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무감한 시대에 던지는 화살  

<피에타 (김기덕, 2012)> 




이희승*



  신기하기만 합니다. 촛불을 들고서 다시는 찾지 않을 줄 알았던 빈 광장을 가득 채운 시민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지난 겨울부터 예감은 했습니다. 많은 이들의 절규, 고통 그리고 죽음을 지불하고 겨우 벗어난 줄 알았던 과거의 망령을 소환해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까지 옭아매려 했던 그 세력들이 줄줄이 포승줄이 묶여 심판대로 향할 때, 다시 뒤로 가지는 않으리라 확신을 했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지켜본 이번 대선은 승부를 알고도 손에 땀이 나는 경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침 뉴스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네요.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에 오르기를 바랬던 많은 이들도 서서히 이 흥분과 기대에 전염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손수 양복 저고리를 벗어내려 놓고, 소매를 걷어 올리며 거꾸로 향했던 이정표를 바로 돌리려고 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막연하지만 꽤나 단단한 믿음을 갖게 되는 이유라면 단 한가지. 그가 타인의 고통을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 고통에 민감함으로 번민하는 지도자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문득, 고통의 교감에 번민하는 외로운 영화감독 김기덕의 <피에타(2012)>가 떠오릅니다.


  뤼미에르 형제의 ‘신기한’ 발명품으로 세상에 첫선 보였던 영화는, 새로운 예술매체로써의 가능성때문에 현대를 함께 열어가던 많은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지요. 활발하고 진보적인 실험과 모험의 대상이었던 영화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불행히도) 개인적 관음의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산업의 구조 위에 재조립되어 버렸습니다. 현실의 괴로움과 고통을 잠시라도 잊고자 하는 대중의 심리와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춘 헐리우드의 상업적 이해가 만나 탄생한 여러 장르 영화들은 스크린에서 재현되는 인간의 갖가지 감정들을 궁극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두려움이라는 원초적 감정은 호러 영화의 문법을 통해 말초적 쾌락의 도구로 재활용됩니다. 욕망하는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고뇌에서 비롯된 상실감과 좌절은 멜로 영화의 제조 공정을 통과하면서, 삶을 관통하고 변화시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카타르시스보다는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상큼하게 떨쳐버릴 수 있는 소모성 슬픔을 선사하죠. 예술 영화라고 분류되는 영화들조차도 거의 장르화되어버린 엘리트적 주제의식과 시각적 탐미주의을 통해 일부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미학적 쾌락을 제공하는데 심혈을 기울일 때가 많습니다. 해외에서의 평가와는 달리, 국내 비평가나 관객들과 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도 이런 도식화된 예술영화로 해석될 만한 소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특히,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보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여성의 육체를 가학적 유미주의의 재료로 사용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인류의 구원이라는 추상적 주제를 위해 희생한다는 지적을 온전히 피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논란을 잠시 뒤로 하고, 열띤 찬반 논쟁의 한가운데 서기 일쑤인 그의 영화들을 살펴보면 고통이라는 공통된 지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영화인 <악어 (1996)>에서부터 그가 직간접적으로 제작에 참여하고 탄생시킨 거의 모든 영화들은, 어떤 장르적 장치를 통해서도 관음적 쾌락으로 온전히 전환할 수 없는 ‘불편한’ 고통의 경험을 관객의 마음에 선명하게 남기죠. 단순히 센세이션널리즘이라고 폄하하기에는 긴 세월동안, 그의 작품활동과 평범하지 않은 삶의 여정은 고통이라는 일관된 테마를 고스란히 실재화하는 지난한 과정으로 보입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소외계급의 고통을 매개로, 계급화된 문화 엘리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예술영화의 지평을 넓혀 보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보여 줍니다. 마치 그 무게를 감당하기도 어려운 커다란 붓으로, 아직 제대로 형상화되지도 않았으며 영화예술의 구조적 변화없이는 제대로 형상화될 수도 없을만큼 ‘날것’의 고통을 스크린에 그려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볼때마다, 쾌락을 상품화하는 문화산업에서 고통의 공감을 통해 인류와 문명의 변화를 촉구하는 예술로 영화를 복원하려는 그의 의지를 읽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국내외에서 상당한 호평을 끌어낸 영화 <피에타>는 비문명의 수준에 가닿은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이윤추구, 누적된 피로와 고통과 절망을 감당하며 서로를 물어 뜯어야 하는 도시빈민들, 그리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자기 희생과 구원에 대한 물음을 거칠게 던져 놓은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색채가 짙은 포스터와는 달리, <피에타>의 주인공인 강도(이정진)는 다 허물어진 청계천 골목을 누비며 악덕 사채업자를 위해 채무자들의 사지를 절단해 불구로 만들고는 그 보험금을 가로채는 하이에나같은 존재입니다. 김기덕 감독의 남자 주인공들이 늘 그렇듯이, 태어나서부터 버려진 채 거칠게 자란 강도는 돈을 벌겠다는 욕망보다는 원초적인 폭력에의 본능에 의해 움직입니다. 성적 쾌감을 위해 남이나 자신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새디즘과 메조키즘이라는 발전된 형태의 욕망의 구조를 찾아 볼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잔인성을 표현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죠. 느닷없이 어머니를 자청하며 찾아온 미선(조민수)은, 청계천 개발을 핑계로 수십년간 자리잡고 있던 군소업체들이 내쫓기고 황량하게 변한 도심 한복판의 메탈정글에서 홀로 살아 가고 있는 맹수같은 강도를 ‘관계’라는 문명의 첫 단계로 끌어 들이게 됩니다.


    이 묘령의 여인이 자신을 버린 엄마라는 사실에 치를 떠는 강도의 모습은 야수적인 폭력성을 극복하고 문명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내적 외적 고통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미선을 강간함으로써 자궁으로의 회귀를 시도하는 강도는, 수치심과 고통에 휩싸여 신음을 토해내는 미선의 얼굴을 내려다 봅니다. 채무자들의 팔다리를 절단하면서 수없이 본 고통의 장면이었건만, 강도는 미선이 느끼는 고통을 고스란이 교감합니다. 김기덕 감독은 미선의 비명과 절규가 귀를 멍멍하게 하는, 고통이 가득찬 클로즈업을 눈에 띄게 거친 핸드헬드 카메라로 잡아내며 ‘고의적인’ 줌인을 사용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강도의 망설임에 주목하게 합니다. 미선이 느끼는 모욕과 수치심과 고통을, 가해자인 강도와 그 가해의 현장에 비밀스런 공모자로 함께한 카메라가 함께 체험하는 듯합니다. 강간이라는 폭력행위의 영화적 재현에 내포된 가학적, 피학적 쾌락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생생한 고통을 스크린 너머로 전달하는 이 충격적인 장면은, 근친 상간이라는 근원적 욕망의 대리만족을 통한 관습적인 쾌락 추구에 젖은 관객을 향해 찬물을 끼얹습니다. 


    자신을 문명의 경계 안에서 성찰한 적이 없었던 강도는 처음으로 타인의 고통을 체험적으로 교감하면서, 그간 채무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했던 자신의 폭력과 그 끔찍한 결과를 하나하나 되짚어 갑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향한 무한한 애정, 그 사람을 잃는 단장의 고통을 통과하면서 강도는 자신이 부지중에 공모했던 자본주의의 야만적 본성을 자각하게 되죠. 어느날, 한 채무자가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광경을 목격한 강도는 묻습니다. “돈이 뭐죠?” 미선은 대답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 되어버린 ‘돈’이 가시 돋힌 그물로 모두를 옭아매고 신음하게 만든 청계천 풍경은 이 영화가 제시하고자 하는 한국사회의 단면이자, 현대문명의 척박함에 김기덕 감독이 들이댄, 필터없는 거울인 것 같습니다. 영화 곳곳에 고스란이 드러나는 청계천의 뒷골목들은 다소 도식적인 미장센을 만들어내긴 합니다. 하지만, 최소의 자본(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데 김기덕 감독은 미처 2억원이 안되는 버젯을 사용했다고 하네요)이 최선의 선택을 통해서 탄생시킨 이 암울한 미장센은, 우리가 상승욕구에 몸을 맡기고 최고를 외치는 동안 잔인하게 파괴하고 멸종시킨 주변인들이 화석이 아니라 살아서 고통을 느끼는 인간임을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유수의 비평가들은, 이제는 김기덕 감독이 피비린내나는 몸부림과 비명으로 가득한 가학과 피학의 미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허나, 프로이트가 천명했듯이, 고통이란 성적 쾌감을 목표로 주조된 육체의 환상인 새디즘과 메조키즘을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능력입니다. 고통은 원초적 폭력성에 대응하고 대항하는 인간 본연의 초월적 방패막이로써, 문명을 탄생시키고 유지하는 예술성 혹은 종교성의 근간이 된다는 해석이지요. ‘고통에 처한 신체’라는 저서에서 일레인 스캐리는 고통은, 당하는 이에게는 홀로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는 끔찍한 체험이지만, 고통을 진정으로 교감하는 이에게는 고통을 당하는 이의 관점을 체화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세상을 새로이 창조하는 경험이기도 하다라고 기술합니다. 이러한 고통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바로 예술이라고 할 때, 김기덕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처럼, 타인에게 가해진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나의 것으로, 더 나아가 나의 책임으로 끌어 안으려는 예술적 시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문이 살짝 열린 듯한 ‘새로운’ 시대가 많은 이들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교감하려는 수많은 이들의 안간힘으로 탄생했음을 잊지 않기를, 그리하여 진정으로 거듭나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길에 우리가 서있는 것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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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자다 못가의 사람들 [각주:1]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
― 「요한복음」 5:1-9 중

 

오늘의 성서 본문에서는 38년간 베드자다 연못가에서 첫 번째로 물에 뛰어들 날만을 기다리던 한 병자가 예수를 만나 몸이 치유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라고 말하자, 그는 몸이 나았고 예수의 말대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말은 그가 그토록 바라던 ‘몸의 회복’을 한순간에 가능하게 했습니다, 연못의 신비한 힘을 빌지 않고도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 치유 사건은 뭔가 수수께끼 같은 면이 있습니다. 환자의 치유를 선언하는 타이밍에 예수는 왜 “네 병이 나을 것이다” 또는 “네 병을 고쳐주마”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마치 원래 있지 말아야 할 곳에 그 병자가 자리를 깔고 있다는 듯이 “자리를 걷어 떠나라”고 한 것일까요? 그리고 왜 예수는 그를 성전에서 다시 만나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14절)라고 권면한 것일까요? 문맥 상 이 두 말은 등가의 의미를 갖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8절의 예수의 치유 선언과 14절의 권면은 “네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서 떠나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면 우리는 그 병자가 38년이나 지키고 있던 그 자리가 어디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그 병자가 있었던 자리는 어디인지 함께 생각해보고,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는 예수의 치유선언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 병자가 있던 곳은 ‘양의 문’ 곁, 베드자다 못가입니다(2절).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있었습니다(3절). 예수는 많은 환자들이 누워있는 베드자다 연못가의 주랑을 거닐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그는 거동이 쉽지 않은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를 발견합니다. 그 병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연못만 응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8년이나 앓아온 그 병자는 날이 갈수록 굳어져가는 몸 때문에 이렇게 인생이 끝장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고, 공동체에서 온전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몸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 몸은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온 희망을 연못의 신비한 힘에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병세가 깊어갈수록 더 강한 처방을 원했고, 그렇게 오게 된 곳이 베드자다 연못이었을 듯합니다. 대체 베드자다 연못은 어떤 곳이기에 거동이 힘든 중증 환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일까요?

 

'양의 문'의 위치


애초에 베드자다 연못은 포로기 이후 강화된 사제 집단의 권위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공간이 형성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문 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양의 문’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느헤미야에 의해 중건된 성벽의 문 중 하나입니다. 「느헤미야」 3:1에서는 이 문이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동료 제사장들이 나서서 만든 것이며 첫 번째 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북쪽 지방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성전으로 이어지는 길의 최종 관문과 같았던 ‘양의 문’은 그 이름이 주는 인상과 같이 제의용 가축이 성전으로 대거 유입되는 통로였습니다. 그리고 베드자다 연못은 이러한 도시의 흐름에 맞춰 성전에 제사용 물을 대거나 제의용 동물을 씻기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활동하던 당대에는 성전 안에서 제의용 동물을 거래하는 산업이 이미 활성화돼 있었습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언급된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이 이 산업과 관련돼 있습니다.(마태 11:15-19; 마가 11:15-19; 누가 19:45-48; 요한 2:13-22) 아마도 이 산업은 성전 중심 체제가 형성된 초기부터 성장했을 것입니다. 레위기 기록(레 22:17-25)으로 볼 때 제의용 동물은 엄격한 기준에 따라 ‘흠이 없는 것’을 선별해야 했는데, 원근 각지에서 성전으로 모이는 이들이 제의용 동물을 온전하게 수송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성전 근처 및 성전 안에서 ‘흠 없는’ 소나 양, 염소 등을 구입하려는 수요가 넘쳐났고, 베드자다 연못은 (자신이 정성스레 가져온 제의용 동물을 씻기는 곳이라는)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누군가가 구입했거나 곧 구입하게 될 제의용 동물을 제사장들의 형식적 검사를 받기 전 잠시 들러 씻기는 곳이 되었습니다.
중증 환자들의 집합소가 된 베드자다 연못은 이처럼 성전 중심의 도시공간 배치와 상업화된 제의 방식이 결합된 체제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간이 중증 환자들의 희망의 보루가 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약간의 음모론적 상상력을 보태보겠습니다. 이렇게 상업적으로 구성된 제의 체제에서라면 종교 상품인 동물의 시장가격을 통제하기 위한 핑계이자 사람들에게 종교적 신뢰를 주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박물관에 있는 베드자다 연못 모형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높이가 다른 쌍둥이 건물로 구성된 베드자다 연못은 상층의 물이 수로를 통해 하층 건물로 유입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자다 연못에 관련된 자료를 찾다 보니, 오른쪽에 보이는 상층 건물은 동물을 씻기던 곳이었고, 왼쪽 건물은 환자들의 치유센터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동물 씻긴 물이 하층으로 흘러들어가 환자들을 씻기는 치유센터의 물로 사용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음모론적 상상을 돕는 촉매제가 되기에는 충분할 듯합니다.
제사장 그룹은 상하층의 물을 모두 동물을 씻기는 데 써도 부족하겠지만, 하층의 회랑을 병자들을 위한 치유센터로 내어주자는 결단을 ‘힘겨운 척 쉽게’ 내립니다. 제의용 동물들을 씻긴 물이 신비한 치유의 힘을 갖는다는 소문이 득이 되면 됐지 실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이 제사장들의 음모를 제의용 동물을 구입할 능력을 가진 이들이 정말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속아 넘어가는 척하며 짐승(그것도 그다지 거룩해 보이지 않는) 씻긴 물에 ‘나만 안 씻으면 되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 상품 구매력을 소유한 이들 사이의 암묵적 합의, 그것이 베드자다 연못에 대한 대중들—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이들, 구매력을 통해 자신의 죄를 사함 받을 능력이 없는 이들—의 소망을 떠받치는 토대였던 것은 아닐까요.
다시 예수와 병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가 병자에게 “낫고 싶으냐”라고 묻자, 병자는 원망 섞인 어조로 대답합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7절). 함께 누워있는 병자들은 자신이 연못에 들어가도록 도와주기는커녕 자기를 밀쳐내는 경쟁자들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문득 궁금해집니다, 정말 그곳에는 환자들을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언뜻 생각해보면, 어떤 환자들은 가족이나 친척이 함께 와서 못에 넣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이라면 종들을 거느리고 못가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겠다, 하는 상상도 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너무 순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종을 부릴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이 연못이 아니라 의원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자다 못에서 씻으라고 한다면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사환에게 화를 냈던 것처럼 불쾌해하고 화를 냈겠지요.(열왕기하 5:10-12) 그리고 죄인으로 규정돼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족이 얼마나 냉정한지, 그와 함께 있다가 자신들까지도 율법을 어긴 사람으로 내쳐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9:20-22) 그러니 가족도 그들과 함께 있었던 이, 즉 환자를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몸이 불편한 환자들에게 “내가 당신을 연못에 넣어주겠다”고 말했을 법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베드자다는 체제의 일부분이지만 동시에 체제의 작동 논리가 발현되는 장소, 곧 체제 자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성전 중심 체제의 곳곳에서 ‘속죄’라는 종교적 가치와 제의용 동물이 상호 교환되는 상업적 종교의례가 일관성 있게 발현되고 있었는데, 베드자다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드자다의 하층 연못에서도 구원과 속죄를 바라는 열망이 그들에게 남아있는 모든 자원을 값으로 지불하게 만들고 종교 상품으로 교환되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겠지요. 그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 천사가 물을 휘저을 때 제일 먼저 당신을 연못에 넣어주겠다며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듯합니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를 보니 중증 환자들을 ‘물에 넣어주는 사람’, 밑바닥 사람들의 소망을 이뤄주겠다며 접근하는 사람들의 면모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영화에서 이강도(이정진)는 몰락해가는 청계천 금속 가공 상가를 돌아다니며 일수를 회수하는 사람입니다. 일수를 쓴 이들은 쉽게 상환기한을 넘겨버리고 이자는 원금의 열배로 금세 뛰어오릅니다. 강도는 일수를 줄 때 채무자가 상해보험에 가입하도록 요구하고 일수를 갚지 못하면 가차 없이 그의 신체를 훼손해 보험금을 가로챕니다. 일수를 빌려야 하는 이들, 낮은 신용등급을 가진 죄밖에 없는 그들은 그 죄값으로 신체가 영구히 훼손되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은 바로 그들과 별반 다른 삶의 조건을 갖지 않았을 사람인 것이지요. 형벌의 집행자인 이강도는 ‘빌린 돈’의 달콤함을 선전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잔인한 이면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요즘의 불경기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일수를 갚는 사람은 하나도 담아내지 않고, 일수를 못 갚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 이들이 맞게 되는 지옥만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그것은 불경기 때문에 욕망을 소비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지불 능력은 축소됐지만, 이들로부터 이윤을 갈취하는 이들의 욕망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욕망의 격차’가 자본주의 사회의 수많은 패배자와 무능력자를 생산해내게 됩니다. 이렇게 생산된 패배자와 무능력자들은 ‘일확천금’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면서, 현실에서는 고리대금의 유혹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요.

청계천 금속 상가와 대비되는 주변 건물들

한편, 영화는 종로나 명동의 고층빌딩과 청계천 금속 상가를 한 화면에 보여줌으로써 두 지역 간 건물의 높낮이가 얼마나 다른지, 외양에서 얼마나 큰 격차가 나는지 드러내 보입니다. 한때 청계천 금속 상가는 ‘잘 나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재개발만을 기다리는 곳이 된 느낌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베드자다 연못이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된 이중구조라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연못은 성전 중심으로 배치되고 작동하는 종교-사회체제의 일부분입니다. 연못은 이 체제의 작동 논리 속에서만 기능할 수 있고 존재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베드자다 연못에서 소비되고 있는 희망과 꿈의 담론은 체제의 작동 논리와 전혀 무관할 수 없습니다. 하층 베드자다의 ‘신비한 힘’이 성전체제의 배치 속에서 등장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구매능력을 가진 자만이 ‘속죄와 구원’을 향유할 수 있는 종교체제 안에서, 불구의 몸뚱어리만 남은 사람들은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죄인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결국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 가진 게 몸밖에 없어서 ‘속죄와 구원’을 구매할 수 없고,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죄인일 수밖에 없는 한 사내에게 예수는 “네 자리를 걷어서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베드자다에 일등으로 뛰어들 꿈을 꾸는 한 그는 악한 체제의 작동을 돕는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그 꿈, 그 악몽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그는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그의 불구인 몸을 근거로 그를 죄인이라고 규정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기준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라”고 하는 예수의 명령을 듣는 저에게, 예수의 명령이 “꿈 깨”라는 말로 들립니다. 악몽 그만 꾸라고, 악몽 속에서 취해있지 말라고 말입니다.
어찌 들으면, 예수의 이 말은 남의 심정도 모르고 질러대는 ‘훈계’나 ‘계몽적 언사’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말을 따라 일어나 걸어간 그 병자가 그를 죄인으로 간주하던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성서는 그다지 밝은 전망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이 위로를 주는 말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삶에 대한 전승들이 그를 먼발치에서 태평하게 훈계나 던져대는 사람이 아니라 붕괴돼 가는 삶의 자리에 서 있는 이들과 함께 서서 이들을 지지해줬던 분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베드자다A를 떠난 병자가 결국 맞닥뜨리는 현실은 ‘자유’가 아니라 베드자다B, C, D에 불과할지라도, 예수는 여전히 그 곁에서 그 병자가 그를 죄인 취급하는 체제의 시선에 순응하지 않도록 그를 격려하고 일으켜주는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이 글은 한백교회 2012.9.30. 예배의 하늘뜻 나누기(요 5:1-9) 본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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