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의 근본원인은 아직도 얼굴을 감추고 있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뉴스가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막장드라마와 리얼리즘의 간격이 일순간 무너진다. 한 두 번만 보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고, 또 마지막 결론까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대개는 그 짐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예측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다음 회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막장 드라마다. 뉴스를 보는 것인지 막장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인지, 이미 막장 드라마 같은 뉴스에 충분히 중독되어 버린듯하다.  


    그리고 깊은 의심이 생긴다. 막장드라마 같은 뉴스가 사실로 드러날 때 마다, 오히려 그렇게까지 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막장드라마를 이해하는 상식이면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것인데, 우리는 왜 몰랐던 것인가? 왜 묻지도 의심하지도 않았을까? 막장드라마가 리얼리즘이 되는 이 상황이 못내 의심스럽다. 최대한 앵글을 좁혀 최순실이라는 막장드라마적으로 과장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춘다거나, 아니면 최태민을 연결고리로 해서 박근혜와 최순실이 맺고 있는 관계구도에 모든 원인이 있는 것처럼 만든다거나, 그와 같은 초점의 집중과 시계의 한정을 위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번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까마득히 몰랐던 것처럼 화들짝 놀란 표정과 목소리와 행동을 나타낼 수 있도록 상황을 구성하고 있는 그 모습이 정말 의심스럽다. 


    어쩌면 “집단 유체이탈 국가”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박근혜-최순실 커넥션이 국정농단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아니 그들의 국정 농단에 충분히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당연히 있을 것인데, 아무도 말이 없다. 박근혜와 최순실을 비호하기 위해서 온몸을 던졌던 정치인들, 박근혜 개인에게 권위의 휘광을 둘러 보수와 애국민족정신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온 언론인들, 감시와 사정의 책임을 버리고 박근혜 권력과 재벌의 시녀가 되어 온 판.검사들, 자존심도 책임감도 없는 관료들, 이들 모두가 마치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다. 문제가 되었던 두 재단에 돈을 기부한 기업관계자가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매우 억울하다는 듯이, 자신들은 어둔 밤 길가다가 강도를 당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복음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여기며 노골적으로 이념과 색깔 놀이의 적극적인 주체가 되어 온 기독교 교계가 이제 와서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가짜 목사라고 하면서 일종의 선 긋기를 하고, 자신의 흑역사를 감추는데 급급하고 있다. 사실은 이들, 정치인, 언론인, 법조인, 관료, 종교인, 재벌들은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의 엄청난 혜택을 입은 자들이 아닌가? 아마도 최순실 자신보다 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취한 개인이나 기업이나 집단도 분명히 있을 것인데, 전혀 몰랐다는 표정이다. 


    이 의심스러운 상황전개는 이미 예정된 어떤 결말을 향해서 작동중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사관이 원하는 완벽한 범죄 서사를 다 구성해 주고, 또 범인에 대한 분명한 논리적.서사적 근거를 다 제공해 주고, 유유히 경찰서를 빠져 나와 사라지는 진짜 범인. 대표적인 반전영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1995년작 “유주얼 서스펙트”의 이야기다. 우리들에게 그럴듯한 원인과 결과의 서사를 제공하고, 그래서 처벌하거나 응징해야 할 범인을 정해 주고는, 진짜 원인은 슬그머니 얼굴을 감춰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아니 진짜 원인을 교묘히 가리는 정도가 아니라, 박근혜-최순실 커넥션을 가능하게 한 그 프레임 안으로 우리를 돌려 놓으려고 할 것이다. 만약 우리들의 분노가 아직도 박근혜-최순실의 관계구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향한 깊은 탐색이 진행되지 못하고, 문제를 벗어나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매달린다면, 새로운 비젼 혹은 새로운 대안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결국 분노가 창조적 저항이 되지 못하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향한 희망을 만들지 못한다면 시민사회와 대중은 다시 현실과 타협하게 될 것이다.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지금 여기서 현실이 되고 있고, 미래가 될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도 마찬가지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에 그 사태의 뿌리가 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청산하지 못하면 또 다시 미래가 되어 나타날 것이다. 87년 이후 어느 정도 형식적 민주주의를 진전시켰다는 성취감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사람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비젼을 만들어 내는 일에서는 턱없이 부족했고, 오히려 기성의 보수적 가치와 타협하고 말았다. 그것이 결국 박정희 신화에 기초한 보수정권 재창출의 명분을 제공했고, 박근혜-최순실 커넥션은 그 박정희 신화 혹은 신드롬 안에서 풍부하게 양분을 섭취하며 자라난 괴물이다. 


    박정희 신드롬은 주린 배를 채워주었고 앞으로도 배불리 먹여줄 것이라는 신화다. 배불리 먹여주기 위해서 한 일이기에 유신체제도 정당했다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신화다. 말하자면 배를 채우고 채워주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신화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권력자에게 기본적인 인권마저도 포기하거나 양도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신화다. 하지만 예수는 정반대였다. 예수는 배불리 먹여주었다고 해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겠다는 무리를 냉정히 뿌리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가셨다. 가난하고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한 순간 특정한 사람들만 배불리 먹여주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어떻게 먹느냐에 딸린 문제, 곧 새로운 가치와 질서의 문제다. 예수는 먹여주는 것을 담보로 자신에게 권력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과는 다른 미래, 곧 먹고 사는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가도록 요구하셨다. 


    아마도 눈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박정희 신드롬의 흉측한 속내는 박근혜 정권이 충분히 보여주었고 지금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박근혜 정권과 함께 박정희 신드롬도 명운을 다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언제 또 어떤 옷을 입고 다시 등장할지 모를 일이다. 아니 지금도 겉옷만 바꾸고 다시 등장하기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이라면 박근혜 같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박정희 신드롬을 지키기 위해서 박근혜를 버리는 수순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같은 방어 프레임에 걸려 다시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만들지 않으려면, 박근혜-최순실 사태의 근본뿌리를 직시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자세와 지혜가 정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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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권력에 대해

: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를 생각하며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기독교 사회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 ( Reinhold Niebuhr)는 중앙으로 집중된 힘은 쉽게 타락하기 때문에, 반드시 정치 권력은 다양한 이익 집단들 사이에서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하며, 사회는 윤리적 체크리스트를 가지고, 정치적 이익 집단들이 사용하는 힘을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니버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소련의 중앙통제식 공산주의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최소한 삼권분립의 시스템을 가지고 운영되며, 대통령이나 어느 이익집단이 정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도록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미국의 실용주의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고용주들과 임금 협상, 자신들의 권리 등을 논의할 수 있는 힘을 가능하게 하였다.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자본가들에게 힘이 집중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이다. 


    이에 반해, 니버에 의하면, 소련의 공산주의는, 정치와 경제 권력이 공산당에 집중되어 있고, 이 힘을 견제할 제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권력 남용이 쉽게 이루어진다. 중앙정부가 권력을 남용할 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집단은 두말 할 것 없이 일반 민중들이다. 그러므로 니버가 주장하는 기독교 현실주의 (Christian Realism) 관점에서 보면, 인간 사회에서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익 집단 간의 힘의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강대국들 또는 거대 사회집단들 사이의 힘의 균형보다는 민중들이 힘을 되찾아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해방신학자들과 제3세계 중심으로 국제 정치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탈식민주의 신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중앙권력형 정치구조가 억압과 고통을 재생산하는 반민주적이란 니버의 주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에 덧붙여,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약자의 폭력은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니버의 주장은 어떻게 보면 현대 사회에서도 수용하기 힘든 급진적인 생각이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세계 곳곳의 정치적 사건들을 보면서, 20세기 중반의 기독교 윤리학자 니버를 떠올리게 되었다. 니버가 활동하던 1930~50년대는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와 많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세계 대공항과 두번의 세계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의 죄성을 뼈져리게 느끼고, 노동 운동 등을 통해 새로운 미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한 당시의 노동자들과 일반 민중들의 힘은, 고도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21세기 노동자들와 민중의 힘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날드 트럼프가 주장하는대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려면, 자본가들과 정치 엘리트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노동자들와 일반 시민들에게 분산시켜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가 생각하는 위대한 미국은 라인홀드 니버가 끔찍해한 자본가들을 위한 미국, 책임을 회피하는 미국 고립주의, 그리고 미국 패권주의다.

  
   트럼프가 구상하는 미국의 모습도 문제지만, 현재 한국에서 밝혀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는 니버의 입장에서 보면 최악이다. 니버는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정치 권력이 한 개인과 정당에 집중되는 것은 견제하고 두려워 하면서, ‘자본’은 정치권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점이 아이러니라고 보았다. 자본은 정치 권력을 쉽게 장악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권력형 비리는 자신들이 가진 정치 권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재하고, 그 부를 사용하여 다시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전형적인 부정부패의 모습을 띄고 있다. 한국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반 민중들의 시국 선언과 광화문 광장을 밝히는 시민들의 촛불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사유화한 권력이 실제로는 한국 민중들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지금의 대중 시위는 니버가 이야기 한 힘의 균형이 아니라, 민중들이 원래 자신들의 것이였던 힘을 되찾아 와서, 새로운 정치 구조를 만들어 가려는 혁명의 몸짓이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그가 생각한 인간의 죄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서구의 자유주의 전통에서, 니버는 인간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자기 이익 추구는 결코 윤리적 중립 상태로 존재할 수 가 없다. 이익 추구가 극대화 되면, 인간은 쉽게 이기적이 되며,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은 도덕적 양심이 있어서, 자비심, 동정심, 이해심 등의 감정을 통해,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사회 집단이나 국가는 집단화된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이타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현실 가능한 방법은 힘의 균형을 통하여, 한 집단 또는 한 국가가 이익 추구를 위하여 다른 집단이나 다른 국가를 억압하거나 폭력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니버의 이러한 생각은 많은 여성 신학자들과 사회 운동가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우선 여성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 (특히 여성)은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기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돌봄과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이다. 또한 이런 관계성을 통해서 삶의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인간이 이기적이며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주장은 인간이란 존재 전체를 규정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한 집단 또는 국가가 그 집단과 국가 전체 구성원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 국가의 이익이 국가 구성원들의 이익과 동일시 되는 것은 위험한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국가의 이익은 그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개인적 생각들—비록 그들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지도자들의 삶의 태도, 인간에 대한 이해, 끊임 없는 자기 반성, 윤리적 기준들이 절대적으로 간과될 수 없다. 어떻게 주가 조작과 유령회사를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이 이타심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비록 그 사람이 일요일 마다 교회 주차장에서 주차요원으로 봉사를 했다고 해도 말이다. 일생을 공주처럼 떠받들여 살면서, 남에게 섬김만을 받고 그 섬김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봉사와 희생정신을 찾고, 국가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소외된 사람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 성설이다. 아무리 국가 구조가 삼권 분립과 권력의 분산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지도자들의 도덕성이 일반 국민들의 그것에 미치지 못 한다면, 미국이든 한국이든 현재의 대통령 중심제도는, 국가 구성원 전체의 이익이 아닌,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할 수 밖에 없다. 즉 국가나 특정 집단이 집단화된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공동선을 위해 집단 이익을 포기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집단이나 국가의 지도자들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타집단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전쟁을 일으키고, 권력을 사유화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니버는 종교가 정치를 해석하려고 할 때,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정치적 혼란과 윤리적 혼란을 일으킨다고 했다. 정치적 사건을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할 때, 미국이 세계 평화를 위해 하느님께 선택받았다는 미국 패권주의 신학이 등장하게 되고,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약자를 억압하거나, 정치인들을 무지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종교가 정치 세력과 떨어져서, 비판적 관찰자의 입장을 갖는 것이 세상의 고통을 훨씬 더 덜어주는 길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종교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종교적 관점에서 자신의 입신양명을 설명하려는 지도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민중들은 올바른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를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아마도 나를 포함한 세계 민중들은 도덕적으로 흠없는 정치자들을 원하기 보다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줄 수 있는 지도자를 현실적으로 기대할 것이다. 국가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는 것, 자신과 측근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권력을 쓰지 않는 것은 도덕성이라기 보다는, 인간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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