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묵시록 9 : 묵시록의 영웅 트럼프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한국에서 요즘 많이 쓰는 ‘집단적 지성’이란 말을 접하면서 그런 게 과연 있을까 의심을 품은 적이 많지만 나 역시도 그에 대한 기대를 했었던 것 같다. 그 기대가 ‘트럼프 대통령’이란 상상하기조차 싫었던 말을 듣게 되면서 깨졌을 때까지는 말이다.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예선전을 이기도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 나는 그 마저도 인정하기 싫어 뉴스 읽기를 거부했었다. 그가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다는 뉴스를 미국의 어떤 정신의 몰락과 내가 아는 묵시록의 한 페이지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의 충격도 그의 당선 소식이 준 충격과는 비길 수 없었다. 세상의 예측은 다 틀렸고, 미국의 경제와 정치의 내막을 가장 잘 알 것 같았던 뉴욕 타임스의 Paul Krugman도 자신이 미국을 잘 모르고 있었노라 고백을 하고 말았다. 지난 한국의 총선과 영국의 Brexit도 그랬다. 왜 빅데이터와 SNS의 개명된 시대에 그렇게 많은 돈과 기술을 투자하고도 사람들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그 개명된 시대의 하수인이 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 자존심이 작동한 것일 수 있다. 어쨌거나 트럼프가 어떻게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탄식하는 일은 모두에게 남겨진 몫이 되었다.  


    나는 미국의 선택을 세상이 더 좋아질 수 없다는 종말론적인 심정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으니 정반대의 극단적인 수를 던져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 정치문화의 미래는 이미 결정된 것으로 보였다. 동성애 결혼 문제에 대한 법원의 진보적인 판결이 나오고 다수의 미국인이 이런 결정을 지지한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다른 진보적인 이슈들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는 것으로 보였다. 오바마케어라 불리는 국가가 관리하는 의료보험 제도도 보수주의자들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면서 진보적인 색체의 정치가 주류로 정착되는 듯했다. 그에 따라 보수권 내에서도 새로운 정치권의 스펙트럼 속에서 각자의 위치를 찾아나가려 한다는 느낌도 받았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그게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개표 직후부터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목 받기 시작했다. 바로 미국 시골의 가난한 백인남성들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소외되고 주류사회의 변화를 받아드릴 수 없었던 그들이 정치적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것이 반란이었다면 그 의미에 대한 평가는 그들이 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는 과거 어느 대통령 후보보다도 더 많은 81%의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나온다.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그 뿌리가 근본주의에 있고, 근본주의는 19세기 미국의 전천년설의 묵시록을 수용한 사람들의 신앙이기도 했다.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지난 웹진의 글에서 다룬바 있다. 그들의 신앙이 정치화 된 시기를 1970년대 말이라고 흔히 얘기하는데, 나의 입장은 그 현상을 미국역사 전체에서 찾아야 하고, 그 이해를 돕기 위한 용어로 묵시록이란 개념을 여기서 쓰고 있다. 70년대 말 복음주의 신앙의 정치운동화가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만들면서 성공하게 된 이론적 배경에는 근본주의-복음주의 신앙과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의 만남이 있었다. Frederick Hayak에서 Milton Friedman까지 ‘자유’라는 개념을 화두로 삼아 세상의 가치를 자본주의의 가치로 바꿀 꿈을 꾸고 있던 신자유주의에겐 유권자가 필요했고, 정치적 플랫폼이 필요했던 근본주의-복음주의 신앙인들에게 ‘개인의 자유’만큼 매력적인 용어는 없었다. (60년대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 이후 비대해진 국가권력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암묵적 적그리스도로 보았던 근본주의 신앙과 국가의 규제를 받지 않는 자본의 자유를 추구하던 세력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신앙운동이 바로 미국의 뉴라이트(New Christian Right)운동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들의 타협적인 도덕관에 맛서는 순혈의 ‘도덕적 다수’라 불렀다. 그들의 세계관은 미국의 묵시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몰락은 그 세계관의 토대였고, 세상은 적군과 우군으로 구분되었고, 적을 대하는 자세는 언제나 폭력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세계관은 청교도 이후 미국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으로, 현대 미국의 종교와 정치는 이 세계관이 신자유주의 세계관과 만나 변신한 형태, 곧 70년대 후반 근본주의 개신교의 ‘도덕적 다수’ 운동과 분리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 등장해서 인류의 삶을 바꾸어 놓는 비극적인 과정에 대한 설명 없이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성공한 이데올로기가 늘 그렇듯이, 신자유주의의 이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그 테두리의 밖은 상상도 하기 힘들게 되었다. 성공한 이데올로기는 일상과 접목된 보편의 철학이 된다. 철학으로서 신자유주의는 반민주적인 철학이다. 다수가 아닌 소수의 자본가와 기업인에 의한 절대적 지배를 꿈꾸고 승자와 패자로 사람을 구분하는 도박의 철학이다. 그 철학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상을 움직이는 현실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현실을 이길 수 있는 건 비판이 아니고 혁명뿐이다. 그리고 모든 혁명은 주된 텍스트는 묵시록이다. 트럼프를 지지한 유권자들은 그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선택한 신자유주의 철학에 의해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비판의 대상이 될 신자유주의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미래를 모르는, 아니 미래가 없는 묵시록의 혁명이 아니었을까.


    좀 더 현실 정치의 입장에서 본다면,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트럼프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한 이유는 진보적인 이슈들을 수용하는 사회분위기에 저항하는 면도 있고,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철저하게 밖으로 내몰린 현실에 대한 왜곡된 표현이라는 면도 있다고 해야 하겠다. 하지만 결국 그 이유는 트럼프라는 인물에게서 찾아야 한다. 실제 트럼프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한 유권자들은 많지 않았다. 소외된 백인들의 분노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분노의 정치를 공공연히 말하는 트럼프에게서 그들의 아바타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앙도 없었고, 전통적인 도덕의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삶을 살았고,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었고,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회개하지 않았던 세속의 인물인 트럼프를 보수 기독교인들이 지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묵시록이란 주제에 맞는 간명한 설명 하나가 가능하다. 그들은 트럼프를 묵시록의 영웅으로 본 것이다.  


    트럼프의 세계관은 묵시록에 기초한 것이다. 세속화된 그의 묵시록에서 종교적인 언어나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은 없었지만, 세상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근본주의 묵시록의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세상을 선과 악이란 이분법으로 이해했고, 미국이라는 선과 테러라는 악의 두 축의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을 싫어했다. 세상의 선과 악이 너무나 분명한 상황에서 그에 대한 설명은 과거의 정치, 행동이 아닌 말의 정치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에게 선을 실천하기 위해서 폭력은 불가피할 수도 있었다. 세상은 무질서와 테러의 위험 앞에서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고, 지금이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그의 선언에서 진리와 예언을 읽은 사람은 의뢰로 많았다.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폭력과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웃어넘길 수 없는 현재의 시간에 대한 진단이고 묵시록의 예언이었다.  


    <Waiting for Armageddon>은 10년 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끝낼 아마겟돈 전쟁이 곧 일어난다는 묵시록을 믿는 약 5천만 명 정도라는 미국 근본주의자들의 신앙을 주제로 하고 있다 (Youtube에서 볼 수 있음). 비교적 편견 없이 그들의 신앙과 입장을 다룬 영화로, 묵시록의 신앙이 개인적인 믿음을 넘어, 곧 파괴되어 없어질 세상에 대한 인식이 정치화되어버린 현실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마지막 날의 현상으로, 선택된 산 자와 죽은 자들이 한 순간에 하늘로 사라지는 휴거를 믿는다. 그 순간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환란을 겪게 되고, 예루살렘에서 재림예수가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최후의 전쟁을 벌여 승리한 후 천년왕국을 일으킬 것으로 믿는다. 이 묵시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설과 영화의 소재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를 현실의 일부로 이해해줄 사람이 없으면 그 장르가 미국 영화의 대표적 장르로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묵시록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숫자가 오천만 명이 되고, 그들이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유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세한다는 게 미국의 현실이다. 


    트럼프가 선과 악을 넘어선 니체적인 영웅이라면 무리가 있을까. 자신의 삶이 전통적인 종교의 선과는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는지 그에게 악이란 개념도 종교적인 게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윤리를 넘어서 묵시록의 결단을 요구하면서 대통령이 됐다. 동성애자들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전통적인 도덕관이나 가치관의 회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웃에 담을 쌓고자 했고, 불법채류자들에게 가혹해져야 한다고 했다. 모든 국가는 한국은 한국의 문제이고 위대한 미국이 망하기 직전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고, 완전히 망하지 않으려면 자신을 선택해야 한다는 협박도 있었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립서비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현대 정치의 공식은 그에게 불필요했다. 암울한 공포의 디스토피아적인 비전만으로도 대통령이 되는 게 가능했다는 사실은 묵시록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묵시록의 영웅은 재림예수일 필요도 없고 적그리스도일 필요도 없다. 세상의 몰락을 상기시켜주고 그에 합당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니면 몰락의 사실을 자신의 말과 제스처로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런 영웅이 되기 위해 트럼프는 종교적일 필요도 없었고,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 신학의 본질은 이미 미국적인 것으로 미국의 정신 속에 녹아져 있었다.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라는 21세기에 많지 않다. 트럼프는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묵시록의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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