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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28 [신학 정보] 한(恨)의 신학 (김진호)


한(恨)의 신학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한’을 한국인의 심성적 기조로서 강조한 것은 해방 직후 남한 문학가들의 비평 작업에서 시작한다. 이후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문학과 민속학 연구자들의 활발한 논의를 통해 ‘한’에 대한 인식론적 관점이 정립된다. 여기서 ‘한’은 체념적 절망상황에 직면한 한국인 특유의 심성적 기조다. ‘체념적 절망상황’은 모든 인류가 겪어야 했던 좌절체험인데, 한국인은 ‘한’의 정서를 통해 그것에 대응하는 삶의 지혜를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고통의 응어리를 ‘삭임’, 바로 그것이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밉지만, 그것이 타인을 향한 적개심으로 폭력적이 되거나 자기를 향한 증오심으로 자기학대나 자살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삭이는 삶의 미학이 한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부정에서 긍정으로의 감정 전이를 ‘한’이라는 한국 특유의 정서로 해석함으로써, 한국문화의 깊이와 우월성을 강변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한’은 다른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한국적 감정임을 주장하였다.

‘번역 불가능성’(translation impossibility)에 관한 주장은 타문화권 연구자의 비평을 불허한다. 그런데 과연 특정 문화 속에 침륜된 경험의 언어를 다른 문화권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가능한가. 번역 불가능성의 대상이 되는 어휘들은 ‘한’ 외에도 무수히 많다. 그럼에도 많은 어휘들은 번역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번역이라는 행위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런데 한국의 문학가들과 사상가들은 그 많은 경험의 어휘들 가운데 ‘한’만을 특정하여 번역 불가능성을 강변한다. 이것은 ‘한’이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의 핵심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국제적 토론의 장에서도 그것이 허용되는 분위기였다. 그런 점에서 ‘한’은 일종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적이고 동시에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적 요소가 되었다.

한의 자리는 민족이 아니라 민중이다
그런데 김지하의 ‘한’ 해석은 다른 문제의식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을 언도받아 수감되어 있던 기간 중인 1974년 11월경부터 1975년 2월 중순까지 쓴 원고지 500매 분량의 옥중메모는 「성지」 「명산」 「말뚝」 「장일담」의 작품구상을 담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의 ‘한’에 관한 문제의식이 집중적으로 담겨 있다. 이에 따르면 ‘한’은 우리 민족의 독특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독특성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은 민중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이른바 ‘한의 신학’을, 즉 ‘한’이 신학함의 새로운 화두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는 신학의 경계를 넘어 비판적 지식담론의 새로운 화두로 부상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김지하에게서 ‘한’이라는 담론의 장소는 민족이 아니라, ‘감옥’ 혹은 ‘창녀의 썩은 자궁’이다. 곧 민중의 장소다. 배제와 차별의 한 복판이다. 거기에서 ‘한’은 그러한 배제와 차별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순순히 동화되지 않는 역설의 감정 현상이다. 그러한 한이 자원이 되어 세상이 전복된다. 곧 ‘역설’은 ‘역전’의 토대다. 그것을 김지하는 천도교와 증산교의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과 연관시킨다. 현실의 역전 불가능성이 전복되는 시공간이 바로 후천개벽이다. 바로 여기에서 그는 ‘단(斷)’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응어리진 한을 통한 전복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한의 악순한을 종식시킨다. ‘한과 단의 변증법’이다.

그렇다면 김지하의 한의 문제의식을 가장 앞서서 가장 열렬히 가장 큰 비중으로 강조한 이는 신학자 서남동이다. 서남동의 글 「한의 사제」 「한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소리의 내력」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 「민담의 신학―반신학」 등은 김지하에게서 얻은 한의 문제의식으로 신학의 내용과 형식에서 전복에 가까운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한 신학은 신학 내용에서 커다란 전환을 기도하고 있다. 그에게서 민중의 공간은 ‘죄’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곧 죄는 민중이 저지른 잘못의 결과가 아니라 배제와 차별의 결과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지배자의 시선이다. 하여 죄는 권력을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권력을 가진 자는 언어를 지배하는 자다. 그러므로 죄는 권력을 갖지 못한 자의 언어를 박탈한다. 여기에 ‘한’의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즉 한은 배제와 차별의 설움을 겪는 이가 그것을 적절히 표현하지 못하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 민중의 언어는 박탈당한 것, 아니 지배체제에 의해 도난당한 것이다. 그래서 한의 정서는 응어리져 있다.

자기의 감정을 지배체제의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자기 언어가 도난당했기에 말이다. 한데 그 언어는 그들이 겪는 배제와 차별의 경험을 죄로 인한 자명한 결과처럼 해석한다. 그러나 몸이 저항한다. 언어를 도난당했으니 뭐라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몸은 그것에 순순히 순응하지 않는다. 실어증이 발생하고, 기억상실증이 오며, 온갖 병증이 나타난다. 해서 많은 민중은 질병에 걸려 있고, 정신줄이 나가 있으며, 말을 하지 못한다. 바로 한의 증후다.

민중신학자는 ‘한의 사제’다

한데 서남동은 그것이 ‘민중의 언어’라고 말한다. 그가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민중의 말을 듣고자 함이다. 소리의 내력을 해독하고자 함이다. 곧 그 은폐된 말, 왜곡된 언어를 알아차리기 위함이다. 그것을 듣고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자, 그이가 바로 서남동이 말하는 민중신학자다.

이 들음과 증언의 행위는 민중의 한, 그 응어리를 푸는 일이기도 하다. 민중에게 권력이 부과한 죄의 굴레로부터 해방을 선언하는 자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자는 ‘한의 사제’이어야 한다. 하여 민중으로 하여금 역사의 주체가 되도록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김지하를 따라, 민중의 한이 복수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단(斷)’을 선포하는 자다. 후천개벽의 시간, 하느님나라의 시간이 도래했을 때, 민중의 일어섬, 민중의 한풀이가 보복의 악순환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단’을 설교하는 자이어야 한다. 한과 단이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야 함을 선언하는 자, 그가 바로 민중신학자인 것이다.

둘째로, 서남동의 한에 관한 신학적 성찰은 신학의 형식에 중대한 전환을 가져왔다. 그것을 그는 ‘민담의 신학’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민담’이란 설화의 한 갈래로서의 민담(sage)이라기보다는 구술된 민중 이야기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설화’(narratives)에 가깝다. 성서 시대의 설화가 성서 텍스트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면, 한국의 신학은 한국의 설화를 아울러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겠다.

그는 몇몇 글에서 한국의 설화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신학적 담론의 형식을 전환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를 반(反)신학 혹은 탈(脫)신학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신학이 이러한 형식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의 반신학/탈신학은 신학 내용뿐 아나라 형식의 전환을 기조로 한다. 신학은 우리 사회의 경험, 특히 민중의 경험을 구체화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러한 민중의 경험, 그것 속에 함축된 민중의 비언어적 언어인 한을, 한풀이의 사제의 자세로 담론화하는 것, 그것이 서남동이 말하는 반신학/탈신학의 요체다.

이와 같이 김지하의 ‘한 사상’과 서남동의 ‘한의 신학’은 한에 관한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자민족 중심주의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한의 개념화에 문제제기이다. 나아가 한의 사상, 한의 신학은 민중의 눈으로 세계의 고통을 해독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대안적인 실천적 사유의 체계이자 형식이기도 하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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