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빠 이야기’ 연구 동향 (3)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1. 구전되고 기억된 역사로서 복음서

영국의 신약학자 제임스 던(James D.G. Dunn)은 복음서의 형성 과정이 “과거를 다시 현존하게 함으로써(Vergegenwärtigung), 정확하게 과거와 현재의 지평을 융합하는 ‘기억함’의 과정이었”다고 말한다.[각주:1] “그렇다면 공관복음서의 최초 이야기들 속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처음 제자들의 기억들이다―즉, 예수 자신이 아니라 기억된 예수인 셈이다.”[각주:2]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근본적으로 예수에 관한 지지자들의 기억의 산물이라는 관점을 취한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가 역사적 진실로서 입증되기 어렵다고 해서, 반드시 이 이야기의 ‘모든 것’들이 후대에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허구라고 간주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종래의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이 추구해온 역사적 진실은 역사적 재구성에 바탕을 둔 고고학적 진리, 즉 고고학자들이 유적발굴 작업에서 조각난 파편들을 긁어모아 과거를 그대로 복원하는 것과 유사한 차원의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고고학적 진리 복원의 작업을 통해 성서학자들은 역사적으로 진실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날카롭게 구분할 수 있다고 자신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바라빠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 따라서 문학적으로 창조된 허구라고 간단하게 결론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복음서의 이야기 및 어록들이 애초부터 지지자들의 기억에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면, 역사적 진실이 곧바로 고고학적 진실로 환원되고 고고학적 진실이 아닌 것은 문학적 허구로 간주되는 그 모든 작업의 절차들은 전면적으로 재고될 수밖에 없다.
 
복음서라고 하는 텍스트가 기억 속에서 구전된 서사라는 것을 상기할 때, 우리는 복음서가 말하는 역사적 예수의 그 ‘역사적’이라는 말을 새롭게 재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가 지지자들의 자발적/비자발적인 기억 행위, 특히 그 기억행위가 담겨 있는 구술연행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나아가 그것이 기억주체 혹은 전승주체의 서사적 정체성 수립을 가능하게끔 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 우리는 기억 속의 예수 이야기들을 고고학적 차원의 역사적 진실과 문학적 차원의 허구로 단순 도식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이고, 기억이 현재의 욕망에 따라 하나의 창조적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복음서와 같이 언어로 기록된 기억, 그 서사적 구성에도 당연히 고고학적으로 완벽하게 복원 가능한 역사적 진실이 들어있진 않은 것이다. 오히려 기억에 기초한 복음서의 기록은 다른 차원의 역사적 진실에 속한다. 우리는 고고학적 차원에 속하진 않지만, 그 기억의 주체에게 있어서는 엄연한 사실로 존재하는 이와 같은 역사적 진실을 기억사적 진실 혹은 서사적 진실로 명명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필자는 빌라도가 이러한 유월절 사면을, 즉 나자렛 예수와 바라빠라고 하는 이름의 인물을 무리들의 요구에 따라 바꿔준 그러한 사건을 ‘실제로’ 수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증하려는 데 두고 있지 않다.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관점을 따르자면, 무릇 과거는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시점의 상황과 서술자의 욕망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이다. 서사 행위는 현재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과거의 ‘사후적’인 재구성 행위라는 이른바 ‘사후성의 원리’[각주:3]에 따르자면,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찾을 수 있는 과거는 '기억사적 진실‘인 동시에 ’서사적 진실‘이다. 욕망과 기억에 의해 구성되는 그러한 ‘서사적 진실’에서 ‘서사의 욕망’ 내지 ‘욕망의 서사’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된 과거가 이야기하는 당사자와 청자/독자의 현재의 상황 내지 욕망에 의해 재구성된 허구라고 보는 서사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도 현재의 상황과 필요에 따른 구성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진실성 역시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이 분명한 역사적 예수 자신에게 있(을 수도 혹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예수 사후부터 구전(口傳)되어 오던 예수운동의 이야기를, 66-74년에 이르는 유대전쟁의 시기 중에, 특히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가까운 전후(前後) 시기 어느 시점에서 수집하여 문서화한 후 그것을 다시 ‘새로운 기억 전승’과 결합시켜 구전으로 연행(連行)해 나갔을 마가공동체에 있다고 보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밝혀내야 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마가공동체의 ‘기억의 삶의 자리’이다. 중요한 것은 이 기억 행위의 주체가 누구이며, 그들에게 이러한 기억의 서사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러한 기억의 서사를 창안해내도록 했냐는 것이다. 덧붙여 이 기억의 서사가 단순히 관념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모종의 행위를 동반한 적극적 실천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2. 트라우마적 기억의 서사로서 수난사화

마가복음 14-16장에 이르는 소위 ‘수난사화’(The Passion Narrative)에서는 무리들, 즉 오클로스(οχλος)뿐만이 아니라, 제자들, 그리고 여성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모든 예수의 지지자들이 예수를 배신하거나 예수를 따르는 데 끝내 실패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예수를 그 적대자들에게 팔아넘긴 존재가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이었고, 예수의 제자를 대표하는 베드로 역시 예수를 면전에서 부인했다. 더욱이 제자들과 무리들이 모두 예수를 배신하고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고, 무덤에 안장되었을 때까지도 예수를 따랐다고 하는 여성 제자들(15:40-41, 47; 16:1-8) 역시 빈 무덤을 목격하고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접했을 때는 정작 “무덤에서 도망하였”고, “벌벌 떨며 넋을 잃었”고,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6:8). 그녀들은 예수가 부활할 것이라고 약속한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실패했다.[각주:4]
 
수난사화에서 보자면, 열 두 제자로부터 시작하여 여성을 포함한 보다 넓은 범주의 제자들, 그리고 무리들에게 이르기까지, 예수의 모든 지지자들은 예수를 끝까지 지지하고 따르는 데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무리의 배신 혹은 적대적 태도로의 돌변이 마가복음의 전체적인 서사 구조에서 이탈한 것이라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세 차례에 걸친 수난예고와 동반되어 제시된 예수를 지지하고 따름에 요구되는 진정성과 성실성의 철저함(8:34b-37; 9:33-35; 10:42-45)을 확인시켜 주는 문학적 결말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첫 번째 수난예고에서부터 세 번째 수난예고에 이르기까지 거듭 제자와 무리들을 포괄한 그의 지지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와 함께 제국의 폭력과 종교적 타락에 대항하여 걷는 것이며,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는 것임을 주지시켰다.[각주: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를 따르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러한 실패가 16장 8절의 여성 제자들에게서도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으로서, 마가복음의 청중 및 독자들에게도 예수를 따름에 있어 긴장과 결단을 유도하는 열린 결말의 구조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마가복음이다.[각주:6]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추종해온 무리들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를 지지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무리들의 모습을 종합해보건대, 이 무리를 예루살렘 주민이 배제된 갈릴리의 출신의 무리로만 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예수운동의 초창기부터 이미 예루살렘에서 온 예수 지지자로서 무리들을 언급하고 있다(3:8).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예수의 성전에 대한 태도 때문에 그를 배척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각주:7]은 마가복음의 어떠한 본문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마가복음 저자의 의도는 이들이 예루살렘의 무리인지 아니면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온 무리인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후대의 바라빠 이야기가 첨가되면서, 빌라도의 재판 이야기에 등장하는 오클로스의 정체가 다소 모호해지긴 했지만, 예수의 모든 지지자들의 총체적인 실패와 배신을 강조하고 있는 수난사화 및 마가복음 전체의 문맥으로 보아―물론 이 오클로스가 14:43-50의 오클로스와는 구별되는 것이 분명하지만―기존에 계속 언급되어온 예수의 지지자로서 그 오클로스의 연장선상에 있는 캐릭터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라빠 이야기가 만들어진 배경에 관한 많은 논의들이 이 이야기의 컨텍스트를 초기 그리스도교의 변증적 상황이라고 보고, 또한 이 이야기의 청중을 마가공동체 내부가 아닌 외부의 유대인 일반이라고 본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기존의 논의들은 유대인들에게 예수 죽음의 책임을 전가하고 대신에 로마인들의 책임은 면제해주려는 의도에서 바라빠 이야기가 창작되었다는 견해를 되풀이해왔다. 그럼으로써, 마가복음과 마가공동체를 반유대주의적(anti-Semitic) 텍스트 및 집단으로 규정해온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오클로스에 관한 많은 연구들을 참조해보고, 또한 수난사화의 문맥 안에서 오클로스 및 예수의 지지자들 일반에 관한 진술을 살펴 보건대, 마가복음이 상정하고 있는 이 이야기의 ‘저자적 독자’(authorial audience)[각주:8] 혹은 ‘청중’은 공격의 대상으로서 그리스도교 외부의 유대 군중들이 아니라, 마가공동체 안에 남아 있는, 즉 이 이야기의 본래적 상황과 연관된 예수의 지지자였던 유대 군중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열 두 제자들과 다른 나머지 제자들, 즉 여성 제자들(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을 포함한 일반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수난사화 안에서 명예를 복권시켜 놓고 있지 않다. 오히려 수난사화 이전의 본문에서 한 번도 예수의 지지자 중의 일원으로서 부각되지 않았던 이들, 예컨대 무명의 여인(14:3-9), 역시 무명의 백부장(15:39),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15:43-46) 정도만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마가복음은 예수운동의 초기부터 그를 지지하며 따랐던, 혹은 적어도 예루살렘 입성을 즈음하여 합류했던 그 많은 지지자들이 예수를 지지하고 보호하는 데 실패했음을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도처에서 다양하게 시사하고 있다.

한데, 우리는 역사적으로 예수의 열 두 제자와 여성 제자들, 심지어 무리들이 이후에 예수의 부활을 체험하고 그를 다시 따랐다는 사실을 다른 복음서의 부활사화 및 사도행전(1:13-15a), 그리고 바울서신(고전 15:5-7)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예수가 죽은 이후에 전에 예수를 지지했던 오클로스의 후일담에 관해 마가복음에서는 직접적으로 어떠한 보도도 찾을 수 없지만, 마가복음보다 후대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누가복음은 뜻밖에 중요한 정보 하나를 제공하고 있다. 누가복음 23:44-49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숨을 거두는 장면으로서, 마가복음 15:33-41과 평행하는 본문이다. 시간과 장소가 일치하며, 예수의 운명 당시 정황이 유사하며, 백부장과 여성 제자들의 등장이 일치하는 두 본문에서 한 가지 대조되는 것은 누가가 48절에서 오클로스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는 오클로스가 예수가 죽는 현장에 함께 있었다고 보도하며, 더 나아가 이들 오클로스가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고 전하고 있다. 누가에 따른다면, 예수를 빌라도에게로 끌고 가서 그를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했다”고 고발했던 그 다수의 무리들 가운데 일부의 무리(눅 23:1, 4)가 나중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운명할 때 ‘그 무리들’(23:48, οἱ ὄχλοι)로 다시 등장한다. 브라운은 23:48절의 동사 τύ́πτοντες와 15:19의 ἔτυπτον의 원형이 같은 것(τυπτω)에 주목한다. 로마 군인들이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치던 행동과 예수 처형을 지켜보던 무리가 스스로에게 한 행동이 같다는 것이다. 만일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참조했다는 복음서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여기서 누가는 오클로스에 대한 마가의 부정적 묘사를 최대한 완화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누가의 오클로스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죽이는 데 가담했다는 그 충격적인 사실을 뒤늦게 인식하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자신들이 지지하고 따랐으며, 자신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베풀었던 그 의로운 인물을 죽이는 데 동참했다는 사실은 오클로스에게 이제 트라우마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예수가 체포될 당시부터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던 열 두 남성 제자들(막 14:50), 그리고 예수의 마지막 현장을 지켜보고, 또한 그의 무덤까지 찾아갔지만, 끝내 부활을 믿지 못하고 도망쳤던 여성 제자들(16:8), 그리고 예수를 살리기 위해 빌라도를 찾아갔지만, 결국 대제사장들의 선동으로 인해 예수를 죽이는 동참한 무리들(15:6-15). 이 모든 예수의 지지자들에게 있어 자신들이 예수의 죽음에 공범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은 ‘통탄스러운’, 혹은 ‘가슴을 칠 수’ 밖에 없는 슬픈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이 사건은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어떻게든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예수를 애도하고자 했다. 그의 죽음을 현실로 수용하고, 기존에 유지되던 모든 친밀한 인관관계 혹은 공동체를 그대로 놓아둔 채 그의 부재를 현실 안에 통합하려 했다. 예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예수의 지지자들은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부터 예수에게 ‘고인’이란 칭호를 붙여줄 것이고, 그 결과 그는 남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지평 안에 안전하게 ‘추억’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물론, 이때 자신들이 예수의 죽음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은 망각/은폐될 것이다. 예수의 여성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그의 무덤을 찾은 것은 바로 이러한 애도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을 때, 모든 애도는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제는 정말 잊고 싶은 자신들의 과거 소행을 상기시키는 ‘놀라움’과 ‘두려움’의 사건이었다. 여성들이 예수의 부활 소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 그 놀라운 소식을 빨리 제자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그 사실을 그녀들이 도저히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녀들은 예수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희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예수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자신들의 과거가 영원히 덮을 수 없는 악몽으로 남을 것이기에 그녀들은 부활의 소식 앞에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죽음 이면에 존재하는 예수 지지자들의 실패와 배신, 그리고 좌절을 결코 망각/은폐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사건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였던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트라우마란 개인이 대상(그것이 자신일 수도 있는데)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는 충격적인 계기인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고 난 후 생기는 증상을 일컫는다. 다른 사건에 의해 본래의 트라우마적 사건 또는 원인적 사건에 관한 기억이 다시 살아날 때, 비로소 트라우마로 느끼게 된다. 이 원인적 사건(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는 “뒤늦은 계기” 혹은 “사후적 사건”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는 것이다.[각주:9] 필자는 예수의 실패한 지지자로서 오클로스와 그에 연관된 예수의 남녀 제자들에게 예수 죽음의 트라우마가 반복적으로 경험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단순한 상처나 슬픔으로 남지 않고 트라우마적 기억으로 남은 이유는 예수의 죽음에 예수의 지지자들이, 특히 오클로스와 제자들이 깊이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즉 예수를 배신한 원인적 사건을 불러오는 사후의 사건이 반복적으로 그들을 찾아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에게 그렇게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트라우마의 귀환, 그 “억압된 것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pressed)으로서 어쩌면 바라빠 예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오클로스가 예수를 죽이는 데 가담한 근원적인 제1사건이 있었지만, 그것이 당시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단지 충격만 주고 그 후 제2, 제3의 예수 사건을 통해 사후에야 비로소 제1의 예수 죽음 사건의 의미가 드러났던 것이 아닐까? 바라빠 예수는 오클로스들의 예수 죽인 트라우마를 발생시키는 그런 예수의 부활, 혹은 억압된 것의 귀환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필자가 그리고 있는 가설은 이런 것이다: 마가공동체는 트라우마 쓰기 즉 ‘외상 후 쓰기’(post-traumatic writing)라고 하는 사후 작용을 경험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들 당대의 또 다른 예수들 혹은 예수 사건과의 조우를 통해 과거의 트라우마적 사건을 개작(working over)하고, 심지어 어느 정도까지는 해제(working through)의 과정까지 나아가게 된다.[각주:10] 이러한 트라우마 다시 쓰기를 사후 작용에 의해 촉발시킨 계기가 바로 예수 사후부터 70년 유대전쟁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출현한 바라빠 예수와 같은 그런 인물들, 즉 테러리스트, 강도, 젤롯데 같은 이들과의 조우였던 것이다.[각주:11]  

3. 오클로스의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바라빠 이야기’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와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기억된 역사로서 바라빠에 관한 이야기를 70년경 마가의 역사적 상황과 확고하게 연결시킨다. 그들은 먼저 이 이야기에 묘사된 무리들과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 혹은 마가공동체를 분리시켜 사고한다. 마가복음이 그리고 있는 무리는 예수 시대의 무리인 동시에 유대전쟁을 전후한 마가공동체 당시의 무리이기도 하다. 마가는 그 무리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창작해낸 것이며, 이때의 바라빠는 말 그대로 하나의 메타포일 뿐이다. 즉, 70년 전쟁 발발 전까지 유대 군중들이 나자렛 예수 대신에 선택해왔던 다른 많은 혁명적 지도자들을 상징하는 인물인 것이다. 보그와 크로산은 바라빠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가 모두 혁명가들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두 사람 다 로마제국에 도전했지만, 바라빠 예수는 폭력에 호소했고, 나자렛 예수는 비폭력에 호소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적어도 66년까지 예루살렘 무리들은 (혹은 유대 땅에 살고 있는 많은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방식이 아니라 바라빠의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이다.[각주:12] 이들의 논의는 간략한 스케치에 그치고 있지만, 바라빠 이야기를 해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이 이야기의 컨텍스트를 66-70년의 유대전쟁과 결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크로산은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에서 바라빠 사건, 즉 공개적이며 미리 예장된 유월절 특별사면은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마가의 창작임에 분명하다고 일단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한다. 빌라도이건 아니면 다른 어느 로마 총독이건 간에, 그런 축제일에 군중이 요구하는 죄술를 풀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가의 서사 전략에서 이 특별사면은 매우 훌륭한 해결책이라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마가에게 있어서 그 특별사면이 상징적으로 그 이전 기간들의 사건을 요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백성들은 한 사람의 의적과 예수 가운데 선택받도록 ‘늘’ 요청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평화주의자 예수보다는 바라빠 예수와 같은 폭력적 혁명가를 선택하곤 했다. 마가가 보기에는 그래서 66년의 로마에 대한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각주:13] 크로산에 따르면, “바라빠 사건은 실제로 그 사건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과정으로서는 진실한 것이다.”[각주:14]
 
마가복음의 수난사화는 마가공동체의 트라우마가 재현되고 ‘반복’되는 이야기의 공간이자 그것을 그들이 어떻게 극복해나갔는가를 보여주는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라빠 이야기가 결합된 빌라도의 재판 이야기이다. 마가복음의 저자가 빌라도의 재판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오클로스의 이야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그들에게 그 문제가 트라우마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 이야기 안에 현재적인 바라빠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그들이 치료를 위해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는 데 오클로스가 가담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즉 과거의 고통스러운 사건을 과거의 자리에 그대로 위치시키고 현재와 미래를 과거로부터 구분하면서도, 그 이야기 안에 바라빠라고 하는 가공의 상징적 인물을 예수의 대조인물로(foil)로 만들어 넣고, 자신들이 지금 따라야 할 길이 누구의 길인지를 상기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 지난날의 실패의 고통을 반복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억압된 기억들을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몸으로 겪어냄으로써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실천이기도 한 것이다. 실패를 반복함으로써, 실패를 극복하는 것. 그것이 마가공동체가 다시 쓰는 오클로스의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바라빠 이야기’인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제임스 던/차정식 옮김,『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서울: 새물결플러스, 2010), 197-198[James D. G. Dunn, Jesus Remembered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3), 130]. [본문으로]
  2. 제임스 던, 앞의 책, 198. [본문으로]
  3. ‘사후 작용’(differed action) 혹은 ‘사후성’(differed)의 원리는 프로이트가 “심리적 시간, 인과성의 개념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한 용어”로서, “경험, 이상, 기억 흔적은 사후에 새로운 경험과 관련을 맺으면서 수정되어 다른 차원으로 발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후 작용에 의해 원초적 외상의 사건은 새로운 의미와 심리적 효과를 부여받는 것이다. 즉 외상의 흔적이 계속해서 잊혀 지지 않은 채로, 또 그 의미를 비밀에 부친 채로 연기되다가 후에 다른 사건을 계기로만 사후적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후성이란, 거꾸로 된 인과율을 내포하고 있다. [본문으로]
  4. 막 16:8에 묘사된 빈 무덤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부활 소식에 대한 두려움과 침묵을 제자도를 실천하는 데 실패했다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논의들로는 다음의 글들을 참조할 것: John Dominic Crossan, “Empty Tomb and Absent Lord (Mark 16:1-8),” in The Passion in Mark (ed. Werner H. Kelber; Philadelphia: Fortress, 1976) 135-52, 특히, 149; Malbon, “Fallible Followers Women and Men in the Gospel of Mark,” Semeia 28(1983), 29-48, 특히, 44-45; Andrew T. Lincoln, “The Promise and the Failure: Mark 16:7, 8”, JBL 108/2 (1989), 283-300, 특히, 293-295; Susan Miller, “‘They Said Nothing to Anyone: The Fear and Silence of the Women at the Empty Tomb (Mk 16.1-8),” Feminist Theology 13.1(2004), 77-90, 특히 88-90. [본문으로]
  5. 마르쿠스 보그(Marcus J. Borg) &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오희천 옮김,『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서울: 중심, 2007), 142-143. [본문으로]
  6. Malbon, “Disciples/Crowds/Whoever: A Markan Narrative Pattern,” 126. [본문으로]
  7. F. Belo, A Materialist Reading of the Gospel of Mark (New York: Orbis Books, 1981), 224-225; E. P. 샌더스(Sanders)/이정희 옮김,『예수운동과 하나님 나라: 유대교와의 갈등과 예수의 죽음』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7), 526. [본문으로]
  8. 김학철, “마태공동체 연구사에 관한 비판적 고찰과 전망,” 『신학논단』47(2007), 31-32. 김학철에 따르면, “저자적 독자란 저자가 글을 쓰면서 마음에 품고 있는 독자를 말한다. 저자는 이 청중이 본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지식과 해석적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저자적 독자'는 하나의 ‘이상적 독자’(ideal reader)이지 실제 독자(real reader)는 아니다. 저자적 독자와 실제 독자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저자적 독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특정한 사회/해석적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의미이다. 저자와 그가 기대하는 독자들이 서로 공유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하나의 특정한 방식으로 독서하도록 저자가 초청하는 그 초청을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9. Dominick LaCapra, Soundings in Critical Theory (Ithaca: Cornell Univ Pr, 1989), 34-35. [본문으로]
  10.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이덕하 옮김, “기억하기, 되풀이하기 그리고 훈습하기,”『끝낼 수 있는 분석과 끝낼 수 없는 분석』(서울: 도서출판b, 2004), 104-121. [본문으로]
  11. 물론 프로이트는 트라우마적 기억의 계기를 제공하는 원초적 사건이 정말 사실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허구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왜냐면 그것은 환자의 순수한 기억이었다기 보다는 분석가 프로이트가 여러 상황들을 바탕으로 하여 재구성한 일종의 가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트라우마적 기억 속에 간직된 원초적 장면이라는 ‘근원’은 ‘있었던’ 근원이 아닌 ‘부재’의 근원이 되어버리며, 담론 혹은 서사가 만들어 낸 허구적 산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정신적 시간성과 인과성’에 있어서 기억이 ‘새로운 경험’에 맞추어 수정될 수 있다고 하는 사후성의 논리는 결국 전이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과거는 현재에 의해 다시 써지고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근원이 더 이상 근원이 아니고 실제가 더 이상 실제가 아니라는 말이며 역사적 진리를 전복시키는 효과를 가져 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트라우마적 기억을 적용하고 있는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마가공동체 안에 속한 집단이거나, 마가복음으로 편입된 수난전승 배후에 있으면서 오클로스로 지칭되는 예수의 지지자 집단이다. 개인적 기억에 있어서는 트라우마적 사건의 실제성 여부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지만, 집단적 기억에 있어서는 그 기억의 ‘사회적 틀’, 즉 그러한 기억을 가능케 한 사회적 동인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 [본문으로]
  12. 보그 & 크로산,『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서울: 중심, 2007), 205; Marcus J. Borg, Jesus: uncovering the life, teachings, and relevance of a religious revolutionary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2006), 265. [본문으로]
  13. 존 도미닉 크로산/김준우 옮김,『역사적 예수』(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619-20. [본문으로]
  14. 크로산,『역사적 예수』, 62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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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병합 100년, 무엇이 남았나?

양미강
(한백교회 담임목사 | 세계NGO역사포럼 운영위원장)

내가 언제부터 일제 피해자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지금으로부터 14년전인 1997년이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총무로 일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내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맨 처음에는 적대감 가득한 울분이 내 마음에 가득하더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또 다른 연민이 나를 감싼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제의 식민지로 살았던 36년간의 세월은 일본이나 한국 모두에게 역사적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심각한 상처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심리적 외상증후군이 개인의 마음뿐 아니라 우리 역사 전반에 스며있다. 나는 이것을 역사적 트라우마라 일컫는다.

일제 식민지 피해자들인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들, 강제동원 피해자들, 원폭 피해자들, 한국인으로 일본의 포로감시원이 되었다가 BC급전범으로 내몰린 사람들 등등 수도 없는 피해자들 마음속 깊이 박힌 트라우마는 종종 피해의식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종종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과격한 민족주의적 반응 역시 트라우마의 한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트라우마는 피해자에게만 나타나지 않는다. 가해자인 일본정부 역시 해방된 지 60년이 넘어서까지 진상규명 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트라우마의 왜곡된 현상 아니겠는가? 역사적 트라우마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과거를 직면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


2010년 8월 강제병합된 지 100년이 되는 달,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었다. 과거 100년은 지금까지 우리의 의식 밑바탕에 있던 트라우마의 아픈 모습이라면, 앞으로의 100년은 질적으로 다른 전환점을 요청받고 있다는 인식이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활동하고 있던 사람들을 하나로 모이게 했다. 그 전환점이란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일이다.

그동안 일본정부는 무라야마 총리, 고이즈미 총리, 칸 나오토 총리에 이르기까지 사과담화가 발표되었으나 정작 한국인들에게 진정성을 보여주기에는 미흡한 부분이었고, 또한 사과에 따른 법적 조치가 병행되지 않아 말뿐이라는 평가를 면치 못했다. 당연히 정부가 해야할 몫에 관해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시민사회가 나선 것이다.
 
얽히고 설킨 매듭을 풀겠다는 의지가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한일시민대회에 녹아있다. 일제 피해자문제를 가지고 활동해왔던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 140여개 단체들은 각각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난 2년간 활동해왔다. 8월 22일 1000여명이 참석한 일본 개막식을 시작으로, 8월 27일부터 29일까지 한국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과 한일시민대회 폐막식이 주요행사였다.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에는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연인원 3500여명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 8월 한달 내내 역사현장 기행, 전국단위의 달리기 행사 외에도 두 개의 문화공연, 표석제막식과 특별전시회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한일시민공동선언이다. 이 선언이 가지는 의미는 2001년 더반 선언에서 나타난 식민지배와 식민주의가 반인도적인 범죄라는 선언을 이어받아 한일과거사 문제가 식민지 지배에 따른 범죄이며 동시에 더반 선언문이 제기한 반인도적 범죄라는 보편성을 제기한다는 점에 있다. 그동안 가해와 피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구조에서 벗어나 식민주의와 식민지 책임을 묻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다. 한일시민공동선언이 더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실천력을 담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일본총리들의 수많은 담화와 선언이 무색한 것은 그야말로 말뿐이었기 때문이다. 한일시민사회가 역사적 매듭을 풀겠다는 의지를 선언문에 담았으니 더도 말고 그대로 실천한다면 역사적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일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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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의 지옥과 천국 :  영화 <똥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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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
(영화 프로듀서, 감독)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

최근 독립 다큐멘터리 <워낭소리>가 300만 관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1억원에 못미치는 적은 예산으로 고군분투 제작된 <똥파리>라는 독립영화가 해외 영화제에서 연달아 최고상을 받으며 국내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런 유례 없는 성과는 현재 독립영화를 둘러싼 환경에 비추어 볼 때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극장을 확보하지 못해 개봉조차 할 수 없는 독립영화들도 많은데, MB정권하의 영화진흥위원회는 2009년 들어 '다양성영화 개봉지원사업' 마저 폐지하였다. 80년대 말 영화운동의 차원에서 처음 만들어진 ‘독립영화’라는 명칭은 이제 ‘다양성 영화’라는 신자유주의적 명칭 하에 비상업, 비주류, 저예산, 예술영화 등과 함께 두루뭉술하게 묶여져 불리고 있다. 독립영화제작지원 예산은 몇 년째 6억원으로 고정된 반면, 정부의 지원정책은 '영화산업'으로만 집중되고 있는 현실이다. 멀티플렉스에서의 무한경쟁이라는 배급구조 속에 독립영화가 놓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독립영화 역시 상업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독립영화는 상업영화와는 달리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국가 이데올로기로부터의 독립, 산업으로부터의 독립 등을 기반으로 하기에 그 기획과 제작, 유통의 과정이 차별적이고 보호되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편한 영화, 똥파리

독립영화는 관객에게 불편하다. 거친 화면, 지루한 전개는 독립영화 하면 늘상 떠오르는 이미지다. 한마디로 완성도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나처럼 영화를 제작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영화 그 자체보다도 영화를 만들어가는 현장의 총체적 모습까지 함께 읽혀 묘한 감흥을 일으키기도 한다. 상업영화를 볼 때는 제작사, 투자사의 입김이 감독의 초심을 어떻게 변질시켜 나갔는지, 감독이 어디쯤에서 타협했는지 읽힌다면, 저예산 독립영화를 볼 때는 서투른 아마추어리즘 속에서도 빛나는 주제의식을 발견하며 때로는 제작비의 곤궁함 속에서도 꿋꿋하게 완성해낸 감독의 뚝심을 읽을 때 박수를 쳐주고 싶은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영화 <똥파리>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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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영화 제작지원과 CJ-CGV 인디펜던트 프로모션 제작지원을 받아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스탭 전원의 노개런티에도 불구하고 막바지에서는 감독이 전세방을 빼 제작비로 써야 할 만큼 힘든 상황에서 완성되었다. 30여편의 독립 장,단편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이름을 먼저 알린 양익준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쓰고 연출함으로써 장편영화 감독이 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픽션이 가미되었지만 자신의 문제, 자신의 가족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독하다. <똥파리>의 주인공 상훈을 꼭 양익준 감독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없이는 힘든 일이다.

글쓰기든, 영화 만들기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정신분석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분석가는 작가가 될 것이고, 분석주체(환자)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 분석가는 제대로 기능을 못할 수도 있다. 작가이자 배우로 이중의 역할을 한 양익준은 어떠했는가?

주인공 상훈은 똥파리다. 더러운 똥을 먹고 사는 똥파리로서 그는 용역업체에서 일한다. 용역업체에서 하는 일이란 사채 빌려쓴 사람 찾아가 온갖 협박과 폭력으로 수금해오는 일, 노점상 철거 용역깡패, 대학에서 농성하는 학생들 구타하여 해산시키는 일 등 다양하다. 자본사회에서 누구나 그렇지만 그에게도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노동과 생산의 댓가로 주어지는 돈이 아닌, 내몰린 자들을 폭행하고 갈취하는 돈이기에 그 돈은 더러운 똥이 된다.

똥파리는 웽웽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내듯이, 그의 언어의 대부분은 욕이다. 그는 좀체로 웃는 법이 없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으로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고 욕과 함께 주먹이 나간다. 그에게는 법이 없다. 일정한 궤도 없이 요란스레 비행하는 똥파리다. 그의 욕설과 폭력 앞에서 수많은 약자들이 무릎을 꿇지만 그래봤자 똥파리의 운명이다. 파리 목숨이란 말이 있듯이 파리채 한 방이면 쭉 뻗어버리고 마는 신세. 그 똥파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죽기 위해서 그렇게 온 몸으로 절규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그것이 온통 자신을 옥죄고 있다. 술만 마시면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버지, 그가 중학생 때 목격한 여동생과 어머니의 죽음. 그들은 가족 내 약자로서 폭력의 희생자이다. 그의 아버지가 살인죄로 15년 감옥살이를 한 기간은 그 소년이 성인이 되는 시간으로서, 영화 속에서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피해자, 희생자임에도 이 사회에서 아무런 보살핌 없이 성장하여 어떤 사유도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당한 폭력의 수행자로 자리바꿈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살았으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존재인 늙고 힘없는 아버지를 ‘생각날 때마다’ 찾아가 짓밟는 게 일상이 되었다.

루이 알튀세는 근대 이전과 이후 공히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로서 ‘가족’을 들고 있다. 가족이란 인간들 사이의 가장 원시적인 위계질서가 성립되는 곳이다. 가족적 질서란 인간만이 만들 수 있는 독특한 질서로 동물적 야만성을 ‘인륜’으로 배우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훈의 가족은 그 위계질서마저 무너져 있다. 그의 상징계는 일찍이 붕괴된 셈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괴로워하는 건 여전히 눈 앞에서 현존하는 아버지의 존재다.

용역업체 사장이기도 한 친구 만식은 “이런 말하면 뭐하지만 어쨌건 하나 남은 피붙이 아니냐? 나 같은 고아새끼는 그런 아버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잘해드려 임마!” 라고 말하며 아버지에게 갖다드리라고 돈을 쥐어주곤 한다. 그럴 때마다 상훈은 냉소하며 아버지에게 찾아가 보란 듯이 짓밟아버린다. 그리고 절규한다. “왜 그랬어! 왜 그랬냐구! 왜 그랬어?” 상훈은 결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똥파리로 살아가는 지금의 상훈에게 그런 아버지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자살하려고 손목을 긋고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병원으로 업고 가며 “죽지 마...지금 죽으면 안 돼..지금 죽으면...난...뭔데? 난 왜 이렇게 산 건데?” 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리고 만식의 말대로 하나 뿐인 피붙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피를 나누어 살리고 나서, 비로소 새로운 삶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똥파리로 살아가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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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에게 지옥이었던 가족이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천국으로서의 가족을 꿈꾸어 왔다. 그 구성원은 상훈과 마찬가지로 가정폭력의 상처를 안고 있는 자들이다. 혼자 예닐곱살 된 아들을 키우며 힘겹게 살고 있는 이복 누나와 어린 조카, 그리고 알 수 없는 동질감 속에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여고생 연희. 상훈은 꼬마 조카에게 찾아가 자기 나름대로의 아빠 역할을 해주곤 한다. 연희와 꼬마 조카와 함께 맘껏 웃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그는 천국 같은 가족을 경험한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이런 환상 속에서 미소 짓는다. 거기엔 누나와 조카, 연희, 그리고 상훈을 따라 용역업체를 접고 식당을 차린 친구 만식이 새로운 가족이 되어 함께 모여 있는 모습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어머니와 제자를 새로운 가족으로 맺어주고 떠나듯이 말이다.

영화 <똥파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해자나 피해자나 할 것 없이 모두 이 사회의 희생자들이다. 인간적인 삶을 담보해주지 못하는 세상,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서로 물고 뜯기는 소외된 자들, 무력한 자들,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끝내 파리 목숨이 되어 죽고 마는 자들...모두 똥파리 같은 존재들이다. 사회가 변하지 않는 한 똥파리는 계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된 상처를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억압적인 장치들에 대항하면서 진정으로 능동적인 주체로서 살아남아야 한다.

후일담이지만, 영화가 만들어진 후 불편했던 양익준 감독의 가족 관계가 좋아졌다고 한다. 자신의 실재와 맞닥뜨리는 고통스런 과정을 통과해낸 듯하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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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ineluna
    2009.03.24 11:5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된 상처를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억압적인 장치들에 대항하면서 진정으로 능동적인 주체로서 살아남아야 한다...

    마지막 문단에서 힘을 얻고 갑니다.결국 자신의 문제는 자신의 몫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겠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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