18대 대통령 선거 기간에 경향신문에 실린 시사만평이다. 이 만평은 현재 남한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분열 과정과 그 분열로 인해 현실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고도 심도 깊게 보여준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논리는 남한의 사회적 분열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양쪽 진영, 즉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서로 상대방과의 분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기제이다. 말하자면, 이승만, 박정희로 대표되는 보수정권을 지지하고 경제성장에 우선적 가치를 두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산업화”의 논리가,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민주정부를 지지하고 민주주의에 우선적 가치를 두는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민주화”의 논리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이 두 가지 정당화 명분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성공의 기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자들이건 자유주의자들이건, 예를 들어 현재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불안정한 일자리와 청년실업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계속되는 양쪽 진영 사이의 갈등이 젊은이들의 고통을 심화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진영 사람들은 오히려 젊은이들이 자신들 주장의 정당성을 이해하거나 지지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비난한다. 

   그렇다면, 남한의 보수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사이의 이러한 분열 과정을 촉진시킨 사회적 합의의 붕괴는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 한국 전쟁 이후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군사독재가 남한의 정치를 지배했고, 반공주의의 물결과 군사독재적 통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군사정부는 경제발전이라는 명분을 이용했는데, 그 과정에서 경제발전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바로 민족주의다. 그리하여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 과정은 민족주의와 결합한 반공주의를 지지하는 사회적 합의를 창출해냈다. 

   그러나 1987년 이후의 민주화 과정은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흔들기 시작했고 1997년 외환 위기는 그것을 완전히 두 조각으로 붕괴시켰다. 그 결과, 외환 위기 이후 남한에는 더 이상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각자 자신들이 붙들고 있는 반 조각의 합의에 매몰되어 있다. 이를테면, 보수주의자들은 과거의 사회적 합의 중에서 반공주의라는 조각을,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은 민족주의라는 조각을 붙들고 있는데, 이는 현재 남한의 사회적 분열 상황을 대표한다. 이러한 사회적 분열의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다른 이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만한 가치나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자격 없는 사람들,” 혹은 정상적인 사회적 주체가 될만한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무능력자”로 간주되는 사회적 고통이다. 


    2. 한국 전쟁 이후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라는 사회적 합의의 형성과 붕괴 


     (1)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의 형성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본의 식민지 침략에 대한 반응의 일환으로 형성되었지만, 일본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직후 한국이 두 나라로 분열되면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분단 이후 민족의 분열과 민족주의라는 모순을 해결하고, 일제 식민지 기간에 형성된 민족주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남한과 북한 정권은 모두 서로를 “민족/국가의 적”으로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정권이 민족/국가의 진정한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정권이 반제국주의 투쟁을 선언하면서, 자신들이 민족/국가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기 위해 이 투쟁을 이용하고 있는 반면,[각주:1] 남한 정권은 북한 정권이 소련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므로 민족/국가의 적이라고 라고 비난하면서,[각주:2]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자신들이 “유엔에 의해 승인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국가”[각주:3]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자기 정당화의 수단일 뿐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한반도의 분단은 더 고착화되고 심화되었다. 남한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북한 정권은 “동족상잔의 비극”의 원흉이고,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이 한국전쟁의 원흉이고 남한 정권은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직후에 이승만은 일민주의(一民主義)가 남한과 장차 통일될 국가의 민족 이데올로기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각주:4] 일민주의의 요점은 반공 이데올로기, 갈등에 대한 증오, 분리될 수 없는 국가 정체성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각주:5] 신기욱에 따르면, 일민주의는 혈통민족주의에서 보여지는 파시스트적 경향이 반공주의와 결합된 형태이다.[각주:6] 토지개혁이 시행되고 정부가 행정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이 시기에, “한국 국민”이라는 정체성과 구분되는 “대한민국(남한)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각주:7]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의 물질적 기초는 박정희 정권 동안 더욱 강화되었다. 박정희는 국가를, 개개인을 위한 중재자가 따로 필요 없는 한국 국민의 자연적인 모임으로 이해했고,[각주:8] 이는 이승만의 일민주의 개념과도 공통점을 갖는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은 “조국 근대화”[각주:9]와 “민족중흥”[각주:10]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 슬로건들이 보여주듯이,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보다 더 능동적으로 개발주의를 활용하였고,[각주:11] 한국 “국민”이 국가 생산성 향상이라는 목적을 위해 단결해야 하며 모든 국민(國民)은 생산적인 사고방식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다.[각주:12]

     그러므로, 일민주의가 그러했듯이,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기반이 되었던[각주:13]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한국 국민들 사이의 갈등이나 분열을 증오했다.[각주:14] 한편, 박정희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한국적 독자성”을 강조했는데, 남한에 자율적인 시민사회의 형성이나 자본의 축적 등과 같은 근대화의 조건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구식 근대화와는 다른 독자적인 방식의 근대화를 주창하였다.[각주:15] “한국적 근대화”라는 이 개념은 박정희가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또 다른 이념적 기반이었다. 박정희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중 개발주의는 남한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주적으로 여기는 북한을 남한 정권이 다루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 정권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통한 북진통일을 내세운 반면, 박정희 정권은 한국전쟁과 같은 또 다른 미래의 전쟁 없이도 북한을 흡수하여 통일을 이룩한다는 흡수통일 논리를 내세웠다.[각주:16] 여기서 남한이 북한을 흡수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는 경제발전인데, 이 경제발전은 박정희가 제안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남한 국민들이 단결해야만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각주:17]

     박정희 독재 정권 시기 동안, 남한은 급속한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경험하였다. 이렇게 빠른 경제 발전 과정에서 북한을 향한 남한 국민들의 증오는 일정 부분 그들의 능동적인 사고방식으로 변환되기도 했는데, 독재정권은 이러한 변환을 경제발전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용하였다.[각주:18] 그리고 이러한 경제발전 과정의 결과로서 남한 국민들은 국가적 성취감을 얻기 시작했는데, 이 성취감은 그들의 개인적 성취감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박정희가 만들어낸 이러한 변화들이 현재까지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한 국민들은 박정희를 남한 근대화와 경제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지금까지도 남한 보수 진영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주된 기반으로 남아있다.


     (2) 남한 국가의 형성과 근대화에 미친 미국의 영향

     미국의 군사개입은 남한 정부가 수립되고 한국전쟁이라는 위기를 탈출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많은 (보수적인) 한국인들은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혈맹’이라 부른다.

     박명림의 ‘미국의 범위’[각주:19]라는 개념은 1945년 이후 미국의 남한 개입을 설명하는 데에 유용한 개념이다. 박명림에 따르면, 남한에서의 ‘미국의 범위’는 공산주의 혁명의 방지와 파시즘의 방지 사이이며 구체적인 미국의 정책은 이 범위 내에서 시계추처럼 진동한다.[각주:20] 그리하여, 이 진자운동의 범위 내에서, 미국은 어떤 때는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독재자를 지원하기도 하였다.[각주:21] 물론, 이러한 ‘미국의 범위’는 남한이 미국의 영향권 내에 머물러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므로, 이 범위 안에서는 기본적으로 보수적 편향이 작동하게 마련이다.

     한편, 남한 정부의 수립과 한국전쟁에서의 생존은 물론이고, 남한 사회의 근대화 과정 자체도 미국의 막대한 영향 아래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의 해방과 한국 전쟁을 겪은 직후, 남한 사회에서 미국이 주력한 일은 근대적 교육 제도와 관료제의 수립과 언론의 발전을 지원함으로써, 이 제도들을 통해 미국의 이상인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자본주의를 남한인들에게 이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각주:22] 또한, 미국은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를 세우고,[각주:23] 사관학교가 세워진 이후에도 여러 연수 과정을 통해 남한군의, 특히 장교단의 군사적 능력과 리더십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각주:24] 그 결과, 남한군 장교단은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관료제 운영의 노하우와 지식도 갖추게 되면서, 자신들을 국가 안보뿐 아니라 경제 발전도 지도할 능력이 되는 집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고,[각주:25] 박정희의 5.16 쿠데타는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기도 하다. 또한, 경제적 근대화에 대한 박정희의 열망은 미국이 5.16 쿠데타를 지지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각주:26]

     1950년대의 미국의 개입이 위에서 본 것처럼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 시스템 – 교육, 관료제, 군대 등 – 을 확립하는 데 주력한 것이었다면, 1960년대에는 미국은 남한의 민족주의 세계관을 확립하는 데 주력 지원을 했다. 미국이 남한의 민족주의 세계관으로 제안한 것은 ‘근대화 이론’이었는데,[각주:27] 이 이론은 남한과 같은 ‘저발전’ 국가의 근대화는 오직 전통적 요소를 배격하고 미국과 같은 ‘발전된’ 서구 국가와 연계될 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각주:28] 이 이론에서, 근대화는 저발전 국가가 기술적 지식을 모방하고 흉내내어 익힌 뒤 그 기술적 지식을 사용함으로써 걷게 되는 발전의 보편적인 길로 이해되었다.[각주:29] 그리하여, 미국이 제안한 근대화 이론은 탈식민 국가들에게 공산주의적 발전경로에 대한 대안의 구실을 했다.[각주:30]

     남한의 지식인들은, 비록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적 요소의 적극적 역할을 더 많이 찾으려 하긴 했어도,[각주:31] 위에 서술된 바와 같은 근대화 이론을 널리 수용했고, 그로 인해 민족주의와 반공주의의 결합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경향은 더 심화되었다.[각주:32] 그 결과, 박정희 정부를 근대화의 리더로 인정하는 지식인 그룹도 형성되었다.[각주:33] 그러나, 근대화 이론을 수용한 다른 지식인들 중에는, 근대화 개념이 독재정치를 시작한 박정희 정부에 대한 저항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도 있었다.[각주:34] 짚어 볼 점은 근대화 이론에 대한 이 두 가지 반응이 앞에서 언급한 ‘미국의 범위’ 안에 이미 포함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미국이 근대화 이론을 제안한 의도 자체가 경제적 근대화 과정을 가속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남한인들의 열망을 불러일으켜 박정희 정부를 견제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각주:35] 요약하면, 미국은 남한 사회의 거의 모든 방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했으며, 특히 제도적, 지성적 측면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 웹진 <제3시대>


  1. Shin, Gi-Wook. Ethnic Nationalism in Korea: Genealogy, Politics, and Legacy.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155 [본문으로]
  2. Ibid. [본문으로]
  3. 이기백, 한국사신론. 제2판 (서울: 일조각, 1976), 442 [본문으로]
  4. Shin, ibid., 101 [본문으로]
  5. Ibid. 102~103 [본문으로]
  6. Ibid. 78 [본문으로]
  7. 김보현, 박정희 정권기 경제개발 (서울: 갈무리, 2006), 83~88. [본문으로]
  8. Ibid., 122~123 [본문으로]
  9. Shin, ibid., 103~104 [본문으로]
  10. 김보현, ibid., 122 [본문으로]
  11. Shin, ibid., [본문으로]
  12. 김보현, ibid., 140~144 [본문으로]
  13. 김보현, ibid., 153 [본문으로]
  14. Shin, ibid., 107 [본문으로]
  15. Ibid [본문으로]
  16. Ibid. 160 [본문으로]
  17. Ibid. 162 [본문으로]
  18. 김진호, 시민 K, 교회를 나가다(서울: 현암사, 2012), 68 [본문으로]
  19.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제2권(서울: 나남, 1996), 523 [본문으로]
  20. Ibid. 523~524 [본문으로]
  21. Ibid. 524~526 [본문으로]
  22. Brazinsky, Gregg.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 Koreans, Americans, and the Making of a Democracy.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7, 41 [본문으로]
  23. Ibid., 73 [본문으로]
  24. Ibid., 79 [본문으로]
  25. Ibid. 100 [본문으로]
  26. Ibid. 118 [본문으로]
  27. 정일준, "한국 사회과학 패러다임의 미국화" 원용진, 김덕호 엮음,아메리카나이제이션(서울: 푸른역사, 2008), 339~340. [본문으로]
  28. Ibid. 348~349 [본문으로]
  29. Ibid. 351~352 [본문으로]
  30. Ibid. 350 [본문으로]
  31. Brazinsky, ibid, 172 [본문으로]
  32. Ibid. 177 [본문으로]
  33. Ibid. 178 [본문으로]
  34. Ibid. 184 [본문으로]
  35. Ibid, 186~18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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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취지

_지난 30년 동안 많은 성서신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이 탈식민주의 이론과의 대화를 시도 해왔다. 그러나 실천신학 영역에서는 이런 노력이 많지 않았다. 다행히 최근 10년동안 예배학자들과 기독교 교육학자들을 중심으로 실천신학과 탈식민주의 담론을 이론화하고 실천적으로 고찰하는 노력이 보인다. 본 작업은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예배 중 성찬의 문제를 세가지 측면에서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다루고자 한다. 첫째, 성찬을 문서화된 예식으로 강조될 때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 진단한다. 소위 “문서주의의 헤게모니”를 다루면서 탈식민주의에서 관심하는 “행위로서의 지식”과 대조적으로 성찰한다. 둘째, 성찬을 둘러싼 지도력의 문제를 다룬다. 소위 성직자의 특권인 집례 권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살피면서 공적 의식으로 성찬, 공동체적 참여로서의 성찬의 역할을 조명한다. 셋째, 성찬에 쓰이는 빵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자본주의적으로 획일화되어 상품화되어가는 영성체, 성찬 요소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서구화 획일화의 문제와 탈서구화와 토착화의 문제를 집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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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그 상을 수여할 자격이 없다

“소녀 말랄라”와 노벨평화상


조민아

(세인트캐서린 대학 조교수)

 


열 여섯살 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 

파키스탄의 스와트 계곡에서 살던  말랄라는 2009년 열 한살의 나이로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세력 탈레반의 여성 탄압과 교육권 박탈을 비판하는 글을 BBC의 블로그에 올리면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파키스탄 정부군과 탈레반의 전투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교육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잃지 않았다. 2012년에는 무장괴한의 습격을 받아 머리와 목에 치명상을 입었지만, 전세계인들을 향한 말랄라의 메시지는 오히려 더 힘차고 단호해졌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극단주의자들은 책과 펜을 두려워 한다. 교육은 그들을 겁먹게 한다.” 말랄라의 말이다. 이 멋진 여성이 201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나는 말랄라의 수상 소식이 불편했다. 그녀의 용기와 업적이 찬사를 받는다는 사실이 불편했던 것이 아니다. 여성교육권을 위한 그녀의 신념은 더 널리 알려져야 하고, 더 많은 이들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그녀에게 상을 수여하는 손길들이다. “그들”은 과연 말랄라에게 “평화상”을 내릴 자격이 있는가? 


노벨평화상이 “평화상”으로서의 공신력을 의심받기 시작한 것은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다각적인 후보 추천과 심사과정을 거치지만, 평화상 수상자를 최종 결정하는 이들은 노르웨이 국회가 임명하는 5명의 위원들이다. 중립을 최대한 유지한다고는 해도 국제정치의 알력과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노르웨이는 미국과 정치적, 경제적 협력관계를 돈독하게 맺고 있는 대표적인 우방 국가이다.  국방 장비와 방위력에 있어서 미국에 적지 않은 의존을 하고 있는 노르웨이로서는 선정 과정과 심사에 끼치는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다. 


역대 가장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던 수상자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외교관 헨리 키신저이다(1973년 수상).  그는 베트남전 당시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베트콩 사이 협상을 주도하여 평화조약을 맺게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정작 협상을 주도한 미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공산주의가 뿌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전대미문의 학살전을 벌여 수백만명의 생명을 살상한 전쟁의 주범이다. 맹폭과 민간인 학살, 고엽제 살포 등 미국이 벌인 전쟁범죄는 키신저가 평화상을 수상했던 그 당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은 전쟁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해 키신저와 공동 수상자로 지명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레득토(黎德壽, 여덕수)는 수상을 거부했다.  


노벨 평화상 논란이 정점을 찍은 것은 버락 오바마에게 상이 수여된 2009년이었다. 오바마는 “국제외교와 다자간 대화,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의지, 또 핵무기 감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정치적 태도(공로나 업적도 아니고)”를 인정 받아 대통령직에 오른지 불과 1년이 되기도 전에 평화상을 수상했다. 수많은 평자들이 수상 선정 이면에 작용했던 미국의 영향력을 짚어 내며 노벨 위원회가 자충수를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평화를 향한 의지가 돋보였다던 오바마는 이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소말리아, 리비아, 이라크에 이어 시리아에까지 무차별 공습을 퍼부으며 무려 7번이나 전쟁을 감행했다. 특정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던 이전의 형태에서 벗어나  “이슬람주의 세력”의 주요 활동지역을 타겟 삼아 미국을 위시로 다국적 국가들이 참여하여 전격 소탕작전을 벌이는 형태의 전쟁을 제안하여 중동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기도 했다. 


그 말 많고 탈 많은 노벨 평화상을, 말랄라가 수상했다. 말랄라의 고향 파키스탄에서의 반응은 엇갈린다. 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를 비롯한 정부 각료들은 말랄라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축사를 보냈지만, 파키스탄 언론들은 수상 소식을 전달하는데 미온적이었다. 가장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한 이들은 물론 탈레반 강경세력들이지만, 탈레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파키스탄인들 또한 말랄라의 수상 소식이 마냥 자랑스럽지는 않은 듯이 보인다. 대표적인 이유는 파키스탄에 넓게 퍼져 있는 서구에 대한, 특히 미국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파키스탄은 1950년대 이후부터 미국과 우방 관계를 맺고 경제적 지원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 두 국가의 관계는 조지 부시 전 미대통령이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엇갈리기 시작한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세력의 성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두 국가가 서로 다른 의견을 갖게 된 것이다. 파키스탄 집권세력이 지속적으로 친미 성향을 유지한데 반해, 민중들은 미국 정부와 파키스탄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파키스탄을 싸움터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해 왔다. 


실제로 지난 10여년 간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과의 갈등으로 야기된 일련의 폭력 사태들로 희생된 파키스탄인은 3만명에 이른다. 그중 거의 삼분의 일이 자국 군인의 손에 죽었다. 파키스탄인들은 자신들의 의사와는 무관한 내전을 겪으며 삶을 파괴당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미국은 2011년 오사마 빈라덴 사살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오점을 남겼다. 파키스탄의 주권을 무시하고 이 나라 북서부에 지상군과 무인기(드론 Drone)를 투입하여 수많은 민간인을 살상한 것이다 (“Will I be next?’ US drone strikes in Pakistan,” Amnesty International USA Report, 2013년 10월). “해당지역의 급격한 탈레반화”를 막고 “탈레반 무장세력 소탕”을 목적으로 한다는 미국의 드론 공습은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정세를 감안한다면, 이번 수상 결정에 미국의 입김, 특히 “이슬람 세력의 이미지를 악화하여 중동지역에 대한 서구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고 말한 일부 파키스탄 언론 (“The antagonism towards Malala in Pakistan,” BBC News, 2014년 10월 10일)의 지적을 그저 과장된 음모론이라 치부할 수만은 없다.  파키스탄인들이 갖고 있는 불편한 감정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말랄라에 대한 서구의 태도이다. 알다시피, 미국과 유럽은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탈레반의 폭력을 거부해 온 이 젊은 여성에게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서구 언론은 “말랄라와 같은 착한 파키스탄인”들과 “이슬람주의에 경도된 나쁜 파키스탄인”들을 분리하는 수사들을 끊임없이 사용해 왔다. 그들은 말랄라가 어떻게 “악의 세력”에 맞서 싸워 왔는지를 영웅담으로 만들어 퍼뜨려왔고, “사악한 이슬람주의자들”의 습격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진 말랄라를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우월한 의학기술을 총동원했고, “무장괴한으로부터 언제 또 습격을 당할지 모를”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든든한 경호원 역할을 자처해 왔으며, “위험하고 가난한 고향”에서 이루지 못한 그녀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마치 이런 “인재를 썩히고 방치하고 있었냐”고 핀잔이라도 주듯 각종 국제 회의의 연사로 초청해 그녀의 얼굴에 스포트라이트를 터뜨리고 있다. 


이 이야기 구도,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다. “무지와 폭력의 미개한 세상에서 고통 받는 원주민 소녀를 구해내는 백인들”의 이야기. 여러가지 모양새로 각색되어 디즈니 만화에도 자주 등장해 온 진부한 멜로 드라마.  탈식민 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은 그 낡은 서사. 찬드라 모한티(Chandra T. Mohanty)의 논문 “Under Western Eyes: Feminist Scholarship and Colonial Discourse”는 이러한 이야기 구도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심층 분석한다. 


모한티는 “제 3세계”—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의 여성들을 “가부장제의 희생자들”로 일반화하여 묘사하고, 반대로 이 지역의 남성들을 “가부장적 폭력 구조를 지속, 심화시키는 주범”으로 묘사하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구를  “이미 해방된 주체들, 선진화한 조력자들”로 묘사하는 서구의 접근방식에 문제점이 많다고 비판한다. 모한티에 의하면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해방의 주체가 되어야 할 여성들이 속해 있는 지역의 역사적 상황과 정치사회적 갈등을 단순화할 뿐 아니라, “우리(서구)”와 “저들(제3세계 여성)”을 구분하여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저들”을 “우리”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로 전형화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구도는 “제 3세계” 여성이 “희생자”의 위치를 벗어나는 순간 자동적으로 “억압자들과 한편”이 되거나 혹은 “서구인들과 한편”이 되는 것처럼 조장하여, 지역공동체들 내의 반목을 양산하고 연대 가능성을 차단하기도 한다. 모한티의 주장은 말랄라가 파키스탄인들에게  “서구의 꼭둑각시”로 이해되어 비난 받고 있는 까닭을 잘 설명한다. 여성교육을 향한 말랄라의 신념이 그녀의 고향 사람들에게 설득력있게 전달되기도 전에 식민주의가 만들어낸 이분법의 도식에 갇혀 버리고 만것이다. 


말랄라의 메세지가 “억압받는 제 3세계의 모든 여성들에게” 닿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서구의 언론들은 정작 말랄라가 부딪히고 있는 갈등과 오해를 해소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어느 블로거가 토로한 것 처럼, 서구 언론들은 말랄라를 통해 자신들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일에만 전력을 기울인다. 그들은 말랄라의 확고한 신념과 용기가 사실 그녀의 깊은 이슬람 신앙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의 아젠다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2006년, 말랄라의 고향에서 또래의 소녀가 다섯 명의 미군들에게 강간 살해 당했다는 사실은 가능한 빨리 잊고 싶어한다(Why I can’t celebrate Malala’s Nobel Prize: http://middleeastrevised.com/2014/10/11/why-i-cant-celebrate-malalas-nobel-peace-prize/). 영국의 평론가 조지 갤러웨이(George Galloway)는 서구 언론들의 양면성을 비꼬며 “만약 말랄라가 드론 공습에 의해 살해되었다면 영국언론들은 그녀의 이름조차 공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트위터를 날렸다. 냉소적이긴 해도, 갤러웨이의 지적은 옳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열여섯살 당차고 현명하고 꿈많은 여성 말랄라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녀가 가진 강고한 용기과 여성교육에 대한 열정을 우리는 오래 오래 찬사하고, 그녀의 말들을 가슴에 간직해야 한다. 그러나 말랄라의 신념과 열정을 기억하기 위해 그녀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사실까지 덧붙여 기억해야 할 이유는 없다. 거부하지 않고 받았으니, 그녀의 선택이었겠거니 존중하면 된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말랄라는 노벨평화상이라는 별로 돋보이지 않는 경력을 갖고 있는 말랄라가 아니다. 열한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꿈과 고향땅 친구들의 꿈을 위해 목숨을 걸고 블로그에 글을 올린 말랄라, 탈레반 뿐 아니라 서구의 위압적인 정치인들과 지식인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밝힐 줄 아는 말랄라, 수상 이후 버락 오바마를 만나 “드론 공격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파키스탄 민중을 분노하게 한다”고 말한 말랄라,  “드론 대신 책을 보내달라”고 미국인들에게 호소한 말랄라 (MSNBC Interview, http://www.msnbc.com/ronan-farrow/watch/exclusive-ronan-speaks-with-malala-yousafzai-346760259967),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학교 재건을 위해 5만달러를 기부한 말랄라. 이 벅차게 아름다운 여성 말랄라를, 나는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미 지도자인 그녀가 어떻게 더 깊어가는지, 어떻게 더 성숙해가는지, 고통 속에도 꿈을 잃지 않는 세상 곳곳의 말랄라들과 어떻게 연대하는지, 나는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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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6]

바울신학과 탈식민주의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왜 탈식민주의(포스트콜로니얼리즘)인가? 그것도 바울에 대해 말하는 와중에 뜬금없이 탈식민주의라는 생경한 이야기를 꺼내들어야 할까? 오늘의 웹진에서 필자는 바울을 말하기 위해서, 또는 성서를 현실사회에서 의미있는 말씀으로 끌어오기 위해서 탈식민주의적 관점이 필요함을 역설해 볼 것이다. 탈식민주의가 아니라 탈식민주의적 관점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웹진의 전체를 걸쳐 필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성서를 현실의 삶 안에서 구체적 메세지로 읽어낼 것인가, 즉 바울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다시 또한 기억해 주길 바란다.
   해체주의라는 표현을 기억할 것이다. 영어로 Deconstructuralism이라고 번역하는데, 언뜻 해체주의라는 표현이 와닿는 표현이긴 하지만 데리다가 말했던 단어의 의미와는 조금 거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데리다가 말했던 것은 해체중심의 어떤 것이 아니라 구축주의(Constructuralism)를 벗어나자는 의지가 더 강했던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필자의 은사님이셨던 이경재의 독법을 따라 해체주의를 ‘탈구축주의’로 이해한다. 왜 ‘탈’이라는 표현에 대해 고민할까?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어떻게 해석할까? 포스트라는 표현이 ‘이후’라는 뜻이 있으니 ‘근대이후주의’라고 번역하면 알맞을 것 같다. 근대이후주의라고 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은 근대시대이후에 나타난 모든 ~주의를 망라한 것이라는 표현이 된다. 그러나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 때의 의미가 이러한 것이었을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표현 안에 이미 모더니즘에 반하는 또는 모더니즘을 극복하려는 어떤 것이 있다는 표현이 아닐까? 만약 그렇게 이해한다면 ‘탈근대주의’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에 대한 해석의 다의성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라는 표현에 오면 더욱 심각해진다. 왜 ‘식민이후주의’라고 해석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식민주의가 끝이 났는가? 일본의 식민통치가 종언을 고했고, 이제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으니 식민주의의 시대는 끝이 났는가? 아니면 우리는 아직도 온갖 종류의 식민주의의 잔재들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가? 아니 전세계가 근대주의를 뒤덮었던 식민주의의 그늘아래 있지 않은가? 아니 구세대의 식민주의는 군사력과 땅의 정복을 필두로 하였다면 현대의 식민주의는 금융, 산업, 그리고 정보의 힘을 앞세우고 있지 않은가? 만약에 이러한 끝나지 않은 식민주의의 그늘아래서 현실을 바라보고 이에 대한 메세지를 고민하고 있다면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탈식민주의’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여기서 ‘탈’이라는 표현은 1960년대 이후, 유럽의 식민주의가 각지의 독립운동에 의해 종언을 고했다는 시각에 대한, 또는 식민이후주의라는 번역에 대한 저항이며 여전히 남아있는 식민시대의 효과적인 대안담론을 모색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언제나 식민주의라는 통치체제의 위에는 제국주의라는 정치이념이 자리잡고 있다. 제국주의와 식민통치의 가장 고전적이고 효과적인 예를 든다면 알렉산더가 이루었던 마케도니아 제국을 들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Alexander the Great) 타국이나 타지역의 부족들을 약탈하는 대신에 그리스문명을 소개하고 언어와 문화를 통일하여 그리스문명의 가치에 찬성하는 나라와 부족들을 흡수함으로 효과적으로 또한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팽창을 이루었다. 이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인 곳이 바로 로마였고 이후 로마가 시저(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공화정 중심의 국가에서 황제중심의 제국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제국주의의 역사를 거꾸로 읽어본다면 제국주의는 민중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 일어났을 때 이에 대한 지배계급의 방어기제로 형성된 정치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각주:1] 과연 대표적으로는 마케도니아, 좀 더 과거로 가면 앗시리아와 바빌론제국, 로마 이후에는 대영제국 등으로 이어온 제국주의의 시대는 끝이났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의 시대를 Post-imperialism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로버트 영은 그런 의미에서 제국의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식민주의 시대로부터 시작된 압제에 대한 저항의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각주:2] 하지만 제국은 변했으며 세계 또한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저항의 담론은 현실에 대한 바른 통찰이 없으면 공허함에 그치게 된다. 탈식민주의는 변화된 제국과 식민의 시대에서 구체적 저항의 방법과 실천을 모색한다.

   탈식민주의, 바울과 다리놓기

   이와같이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에 대해 살펴보다 보면 이들이 성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먼저 이스라엘 신앙의 뿌리 자체가 이집트 종살이의 해방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해방의 경험은 곧 야웨신앙의 중심이 되었고, ‘우르’라는 고대의 도시제국에을 떠나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아브라함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구약성서의 근간에 오경의 편집연대가 바빌론 포로기라는 것은 바빌론 제국의 종교와 문화적 식민으로서 신앙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 바로 구약과 유대교 생성의 근원이라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구약은 바빌론이라는 제국하에서 신약은 로마제국 아래에서 편집되고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성서, 또는 기독교의 근본 뿌리가 바로 제국에 대한 저항임을 말하는 것이다. 제국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다면 성서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화하며 저항의 담론을 뒤집어 지배의 담론으로 만들었고 이는 이른바 제국이라 일컬어지는 대영제국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므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코드는 성서를 읽는 여러 관점 중 하나라기보다는 수천년전의 성서와 현대의 우리의 해석을 역사적, 정치적으로 연결시켜주는 ‘마스터 코드’(Master Code)가 된다. 이 이야기가 새롭게 들리는가? 독재하에 한국을 뒤흔들었던 민중신학이 이야기한 민중의 시각에서 성서읽기가 바로 이것 아니었던가? 예수와 로마제국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러한 시각이 아닌가? 여성신학, 해방신학, 흑인신학이 지칭하는 ‘압제자’에 대한 비판과 ‘억눌린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시아신학이 말하듯 서구로부터 이식된 서구적 신학의 카테고리로부터 자체의 문화적 코드로 신앙을 읽어내려 했던 ‘토착화 신학’이 하던 이야기가 아니던가? 결국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서구의 인문학계는 ‘탈식민주의’라는 이름으로 아시아가, 여성이, 그리고 민중이 외치던 방법으로 텍스트를 읽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론적 틀을 ‘탈식민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성서학’ (Biblical Studies)이라는 학문은 근대의 산물이다. 하나의 거대한 교회, 카톨릭시즘이 지배하던 중세의 교황권이 신학과 성서의 표준이 되던 시대가 종교개혁의 물결에 와해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성서를 읽고 이해하는 기준을 다시 찾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와중에 등장한 것이 바로 ‘해석학’이라는 학문인데, 과연 “어떻게 성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학문으로 시작된 해석학은 근대적 주체로서의 인간관과 함께, 성서의 해석의 단초를 인간에게 놓게 된다. 물론 교권의 권위와 교리주의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성서해석은 이성의 토대 위에서 이해될 수 있는, 또는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에 넓은 의미에서 ‘역사비평학’(Historical Criticism)의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이를 쉽게 말하면 바로 성서와 동시대의 다리를 놓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가 쓰여질 당시의 상황이나 문화, 언어에 대한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성서 텍스트에 접근하여 그 메세지(Message)를 이해함을 통하여 현대에 성서가 말해질 수 있는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역사비평학’의 목적이라 할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이러한 비평적 읽기는 두가지 지평의 가능성으로서 가능해지는데, 하나는 인간의 정신적(Psycological) 지평과 문법적, 또는 언어적(Grammatical) 지평에 의해서이다. 즉, 인간은 텍스트를 통하여 시대와 시간을 뛰어넘어 정신적인 공감대를 저자와 형성하고 언어적 읽기 (문법적, 문학적)를 통하여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신비평(New Criticism)- 역사적, 사회적 배경 이해를 전적으로 배재하고 텍스트 자체가 함의하는 뜻을 읽어보려는 다양한 시도-에 와서 와해되기도 하고, 그 이후 새롭게 재구성되기도 하면서 발전 또는 지양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가 성서학에는 남아있다. 적어도 ‘어떻게’ 성서를 읽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답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왜’ 읽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쉬운 듯하면서 힘든 이 질문. ‘왜’ 성서를 읽어야 할까? ‘왜’ 성서에서 무엇인가를 찾아야만 할까?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른바 ‘진리’라는 것을 담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소위 넓은 의미에서 ‘축자영감설,’ 즉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므로 신자는 그 안에서 삶의 표준과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라고 현대인들에게 주장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성서가 도스토에프스키의 ‘죄와벌’ 또는 현대의 인간의 삶의 군상과 현실을 반영하고 또한 승화시킨 아름다운 예술작품들보다 더 심오한 삶의 진리를, 의미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보통 진보진영에서 이에 대한 질문으로 흔히들 성서는 이미 성스러운 텍스트(Sacred text)로써 때로는 해방의 단초로서, 반대로 억압의 증거로서 사용되기 때문에 성서비평학의 책임은 무한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필자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서를 현대에서 강력한 진리의 계시로써 읽을 수 있을까?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으려면 종교적 믿음과는 다른, 시간의 넓디 넓은 틈을 연결시킬 수 있는 주제(Theme)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민중신학이 민중의 역사를 구약의 출애굽에서 찾아서 읽은 것처럼, 갈레아의 예수를 현시대의 민중 안에서 재발견한 것처럼 역사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강한 고리가 성서학에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민중의 관점, 여성의 관점, 흑인의 관점, 노예의 관점, 아시아인의 관점이 성서를 읽을 수 있는 새로운 주제로 근대와 그 이후의 시대에 새롭게 대두되었고 그들을 통해 성서가 새롭게 읽혀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상은 짧은 시간에 참으로 많이 변해버렸다. 지배와 압제는 스스로를 은폐하고 변화시켜 과연 누가 지배자이고 누가 압제자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버렸다. 전태일 열사를 장렬한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처참한 환경의 방직공장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알 수 없는 저개발국의 어느 곳으로 숨어버렸고, 우리는 값싸고 질좋은 옷을 발견했을 때 횡재한 듯 기뻐하며, 그 옷에 누구의 피가, 아픔이, 그리고 죽음이 숨어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삼성공화국을 욕하면서도 삼성의 신형 핸드폰을 조금이라도 값싸게 사기 위해 밤을 세워 인터넷을 누빈다. 현재에도 우리는 과거에 미국의 누군가에게 당했던 어떤 짓을 필리핀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행하고 있다. 언뜻 보면 나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종교, 정치, 경제들이 거대한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개인들을 수많은 연결고리들 안에 밀어넣고 있으며 우리는 수많은 다른 이름들과 관계들로 규정되고 파편화되고 있다. 결국 세계는 너무나 복잡하여 하나의 관점으로만 해석되기 힘들게 되어버렸다. 그러한 세계에서 아직 식민주의는 끝나지 않았다는 탈식민주의의 사자후는 꽤나 설득력있다. 복잡한 세계를 단순하게 보기보다는 복잡한 관계속에서 간명한 구조를 가지고 세계를 보기 위한 탈식민주의 이론은 더욱 다양해지고 복합해져왔으며, 결국 탈식민주의는 지역적인 담론이기보다는 전지구적 담론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그리하여 탈식민주의는 끊임없이 초국가적 사회정의를 지향하면서도 지나치게 이상화된 정의를 지양하는 학문으로 발전되게 되었다.[각주:3] 지금의 세상이 복잡하다면 성서의 시대는 단순했을까? 그 복잡성의 정도를 따진다면 현대를 따라가기 힘들겠지만 성서의 세계 또한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다. 예수가 논쟁을 벌이던 바리새인이 누구이던가? 로마제국의 앞잡이였던가? 아니 오히려 종교적 담론을 통해 소박하게나마 혁명을 꿈꾸던 세력이 아니었던가?(톰 라이트에 대한 웹진 참조) 예수의 제자들은 가장 낮은 민중의 정체성을 나누었다고들 하지만 복음서의 여러 여성들이나 군중들에게 군림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훗날 예수의 우편과 좌편을 차지하려고 싸움을 하지 않았던가? 사두개인들은 친일파와 같은 기회주의자들었던가? 아님 유대종교라도 로마로부터 지키려 했던 현실주의자였던가? 과연 그러한 상황에 예수는 어떤 형식의 복음을 말했던가? 그것이 ‘복음’이 되었다면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도 분명 뜻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여러가지 질문에 답하려 하는 것이 탈식민주의와 신약성서, 또는 바울신학이라 할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또는 유대주의라는 허상

   이전의 웹진의 원고들이 이른바 NPP(New Perspectives on Paul),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중심으로 쓰여져왔고, 톰 라이트 또한 이와 먼거리에 있는 학자는 아님을 설명하였다. 필자는 이 새로운 관점들과 탈식민주의 관점이 그 줄기를 함께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새관점주의의 시작으로 일컬어지는 E. P. 샌더스가 말하고자 했던 근대초기의 유대주의에 대한 연구가 유대인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반유대주의(Anti-Semitism)와 기독교적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기억해보자. 결국 샌더스는 유대주의에 대한 이러한 여러가지 오해들이 유대주의를 기독교 경전의 뿌리이면서도 기독교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종교로 만들었음을 밝혔다. 물론 중요한 논쟁은 ‘이신칭의’나 ‘언약적 율법주의’등에서 불붙었지만, 샌더스의 업적중의 하나는 완전히 객관적인 학문으로 보였던 성서학이 어떻게 지배자의 논리를 정당화 시키고 보호하는지를 밝힌것에 있다. 샌더스의 책이 나온 1970년대말은 시오니즘으로 무장한 일련의 유대인들이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독립국을 손에 넣었고, 자본의 힘을 등에 엎은 유대인들과 우수한 유대계 학자들이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던 시대이므로, 이러한 샌더스의 업적인 나올 정치, 경제적 배경이 무르익었던 때였던것으로 보인다.[각주:4] 이른바 허상으로 만들어진 유대교에서 벗어서 (샌더스에 따르면) 바울을 바라보는 것이 새관점주의라는 엄청난 여파를 낳았다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또는 지배자의 논리를 가지고 있기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허상들은 없을까? 그것을 벗으려할때 가지게 되는 또다른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은 없을까? 바로 이러한 통찰이 바울에 대한 새관점과 함께 탈식민주의를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진리에 대한 탐구의 가능성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제임슨 던과 톰 라이트의 글들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시대에서 바울의 복음이 어떤 의미로 나타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제임스 던에게는 민족우월주의를 넘어서려는 바울의 노력을, 톰 라이트에게서는 제국의 시대에서 새로운 신앙 공동체의 도래에 대한 바울의 목회적 노력이 핵심이었다고 한다면 바야흐로 탈식민주의에서는 제국과 자본주의, 신식민주의 아래서의 신앙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메시지가 주안점이 될 것이다. 먼저 탈식민주의는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호미 바바라는 탁월한 이론가를 만나게 되면서 샌더스로부터 시작된 지배층의 논리에 대한 더욱 깊은 연구와 이른바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재발견하게 되는데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서 바울과의 관계를 고찰해보자. 
   1970년대가 저물어갈 무렵, 팔레스타인 출신의 사이드라는 학자가 출판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책이 인문학계를 뒤흔들게 된다. 사이드는 미쉘 푸코의 담론(discourse)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근대까지의 ‘오리엔트’(Orient)에 대한 서구의 연구가 객관적 연구의 결과라기보다는 서구의 중동과 아시아에 대한 일종의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역설했다. 푸코는 그의 유명한 담론에 대한 연구에서 당시까지 일종의 사적 또는 공적인 말하기나 여러 종류의 텍스트를 뜻하던 담론(discourse)라는 표현을 지식(Knowledge)이라는 영역으로 사용한다. 이른바 우리가 당연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 ‘지식’이 유통되는 담론이라는 장은 자유롭게 지식들이 생산, 유통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곧 어떠한 것이 지식으로 인정되고 인정되지 않는지 결정한다. 근대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교육기관의 등장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있던 인간이 발전시켜 온 기술과 학문들을 대학이라는 기관이 모으고, 분과학문별로 나누어 독립시키면서 근대적 스콜라쉽(Scholarship)을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언뜻 보면 지식과 학문이 전근대적인 종교와 왕권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적 개체로 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을 보면 근대의 다양한 힘과 권력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거대한 하나의 지식산업을 형성하여 힘의 논리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의학’(Medicine)을 들 수 있다. 보통 우리는 의학이 하나의 순수한 지식이고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전문분야라고 생각을 하지만 푸코식으로 보면 의학이라는 것은 치료(Healing)라는 것이 무엇이고, 질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관장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세계와 어떻게 관련맺어야 할지를 규정한다. 무엇을 먹어야 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며, 어떻게 먹고 생활할지를 조정한다. 놀라운 것이 이러한 엄청난 힘이 규제와 억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설득의 방법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한의학이 대학을 통해 전파되고, 하나의 정치적 힘을 가진 단체로 성장하기 전에는 의학은 한의학을 하나의 미신으로 규정하고 의학의 분야에서 밀어냈었다. 수천년의 역사와 철학을 내포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담지한 학문이 단순한 미신과 질낮은 기술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단계가 순전히 자연스럽게 근대의 시대에 이루어졌다. 사이드는 이러한 담론이론을 가지고 와서 중동과 아시아에 대한 서구인의 지식이라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허상에서 이루어져왔음을 고발하고,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서구인들은 오리엔트를 지식의 영역에서 지배하고 자신들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반명제로서 사용해 왔음을 보았다.
   푸코의 이론을 이용한 사이드의 중동과 아시아를 향한 지식담론에 대한 비판은 거의 최초로 서구의 학문이 피지배 국가와 문화에 대한 연구에 대해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으며 일견 서구사회에서 주변담론으로 치부되던 중동과 동아시아에 대한 학문들이 다시금 탈구축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신약성서학에 끼친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는데, 첫째, 서구성서학이 자신들의 논리와 성서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피식민지인들의 신앙과 문화에 영향을 끼쳤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제국의 그늘아래에 피식민인으로 살아가던 유대인들이 남긴 성서의 전통이 제국과 식민주의의 영향을 감안하여 읽혀져야 한다는 인식을 낳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웹진에서 설명할 호미 바바(Homi Bhabha)의 이론이 중요한데, 기독교문화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보는 시각에서 유대문화와 제국의 문화 사이에서(in-betweeness) 생성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셋째,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문화에서 성서가 어떻게 응답하는지, 복음은 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읽는 시도가 더욱 힘차게 개진되었다. 넷째, 근대의 제국주의가 낳은 산물인 인종차별, 여성차별, 계급차별에 대해 열린 눈으로 성서를 다시금 들여다보는 시도가 행해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웹진에서 다룰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J. C Young, Post-colonialism: An Introduction (Oxford: Blackwell Publishers, 1999), 28. [본문으로]
  2. Ibid., 27. [본문으로]
  3. Ibid., 58. [본문으로]
  4. 유대인이라고 묶어서 부를 수 없음을 유의하자. 시오니즘을 주창하는 유대인들이 있는 반면 그에 대해 엄청난 비난을 퍼붓는 유대인들도 있다. 한국인이 그렇듯이 유대인들또한 무한한 다의성 -Multiplicity-을 가지고 있음을 유의하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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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마가복음 10:17~31

로마와 유대의 문화적 경계에 선 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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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청
(신약학 |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석사과정 수료,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탈식민주의와 주변부 문화의 문제를 탐색한 호미 바바는『문화의 위치』라는 책에서 이주민들의 사회문화적 경험을 ‘어중간한 집’ 혹은 ‘사이에 낀’이라는 사태로 명명하고 더구나 이러한 경험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에서 번역의 미결정이라는 발터 벤야민의 용어를 동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바바의 이 ‘어중간한 집’ 혹은 ‘사이에 낀’이라는 그래서 번역의 미결정이라는 언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태어난 곳의 문화와 전혀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지방에서 서울로 왔다는 것뿐인데 이러한 경험은 이주민의 경험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이해하지 못함 혹은 낯섦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복음서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역사적 사실로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 것이다. 어쨌든 여러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 본문은 바바가 자주 언급한 일종의 문화들 간의 뒤섞임 혹은 교배 같은 텍스트로 다가온다. 

우선, 이 이야기의 처음에서 계명을 잘 지키는 한 사람이 예수를 유대인들에게는 낯선 용어인 ‘선한 선생님’으로 지칭하는 것이 좀 이상하다. 또한 ‘영생을 얻으리이까’에서 ‘얻다’라는 말은 내세의 의미를 뜻하는 용어가 아니라 땅과 관련해 쓰이던 용어였다. 물론 야브로 콜린스는 솔로몬의 시편에서는 이 용어가 내세적 의미의 용어와 함께 쓰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녀 역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땅에 초점을 두었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구약은 유대인들이 내세 개념을 거의 가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나는 영생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이 용어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의 맥락에서 사용되던 용어가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 이외에도 이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계명을 잘 지키면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음에도 계명으로 충분치 않아 예수에게 영생에 이르는 길을 구하는 이 사람의 태도는 따라서 유대적인 맥락에서는 약간 괴기하다고 할 수 있다. 랍비 문헌에는 이와 달리 토라의 계명을 잘 지키면 영생을 얻는 데 족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역사적 예수보다는 헬레니즘적 맥락에서 예수를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두 번째로, 재밌는 점은 영생의 조건으로 이 신실한 유대인에게 예수는 십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1~4 계명보다는 인간과의 관계를 논하는 5~10 계명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십계명의 1계명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유대인의 종교적 정체성에 핵이자 오늘날 과격한 종교다원주의들이 일종의 걸림돌로 간주하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이 아니던가? 그런데 예수는 유대인의 정체성 문제보다는 이웃 간의 관계 문제를 영생의 핵심조건으로 설파한다. 그래서 로버트 프라이스는 이것을 이미 이방인 그리스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맞는 쪽으로 번역된 마가적 예수의 계명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논의가 이상하게 들리는가? 그러하다면 마가복음 10:19를 사도행전 15:29과 비교해보라.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제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행15:29)

세 번째로, 가족과 관련한 베드로의 말 역시 역사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말해 베드로는 가족을 떠나거나 버린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린도 전서 9장 5절은 이 점을 확인해 주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전9:5). 또한 마가복음 1장에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예수가 고쳐주는 일화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빌레발트 뵈젠은 역사적 예수가 나사렛이 아닌 가버나움의 베드로의 집을 거점으로 삼고 자신이 도모하고자 했던 일을 넓혀간 것으로 판단한다. 게다가 뤼데만이 지적했듯이 아내를 가진 베드로에 대한 고려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눅14:26에는 아내를 미워하라는 예수의 말이 있는 반면 우리가 본 막10:29에는 아내에 대한 말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나의 판단에 따르면 지상적인 혈연 가족이 아니라 신성가족으로 재구성하려는 마가의 욕망이 베드로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말하게 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또한 이 때문에 가족에 관한 마가의 다른 말도 내게는 흥미롭게 다가온다. 즉, 나에게는 마가복음 3장의 바알세불 논쟁에서 본 것과 같이 예수를 반대하는 예수 가족에 대한 일화 역시 역사적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낯선 일화로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로 마가와 달리 마가복음보다 좀 더 빠른 문헌인 Q의 바알세불 논쟁에서는 예수의 가족이 등장하지 않으며 게다가 놀라운 점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를 반대했던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사도행전에서는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의 수장으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이와 관련해 마가의 이야기를 역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는 문헌으로 간주하는 학자들은 야고보의 이러한 변신에 대해 야고보가 예수 사후에 예수를 믿었고 사도가 되었다는 일종의 궤변(?)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나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의 가족과 관련한 베드로의 말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따라야 할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범례에 속하듯이 예수의 가족, 특히 야고보에 대한 학자들의 논의 역시 역사적 근거가 불충분한 따라서 마가의 이야기에 근거한 일종의 착시 현상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
 
더구나 나는 대체로 가족에 관한 베드로의 말(막10:28)과 이를 되받아치는 예수의 말(막10:29~30)을 유대사회의 가족개념에 깔린 혈연적 관계를 비판한 결과로 생긴 구성원들의 고통에 대해 마가가 위로를 시도하는 일종의 담론으로 간주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막10:28~30의 이야기를 막3:20~35와 막13:9~13과 함께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막3:20~35는 마가가 혈연에 기초한 유대 가족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막3:20~35에서 마가는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를 반대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그리고 이에 대항하기라도 하듯 가족을 혈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재정의해 버리는 예수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마가 공동체는 유대사회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다. 막13:9~13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유대를 넘어 결국엔 만국에 전파되어야 하는 복음과 그로 인한 가족에 대한 재정의는 마가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가족 내에서 불화를 겪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것은 복음이 유대사회를 넘어 이방사회로 흘러들어가야 하는데 지상의 유대적인 가치관 대 만국의 복음이라는 대립구도가 빚어낸 고난이 자칫 마가 공동체 구성원으로 하여금 지상의 유대적인 가치관들에 연연하도록 만들어 버린다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복음은 결국 파국을 겪고 말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상도 따르는데 막10:28~30은 예수로 하여금 가족을 버린 자는 현세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가족에 관한 마가의 이야기는 촘촘히 얽혀 있기 때문에 가족과 관련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정보를 확실히 제공해주는 전승이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위기를 맞이한 마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예수를 통해 위로를 주고자 하는 마가의 이야기들일 가능성이 더 큰 것 같다. 또한 이와 관련해 그닐카가 지적했듯이 오는 세상에서 보상이 주어진다는 이 마가의 말이 헬레니즘적인 사고 도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결국 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가족과 관련한 막10:28의 베드로의 말과 이를 되받아치는 막10:29~30의 예수의 말을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권위적인 예수의 말로 판정되는 10:21과 10:25에 대한 문제다. 이 말이 예수의 말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판단하는 것처럼 나 역시 이 말을 예수의 진정한 말로 간주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 과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이 말이 예수하면 흔히 가난한 자를 떠올리곤 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검토되지 않은 우리의 상상력을 보증해주는가 하는 점이다. 텍스트의 한 구절은 텍스트 전체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구조주의 문학비평을 동원하면 우리가 읽은 본문의 이 말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우리의 흔한 역사적 상상력과는 다소 다른 의미를 전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와 관련해 마가복음 14장의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여인의 이야기에 나오는 구절인 막14:5과 14:7은 막10:21과 10:25와 관련한 우리의 상상력을 흔들어 버린다. 이 구절들을 막10:21과 10:25과 비교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보다는 예수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이 막10:21과 10:25의 예수의 말을 더 잘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에 대해 학자들은 다양한 변증을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더욱 놀랍게도 현대의 성서학자들뿐만 아니라 복음서 저자들도 당혹스러웠던지 마가복음보다 후대인 마태복음은 어떤 사람들을 제자들로 그리고 요한복음은 아예 가룟 유다로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마가복음 10:17~31을 꼼꼼하게 읽으면 막10:21과 10:25에서의 예수의 말은 표면적으로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주지 못한 그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을 버린 예수의 제자들도 막10:31에 가서는 일종의 경고를 듣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주지 못한 어떤 신실한 유대인의 주저함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는 식으로만 이해해 버리면 곤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부를 버린 예수의 제자들 또한 막10:22의 신실한 유대인의 주저함 못지않게 막10:31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권력을 두고 다투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가 단순히 부와 관련된 문제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제자들의 권력 투쟁과 관련해 마가는 그 자신의 예수의 수난 이야기에서 예수를 막10:31의 말처럼 제자들과 달리 유대인들의 지상적인 이해들 중 하나에 속하는 전통적으로 메시야로 이해되는 찬란하고 힘 있는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볼품없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막10:31은 지상적인 것들에 대한 연연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마가의 이야기는 지상적인 것들에 대한 연연이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적인 부나 명예 혹은 권력과 같은 일반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물론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는 이러한 것들과 관련된 유대적 가치관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인 부와 관련한 이야기(막10:24~27)는 이것들 중 하나에 속한다. 사실 막10:24, 26은 제자들의 놀람을 통해 부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유대인의 일상적인 가치관을 뒤흔들어버리는 예수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뒤흔들어버림에 관한 마가의 이야기 전략은 다소 궁색하기 그지없다. 물론 주석서들 역시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에 관한 제자들의 질문인 막10:26에 관한 예수의 대답(막10:27)이 대단히 궁색해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로써 이제 막10:17~31에 깔려 있는 마가의 이야기 전략이 다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즉,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의 이야기는 지상적인 것들에 대한 연연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즉 영생을 막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지상적인 것들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앞서 나는 이 지상적인 것들에 대한 연연이 어느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일반적인 것들이 아닌 유대적인 가치관들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막10:17~31에 나오는 이야기는 대체로 유대사회를 넘어 이방사회에 전해져야 하는 복음 혹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말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유대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 특히 부와 가족에 관한 유대적 가치관을 비판적으로 돌파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는 마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만 여기서 지금까지 여러분을 골치 아프게 했을 수도 있는 막10:17~31에 관한 나의 분석을 끝맺고자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논의를 잘 따라왔다면 이제 여러분들은 그러면 당신의 이러한 텍스트 분석은 당신이 첫 부분에서 바바를 들먹이면서 말한 이주민의 경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하는 물음을 내게 던질 때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여러분들 중에 예리한 분들은 지금까지 나의 논의에 내포된 문제의식을 간파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간파한 것처럼 그것은 처음에 말한 이주민들이 자신들과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에 갔을 때 부딪히는 낯섦 혹은 어색함 같은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과 관련된 문제다. 이와 관련해 우선 오늘의 본문을 만약 예수 당시의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를 고려해보자. 지금까지의 나의 논의에 따른다면 앞서 본 마가의 이야기에 대해 그들은 아마 어색해 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이 본문을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마태복음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본문 분석에서 우리가 읽은 본문이 헬레니즘화된 맥락을 갖고 있다고 계속 지적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면에 디아스포라의 헬레니즘 유대인들이나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친숙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들에게는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처럼 유대적인 가치관은 다소 누그러뜨려져야 하거나 심하게는 극복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91년부터 지금까지 마이어 신부는『주변부 유대인 예수』라는 책을 계속해서 출간해 오고 있는데 이 책에서 역사적 예수는 당시의 유대사회에서 주류가 아닌 주변부 유대인으로 그리고 이 때문에 주류 유대사회가 공유했던 유대교와는 다른, 즉 비주류가 가지는 방식으로 유대교를 개혁하고자 했던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마이어의 이러한 역사적 예수에 관한 묘사 밑에는 마가의 이야기가 판본으로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의 형제 야고보를 연구한 아이젠만은 예수를 마이어와는 다른 식으로 묘사한다. 게다가 노벨 평화상에 천거되기도 한 휴고 숀필드나 마코비 같은 학자도 주류 유대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예수를 묘사한다. 이들에게 예수는 나자렌파나 바리새인으로서 정결법을 잘 지키고 로마에 저항한 일종의 투사다. 그리고 최근에『예수왕조』를 쓴 제임스 타보르 역시 이들의 논의에 동조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처럼 서로 다른 논의들에서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단 나는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두 문화 사이에 있는 사람들 간에 나타나는 사회문화적 갈등 혹은 충돌이 잠재되어 있고 그리고 이러한 점을 해결하기 위해 마가가 예수의 권위에 의존해 자신의 이야기를 신뢰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텍스트로 간주한다. 하지만 1세기에 격렬한 반유대적인 분위기가 꽤 있었음을 고려하면 예수를 유대 주류 사회에서 주변부 유대인으로 설정하고 동시에 헬레니즘화된 맥락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으로 묘사하는 마가의 이야기는 마이어가 생각하는 것처럼 주변부 유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당시의 로마 제국의 지구화(?)에 포섭 혹은 동화되어 가는 도상에 있는 마가 공동체의 이야기로 최소한 설정해야 하지 않나 하는 의심도 든다. 그러나 오늘 경계 밖의 아이들이라는 권유미 선생의 주제를 고려해볼 때 여전히 마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 유의미한 이야기를 던져 준다고 생각한다. 즉, 마가의 이야기가 로마제국의 지구화(?)에 포섭되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한 사람이 다른 문화를 가진 곳으로 이동하려 할 때, 즉 문화들 간에 놓인 경계를 넘고자 할 때는 수많은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고 때로는 바바가 말한 것처럼 뒤섞임이 때로는 적대가 발생하기도 하는 그래서 어떤 방향으로든지 간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략들과 대안들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문화들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복잡한 사회적·문화적·심리적 갈등과 그로 인한 이들 나름대로의 모색들을 이처럼 한 문장으로 처리해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주해본 경험도 없거니와 너무 복잡한 담론이어서 내가 감히 개입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는 심정이 깔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주류 유대문화를 벗어나 이방인 문화인 그리스 문화와의 뒤섞임을 경험하고 그래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가는 마가의 이야기는 이들의 복잡한 경험의 한 축은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은 전 세계의 맥도널드화를 의미하는 시대를 말없이 살아내고 있는 이주민들에게 한정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맥도널드화에 저항하고자 하는 이주민들은 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써야할 것이며 실제로 쓰고 있을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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