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VI)
: ‘실재(the Real)’에 관하여 (2)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이어도 사나~~

우리집은 내가 열 살이 되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제주도에서 서울 한복판 종로3가로 이사 왔다. (그 문화적 충격이란… 그에 대한 사연은 다음 기회에 또 나누기로 하고) 당시 제주에는 19세기에 출생한 팔십이 넘은 나의 증조 할머니가 생존해 계셨다.  줄곧 제주에서 사셨고, 제주에서 한일합방과 일제시대,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이승만, 박정희까지 모두 감내했던 분이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4.3까지…

할머니는 해녀였다. 지금은 제주해녀가 많이 줄었다지만, 할머니가 젊었을 때 만 해도 그냥 일상적으로 동네 아낙들이 바다로 들어가 물질(제주 해녀들이 바다로 들어가 전복, 해삼, 낙지 같은 것을 포획하는 활동을 일컫는 제주도 방언)을 하였다고 한다. 해녀가 무슨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일상이었다는 말이다. 옛날 지리시간에 배워서 알겠지만 제주도는 섬 전체가 화산섬 현무암 지대로 물이 흘러 지하로 스며들었다가 해안가에서 쏟아 오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민가들이 해안가를 따라 분포하였다. 그냥 마을 길 따라 걷다보면 바다가 나온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당시 제주 바다는 제주 인민들에게 중요한 삶의 자원이었고, 그 몫은 당연히 생활력 강한 여인들의 차지였다. 나의 증조할머니도 젊었을 때는 빈번히 물질에 참여하셨다고 당시를 회고하셨다.

그래서였을까? 할머니랑 같이 있다 보면 당시 물질할 때 불렀다는 노동요들을 가끔 들을 수 있었다. 처음 듣는 알 수 없는 곡조에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를 읊조리던 할머니에게 “그게 무슨 노래야?” 라고 버릇없이 묻던 증손자를 할머니는 마냥 귀엽다 쓰다듬으며, 그냥 옛날에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불렀던 노래라고만 답하셨다. 그 중 대표적인 곡이 바로 ‘이어도 사나’이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는 전설 속 섬 파랑도(‘이어도’의 정확한 명칭)를 찾기 위해 벌이는 수색전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해군함정까지 동원된 수색작업에도 불구하고 이어도는 모습을 끝내 드러내지 않았고, 수색종결을 선언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색작업 취재차 승선했던 제주출신 천남석 기자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천남석의 아버지는 어부였다. 육지에서의 시간보다 바다위에서 생활하던 시간이 더 많았던 아버지는 이어도를 찾아 떠나야겠다며 수평선을 넘었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고,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어도를 목놓아 노래하다 밭이랑 사이에서 죽는다.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 모두가 섬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 이청준, ‘이어도’ 中

‘이어도’는 제주 뱃사람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피안의 섬이다.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이어도’로 갔다고 믿었다. 나의 증조할머니가 불렀던 구전가요 ‘이이도 사나’는 이어도 관련 가락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으로 ‘이어도 가니?’ ‘이어도에 사느냐?’라는 뜻이 가사에 내포되어 있다. 천남석은 섬사람들의 이 지긋지긋한 이어도를 향한 집단무의식, 당신의 아비와 어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어도’로 인한 정신의 가위눌림, 그리고 모두가 갖고 있는 이어도에 대한 부질없는 환상에 이제 그만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그래서 이어도 탐사작전에 비장한 마음으로 승선하였던 것이다.
 
전설 속 섬이었던 이어도의 실체가 처음 확인된 것은 1900년 영국 상선 소코트라호가 제주 남쪽 바다에서 암초에 걸려 좌초된 이후이다. 영국해군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마침내 1910년 수심 5m 아래 암초를 측량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이어도’는 국제적으로 소코트라 암초(Socotra Rock)’라 불린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1984년 제주대 탐사팀이 마라도 서남쪽 149Km 떨어진 곳에서 정상부가 해수면 5m 아래에 있는 4개의 봉우리로 구성된 거대한 수중암초를 확인하였다.

수심 5m아래 거대한 지대가 있다 함은 조금 높은 파도가 일면 그 형체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소설속 천남석의 아버지가 “파도로 정신을 잃어 의식이 혼미했는데 눈앞에 펼쳐진 이어도를 보고 살아 돌아왔다고…그 이어도를 다시 찾으러 가야겠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데, 탐사결과를 놓고 볼 때 영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어도는 존재하는가?

 

<검은 집>에 들어가기까지

지젝은 본인의 기념비적인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1989)의 예제풀이 성격의 책인 <Looking Awa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1991)를 <The Sublime Object…>가 세상에 나온 2년 뒤에 출판하였다. <Looking Away…>를 연습용이라고 한 이유는 대중문화, 소설, 오페라, 히치콕 등을 끌고 들어와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에서 언급한 이론적 내용들을 보다 알기 쉽게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지젝은 이 책에서 미국 작가 하이스미스의 단편소설 <검은 집>을 우리에게 소개하며 실재에 대하여,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텅 빈 실재를 메우는 환상의 역할과 기능에 관한 그의 앞으로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옛날 필자가 어렸을 때 검정 뿔테 안경쓰고 영화 해설을 하던 정영일이라는 영화평론가가 있었다. 그 분은 지금처럼 인터넷도 발달되지 않았고 씨네 21도 없었던 그 시절에 TV ‘주말의 명화’ 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던 아저씨였는데, 소년 상철이 보기에 정말 멋지고 근사하고 똑똑했었다. 그 아저씨 영화해설에 빠져 영화를 보겠다고 기다리다(보통 밤 10시 10분에 주말의 명화는 시작됨)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잠들었던 기억이 얼마였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전설적인 미남배우 알랭드롱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분명히 본 기억이 있다. 어른들의 위선, 탐욕… 뭐 그런 것들을 다룬 영화였던 것 같은데, 보고 나서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던 영화였다.

영화 <태앙은 가득히>의 원작 소설작가가 바로 <검은 집>을 쓴 하이스미스이다. 지젝의 <Looking Away…>에서 언급한 소설 <검은 집>을 필자는 3년 전 한국 방문 했을 때 남산도서관에서 빌려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며 오래 전에 읽었던 이청준의 <이어도>에 등장하는 천남석이 오버랩 되었다. 왜지?

 

언덕 위 그 집에는 마돈나가 있다/없다

<검은 집>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원작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필자 나름대로각색을 했는데 양해 바랍니다)
무대는 미국 시골 어느 선술집, 날이 저물면 마을에 사는 남자인간들이 하나 둘 그곳으로 모여 들어 언덕 위 ‘검은 집’에서 있었던 자신들의 추억을 안주 삼아 시간가는 줄 몰라 한다. 응삼이는 검은 집에 홀로 사는 마돈나와 와인을 곁들인 저녁을 함께 한 후, 테라스에 포개어 앉아 함께 바라보았던 저녁노을을 이야기하고, 갑돌이는 마돈나와 함께 새벽 산책을 나갔는데 갑자가 비가 쏟아져 몸을 급하게 숨긴 처마밑에서 우발적으로 감행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회상하고, 술에 취한 병태는 동공이 풀린 채 마돈나와 나누었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맞닥뜨리는 탁 트인 서재 건너편 첫 번째 방 하얀 커튼이 드리우져 있었던 침실에서의 정사를 고해성사 하듯 읊조린다. 

그때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던, 마을로 새로 이사온 한 젊은 엔지니어가 “내가 그 집에 가서 마돈나를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여러분, 그 집과 마돈나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함께 갈 사람 없습니까?” 그 젊은 엔지니어의 제안에 아무도 마을의 남자들은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그 청년 혼자 언덕 위 검은 집으로 올라가는데…
여기까지의 플롯은 카프카의 <성城>을 연상시킨다. 마을 사람의 경외의 대상인 성을 측량하러 온 젊은 측량 기사 K, 그러나, 소설 ‘성’에 등장하는 K는 성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반면, 하이스미스는 젊은 엔지니어를 언덕 위 검은 집으로 과감히 올려보낸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예상했겠지만, 측량기사, 엔지니어는 근대성, 과학, 합리성, 이성…뭐 그런 것들을 상징하는 것이겠고, ‘성’과 ‘검은 집’은 신화, 전설, 전통, 무의식…뭐 그런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겠지. 물론, 지젝은 이런 얕은 수에 관심하지 않는다. 좀 더 소설을 따라가보자.

언덕 위 검은 집에 도달한 젊은이는 무엇을 보았을까? 응삼이가 마돈나와 함께 저녁노을을 보았다던 테라스는 축대가 무너져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갑돌이가 새벽산책길 마돈나와의 경이적인 첫 키스의 사연이 묻어있던 처마 밑은 누군가가 쳐놓은 녹슨 철조망 때문에 접근조차 힘들었다. 2층 탁 트인 서재를 지나면 첫 번째로 맞닥뜨리는 병태와 마돈나의 하룻밤이 새겨져 있다던 그 방엔 천장에는 거미줄이 난무했고, 창문은 깨어져 있었으며 하얀 커튼은 갈기갈기 찢겨져 깨진 창문 틈 새로 들어오는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현재 언덕 위 검은 집은 폐가였던 것이다. 그럼 마돈나는 어디에?

 

“그럴 수 밖에 없었어…”

마돈나의 자취는 그 집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집을 나오려는 찰나에 1층 화장실 깨진 거울 틈새에 꽂혀 있는 사진 하나가 그 청년의 눈에 들어왔다. 빛 바랜 흑백사진이었고, 사진 밑에 적혀있는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사진 속 주인공은 백발마녀 같은 허리가 약간 꾸부정한 노파였고, 그의 왼손에 보드카 병이 쥐여져 있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Lovely Madonna! 라는 문구가 사진 밑을 장식하고 있었다. 설마 이 노파가 마돈나?  청년은 그 사진을 들고 마을로 내려갔고, 술 집에 모여있는 그 남자인간들에게 언덕 위 폐가를 돌아본 소감을 전달한 후에, 사진을 식탁 위로 던지며 “이 노파가 당신들이 말하는 마돈나인가?”라고 도발적으로 물었다. 순간, 떠들썩했던 그 술집엔 찬물을 끼어 얹은 듯한 정적이 흘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청년은 짦은 외마디 비명소리를 내며 피를 흘리고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청년 뒤로 피 묻은 칼을 손에 들고 응삼이가 서 있었고…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오늘은 살인죄로 징역을 살던 응삼이가 석방되는 날이다. 병태, 갑돌이를 비롯한 동네 몇몇 남자인간들이 감옥 앞에서 두부를 들고 응삼이를 반갑게 맞이하고, 함께 저녁을 먹고, 새롭게 장소를 옮겨 단장한 Bar에서 축하주를 마시면서 그 동안 못다한 밀린 이야기를 하며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응삼이가 갑자기 불쑥 일어나 이렇게 말한다: “난 그럴 수 밖에 없었어…어떻게 그 놈이 그것을 건드릴 수가 있어? 어쩔 수 없었다구!” 응삼이의 최후 변론을 듣고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동의를 하면서, “그럴 수 밖에 없었지.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어. 응삼이 네가 안 그랬어도 우리 중 누군가 아마 그렇게 했을거야. 암 그렇고 말구. 그걸 수 밖에 없었어…”  그리고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술잔에 술을 채우고 브라보를 외쳤다.[각주:1]

 

에필로그: 남겨진 질문들

앞서 살펴보았던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에 등장하는 천남석에게 있어 ‘이어도’는 어떤 의미였을까? <검은 집>에 등장하는 응삼이에 있어 검은 집과 마돈나는 무엇인가?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나? 그리고, 지젝은 무엇을 이들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가? 다음 웹진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들이다. <계속> 

ⓒ 웹진 <제3시대>

 

  1. [검은 집]에 대한 에필로그: 10년 넘게 페미니스트 아내와 사는 까닭에 나는 [검은 집]을 읽으며 무척이나 마음이 불편했다. 이 작품이 남자인간들의 관음증적인 포르노적 상상력에 기반하지 않나? 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소설에서 ‘검은 집’을 향해 환상을 투사하는 존재는 오로지 남자인간들뿐이고, 여자는 남자 인간이 꿈꾸는 환상에 대한 접근이 금지된 에어리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환상을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미묘하고 설명하기 힘든 차이가 존재하며, [검은 집]이라는 책 제목 안에 이미 남자들의 환상공식이 응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봤다. 우리 남자들에게 있어 환상이란 잉여쾌락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마을 사내들에게 검은 집과 마돈나는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과 현실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 흘러 넘치는 공간이고, 그 잉여의 꿈과 욕망을 투사하고 실현시켜주는 일종의 스크린이다. 영화관이 밝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영화의 해상도가 낮아져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이 흐릿해져 잘 보이지 않아 신경질이 난다. 그래서 영화관 안은 어두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환상을 또렷하게 보기 위해서는 말이다. [검은 집]이라는 책 제목 안에 이미 이렇듯 음습한 남자들의 환상 메커니즘이 깔려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자인간의 환상작동방식은? 남자인간들과 다르지 않을까? 그럼, 책 제목은 [하얀 집]이 되어야 하나? (이 우매한 남자인간의 질문에 대한 여성 필자의 현명한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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