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드리는 예배 공동체[각주:1]

- 한백교회 창립 30주년 메시지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로마서 12:1-2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1.


    한백교회가 출발한지 30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교회 온지 3년 밖에 안되었는데. 30년 전 한백교회 첫 예배를 드렸던 분들이 이곳에 계시죠? 그 당시 예배를 드리면서 30년이 지나면 어떤 교회 모습일까 하고 상상을 했을 텐데... 지금과 같은 한백의 모습을 상상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백교회 초기 훌륭하신 지도자 두 분 계셨습니다. 여기 앉아 계신 박성준 선생님과 돌아가신 안병무 선생님이십니다. 안병무와 박성준이라는 두 분의 이름이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함의, 그 기표가 지니고 있는 기의를 감안했을 때, 그 후로부터 전개되는 한백의 30년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난 몇 달간 30주년 예배와 행사 관계로 교회가 분주했습니다. 저는 30주년 예배 하늘 뜻을 준비하면서 한백교회의 역사를 뒤적이고, 기록들, 사진들을 한번 훑어 보았습니다. 한백이 걸어왔던 지난 30년은 87년 시민혁명부터 2017년 촛불혁명까지 한국사회 격동의 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격한 시절을 한백은 흔들거리면서, 물론 그 과정에서 때로는 좌절과 시련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습니다.

   문득 이 순간 한백 초기에 함께 나누었던 기도문을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거친 세월 헛된 역사 무너뜨리며 닫힌 가슴들 다 열리고 쓰러진 이들 다 일어나 대동춤으로 어우러질 그 날을 기다립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큰 강으로 흐를 그 날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작은 소리가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우리 겨레의 큰 함성으로 하나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작은 몸짓이 사람의 세상을 만드는 작지만 굳센 손들의 하나 된 염원이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의 길을 따르는 늘 새로운 시작이 되도록 이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나눕시다.”

   80,90년대의 시대적 화두가 물씬 느껴지는 기도문이죠. 한백이 처음 탄생하던 87년 그해는 혁명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그 해였고, 한편으로는 혁명의 헛헛함을 맛보기도 했던 그런 날이었습니다. 거대하고 우람한 진리들이 광장을 메우던 그 시기에 작지만 묻혀있는 진실들을 발견하고, 말할 수 없는 자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는 생각, 거대담론의 홍수속에서 간과되었던 작은사연과 이야기들을 이제부터는 따뜻하게 환대하자는 다짐, 위의 기도문에서도 드러나듯이 어떤 오만도 편견도 억압도 없는 세상에 대한 바람, 아마도 그것은 한백이 30년 전에 꿈꿨던, 그리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한백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2.

    이렇게 한백 30년을 회고하면서 한백의 지난날을 한마디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한백, 몸으로 드리는 예배 공동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듣기에 따라서는 위험하고 불순한 발언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인간의 몸은 신학적 성찰과 신앙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몸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기원은 플라톤으로 올라갑니다. 플라톤은 세상을 이데아와 코라(Chora)로 나누고 이데아는 하늘, 정신, 형상, 남성, 이성, 코스모스로, 코라는 땅, 육체, 질료, 여성, 감성, 카오스로 분류합니다. 우주의 법칙과 질서는 이데아가 코라에 이식될 때, 코라가 이데아속으로 들어갈 때, 혹은 이데아가 코라를 품을 때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몸이 죄악시 된 이유는 이원론에 기초한 그리스 철학이 신학의 패러다임이 된 이후의 일입니다. 그중에서도 여성의 육체성에 대한 경멸은 모든 것들 중 끝판 왕, 깔데기의 끝에 위치합니다. 특별히 중세이후 전개된 금욕주의 전통은 육체적 욕망의 억압을 정당화했고, 육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의식을 분열시켰습니다.

    육체성을 죄악시한 것은 중세 이후 신학만이 아닙니다. 근대 철학도 탈육체화 되었습니다. 근대 철학의 탈육체화는 코기토(cogito)를 추구하는 데카르트의 이성중심주의, 경험을 초월하는 의식의 선험성을 주장했던 칸트의 인식론, 세계사를 의식의 자기전개과정이라 주장했던 헤겔의 관념론에서 절정을 맞이합니다.

    이러한 패러다임 속에서 몸에 대한 왜곡된 시선은 여성신학, 생태신학, 퀴어(Queer)신학 등이 등장하기 전까지 신학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성경본문,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과 논쟁거리를 선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성서구절의 배후에는 죽은 어린 양과 송아지의 피로 물든 제단 밑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살아 있는 제물로서의 우리 몸이 드리는 예배를 의식적으로 대립시키려는 사도 바울의 의도가 깔려있습니다. 피 흘흘려 죽은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의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제의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성전이데올로기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성전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권력의 카르텔에 대해 바울이 지금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으로 오신 신을 조롱하는 것이고, 참된 예배는 마음과 뜻과 행위로서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한다는 것을 바울은 지금 강변하고 있습니다.


3.

   사실 돌이켜보면 사도바울만큼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직계제자가 아닙니다. 바울은 살아있는 예수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에 머물렀던 유대교 갱신운동으로서의 예수운동을 그리스도교라는 세계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세운 공로는 혁혁합니다. 어쩌면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이런 운명적인 역설 위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자기 식으로 재구성하고 변질시켰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운동이 지녔던 역동성, 즉흥성, 우발성을 교리화, 체계화, 교조화 시킨 인물로, 입체적인 예수를 화석화시키고 교조화 시킨 인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헤겔이나 니체, 톨스토이, 슈바이처, 막스베버, 하이데거, 현대 가장 핫한 철학자인 지젝, 아감벤, 바디우, 테리 이글턴, 테드 제닝스 같은 수많은 사상가들이 예수에서 바울로 전환되는 그 변곡점에 주목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 변곡점을 혁명을 위한 모티브로 차용하고, 어떤 이들은 그 변곡점을 수구적인 것을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현재 세계 최고의 스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슬라보예 지젝(Zizek)은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반했다”고 말하면서 바울을 맑스에 대한 레닌으로 비유합니다. 즉 레닌이 이념으로서의 마르크스를 자신의 혁명을 위한 이론으로 삼았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바울 역시 예수를 그렇게 차용했다는 것입니다. 지젝은 바울과 레닌의 상동성에 주목하면서 바울로부터 레닌이 지녔던 혁명의 기운을 상상하고 소환합니다.

    또한 해체주의적인 시각에서 보면 바울은 원전(元典), 즉 예수에 대한 해체의 아주 훌륭한 사례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데리다(Derrida)의‘차연(差延, defferacnce)’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는 者가 바울이 아닐까 합니다. 데리다의 차연이란 원전과 기원이 가지고 있는 존엄과 가치에 대한 딴지죠. 텍스트의 기원과 가치란 텅 비어있는 것이고 지연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 공백을 유지하는 힘, 의미의 결정을 유보시키고 지연시키는 힘이 진리이고 자유이고 그것이 진정한 텍스트의 면모입니다. 이러한 해체주의의 차연의 전략이 적절하게 작동되는 지점이 바로 바울이라는 것이죠. 이것이 요즘 바울읽기의 새로운 트랜드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복음은 그 자체가 예수에 대한 다른 해석 즉, 예수운동을 자기식으로 해석한 결과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성서는 바울, 즉 예수에 대한 다른 판본을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끔 허용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성서의 텍스트성이라 저는 믿습니다. 단일하고 수미일관된 방식으로 엮이는 것이 성서가 아니라, 무언가 불쑥 개입하고 일탈하고 변주되고 왜곡되는 가운데 성서는 텍스트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갑니다. 보편적 진리란 어쩌면 하나의 우연하고 주관(주체)적인 사건에 근거하는 것 아닐런지요?

    알랭 바디우(Badiou)는 <사도 바울>이라는 책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진리는 다마스쿠스에서 그가 겪었던 사건으로부터 기인합니다. 그 사건은 환상일수 있고, 계시일 수 있고, 우연일 수 있고, 꿈 일 수도 있고, 도착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로 인해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어떤 보편적(Universal) 교리와 선포와 강론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singularity) 어떤 환상, 믿음, 체험에 의해 고백되고 만들어질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입니다. 그것이 사건이고 그 사건을 감행하는 주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바디우는 주장합니다. 그런 주체에 의해 혁명은 다시 상상되고 감행됩니다.


4.

    바울이 말하는 몸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통로입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재산을 다 처분하고 산속으로 올라가 휴거가 올 때까지 세상과 등진 채 황홀경 속으로 빠져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금욕주의적 삶을 살라는 말도 아닙니다. 금욕적 삶은 인간의 욕망이 지닌 물신성을 경계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겠지만, 금욕주의적 삶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몸을 파괴하고, 특별히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타자에 대한 혐오의 매커니즘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몸도 파괴하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여성에 대한 혐오, 동성애에 대한 혐오의 발동이 근본주의적인 금욕주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세상을 등지고 금욕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라, 온 몸으로 우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과 종교적 영이 각각 분리된 따로국밥이 아닙니다. 몸으로 드리는 예배는 종교적인 삶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역시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는 특정한 공간에,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종교적 행위로써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는 세상 안에서, 세상과 함께, 세상과 더불어, 세상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러분, 진리를 얻으려고, 구원을 얻으려고, 해탈을 하고자 여러분의 일상을 떠나 어디론가 훌쩍 점프하여 고행하고 좌선하고 기도하면서 그것들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보내신 이곳, 바로 이 지저분하고 찌질하고 허접한 세상 밖 어디에도 우리가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칠 곳은 없습니다. 이 세상 밖 어디에도 우리가 바라는 구원과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에서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있는 말은 이것입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자는‘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풍조는 무엇일까요? 이 시대의 풍조는 저보다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리라 봅니다. 그것은 맘몬에 대한, 자본에 대한 숭배일 수도 있고, 생명에 대한 경시일 수도 있고, 소수자에 대한 집단적 폭력의 정당화일 수도 있고, 전쟁을 조장하는 군대귀신 일수도 있고, 세상 부정의와 불합리에 대한 냉소적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자는 이러한 이 시대의 풍조와 타협하지 않고, 그것을 가로지르면서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고 공동체입니다. 저는 한백교회가 그런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던 공동체이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5.

    한백이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을 때, 한국교회는 이미 고도성장의 궤도로 진입하여 무서운 속도로 배가를 하던 무렵이었습니다. 우리 앞에는 이미 무수한 교회의 샘플과 전통과 권위들이 존재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다시 교회를 세우고자 했을까요? 그토록 많은 교회 중에 교회 하나를 더 보태기 위해 한백이 태어나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분명 눈부시고 박수를 받을만한 성령의 역사였지만, 그 이면에는 말 못할 아쉬움 또한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물불을 안 가리는 교회성장주의 일 수 있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무차별적이고 공격적인 선교의 패턴 일 수 있으며, 가부장적인 권위의식에 입각한 교회운영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교회 만큼 온갖 혐오의 인큐베이터 같은 곳이 또 어디있습니까? 빨갱이 혐오, 여성혐오, 동성애 혐오, 이슬람 혐오...등 온갖 혐오의 숙주가 자라고 있는 곳이 한국교회라고 한다면, 한국교회에 대한 무례한 평가일까요?

    한백은 이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방식과 율동으로 우리의 교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교회란 무엇인가? 현존하는 교회질서와 세상의 법칙에 불화하는 힘으로서의 교회의 가치를 한백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지난 30년 동안 한백은 다양한 방식과 실험으로 스스로에게 계속 묻고 대답해 왔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제도와 시스템을 흠모했고 그 길을 따라 걸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법 밖의 정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제도와 시스템 밖에 묻혀 있는 진리를 향해 뛰쳐나갈때 교회의 교회다움이 선포되는 것 아닐까요? 민중신학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 아래서 한백은 겁 없이 우리의 교회를 실험해왔습니다. 평신도 위주의 교회 운영방식, 하늘 뜻을 나누는 방식, 목회자와 장로의 임기제, 평등과 소통을 지향하는 예배를 위한 공간의 재구성, 예배의 곳곳을 매우는 한백의 노래와 고백,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 시대에 맞게 복음을 재해석하는 신학적 작업 등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한백性은 그런 가시적인 것보다는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한백을 언제든지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자유함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한백의 신앙을 굳이 예수가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의 질문을 받고 성령을 설명하면서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 그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라고 한 선문답과도 같은 발언과 연결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백은 겉으로 보기에는 쿨하고 시크한 것 같지만, 한꺼풀 벗기면 솜털같이 섬세해서 타인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도드라지는 한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백은‘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지만, 불어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대지의 촉촉함와 대기의 훈훈함을 다 느끼는 바람입니다. 한백의 지난 30년은 남들처럼 급하게 어딘가를 향해 마구 불어갔던 바람이 아니라, 마지막 날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예수처럼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 이 땅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우리를 감싸는 허세와 권위와 위엄과 폭력에 눈치보지 않고 마음과 정성을 모아갔던 바람이었고, 그런 공동체였기에 지금까지 한백이라는 고유명사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명심해 주십시오. 지난 30년 동안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한백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그러합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서 앞으로의 30년을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30년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의 30년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10월 22일 한백교회 30주년 기념예배 ‘하늘 뜻 나누기’ 원고를 수정하였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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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교회 탐방기[각주:1]



박제우*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이신 박성준 교수(성공회대)와 고 박영숙 전 민주당 최고위원의 남편이신 고 안병무 교수(한신대) 등이 주축이 되어 민중신학을 목회철학의 기초로 삼고 1987년 10월에 설립한 나눔과 섬김의 예배공동체 한백교회(한라산의 한과 백두산의 백)에서 예배를 드렸다.


   지난 5월 오늘교회에 탐방을 갔을 때 멤버 중의 한 분인 최규창 대표가 강력하게 추천했던 교회인데, 마침 지난 주일에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이신 김진호 목사님께서 새길교회에서 설교하신 덕에 미리 탐방하고 싶다고 말씀 드릴 수 있었고, 오늘 11시에 시작하는 주일예배를 함께 하게 되었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2번 출구 사이에 있는 골목길로 한 50 m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엔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실이 있는 빌딩이 있고, 길 왼쪽 편엔 1층에 안병무홀이라고 쓰여 있는 건물이 마주보고 있다는 걸 지난 8월 교회개혁실천운동 회원과의 티타임 때 알았는데, 아무래도 주차가 용이하진 않을 것 같아서 경의선 전철로 공덕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고 왔다.


   전철 시간 계산을 잘 못해서 일찍 도착하질 못하고 정확히 11시에 예배처소인 안병무홀에 도착하니 예배 때 함께 부를 노래를 미리 불러 보고 있는 중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친절하게도 남자 성도 한 분이 바로 옆 자리로 오셔서 예배 순서 중에 어떻게 노래집과 주보의 도움을 받으면 되는 지 간단하고 빠르게 안내해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상철 목사님이셨다는...)


    한백교회의 trade mark에 해당하는 한라산의 검은 돌(좌측)과 백두산의 검은돌(오른쪽) 그리고 한반도 어느 지점에서 주워 온 아주 흔한 흰색 조약돌 두개가 그 사이에 담겨 있는 접시가 예배 인도자 뒷쪽 벽에 놓은 탁자에 올려져 있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언젠가 부터는 노란 리본도 얹혀져 있는 것 같다.


    오늘의 예배 인도를 맡은 자매님과 하늘뜻나누기(설교)를 해 주실 정나진 목사님, 그리고, 한백교회의 담임을 맡고 계신 이상철 목사님께서 자리 배치의 앞부분에 앉으셨다. 찬양인도를 해 주신 장로님과, 삶의 고백을 해 주신 분들은 목사님 맞은 편에 앉으셨다. 한백교회의 예배는 주보의 순서대로 진행이 되었는데, 평균 출석 예배자가 50명 안팎인 정도의 규모이다 보니 새길교회 처럼 매주 주보, 광고 사항, 예배 실황 등이 정기적으로 잘 update되지는 않았다. 특히 요즈음엔 창립 30주년 기념 활동들을 준비하느라 많이 분주한 것 같다. 오늘의 주보는 아래의 사진과 같고, 홈페이지에 올려진 가장 최근 주보는 9월3일자 주보였다.




    예배 중의 노래는 대부분 "한백의 노래"라는 자체 제작한 노래집에 있는 것을 불렀는데, 한백의 노래는 그동안 7차례 개정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교회 홈페이지 한백과 찬송에 게재되어 있다. 이제 청년들이 많아지고, 새롭게 증보하고 싶은 노래도 많이 있어서 조만간 몇 곡을 추가하는 증보 작업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예배는 일전에 섬돌향린교회 예배 시에 보았던 울림주발(Singing Bowl)이 맑은 울림 소리를 내면서 시작되었다. 첫 순서인 묵상 후에 기도라는 노래를 기리는 노래로 함께 불렀다. 나는 (부끄럽지만) 처음 접한 노래라 함께 부르질 못하고 멜로디를 들어가며 가사를 읽었는데,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인생에 대한 사랑과 신에게 간구함과 이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이 모두 함축되어 있는 노래였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검색을 해 보니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1집에 실린 노래이다. 가사는 김소월 시인의 싯구이고, 곡은 노찾사에서 지은 것 같다. 이런 좋은 글과 멜로디의 노래가 찬송가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민중가요를 부르던 노래패가 불렀다고 찬양이 아니고, 예배 때 부르지 못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깔뱅이 시편찬송만 불렀듯이 지금도 시편찬송만 예배 중에 부르는 교회가 있듯이, 우리의 정서에 맞게 만들어진 이런 노래를 예배 찬송으로 부르는 교회도 당연히 있을 수 있고, 각각의 교회는 각자의 신앙고백과 이웃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노래하고 예배하면 되는 것이리라.




    일반 교회에서는 교독문을 주로 읽는 순서에 한백교회에서는 마침 오늘이 추석 연휴에 있는 주일인 까닭에 (천상병 시인이 아마 1070년 가을에 지은 시인 것 같은데...) "소릉조 - 70년 추일에"라는 시를 교독하였다. 누가 이런 참 적절한 시를 찾아 내어서 선정하는 지 모르겠는데 역시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한백교회 다운 글 선택이라는 감탄이 나온다.


<소릉조(小陵調)> - 70년 추일에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 시집 <새>(1971) -  


   이어서 삶의 고백 시간에는 최근예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시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시고, 많은 생각을 하시고 계신 형제님께서 정말 진실한 문체와 내용으로 자신의 삶을 함께 나누어 주셨다.


   일반 교회에서 설교라고 하는 "하늘뜻나누기"는 이번 주 중에 3년 간의 박사 논문 작성과 학위 취득을 목표로 다시 독일로 돌아가는 정나진 목사님이 고별 설교로 본인이 박사 학위 논문으로 준비하는 Autoethnogaphy(자아문화기술지)와 관련된 내용을 ['사건'으로서의 환대와 민중메시아]라는 제목으로 하였다. 최근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해서 미리 모든 예배자에게 주보와 함께 배포된 설교문을 중심으로 최근 6개월간 탈북자 정착도우미로 섬겼던 사건과 창세기 31장 1~2절의 말씀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이 야곱에게 들렸다. "야곱은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재산으로 저처럼 큰 부자가 되었다."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살펴보니, 자기를 대하는 라반의 태도가 이전과 같지 않았다.)을 기반으로 한 민중에 대한 기득권자들의 환대 태도, 그 과정에서 직접 체험하는 당사자들과 민중의 상호 변화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셨다. 하늘뜻나누기 시간 후반부엔 정목사님의 발표에 대해 궁금한 점과 추가적인 토론을 하고 싶은 것들을 예배 참여자들이 함께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건 정말 여느 교회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새로운 시도이다. 이런 예배 순서를 언제부터 해 왔는 지는 모르겠지만 30년 된 교회에서 이런 순서를 갖고 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설교 후에는 설교 중에 언급되었던 김민기 작곡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함께 불렀다. 유일하게 나도 익히 알고 불러 보았던 노래이다.


   이어서 물질을 드림(봉헌) 시간이 있었고, 예배 인도자인 자매가 드리는 기도를 했는데, 이 자매는 한백교회에서 오늘 처음 예배 섬김이로 봉사를 하게 된 것 같다. 자매님의 기도를 통해서 자매님이 새롭게 안착한 한백교회의 교회 공동체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의 일면을 알 수 있었다. 의외로 많은 청년들이 함께 예배를 하는 것 같았는데, 자매님도 이들과 함께 한백교회를 통해서 믿음과 세상 속에서의 삶 모두 하나님의 은혜 속에 나눔과 섬김의 삶을 더 활짝 펴며 살기를 기도한다.

   예배는 12시 45분이 넘어서야 한백신앙고백으로 공동체의 다짐을 하고, 마침 묵상을 한 후 마치게 되었다. 마침 묵상 후에 친교 마당 시간에 이상철 목사님께서 몇 가지 안내 말씀을 해 주시면서 나에게도 소개할 시간을 주셔서 짧게 내 소개와 교회 탐방을 하게 된 과정을 말씀 드렸고, 가능하다면 이후의 모임에도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이후엔 기존 보수교회에서 40년 넘게 섬기시다가 40대 후반(그러니까 지금의 내 나이 대에...) 한백교회로 오신 후 지금은 한백교회의 장로님으로 섬기시는 오늘 예배 전에 찬양 인도를 해 주신 장로님의 도움을 받아 점심 식사(애찬)를 함께 하였다. 4개 조로 나눠진 성도들의 모임이 매주 돌아가면서 (즉, 한 달에 한 번 씩) 애찬 준비와 배식과 설거지를 섬긴다고 한다. 애찬 전에 아래 동영상과 같이 아주 재밌는 애찬 노래를 배설된 음식을 보면서 함께 불렀다. 그리고, 이번 주에 생일을 맞으신 여성도님을 축하하는 시간도 있었다.



   점심 식사 중엔 김진호 목사님께서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주셔서 한백교회의 창립 때부터 자신이 담임목사로 섬기신 때부터 양미강 목사님과 지금의 이상철 목사님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백교회가 이사한 얘기, 계속 향린교회를 섬기신 박영숙 최고위원께서 정말 요리를 잘 하셨고 손이 크셔서 한백교회 식구들 전체에게 맛난 요리를 자주 해 주셨다는 얘기, 박성준 교수님과 안병무 교수님 모두 목사는 아니셨다는 얘기, 최근에 이상철 목사님께서 젊은이들과 소통을 잘 하시고 잘 챙겨 주셔서 한동대 출신 청년들과, 한신대 신학생들, 그리고 이런 저런 교육과 강연을 통해 한백교회를 접한 많은 청년들이 합류하면서 교회가 많이 젊어 지고 있다는 얘기 등을 해 주셨다.


   애찬을 얼추 마친 후엔 (좀 재미있게 표현해서 1부 예배, 2부 점심 식사에 이어) 3부 순서로 수다를 떨기 위해(주보 광고에는 장년부의 대화모임이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안병무 홀에서 약 200 m 정도 길 위로 올라가면 있는 "Caffe Cammello"로 시간 여유가 있는 교인들과 함께 갔다. 이 카페의 주인이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한백교회 분들을 좋게 보아 주셔서 매주 이렇게 장소를 편하게 쓸 수 있게 배려해 주신다고 한다.


   이 카페의 안쪽 방에서는 10월28일(토) 저녁 6시에 공연할 창립 30주년 기념 연극 준비팀이 대본 강독을 하고 있고, 내가 앉은 테이블에서는 20대 초반부터 50대 중반까지의 청장년들 10여 명이 함께 앉아, 동성애, 외국인 노동자, 정나진 목사님의 설교 내용, 앞으로 펼쳐질 독일 생활, 한 자매님의 액티브한 유럽 1달 여행기, 한동대의 보수성과 개혁성 등 등 이야기 주제가 따로 정해진 것 없이 흘러가는 대로 참 다양한 얘기를 나누었다. 이상철 목사님으로부터는 주날개늘교회의 남오성 목사님을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에 서로 알고 지냈다는 반가운 얘기도 들었다. 시간은 어느새 5시가 넘어가고...


  헤어지기 전에 이상철 목사님과 찰칵!


오늘 애찬 시간부터 나를 살뜰하게 챙겨 주신 김진호 목사님과도 찰칵!



   한백교회는 10월에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몇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다른 모든 교회 활동과도 마찬가지로 교회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담임목사나 누구의 강력한 인도나 요청이 없는데도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여러가지 활동들을 준비하고 있고, 그 중에 가장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것은 역시 10월마지막 토요일(10/28) 저녁 6시에 안병무홀에서 공연되는 연극인 것 같다. 50명 안팎의 출석 교인들의 절반 정도가 참여한다는데, 정말 기대가 된다.


   오늘 이목사님께서 10월22일(주일)에 있을 창립30주년 기념 감사예배나 28일(토요일)에 있을 연극 공연에 또 와 보라고 초청해 주셨는데, 정말 여건이 되는대로 한백교회를 궁금해하는 지체들과 함께 다시 와 보고 싶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이날 함께 하고 싶은 분은 02-364-6355로 문의전화 해 보시면 된다. (연결이 안되면 저에게 연락 주세요. 010-7180-9492) 오후 5시가 넘에 카페에서 헤어진 나는 원래 계획대로 작년에 못다녀본 안산의 남쪽 지역(경기대학교 쪽에서 봉수대로 올라가는 길)을 산책할 목적으로 램블러 앱을 작동시킨 후 경기대 쪽에서 올라갔다가 추계예술대 쪽으로 내려오는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


    마지막으로... 인터넷에 한백교회를 검색해 보면, 기존 보수교단이나 번영신학에 물든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한백교회의 정체성과 예배에 대해 깎아 내리는 글을 쓴 걸 많이 발견하게 된다. 참 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생각이나 신앙관과는 다르다 정로만 써도 충분할 것 같은데, 많은 악담과 저주의 말을 다분히 왜곡된 정보와 판단을 기반으로 해서 써 놓은 걸 보면 내가 그들과 같은 크리스천이라는 것이 참 부끄럽다. 부디, 한백교회의 정체성과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사랑을 위해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사는 한백교회 공동체를 존중하고, 폭 넓은 신앙의 모습에 대해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갖기를 바랍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요수엘(박제우)의 블로그에 실린 글 '한백교회 탐방기'를 편집하여 옮겼습니다. http://yosuel.tistory.com/7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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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7.10.12 09:3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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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에서 한백교회를 검색하면 온갖 음해성 기사들로 넘쳐난다.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 퀘이커교도인 박성준이 세운 교회, 민중신학의 괴수 안병무가 실세인 교회, 온갖 운동판의 배후들이 득실거리는 교회, 한라산의 돌과 백두산의 돌을 섬기는 교회, 심지어 지난번 박근혜 탄핵 주문을 낭독한 이정미 재판관이 다니는 교회, 작년 박근혜 탄핵 정국당시 검찰 내부 게시판에 박근혜 구속을 주장했던 이00 검사가 다니는 교회, 비전향 장기수 빨갱이들을 지원하는 교회 등...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웃기기도하고 슬프기도 한 한백을 둘러싼 유령과도 같은 루머를 들을 때면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한백교회 담임목사로 3년차를 보내고 있는데 나는 아직까지 위에서 언급한 한백을 둘러싼 유령들의 실체를 접한 적이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백을 향한 정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음해성 보도들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교인들은 나보다 익숙하고 대범하고 내공이 세서 그런지 “목사님, 차차 적응되실 거예요”라고 하면서 내 어깨를 다독인다. 한백교회에는 거의 매주 교인이 아닌 낯선 분들이 예배에 참여해 섞여 있다. 일부러, 우연히, 지나가다, 계획하여, 소문(?)을 들어, 교수님들이 한번 탐방하라고 하여, 오늘 갈 교회가 없어서...이유도 각양각색이다. 기윤실에 계시는 박제우 선생님도 그 중 한분이셨다. 종종 한백교회가 어떤교회인지 알려달라는 주문을 받는데 그런 분들에게 이 기사를 토스해주면 되겠다 싶다. 귀한 기고 감사합니다.
  2. 최재훈
    2017.10.25 18:5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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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 말씀처럼 저도 소문(?)을 듣고 8월의 어느 비오는날 찾아간 낯선(?) 사람입니다..^^ 감사하게 잘 예배드렸습니다. 다시 한국들어갈때 또 찾아가겠습니다


新 公無渡河歌(신 공무도하가)[각주:1]

부제 : 저 물을 건너는 방법에 관하여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한신대 외래교수)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진을 떠날 때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 앞에서 나아갔다. 

그 궤를 멘 사람들이 요단 강까지 왔을 때에는, 마침 추수기간이어서 제방까지 물이 가득 차 올랐다. 

그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물가에 닿았을때에... 

- 여호수아 3:14-15

 



I. 

    오늘 설교제목이 신공무도하가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고전문학 시간에 배웠던 고대가요입니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공무도하)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公竟渡河 공경도하) 

    물에 빠져 죽었으니,(墮河而死 타하이사) 

    장차 임을 어이할꼬.(將奈公何 당내공하)  


    이 곡은 어느 이름 모를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아내가 지었다고 합니다. 원가(原歌)는 전하지 않지만, 그 한역(漢譯)인 「공후인(箜篌引)」이 진(晋)나라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설화와 함께 채록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최표의 『고금주』에 기록된 이 노래의 배경설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공후인은 조선(朝鮮)의 진졸(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것입니다. 자고(子高)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가는데, 머리가 흰 미친 사람(백수광부)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호리병을 들고 어지러이 물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뒤쫓아 외치며 막았으나, 다다르기도 전에 그 사람은 결국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에 그의 아내는 공후(箜篌)를 타며 ‘공무도하(公無渡河)’의 노래를 지으니, 그 소리는 심히 구슬펐다고 합니다. 그의 아내는 노래가 끝나자 스스로 몸을 물에 던져 죽었습니다. 자고가 돌아와 아내 여옥(麗玉)에게 그 광경을 이야기하고 노래를 들려주니, 여옥이 슬퍼하며, 곧 공후로 그 소리를 본받아 타니, 듣는 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II. 

    공무도하가는 죽음이 주제이고 물이 소재이죠. 거의 모든 민족의 신화나 설화속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아이콘이기도 하고, 반대로 죽음, 난관, 어려움, 고난을 상징하는 아이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원칙을 더 말하자면 통과의례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물로 상징되는 고난과 역경과 죽음의 그림자를 통과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는 집단적 주술이 물과 관련된 이야기들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물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를 보면 물을 항아리에 붓는 장면이 나오고,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물을 깃는 대목에서는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이 생수와 관련된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의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여호수아 본문 역시 물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물과 관련된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출애굽사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출애굽 사건 과정에서 등장하는 물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될 수도 있겠고, 통과의례를 상징하는 사건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출애굽의 시작은 물을 건너는 것이고, 출애굽의 완성 역시 물을 건너는 것입니다. 전자의 물은 홍해이고, 후자의 물은 요단강입니다. 종교학적으로 설명하면 출애굽과정에서 등장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두 차례의 도하(渡河)가 고등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널때와 요단강을 건널때의 차이가 뭡니까? 홍해를 건널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가 갈라진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건넙니다. 반면, 오늘 여호수아 본문에 등장하는 물을 건너는 장면에서는 요단강이 갈라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앞에서 강물이 철철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흐르는 강물을 향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발을 담금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표상에 의지하지 않고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현상과 감각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와 우주의 소리를 일치시킬 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깨달음, 구원의 시간, 해탈의 시간이라는 말로 바꿔도 무방할 것입니다.   


III.

    공동의회를 하루 앞둔 어제‘하늘 뜻 나누기’를 준비하면서 오늘 본문이 생각났습니다. 공동의회를 하나 치루는 것이 무슨 홍해나 요단강을 건너는 거창한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앞에 두고 어떤 심정이었을까? 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동안 의지하고 믿었던 모세도 없습니다. 이제 그들은 성인이 되었기에 세상을 전처럼 마냥 낙관적으로만 바라보지도 못합니다. 세상이 호락호락 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았고, 하나님이 마냥 우리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으며, 우리들 사이 관계 역시 생각만큼 견고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지난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알아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지금 이 순간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시퍼런 요단강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전처럼 하늘을 우러러 저 흐르는 강물을 멈추게 해달라고, 예전처럼 하늘을 우러러 저 강물 사이로 길이 생기게 해달라고 더 이상 그들의 신에게 땡깡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냥 눈을 질끈 감고 흐르는 강물에 자신들의 몸을 던집니다. 저에게는 이 장면이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여호수아 3장 16절까지 하지 않고 3장 15절까지만 했습니다. 물론 16절 이하를 읽어보면 강물이 멈추고 땅이 말라 모두 무사히 그 강을 잘 건너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16절 이하에 나오는 성취와 성공에 대한 스토리보다는 오늘 우리가 읽은 14-15절 내용이 더 빛나는 내용이 아닐까 합니다.


IV.  

    잠시 후에 우리는 공동의회를 합니다. 2015년 한해를 결산하고, 2016년 한백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바를 결정하고 실행하겠음을 다짐하는 공동의회입니다. 작년 한해 우리를 지켜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올 한해도 동일한 기쁨과 감사가 깃들기를 함께 바라는 공동의회가 될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공동의회에서는 그동안 5년 동안 헌신했던 김0숙 장로님, 김0승 장로님을 대신할 두 분의 장로님을 선임하는 시간이 들어있습니다. 늘 이렇게 누군가를 다시 세워야 하는 시간이 되면 우리는 고민하고 걱정을 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이 두 분을 대신할 분이 누가 있을까?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주께서는 우리의 염려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백교회 교우 여러분,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여호수아 본문에 나오는 요단강가에서 법궤를 들고 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모두 한백이라는 법궤를 함께 지고 발을 한 발짝만 앞으로 내밉시다. 그리하면 우리 앞을 흐르는 강물도 멎을 것이고, 그리하면 젖어있던 땅도 말라 있을 것입니다. 그러할 것입니다. 정말로 그러할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지난 2016년 1월 31일 주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설교)’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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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취지_

사람은 ‘앎’과 ‘함’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살아간다. 역사-문화적으로 그리스도인이란 ‘느낌’이 없는 집단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느낌은 감정적인 것(동감이나 공감 같은)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이다. 감각적 느낌이 없는, 감각적 느낌으로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정서가 메말라버린 집단이 그리스도인 아닌가?
결코, 성서적[히브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성서적인 것으로 이데올로기적[교리적]으로 변조하여 그리스도인의 몸을 봉인하고, 그 봉인을 바탕으로 사목-권력(상징-권력)을 강고하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감각’이다. 감각은 ‘살’(sa.rx)의 운동이고 이 감각운동이 없는 신체는 죽은 것이다. 이 난장-마당에서 묻는 물음은 간단하다. 인간의 원-생명(archi-zoe)인 하느님의 루아하에는 감각적인 것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감각적 쾌락과 정신적 기쁨은, 살의 쾌감과 종교적 법열은 구분될 수 있는가? 감각적인 미적 정서의 확장과 심화는 무한한 하느님의 원-생명의 또다른 선물이 아닌가?
첫 번째 난장-마당에서는 <<히브리성서>>를 음란하게 훔쳐 읽는 시선들을 늘어놓을 것이다.
두 번째 난장-마당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열정(passion)과 예수의 수난(passion)을 화-쟁(和-諍)시킬 것이다.
이 과정은 결국 예수가 말한 ‘기쁨’(“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1)을 정신-신체적으로(psycho-somatic)으로 강렬하게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강사_ 이정희(목사/백석대학교 기독교문화예술학부 강사)

일시_ 2013년 7월 7일, 14일(매주 일요일 2회), 오후 2~4시

장소_ 안병무홀(한백교회당)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번과 2번 출구. 두 출구 사이 골목 50미터, 좌측 건물의 1층)

공동주관_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한백교회
문의_ 02-363-9190, 010-4944-2019(정용택 연구원), 010-3043-5058(유승태 연구원), 3era@daum.net

수강료_ 1회당 5,000원(한백교회 교인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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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자다 못가의 사람들 [각주:1]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
― 「요한복음」 5:1-9 중

 

오늘의 성서 본문에서는 38년간 베드자다 연못가에서 첫 번째로 물에 뛰어들 날만을 기다리던 한 병자가 예수를 만나 몸이 치유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라고 말하자, 그는 몸이 나았고 예수의 말대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말은 그가 그토록 바라던 ‘몸의 회복’을 한순간에 가능하게 했습니다, 연못의 신비한 힘을 빌지 않고도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 치유 사건은 뭔가 수수께끼 같은 면이 있습니다. 환자의 치유를 선언하는 타이밍에 예수는 왜 “네 병이 나을 것이다” 또는 “네 병을 고쳐주마”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마치 원래 있지 말아야 할 곳에 그 병자가 자리를 깔고 있다는 듯이 “자리를 걷어 떠나라”고 한 것일까요? 그리고 왜 예수는 그를 성전에서 다시 만나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14절)라고 권면한 것일까요? 문맥 상 이 두 말은 등가의 의미를 갖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8절의 예수의 치유 선언과 14절의 권면은 “네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서 떠나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면 우리는 그 병자가 38년이나 지키고 있던 그 자리가 어디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그 병자가 있었던 자리는 어디인지 함께 생각해보고,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는 예수의 치유선언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 병자가 있던 곳은 ‘양의 문’ 곁, 베드자다 못가입니다(2절).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있었습니다(3절). 예수는 많은 환자들이 누워있는 베드자다 연못가의 주랑을 거닐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그는 거동이 쉽지 않은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를 발견합니다. 그 병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연못만 응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8년이나 앓아온 그 병자는 날이 갈수록 굳어져가는 몸 때문에 이렇게 인생이 끝장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고, 공동체에서 온전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몸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 몸은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온 희망을 연못의 신비한 힘에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병세가 깊어갈수록 더 강한 처방을 원했고, 그렇게 오게 된 곳이 베드자다 연못이었을 듯합니다. 대체 베드자다 연못은 어떤 곳이기에 거동이 힘든 중증 환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일까요?

 

'양의 문'의 위치


애초에 베드자다 연못은 포로기 이후 강화된 사제 집단의 권위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공간이 형성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문 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양의 문’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느헤미야에 의해 중건된 성벽의 문 중 하나입니다. 「느헤미야」 3:1에서는 이 문이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동료 제사장들이 나서서 만든 것이며 첫 번째 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북쪽 지방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성전으로 이어지는 길의 최종 관문과 같았던 ‘양의 문’은 그 이름이 주는 인상과 같이 제의용 가축이 성전으로 대거 유입되는 통로였습니다. 그리고 베드자다 연못은 이러한 도시의 흐름에 맞춰 성전에 제사용 물을 대거나 제의용 동물을 씻기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활동하던 당대에는 성전 안에서 제의용 동물을 거래하는 산업이 이미 활성화돼 있었습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언급된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이 이 산업과 관련돼 있습니다.(마태 11:15-19; 마가 11:15-19; 누가 19:45-48; 요한 2:13-22) 아마도 이 산업은 성전 중심 체제가 형성된 초기부터 성장했을 것입니다. 레위기 기록(레 22:17-25)으로 볼 때 제의용 동물은 엄격한 기준에 따라 ‘흠이 없는 것’을 선별해야 했는데, 원근 각지에서 성전으로 모이는 이들이 제의용 동물을 온전하게 수송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성전 근처 및 성전 안에서 ‘흠 없는’ 소나 양, 염소 등을 구입하려는 수요가 넘쳐났고, 베드자다 연못은 (자신이 정성스레 가져온 제의용 동물을 씻기는 곳이라는)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누군가가 구입했거나 곧 구입하게 될 제의용 동물을 제사장들의 형식적 검사를 받기 전 잠시 들러 씻기는 곳이 되었습니다.
중증 환자들의 집합소가 된 베드자다 연못은 이처럼 성전 중심의 도시공간 배치와 상업화된 제의 방식이 결합된 체제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간이 중증 환자들의 희망의 보루가 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약간의 음모론적 상상력을 보태보겠습니다. 이렇게 상업적으로 구성된 제의 체제에서라면 종교 상품인 동물의 시장가격을 통제하기 위한 핑계이자 사람들에게 종교적 신뢰를 주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박물관에 있는 베드자다 연못 모형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높이가 다른 쌍둥이 건물로 구성된 베드자다 연못은 상층의 물이 수로를 통해 하층 건물로 유입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자다 연못에 관련된 자료를 찾다 보니, 오른쪽에 보이는 상층 건물은 동물을 씻기던 곳이었고, 왼쪽 건물은 환자들의 치유센터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동물 씻긴 물이 하층으로 흘러들어가 환자들을 씻기는 치유센터의 물로 사용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음모론적 상상을 돕는 촉매제가 되기에는 충분할 듯합니다.
제사장 그룹은 상하층의 물을 모두 동물을 씻기는 데 써도 부족하겠지만, 하층의 회랑을 병자들을 위한 치유센터로 내어주자는 결단을 ‘힘겨운 척 쉽게’ 내립니다. 제의용 동물들을 씻긴 물이 신비한 치유의 힘을 갖는다는 소문이 득이 되면 됐지 실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이 제사장들의 음모를 제의용 동물을 구입할 능력을 가진 이들이 정말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속아 넘어가는 척하며 짐승(그것도 그다지 거룩해 보이지 않는) 씻긴 물에 ‘나만 안 씻으면 되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 상품 구매력을 소유한 이들 사이의 암묵적 합의, 그것이 베드자다 연못에 대한 대중들—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이들, 구매력을 통해 자신의 죄를 사함 받을 능력이 없는 이들—의 소망을 떠받치는 토대였던 것은 아닐까요.
다시 예수와 병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가 병자에게 “낫고 싶으냐”라고 묻자, 병자는 원망 섞인 어조로 대답합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7절). 함께 누워있는 병자들은 자신이 연못에 들어가도록 도와주기는커녕 자기를 밀쳐내는 경쟁자들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문득 궁금해집니다, 정말 그곳에는 환자들을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언뜻 생각해보면, 어떤 환자들은 가족이나 친척이 함께 와서 못에 넣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이라면 종들을 거느리고 못가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겠다, 하는 상상도 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너무 순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종을 부릴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이 연못이 아니라 의원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자다 못에서 씻으라고 한다면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사환에게 화를 냈던 것처럼 불쾌해하고 화를 냈겠지요.(열왕기하 5:10-12) 그리고 죄인으로 규정돼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족이 얼마나 냉정한지, 그와 함께 있다가 자신들까지도 율법을 어긴 사람으로 내쳐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9:20-22) 그러니 가족도 그들과 함께 있었던 이, 즉 환자를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몸이 불편한 환자들에게 “내가 당신을 연못에 넣어주겠다”고 말했을 법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베드자다는 체제의 일부분이지만 동시에 체제의 작동 논리가 발현되는 장소, 곧 체제 자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성전 중심 체제의 곳곳에서 ‘속죄’라는 종교적 가치와 제의용 동물이 상호 교환되는 상업적 종교의례가 일관성 있게 발현되고 있었는데, 베드자다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드자다의 하층 연못에서도 구원과 속죄를 바라는 열망이 그들에게 남아있는 모든 자원을 값으로 지불하게 만들고 종교 상품으로 교환되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겠지요. 그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 천사가 물을 휘저을 때 제일 먼저 당신을 연못에 넣어주겠다며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듯합니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를 보니 중증 환자들을 ‘물에 넣어주는 사람’, 밑바닥 사람들의 소망을 이뤄주겠다며 접근하는 사람들의 면모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영화에서 이강도(이정진)는 몰락해가는 청계천 금속 가공 상가를 돌아다니며 일수를 회수하는 사람입니다. 일수를 쓴 이들은 쉽게 상환기한을 넘겨버리고 이자는 원금의 열배로 금세 뛰어오릅니다. 강도는 일수를 줄 때 채무자가 상해보험에 가입하도록 요구하고 일수를 갚지 못하면 가차 없이 그의 신체를 훼손해 보험금을 가로챕니다. 일수를 빌려야 하는 이들, 낮은 신용등급을 가진 죄밖에 없는 그들은 그 죄값으로 신체가 영구히 훼손되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은 바로 그들과 별반 다른 삶의 조건을 갖지 않았을 사람인 것이지요. 형벌의 집행자인 이강도는 ‘빌린 돈’의 달콤함을 선전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잔인한 이면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요즘의 불경기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일수를 갚는 사람은 하나도 담아내지 않고, 일수를 못 갚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 이들이 맞게 되는 지옥만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그것은 불경기 때문에 욕망을 소비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지불 능력은 축소됐지만, 이들로부터 이윤을 갈취하는 이들의 욕망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욕망의 격차’가 자본주의 사회의 수많은 패배자와 무능력자를 생산해내게 됩니다. 이렇게 생산된 패배자와 무능력자들은 ‘일확천금’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면서, 현실에서는 고리대금의 유혹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요.

청계천 금속 상가와 대비되는 주변 건물들

한편, 영화는 종로나 명동의 고층빌딩과 청계천 금속 상가를 한 화면에 보여줌으로써 두 지역 간 건물의 높낮이가 얼마나 다른지, 외양에서 얼마나 큰 격차가 나는지 드러내 보입니다. 한때 청계천 금속 상가는 ‘잘 나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재개발만을 기다리는 곳이 된 느낌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베드자다 연못이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된 이중구조라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연못은 성전 중심으로 배치되고 작동하는 종교-사회체제의 일부분입니다. 연못은 이 체제의 작동 논리 속에서만 기능할 수 있고 존재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베드자다 연못에서 소비되고 있는 희망과 꿈의 담론은 체제의 작동 논리와 전혀 무관할 수 없습니다. 하층 베드자다의 ‘신비한 힘’이 성전체제의 배치 속에서 등장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구매능력을 가진 자만이 ‘속죄와 구원’을 향유할 수 있는 종교체제 안에서, 불구의 몸뚱어리만 남은 사람들은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죄인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결국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 가진 게 몸밖에 없어서 ‘속죄와 구원’을 구매할 수 없고,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죄인일 수밖에 없는 한 사내에게 예수는 “네 자리를 걷어서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베드자다에 일등으로 뛰어들 꿈을 꾸는 한 그는 악한 체제의 작동을 돕는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그 꿈, 그 악몽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그는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그의 불구인 몸을 근거로 그를 죄인이라고 규정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기준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라”고 하는 예수의 명령을 듣는 저에게, 예수의 명령이 “꿈 깨”라는 말로 들립니다. 악몽 그만 꾸라고, 악몽 속에서 취해있지 말라고 말입니다.
어찌 들으면, 예수의 이 말은 남의 심정도 모르고 질러대는 ‘훈계’나 ‘계몽적 언사’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말을 따라 일어나 걸어간 그 병자가 그를 죄인으로 간주하던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성서는 그다지 밝은 전망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이 위로를 주는 말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삶에 대한 전승들이 그를 먼발치에서 태평하게 훈계나 던져대는 사람이 아니라 붕괴돼 가는 삶의 자리에 서 있는 이들과 함께 서서 이들을 지지해줬던 분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베드자다A를 떠난 병자가 결국 맞닥뜨리는 현실은 ‘자유’가 아니라 베드자다B, C, D에 불과할지라도, 예수는 여전히 그 곁에서 그 병자가 그를 죄인 취급하는 체제의 시선에 순응하지 않도록 그를 격려하고 일으켜주는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이 글은 한백교회 2012.9.30. 예배의 하늘뜻 나누기(요 5:1-9) 본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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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 여자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광장으로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다.

―「사도행전」 16장 19절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는 한 세일즈맨의 자살에서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의 사회적 모순을 들추어냅니다. 유복한 가정의 가장으로 비교적 좋은 직장의 세일즈맨이던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성실하게 일하면 성공하게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두 아들은 아버지의 그 열정에 반항하며 탈선했고, 그 역시 대공황기를 맞아 직장에서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삶의 막바지에 몰린 그는 자식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겨주고자 사고를 가장한 자살을 했는데 그 보험금을 탈 아들은 이미 그를 떠나버린 뒤였습니다.

지난 8월 22일 또 다른 세일즈맨이 칼을 휘둘러 전 직장동료 2명과 행인 2명에게 큰 부상을 입히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파리 같은 자기 목숨을 끊는 대신 자기를 해코지 한 전 동료들의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는 2005년 더 이상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대학을 중퇴하고 직장인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7년 동안 그는 네 곳의 직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했고 마지막 직장에서 퇴사한 지난 4월, 그간의 노동의 대가로 남은 것은 4천만 원의 부채였습니다. 곧 그는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노동의욕을 상실하였으며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첫 두 번의 직장은 대기업의 하청을 받아 휴대폰 미납요금을 독촉하는 일이었고, 모두 2년이 되어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직전 고용계약이 해지되었습니다.

세 번째 직장도 휴대폰 미납요금을 받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역시 대기업에서 위탁받은 회사입니다. 그런데 이 회사는 개인사업자 형식으로 계약하여 실적에 따라 수당을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업무가 종료될 때 개인 실적과 팀별 실적을 공개하여 심한 노동압박을 가했습니다. 세 번째 직장에서 그는 불과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취업한 회사는 한 시중은행의 대출상품을 위탁판매하는 곳이었습니다. 한데 이 회사는 지금까지의 회사보다도 더 안 좋은 방식으로 노동자를 고용했습니다. 기본급은 없었고 실적만으로 급여를 지급했습니다.

그의 급여로는 기초생계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저리인 은행대출은 꿈조차 꿀 수 없습니다. 결국 이자율이 높은 카드빚을 져야 했고, 상환기일을 못 지켜 고리의 이자가 발생했습니다. 일할수록 그의 부채는 늘었고, 그나마 네 번째 작장을 그만둔 뒤 그는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최선을 다하면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거라고 믿었습니다. 해서 몸이 부수어지도록 일했습니다. 회사의 고강도의 강박을 받으며 그의 전 노동력, 아니 몸 전체를 세일즈했습니다. 한데 7년 동안 그는 늘어만 가는, 아니 더 이상은 늘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한 부채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7년은 그의 노동의욕을 소진시켰고, 감정조절 능력도 분쇄시켜 버렸습니다. 하여 그는 더 이상 세일즈맨이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세일즈맨은 7년 만에 사실상 죽어버린 셈입니다.

이것은 2천년대 우리의 삶을 휘둘리게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재앙인지를 보여주는 한 전형적 사례입니다. 그 체제는 모든 사람들을 세일즈휴먼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노동력을 팔고 몸을 팔며 끝내는 정신까지 팔아버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노동력은 물론이고 몸과 정신까지 ‘소진’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 존재가 소진되어 버린 사람은 여간해선 회복이 어렵습니다. 왜냐면 존재의 바닥까지 소진된 그이는 회생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없을 만큼 자아가 붕괴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최근 크게 늘어난 이른바 ‘묻지마 범죄’(방화, 폭력, 살인)는 그 붕괴의 한 실례입니다. 감정조절에 실패하여 모르는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자살은 그 또 다른 예입니다.

또 많은 이들은 ‘언어 붕괴’ 양상을 보입니다. 횡설수설, 무차별적인 독설 등이 그 양상의 전형적 사례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많은 이들을 피곤하게 합니다. 해서 사람들은 그이를 외면해 버리거나, 심지어는 가까지 못하도록 쫓아내기도 합니다.

해서 그런 이는 자기를 외면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면 지겹도록 따라다니면서 말을 겁니다. 어떤 때는 듣기 벅차게 존경을 표현하고 어떤 때는 분노를 표합니다. 그러나 대화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언어 붕괴 상황에 놓인 그는 뜬금없는 말을 하고 횡설수설하며 상대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존재의 소진 상황에 놓인 이들은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지만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는 주위사람에게 폭력으로 느껴질 만큼 지나치게 열정이 넘칩니다. 자녀나 아내, 혹은 약한 이웃이나 동료에 대한 상습적 폭력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비인간적 체제의 폭력적 할거는 이런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이 만났던 한 여자도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그녀는 ‘점치는 귀신’이 들러붙은 소녀입니다. ‘점치는 귀신’의 그리스어는 프뉴마 퓌토나(pneuma puthōna)입니다. ‘퓌톤’(puthōn)이 ‘점쟁이 영’을 뜻하고 ‘퓌토네스’(puthōnes)가 ‘복화술사’를 가리키는 단어임을 감안하면, 이 소녀는 복화술처럼 말하여 점을 치게 하는 영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주인들’에 고용되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주인이 그녀로 인해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녀는 점치는 조합에 고용된 노예이고 그 조합의 운영자들이 점술사들의 점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사회는 점치는 귀신 들린 소녀 같은 이를 신령한 자로 여겼습니다. 빌립보에는 그런 이가 많았습니다. 해서 그런 회사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은 불과 반세기 전 이 도시가 겪은 엄청난 재앙 때문입니다. 부르투스와 캇시우스가 이끄는 공화군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부대와 바로 이 도시 앞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것입니다. 두 공화군 지도자가 자살하는 것으로 전투가 종료되는데, 이때 양군의 전사자의 수가 무려 2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잘 훈련된 로마군끼리의 전쟁에서 전사자의 수가 이렇다면 이 도시 민간인의 피해는 훨씬 혹독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이후 이 도시는 격변을 거치면서 바울 당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혹독한 역사, 그리고 빠른 변화는 이 도시 주민을 고강도의 집단적 스트레스 상황에 몰아넣은 것 같습니다. 해서 점에 대한 수요도 넘치게 많았고, 광인들 가운데 점치는 광인이 많았으며, 또 그이들을 고용한 회사들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주지할 것은 그 광인들을 사람들이 신령스럽게 여겼다 해도 그이들은 몸과 마음에 깊은 병이 들어 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녀가 몇날 며칠을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예요. 그분들이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고 외쳐댔다고 합니다(17절). 이에 바울은 ‘귀찮아서’ 그녀에게 들러붙은 귀신을 쫓아냈다고 합니다(18절).

이상한 구절입니다. 귀신을 쫓아낸 것이 그녀가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귀찮아서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바울이 자기를 애틋이 여긴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존경하며 따랐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언어 붕괴 상황에 있어서 그녀의 말투에 바울 일행이 괴로워했다는 것을 시사할 것입니다.

바울이 만난 소녀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전쟁으로, 전쟁의 상흔으로 영혼이 파괴된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의 자본은 그런 이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것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파괴된 영혼으로까지 세일즈해야 하는 소녀, 그런 도시에서 바울은 바로 그런 이들의 해방을 뜻하는 복음을 전합니다. 비록 바울은 그 소녀를 이해하지 못했고 귀찮아했지만, 아무튼 그 도시는 그런 죽임의 시스템을 교란시켰던 바울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따라 죽임의 시스템과 맞서야 할 것입니다. 한데 과연 우리는 그 소녀를 귀찮아했던 바울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여의도에서 칼부림한 청년을 보는 우리의 태도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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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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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식객
    2012.09.06 11:3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여의도 사건이 신자유적인 자본주의가 영육을 소진한 예라고 보는 각도가 신선합니다.
    언어 붕괴는 특별한 트라우마가 없다고 하더라도 넘쳐나는 정보에 빠져 사는 요즘 사람들이 보이는 흔한 증세인 것도 같습니다.....

2012.03.04 한백교회 하늘뜻 나누기
성서 본문 : 사도행전 6장 1~7절

사도들의 거절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놓고서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사도행전 6:1-7 中]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무리의 일곱 지도자가 사도들을 찾아왔습니다. 늦은 저녁 그들이 조용히 사도들의 숙소를 찾아온 것은 굳이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인 듯합니다. 마침 사도들이 예수를 전한다는 이유로 의회에서 장(杖)을 맞고(5:40) 병상에 누워있던 터라 ‘문병’을 왔다고 둘러댈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찾아온 ‘진짜 이유’는 문병에 있지 않아 보입니다.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과부들이 겪었던 수모(6:1)에 대해 듣고 난 이후여서인지 이들 일곱 지도자의 표정은 밝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듯합니다. 일곱 지도자의 대표인 스데반의 이야기가 끝나고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조용한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스데반은 사도들의 반응에 당황한 듯 보입니다. 일곱 지도자 중 몇몇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뒤돌아서서 고개를 젓고 있기도 합니다. 다음날, 사도들은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서두에 인용한 말들을 합니다. 대체 그날 저녁 사도들의 숙소에서 일곱 지도자는 어떤 말을 들었던 것일까요? 그들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위에 인용된 사도들의 말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요?

물론 이러한 상황 재구성과 질문 모두 저의 상상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적 비약이 존재하는데 그 비약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통적 해석과 다른 방식으로 상황을 재구성해본 것입니다. 이 본문에 대한 전통적 이해대로라면, 일곱 ‘집사’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그룹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차별 받았고, 그에 대한 사도들의 대응으로 임명됐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 사람을 임명하는 것으로 신앙 공동체 내부의 갈등은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해석에서 세 가지 지점에 물음표를 붙이고 싶습니다.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집단의 일곱 지도자가 (이전에는 없다가) 성서에 언급된 사건 이후에 선출된 것일까, 공동체 안의 갈등은 ‘분배 불평등’ 때문에 초래됐을까, 일곱 집사의 선출로 신앙 공동체는 다시 평화를 회복한 것일까?(평화를 회복했다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이 세 가지가 제가 갖는 의문들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 답은 모두 ‘아니오’입니다. 그리고 이 ‘아니오’라는 답 때문에 앞서 인용한 2-4절을 전통적 해석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본문(행 6:1-7)은 보통 교회 안의 여러 직무 중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이해돼 왔습니다. 또는 사도들이 자신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헬라 이름을 가진 일곱 사람에게 나눠줌으로써 교회 안의 갈등을 해결하는 ‘훈훈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장로나 집사라는 교회의 직분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본문으로 해석되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2-4절은 교회 안의 갈등해결의 모범 사례, 직분 선출을 위한 기준 등으로 이해돼 왔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특정한 해석의 틀을 기반에 두고 있습니다. 바로 사도행전 전체를 교회의 성립과 복음의 확장 과정으로 보려는 틀입니다. 예수 사후의 기독교사(史)는 제도화된 교회형태와 공교회(Catholicism)라는 목표를 향해 수렴해간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사도행전에 묘사된 갈등은 결국 ‘교회’를 완성하기 위한 체계 내적인 분화와 적응의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목적론적 해석학이 성립하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초대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구제업무를 수행했는데, 사람이 많아지자 이 일 때문에 사도들이 시간을 많이 뺏기게 돼 자신의 업무에 충실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일곱 장로 혹은 집사를 선출하는 것은 사도들의 업무를 대신할 사람을 뽑는 것입니다. 일곱 사람이 그 일을 대신했기 때문에 사도들이 ‘방해받지 않고’ 자신들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었고, 그것은 교회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연스런 분화와 적응 행동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차분하게 본문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의 구제에서 헬라 말을 하는 과부들이 차별받았다고 하는데, 차별의 주체는 누구였던 것일까요? 분명히 1절에서는 ‘문제 상황’이 ‘분배의 불평등’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사도들이 제시하는 2-4절의 ‘해결책’에는 왜 분배방식 개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것일까요? 그리고 문제 상황이 분배 때문이었다면 왜 선출된 일곱 집사의 자격조건은 하나같이 분배 업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뿐일까요? 또한 “제자들을 모두 불러”(2절) “여러분 가운데서”(3절) 일할 사람 일곱을 뽑으라고 하고는 (모인 사람들 중에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과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이 함께 있었을 텐데) 뽑힌 사람은 왜 전부 헬라 이름을 가진 사람들일까요? 한 마디로, 문제 상황과 해결책의 연결이 매우 껄끄럽게 돼있는데 대체 이 문제와 해결의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질문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해결방식은 이 껄끄러움을 ‘없는 셈’ 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목적론적 해석학’을 가져다가 성서는 교회와 신자들의 나아갈 바를 모범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목적론적 해석에서 ‘시간’이라는 변수는 사실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에 다양한 ‘단계’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들은 구체적 시간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해석학은 성서를 통해 현대의 ‘삶의 지침’을 발견하고자 하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 해석학의 입장에서, 사도행전에서 언급되는 이상적 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단계들은 현재의 상황과 쉽게 동일시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각색돼 한국교회 안에서 소비되고 있는데, 주로 교회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선출된 일곱 사람에 대한 묘사(3절,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를 근거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나 삶의 태도, 신앙양식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택받은 일꾼’은 이 일곱 집사처럼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으로 설교하는 많은 목회자들은 이 본문이 ‘사역의 우선순위’를 규정하고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즉, 구제와 같은 봉사활동도 중요하지만 목회자들이 그것보다 우선시해야 할 일은 바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섬기는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이 주장은 양날의 검과 같이 사용되는데,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가르치는 목회자의 역할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해 장로들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보호하는 데 사용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이 기도와 말씀 섬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을 규율하는 논리로 사용됩니다. 이 논리를 따라 기도와 말씀 섬김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이 선한 봉사활동이라 해도 ‘장애물’에 불과하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성서는 목회자 중심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고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스데반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해석이 쉽게 내파되고 맙니다. 위의 설명대로라면 스데반은 사도에 의해 임명된 집사 또는 장로입니다. 하지만 그는 평신도지 목회자와 같은 ‘급’이 아닙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서...기적을 행하였”으며(8절),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논쟁의 적수가 그를 “당해날 수 없었다”(10절)고 성서는 전합니다. 이런 표현들을 염두에 두고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사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스데반을 사도와 동급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기적을 행하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니 스데반을 봉사 업무를 전담하는 평신도라고 규정할 근거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반면, 그를 평신도로 본다면 평신도가 사도처럼 행동하는 것을 막을 근거가 없게 됩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그동안 읽어온 오늘의 성서본문에 번역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혹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공교회를 향해 가는 체계 내적 과정으로만 볼 수 없는 심각한 갈등의 흔적을 오늘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흔적을 ‘섬김(디아코니아, διακονίᾳ)’과 3절에 나오는 ‘이 일(τῆς χρείας ταύτης)’의 불일치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도들의 ‘섬김’과 3절의 ‘이 일’이 일치될 수 없는 것 때문에 공동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디아코니아라는 단어는 동사형으로 쓰인 것을 포함해 오늘의 본문 안에서만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사용에서 모두 다른 의미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서를 놓고 볼 때, 1절에서는 “구호음식을 나누어 받는 일”, 2절에서는 “음식을 베풀다(식탁에서 봉사하다)”, 그리고 4절에서는 “말씀을 섬기는 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때 단어의 기본적 의미에 가장 충실한 용법은 2절의 ‘식탁 섬김(봉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구호제도 전통과 기독교 신앙 전통 속에서 이 단어가 갖는 ‘섬김’의 의미가 확장돼 ‘구제활동’이나 (섬김을 본연의 임무로 하는) ‘사역’, ‘직무’의 의미로 쓰이게 된 듯합니다. 오늘의 본문 안에 있는 세 번역은 이 한 단어가 갖는 다양한 번역 가능성을 모두 보여주고 있습니다. 번역본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공동번역, 개역개정과 같은 한글번역뿐만 아니라 NAS, NIV, RSV같은 영문번역들도 아래처럼 새번역 성서와 대동소이한 번역 방식을 보입니다.


1b

τδιακονίᾳ τκαθημεριν

2b

διακονεν τραπζαις

4

τδιακονίᾳ τολγου

새번역

날마다 구호음식을

나누어 받는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다

말씀을 섬기는

공동번역

그날그날의 식량 배급

식량 배급에만 골몰하다

전도하는

개역개정

매일의 구제

접대를 일삼다

말씀 사역

NASB

the daily serving of food

to serve tables

the ministry of the word

NIV

the daily distribution of food

to wait on tables

RSV

the daily distribution

to serve tables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껄끄러운 궁금증들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이유, 본문에 나오는 문제 상황과 해결책이 잘 연결돼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 단어가 이처럼 일관성 없게 번역되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 번역 때문에 구제 문제에서 시작해 뜬금없이 사도의 직무 문제로 귀결되는 방식으로 이 본문이 이해돼온 것입니다.

그리고 3절의 헬라어 ‘테스 크레이아스 타우테스(τῆς χρείας ταύτης)’는 4절의 “우리는 기도하는 과 말씀을 섬기는 에 헌신하겠습니다”와 대비시키기 위해 ‘이 일’로 번역됐으나, ‘크레이아스(χρείας)’의 원래 의미는 ‘요구’나 ‘필요’에 가깝습니다.[각주:1] 따라서 3절 후반부의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를 다시 번역하면 “그러면 그들에게 이 요구를 맡기고”가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들었던 요구는 무엇이고, 왜 그 요구를 자신들이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일곱 명을 선출해 그들에게 맡기려 한 것일까요?

오늘의 본문 안에서 각기 다르게 번역되고 있는 ‘디아코니아’를 구호제도나 직무라고 보는 해석 전통을 따르지 않고 원래의 의미에 가깝게 통일해서 ‘섬김’으로 바꿔보면 아래와 같습니다.(밑줄 친 곳이 다시 번역한 부분입니다.)
1a. 이 시기에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
1b. 그런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1c. 왜냐하면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섬김에서 무시 받았기 때문이다.
2a.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하였다.
2b.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식탁들을 섬기는 것은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요구를 맡기고,
4. 그리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섬김을 계속하겠습니다."
5. 모든 사람이 이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이방 사람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인 니골라를 뽑아서,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눈에 띄는 것은 2b의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라는 표현입니다. 기존의 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하느님의 말씀을 섬기는 일’과 ‘식탁을 섬기는 일’이라고 해석해 마치 두 일이 대비되고 있는 것처럼 표현했지만, 다시 번역해보면 그것은 식탁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반(反)하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즉, 식탁을 섬기는 것은 자신들의 신앙적 신념에 반대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섬기는 일’과 ‘식탁을 섬기는 일’을 원래 모순되는 것으로 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행 2:42, 46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도행전의 문맥 속에서 식탁 섬김과 말씀 섬김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뤄질 때 공동체가 화합과 평화의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것이 사도행전 저자의 시각입니다. 그런데 위의 해석을 보면 사도들은 말씀 섬김과 식탁 섬김을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이로부터 이야기를 재구성하면,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그룹의 과부들이 매일의 식탁 섬김에서 무시 받았고(1절),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이에 대해 사도들에게 식탁 섬김에 함께 할 것을 요구했는데(3절), 사도들은 그 식탁 섬김에 참여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고 거절했습니다(2절). 그리고 식탁 섬김의 요구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일곱 사람을 뽑아 그들에게 맡김으로써(3절) 자신들은 신앙적 소신을 지키며 기도와 말씀 섬김을 계속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4절). 그렇다면 이때 사도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직무의 충돌이 아니라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의 식탁 섬김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적 소신에 위배된다는 점입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서의 다른 본문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깝게는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의 환상’ 에피소드를 들 수 있습니다. 환상 중에 하늘에서 베드로에게 음식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내려오는데, 베드로가 보니 그것들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먹을거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속되고 부정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세 번 거절합니다. 이 환상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예비하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또한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3에는 바울이 ‘게바(베드로)’를 나무란 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유대인적 정체적을 강조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의도적으로 ‘게바’라는 이름으로 베드로를 부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갈 2:9) 중 한 사람인 게바가 안디옥 교회에 방문했을 때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게바의 이 행위를 “위선”(13절)이라고 질타합니다. 이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일상적 실천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과부들에 대한 식탁 섬김을 유대인인 열두 사도가 거절한 것은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역사적 정황으로 봤을 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은 종교적 열심에서나 유대인으로서의 자의식에서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보다 결코 뒤떨어지는 이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절에서 언급된 ‘헬라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은 주로 동로마의 헬라적 도시들의 디아스포라(유대인 이산집단) 출신으로, 종교적 열심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다가 예수 운동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거나, 디아스포라에 소속돼 있을 때부터 이미 예수 운동을 접하고 매력을 느꼈던 이들로 추정됩니다. 그들이 헬라 말을 한다는 점 때문에 헬라문화에 우호적이며 따라서 성전제의와 안식일 규정 등 율법의 준수에서 느슨한 태도를 보이는 ‘혼합주의적’ 경향을 보였을 것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가 헬라 문화의 충격에 대응하는 방식은 흡수, 타협, 전통 고수 등 다각적이었으며, 그 양상은 동방과 서방의 디아스포라가 각기 달랐습니다. 동로마의 헬라적 도시들에 거주한 유대인들은 절대 다수가 유대적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했으며 팔레스틴의 유대인들보다도 더 성전과 율법에 대한 헌신이 뛰어났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귀환한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리고 예수 운동에 소속된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은 율법과 성전에 대한 태도에서 유대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도에 의해 이방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한 학자에 따르면, 팔레스틴 유대인들에게 ‘헬라인’이라는 호칭은 율법과 전통이 정한 신앙과 관습으로부터 이탈한 사람들을 뜻하는 ‘이방인’과 동의어였으며, 이는 곧 헬라인을 불경스런 자로 보는 경멸적 시선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 학자는 70년 이전까지 ‘헬라파 사람들’이란 표현은 ‘정통’을 자처한 바리새주의를 제외하고 모든 다양한 사상과 관습을 포괄하는 일반적 용어였다고도 말합니다. 단정 짓기는 어려우나, 이로부터 1절에서 언급된 ‘헬라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은 적어도 유대 중심적 가치관에서 배제된 이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는 점은 추론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1절에 등장하는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과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은 애초부터 동등한 주체로 성서에 소개된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서 보면, 유대 사회의 주류집단과 하위 주체화된 집단이 예수 운동 공동체 안에 미묘한 형태로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가정은 너무 순진한 시각일 것입니다. 설령 사도들이 식탁 섬김 참여 요청을 거절하기 전까지는 이 두 집단 간의 갈등이 가시화되지 않았을지라도, 사실 그 공동체 안에서는 (신앙 공동체 밖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존재를 평가절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삶의 방식이 일종의 상식처럼 작동하고 있었던 것을 아닐까요? 오늘의 본문은, 그 ‘위험한 상식’을 사도들이 견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동안 평화롭던 교회가 분배 문제로 위기를 맞고, 그 위기를 집사 선출로 타개하는 것으로 이해됐던 오늘의 본문은 새롭게 읽혀야 합니다.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집단에서 일곱 지도자를 선출(혹은 이미 존재하던 지도자를 승인)하는 것은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심지어 사도들마저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던 위험한 상식이 신앙 공동체를 그 근본부터 뒤흔들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일곱 지도자의 선출은 교회가 그 상식으로 인해 결국 분열돼나가는 상황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사도행전 주석서의 저자인 핸첸은 χρεία가 헬레니즘 시대에는 “궁핍, 필요”가 아니라 “직무, 일”을 의미했다고 주장했다. E. 핸첸 / 이선희·박경미 옮김, 『사도행전I』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404-405 참조. 그러나 그의 주장은 어떤 문헌 근거를 토대에 두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그의 글에는 참고문헌이 소개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BDAG(바우어 헬라어 사전)의 ‘χρεία’ 항목을 보면 복음서와 다른 헬레니즘 문헌들에서 이 단어가 ‘필요’나 ‘요구’를 의미하는 용례를 다수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 2:45, 4:35, 20:34, 28:10에서 사용된 이 단어는 명백히 ‘필요’나 ‘요구’와 관련 있다. 다만 BDAG에서는 행 6:3절의 경우 ‘필요한 해동(an activity that is needed)’의 용례로 보고 ‘직무, 의무, 봉사’를 뜻하기도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때 ‘직무’는 제도화된 형태의 직무를 뜻하는 것이 아님은 문맥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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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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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문서는 2011년 한백교회 성탄절 예배에서 사용했던 선찬 예식서입니다.



20111225일 성찬식

*성찬상 설치

[교회공간의 정 중앙에 테이블을 길게 놓는다. 흰 보를 덮고 그 위에 포도주 잔을 40 여개 놓는다. (증편)을 한 입에 들어갈 수 있게 썰어놓은 접시를 세 곳으로 나누어 놓는다.]


*
사회자의 멘트(김현숙)

오늘은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이 기쁜 성탄절에 드리는 성만찬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한 청년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만찬을 하였던 그 시간은 어떠하였을까? 그 시간에 더 살고 싶은 욕망은 없었을까? 더 좋은 세상을 꿈꾸지 않았을까? 아마도 제자들, 여인들, 후견인들 그리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인생의 회한에 젖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만찬의 시간에 삶을 생각하려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탄생과 죽음이 만나는 성만찬을 시작하겠습니다.


1_
여는 의식

단위의 촛불을 성찬상으로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여는음악, 위의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짧은 곡: 연주자(박경민,리코더)]
[단위의 촛불을 성찬상으로 가져온다.(양미강)]


2_하늘 뜻 나누기

이어서 양미강목사님의 하늘 뜻 나누기가 있겠습니다.

아가야, 우리 봄을 기다리자[누가복음 1:46-55]”(양미강)

[이어주는 음악1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연주자(박경민,바이올린)]


3_
성만찬을 기리는 시간: 탄생을 생각하며...

낭독
(도홍찬)

너는 기다림이었다.

척박한 팔레스틴에서, 고난의 한반도에서 너는 해방의 메시아였다.

너는 기쁨이었다.

불임의 부부에게, 노산의 어미에게 너는 산고 끝에 오는 환희였다.

너는 황망함이었다.

열정에 사로잡힌 연인에게, 어설픈 신혼부부에게 너는 삶의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너는 슬픔이었다.

가난 속에서, 폭력 속에서 너는 고통의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누군가는 사랑의 맨 얼굴을 너에게서 본다.

누군가는 무심하게 너의 옆에 그냥 서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힘들게 너의 존재를 끌어 안는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내 발견한다.

너의 얼굴은 영원의 순백이 아니라, 애욕과 세파 속에서 골이 깊이 패인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는다.

사랑은 지독한 소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고통의 연단 속에서 삶은 지극히 깊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 우리는 방관하고 삶에서 퇴거할 자유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너의 탄생에 부친다.

너의 삶은 고지되거나 예정되어 있지 않다.

불안이 너의 영혼을 좀먹지 않게 하거라.

죄의식 속에서 신에게 기대지 말라.

너는 가능성이고 자유이다.

 

채워도 차지 않는 곳, 도달해도 남는 곳, 만나도 떠난 그 자리에서

하느님은 당신에게 조용히 말을 걸 것이다.

[이어주는 음악2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연주자(김선우,가야금)]

 

4_성만찬을 기리는 시간: 삶을 생각하며...

낭독(김현숙)

<이것은 김진숙의 기도입니다> @JINSUK_85 김진숙 의 트위터

-열여덟 살,옷 공장, 신발공장, 가방공장, 조선소용접공 대공분실 해고, 징역, 수배, 다시 징역, 장례 치르고 추모사 하다 보니 쉰. 20년 지기가 정리해고 반대하며 129일 매달려있다. 목을 맨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 다시 정리해고 반대하며 올라 와, 울다가 웃다가.

-땅멀미는 서서히 나아가고 있는데 허리가 아파서;; 2.퇴원날짜는 아직 기약이 없어요.

-재키, 자야할 시간일텐데, 여긴 비가 내려요. 크레인에선 아주 작은 빗소리도 크게 들렸는데 창을 열어보고야 비가 오는 줄 알았네요. 재키한테 김장김치를 보내주고 싶단 생각을 자꾸해요.^^

-크레인이 24시간 흔들렸거든요. 바람불면 멀미도 심했구요. 그런데서 살도록 몸이 이미 적응을 해서 이제 정지한 것들을 못견뎌 하는 거 같애요. 사람 몸이 참 희안하면서도 신비롭습니다.^^

-오전에 노사 잠정합의 했습니다.자세한 합의내용은 조합원 찬반투표 과정에서 공개가 될 거 같습니다. 300일 넘게 기다려 오셨는데 몇 시간만 더 두근두근 기다려 주세요.^^

낭독(이종원)

<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 입니다> 누가복음 22.41~45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5_
성만찬

이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성찬상을 중심으로 둥글게 서시기 바랍니다.

성찬 테이블에 둘러선 채 배병과 배잔을 동시에 다함께 그리고 자유롭게 하려고 합니다.

우선 잔을 들으세요. 그리고 양미강목사님께서 건배사를 해주시면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떡 을 집어서 원하시는 분에게 다가갑니다.

우선 눈빛을 나누세요. 그리고 그 분에게 다가가서 속삭이듯이, 위로와 축하의 말을 건네세요. 그런 후에 또 다른 분에게 다가갑니다. 적어도 두 분 내지 세 분을 만나십시요. 다가가면서 상대방에게 떡 과 위로 그리고 축하의 말을 건네세요. 테이블보를 거두어주십시오.

[성만찬이 차려진 테이블보를 걷는다.(김봉숙,최종봉]

[건배사
:포도주와 빵을 들고 성찬의 의미를 되세김(양미강)]

[배경음악: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중주:연주자 (박경민,김선우)]

떡과 포도주 못 드신 분 계신가요? 다 드셨으면 제자리로 돌아가시겠습니다.

이제 오종희 선생님의 낭독이 있겠습니다. 

 

5_성만찬을 마치는 기도: 죽음을 생각하며...

낭독(오종희)

태어나 이 땅을 꾹꾹 밟고 살아가야 비로소 전해지는 메시지가 있는 것처럼 죽어 이 땅 밑에 꾹꾹 밟혀 묻혀야 비로소 전해지는 메시지도 있습니다. 구원을 갈망하는 우리는 이천년 전 당신이 죽음을 거뜬히 초월한 구세주였음을 기억한다 하지만 당신 앞에 놓인 잔 하나 옮기지 못하는 걸 보면 당신도 비존재의 충격 앞에 그저 순응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오늘 당신의 생일에 죽음을 생각합니다. 보통, 아이들의 돌잔치에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천년만년 영화가 보장된 어느 나라 왕족처럼 아이도 부모도 화려한 드레스를 걸칩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돌잔치는 점점 디즈니랜드 성처럼 반짝거리는 환타지를 닮아갑니다. 부모의 주머니를 털어 안간힘을 다해 몇 시간 동안의 구원을 구매하고 소비 하는 겁니다. 성탄절에 죽음을 말하는 건 그런 유사 구원을 거부하는 최소한의 각성 장치인지 모르겠습니다. 뻑뻑한 삶을 살다 보면 때론 유사 구원도 반짝거리는 환타지도 필요 하건만 당신에게서 만은 다른 것을 원합니다. 당신의 탄생에 죽음을 생각하고 당신의 죽음에 삶을 생각 하겠습니다. 옛날 옛날에 무력한 핏덩이로 태어나 외면 받은 삶을 살다가 권력의 폭력으로 살해당한 당신의 메시지가 왜 아직도 읽혀지고 전해지는지 생각하겠습니다.


너무 높이 고양되어 우리가 이름 부르기도 불경한 신이 아닌 죽임 당한 구세주로서
,

아파하는 자들과 힘없는 자들과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과 함께 기꺼이 상관는 그런 주로 임하소서, 예수여~.

[이어주는 음악 (박경민,리코더)]

이제 테이블보를 다시 덮어주시고 촛불을 다시 단으로 가져감으로서 성만찬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6_맺는 의식

[성만찬이 차려진 테이블보를 닫는다. (김봉숙,최종봉)]

[촛불을 다시 단으로 가져간다. (양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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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19일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원고
본문 : 마태복음서 5장 33~37절



“예”와 “아니오”가 하나가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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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용연
(본 연구소 회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 과정)

저는 오늘 성서 본문을 읽다 보면 조금 특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은 오늘 성서 본문의 시작처럼, 맹세라는 걸 하면 제대로 지켜라 이게 일반적일 것 같은데, 아예 맹세라는 걸 하지 마라 일단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이색적이구요.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거기에다가,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하라”는 말을 덧붙여 놨다는 말이죠. 이렇게 덧붙임으로써 구조상 맹세하지 말란 말과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하라는 말이 대조 관계를 이루게 되어 뒷 말을 한 번 더 강조하는 구조가 되게될 텐데요. 도대체 맹세와 예/아니오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길래요?
저는 이번에 하늘뜻나누기 준비를 위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맹세라는 것은 어떻게 이야기를 붙이든 지금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맹세하지 말라는 말은, 현실의 문제를 접했을 때, 어떤 우회나, 회피나, 이런 길을 찾을 생각을 하지 말고, 현재의 문제를 직시하고 거기서 지금 당장,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하라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왜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 등등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는 건가라는 것도 감이 잡힐 것 같네요. 그걸 두고 모두 하느님과 결부시켜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아무리 맹세를 지키려는 진실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과 같은 권위를 빌려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럼 “예”한다는 것은 도대체 뭐고, “아니오”한다는 것은 도대체 뭘까요?
“예”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저에게는 계속 곱씹어지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서준식 선생의 동생인 서경식 선생 책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알다시피 이 두 분은 재일조선인이죠. 어렸을 적에 주변의 일본인 아이들이 자기들을 놀리는데, 이렇게 놀리더라는 거에요. “조선, 조선, 파가 취급하지 마. 같은 밥을 먹는데 토코가 틀리냐”
여기서 조선, 조선, 이렇게 부르는 건 흔히 알려진 “조센징”이라는 비하어처럼 아예 “조선” 자체를 비하어로 쓰는 거구요. “파가”와 “토코”라는 말은 원래 발음은 “빠가(바보)”와 “도코(어디)”인데 조선인들이 발음을 제대로 못해서 저런 말이 나온다고 놀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놀리는 것도 상당히 악질적이죠. 놀리지 말라고 항의하는 말인데 그걸 또 비틀어서 놀리고 있으니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놀림을 받고 들어가면,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더라는 이야깁니다. “조선은 나쁘지 않아. 나쁜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
그래서 그 어머니는 나중에 서준식 선생과 그 형 서승 선생이 한국에서 조작 간첩이 되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거지요. "빨갱이는 나쁘지 않아"

저는 이 이야기말로 “예”할 것을 “예”라고 하는 전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평소에 했더랬습니다. 놀림받는 존재, 억압받는 존재, 그렇게 주변에서 자기를 계속 부정당하는 존재. 그래서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야?”라고 계속 자기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런 존재들에게 “너 이렇게 살아도 돼. 너는 나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 그래서 그것이 “나 이렇게 살아도 돼. 나는 나쁘지 않아”라는 자기 긍정으로 이어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해야 할 것을 “예”하는 전형이 아닐까 하는 거지요.
조금 다른 예를 들자면, 지난 주에 한백식구 한 분을 만나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분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다른 것은 괜찮은데 성적이 안 좋으면 자꾸 재시험을 본대요. 그래서 그럴 때마다 내가 딸을 제대로 키우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신다고 합니다. 저는 한백이 그럴 때, “재시험 봐도 괜찮아.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있어”라고 그 분께 힘을 주는 공간이, 그래서 그 분이 “나는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있다!”는 자기 긍정을 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메시지는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일 텐데, 저는 그 ‘은혜’와 ‘믿음’이란 말이 결국은 이런 ‘자기 긍정’을 그 실체로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라고 말해 주는 것이 ‘은혜’라면, 그 말을 받아 “그래, 내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이 ‘믿음’ 아닐까 싶은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 보겠습니다. 앞에서 서준식/서경식 선생 어머니의 말씀. “조선은 나쁘지 않아. 나쁜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라는 말씀을 인용했었습니다. “나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하셨으니, 그 말 그대로, 모든 것에 다 “예”라고 말하면 되는 걸까요? 그렇게 말할 수는 당연히 없는 게, 당장 “조선은 나쁘지 않아”부터가 그걸 깨겠지요. ‘조선’을 놀리는 사람들에게 “조선은 나쁘지 않아”라고 해 버리면 당장 그 사람들에게 대놓고 “아니오”라고 말하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렇게 “예”라고 하는 것이 동시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구조는 모든 소수자들에게 적용되는 구조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소수자들이 자신이 받는 억압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예”라고 긍정할 때, 그것은 동시에 그 소수자들의 억압 위에서 존재하는 지금의 세상에 대해서 통째로 “아니오”라고 하는 것이란 이야기지요.
조금 더 범위를 넓힌다면 이런 예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노무현 대통령 추모 광고를 보다가 계속 곱씹게 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당신이 다시 태어나 바보 대통령이 또 한 번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나라의 행복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이것도 말하자면 민주화 시대라는 ‘사람 살 만한 시대’가 내가 “예”할 수 있는 시대라는 표명일 거고, 동시에 그렇지 않은 지금 시대에 대해서 “아니오”하려는 표명이기도 할 겁니다.

한데, 앞에서 말한 문구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프레시안에서 노동운동가 김진숙씨가 이렇게 말했더랬죠. 차라리 군사독재 때는 대드는 노동자만 잘렸는데, 민주화되었다는 시대엔 남녀노소가 다 잘리더라고요. 그렇다면 “바보 대통령의 행복한 국민”이라는 “예”는, 이명박 정부라는 현재에 대한 “아니오”도 되지만, 또 다르게 보면 ‘다 잘리는 남녀노소’에 대한 “아니오”도 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이 지점에서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예”가 동시에 그 삶에 대한 억압에 대해서 “아니오”가 될 수 있다면, 그 “예”가 동시에 그 “예” 속에 숨겨져 있는, 타인의 삶을 억압하는 구석에 대해서 “아니오”가 될 수는 없는 걸까. 아마 그건 인간으로서는 무지하게 어려운 길이겠지만, 그걸 성취해서 나의 “예”가 내가 당하는 억압과 내가 가하는 억압 양쪽 모두에 대해서 “아니오”가 될 때 그 경지를 “구원”이라고 일컬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한백이 22년 전에 이 땅에 세워졌을 때, 한백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한백은 “예”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이었을 겁니다. 기존의 한국 교회의 모습을 두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 아닌가 하던 사람들에게, “네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너처럼 믿는 것이 참 믿음이다”라고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공간이 된 것이 한백이 아닌가 싶은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기존의 한국 교회에, 다시 그 한국 교회와 친화적인 기존의 한국 사회에 대한 “아니오”이기도 했겠죠.
저는 한백이 22년 동안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기존의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를 두고 이건 아닌데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예”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이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라고 말하는 것이 동시에 기존의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한백이 22년 동안 마음 속으로 동일시해왔던 이른바 “민주화운동”이, 그들이 “예”라고 말하는 것에 또다른 억압을 숨기고 있었다면, 한백 스스로도 그러한 억압에 대해 반성하고 또다른 “아니오”를 말해야 하는 자리가 있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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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疏通)이냐 불통(不通)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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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미강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 연구소 운영위원)

얼마전 모 시사주간지 팀장으로부터 한통의 메일을 받았다. 내용인즉슨, 특별호를 기획하면서 합리적 보수로 대표되는 사람들을 추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평소 그의 면모를 알고 있었던 터라, 가능하면 그의 기획에 동참하고 싶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학술 담당 기자로서 뉴라이트 진영을 취재하면서, 저는 보수 담론의 일부에서 '역 영감'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합리적 진보-합리적 보수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식의 '대연정'의 정치공학이 아니라, 혼돈의 시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비전을 창출하기 위해서라도 보수담론이 내장하고 있는 '매력 포인트'를 관찰하고 익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가 하고 있는 고민의 깊이가 느껴지기에 나는 기꺼이 합리적 보수를 찾는 길을 함께 하기로 하면서 그가 보내온 문항을 꼼꼼히 살펴봤다. 각 분야에 걸친 합리적 보수를 찾는 문항에서 내가 추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내 주변을 뒤져봐야 정말 합리적 보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참 난감했다. 그 난감함은 내가 맺어온 인간관계의 폭을 알려주는 것이기에 더욱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누구와 관계를 맺고 살았는가? 지금 생각하면 나와 동색인 사람들과 기꺼이 어울려 살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같은 색깔의 사람들과 살아가는 것이 나의 존재방식이었고, 그 존재방식만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니 당연히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했다. 같은 색깔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아온 결과, 내 주변에는 합리적 보수라고 말할 수 있는 다른 색깔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너무 당연한 이치였다. 난 누가 합리적 보수인지, 합리적 진보인지를 구별하거나 편가르고 싶지 않다. 다만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갈 지를 고민할 뿐이다.

최근 한백교회는 두 주 동안 두가지 문제인식이 충돌하고 있다. 한백교회의 장점은 어떤 이야기라도 함께 나눌 수 있기에 하늘뜻을 나누는 설교자들이 부담없이 자신의 소신대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뜻나누기에서 나온 의제들을 가지고 토론하면서 현 상황을 바라보는 교인들이 갖는 인식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현재 MB정권에 대한 인식이 과거 독재정권과도 같은 것인지, 아니면 과거와는 다른 것인지, 소위 진보진영이라고 말하는 우리 내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 역시 소위 보수진영의 공세에 의해 조작되고 있는 것인지 등등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토론 중에 있다.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결론이 꼭 나야 할 일도 아닌 것 같다.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 얻고 싶은 것은 진보와 보수라고 구분짓고 담을 쌓기 보다는, 말과 상식이 통하는 대화의 파트너들을 찾아내고 관계 맺는 일일 것이다. 최근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독선과 배타성이다. 우리 내부의 문제를 성찰하지 못하고 타인을 향해 투사될 때 나타나는 독소의 위험성을 몸소 느끼기 때문이다. 소위 진보 혹은 보수라는 이름으로 자기 의로움에 빠져 자기만이 옳다는 신념을 내세울 때 가장 치명적이다. “내가 이렇게 헌신해왔는데, 내가 이렇게 남들 알아주지 않을 때 몸바쳐 일해왔는데, 내가 이 기나긴 시간들을 투신해왔는데” 등등.... 여기에 도덕성과 청렴성까지 결합되면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자기 의로움의 극치를 달리게 된다. 자신만이 옳다는 절대신념은 어느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놓지 않는다. 스스로 굴레 속에 갇혀버린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 의로움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자기의 의로움보다는 타인의 의로움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겠는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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