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 이후의 선교 3]



말이 말 같지 않은 시대의 말에 관하여




홍정호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맹세의 쇠퇴, 거짓말의 전성시대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알바생을 대상으로 거짓말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알바생들이 1위로 꼽은 사장님의 거짓말은 “일 잘하면 월급 올려줄게.”(28.1%), 알바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은 “하나도 안 힘들어요, 괜찮아요.”(32.0%)인 것으로 드러났다.[각주:1] 남녀를 대상으로 한 ‘연인 사이 거짓말’도 있다. 국내 한 결혼정보업체가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남자는 “이제 집에 간다.”(44.3%), 여자는 “화 안 났다”(39.2%)는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각주:2]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기꺼이 속아줄 수 있는 거짓말과는 달리 분노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거짓말도 있다. 타인의 삶을 위기와 파멸로 몰아넣는 거짓말이다. 선거철 공약(公約)은 결국 ‘공약’(空約)에 불과하다는 반복 학습의 결과 정치권의 말은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집단의 말로 인식되고 있다.[각주:3] 또한 비리를 일삼는 이른바 ‘지도층’의 말을 감싸고도는 듯 보이는 형사사법기관들의 행태는 법원과 검찰, 경찰의 말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낙제점 수준으로 끌어내렸다.[각주:4] 여기에 종교지도자연 하는 이들의 말은 구태여 보태지 않겠다. 믿을 말이 없다. 바야흐로 거짓말의 전성시대다.  


    아감벤(G. Agamben)은 그의 책『언어의 성사(聖事)』에서 우리시대를 ‘맹세의 쇠퇴기’로 명명한다. 말과 사물(사태)과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던 맹세가 쇠퇴한 이 시대를 아감벤은 “인간성이 어떤 탈구 앞에 처해 있”[각주:5]는 위기의 시대로 진단한다. 맹세가 사라지는 한편에는 벌거벗은 삶으로 축소되는 ‘살아있는 존재자’(the living being)의 들리지 않는 말이, 다른 한편에는 책임을 벗어던진 ‘말하는 존재자’(the speaking being)의 공허한 말이 메아리친다. 자기 말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는, 오직 말하기 위해 존재하는 ‘말하는 존재자’의 시대를 떠도는 말은 ‘그냥 하는 말’, ‘하나마나 한 말’, ‘해야 돼서 하는 말’, 즉 빈말이다.


    신앙(신학)의 문제는 빈말이 지배하는 맹세의 쇠퇴기가 ‘독신의 시대’(the age of blasphemy)라는 데에 있다. 아감벤은 “시원적 형태의 독신은 하느님께 가해진 모욕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당하게 입에 담는 것”[각주:6], 즉 신의 이름을 허투루 부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늘에 대고 쌍욕을 해대는 사람보다 입에 발린 말로 찬양하는 사람이 ‘시원적 형태의 독신’에 더 가깝다는 지적이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오늘날 교회 안의 얼마나 많은 말들이 맥락으로부터, 혹은 말의 사태로부터 분리된 채 허투루 불리고 있는가? 말과 사태와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는 충실한 맹세의 말,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는 말이라야 언어는 성사(聖事)가 된다. 그러니 ‘나는 차라리 입을 다물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또 이렇게 손가락을 놀리고 있으니, 딱하다고 해야 하나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 “의미화의 연관으로부터 풀려난 신의 이름은 공허하고 의미 없는 말, 곧 독신이 되며, 바로 이렇게 의미로부터 떨어져 나와 부적절하고 사악한 용도로 쓰일 수 있게 되는 것”[각주:7]이라는 아감벤의 일침은 전문가로서의 목사 혹은 직업으로서의 신학자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말함과 피함 사이


    빈말, 특히 남을 해할 목적으로 한 거짓말의 병폐를 보여주는 성서의 대표적인 예는 ‘나봇의 포도원’(「열왕기상」 21:1-19) 이야기 일 것이다. 농민 대중의 몰락을 억제하고 그들의 지위 복원에 정치적 관심을 기울였던 요시야 개혁세력의 관점을 반영하는 문서인 「열왕기상」에 실린 이 이야기는 법을 통한 대중의 주체화(김진호)를 시도하는 데 있어서 ‘언어’의 문제, 특히 ‘말’을 매개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해석적 개입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그동안 스스로를 ‘말’의 주체로 여겨 온 왕과 귀족과 사제세력의 모순과 기만성을 폭로함으로써 대중을 말의 주체이자 통치의 주체로 세우는 것이 그들 개혁세력의 목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패망한 북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한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가 요시야 개혁세력의 문헌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나봇의 토지에 대한 강탈은 ‘거짓 증언’을 매개로 교묘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아합이 나봇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그의 아내 이세벨이 문제해결사로 나서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다. 거기에는 이런 ‘지령’이 담겨 있었다.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게 하시오. 그리고 건달 두 사람을 그와 마주 앉게 하고, 나봇이 하나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고 증언하게 한 뒤에,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시오.” ―「열왕기상」 21:9-10


    이세벨의 계략은 성공했고, 나봇은 ‘하나님과 임금님을 저주’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 바깥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었다. 아합은 포도원을 거저 얻었다. 무고한 아합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 일로 ‘이세벨’(Jezebel)이라는 이름은 오늘날까지 서양문화에서 ‘악녀’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세벨의 악행에 대한 고발은 타종교인, 여성,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성서적’ 근거로 종종 활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페니키아 출신의 이방 여성인 이세벨에 대한 악마화(demonization)가 이 이야기의 주제는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봇의 이야기는 말의 주체로 여겨져 온 이들의 기만성을 폭로함으로써 농민대중을 ‘말’과 ‘법’(통치)의 새로운 주체로 호명해 내기 위한 요시야 개혁세력의 정치적 기획의 연속선상에서 놓인 정치적 우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이 생긴다. 이세벨은 ‘그녀의 정의’를 실행한 게 아닌가? 절대 주권자인 왕의 아내이자 종교‧문화적으로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이세벨의 입장에서는 왕의 아내로서의 ‘마땅한’ 권한행사를 포기하면서까지 실익(實益)을 양보해야 할 어떤 명분을 찾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세벨의 정의는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세벨이 ‘그녀의 정의’를 실행한 것이라면 나봇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그녀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실행했고, 나봇은 목숨과 재산을 잃었다.


법의 말과 '아마도'의 정의


    빈말, 혹은 거짓말에 둘러싸인 진실을 헤쳐 정의에 이르는 길이 험난한 까닭은 그 ‘말’이 ‘거짓’임을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하고 절대적인 기준, 혹은 그런 기준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 한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 We Live By)에서 레이코프(G. Lakoff)와 존슨(M. Johnson)은 언어학과 철학에서 주류로 여겨져 온 ‘객관주의’(objectivism)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은유’(metaphor)를 새로운 사고와 행위의 중요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그릇된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것”[각주:8]이었다는 그들의 반성은 참과 거짓의 경계가 분명한 이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현실의 단면에 대한 어떤 숙고를 요청한다.


    법의 통한 대중의 주체화를 모색한 요시야 개혁세력의 ‘꿈’과는 달리 현실에서 법(의 말)과 정의(의 말)의 관계는 어느 한 편의 손을 온전히 들어줄 수 있을 만큼 그리 단순명쾌하지는 않은 것 같다. 법과 정의의 관계는 모호하다. 적어도 그것이 펼쳐진 삶의 관계성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보기 전에는 그러하다. 법과 정의의 관계를 숙고한 데리다(J. Derrida)는 “법은 정의가 아니”[각주:9]라고 말한다. “계산의 요소”로 구성되는 법과 달리, 정의는 언제나 “계산 불가능한 것”[각주:10]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의에 관해서는 항상 아마도라고 말해야”[각주:11] 한단다. ‘아마도’의 가능성을 벗어난 정의, 법치의 이상과 동일시되는 정의는 결국 통치자의 독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금 통치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대중을 법의 주체로 호명해내고자 했던 요시야 개혁운동의 실패는 법, 혹은 법의 말을 통한 대중 주체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성찰의 과제를 우리에게 남긴다.


   빈말, 혹은 거짓말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아마도’의 정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드러난 사실은 드러나지 않은 더 많은 진실에 둘러싸여 있다. 면(面) 위에 찍힌 점 하나가 공허(空虛)에 둘러싸여 있듯 겉으로 드러난 한 점의 사실은 드러나지 않은, 혹은 드러낼 수 없는 막막한 진실의 표면에 아른거리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시대의 ‘나봇’, 즉 억울한 죽음을 향해 내몰린 이들에 대한 편파적 옹호는 신학의 마땅한 지향점이다. 여기에는 논란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말의 화신인 저 ‘이세벨’의 말을 향해서도 ‘아마도’의 정의를 철회해서는 안 된다. 이미 형성된 ‘올바름’의 잣대로 참과 거짓의 여부를 판단한 채 무책임한 도덕적 비난을 쏟아 부을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비난과 옹호 사이로 난 작은 틈을 헤집고 들어가 거기에서 ‘올바름’의 내용을 구성하는 지난한 길에 나서야 한다. 정의는 법치의 철폐도, 그것의 실현과도 동일시 될 수 없는 ‘아마도’의 가능성에 머문다. 그래서 정의는 오직 목숨을 건 ‘맹세’가 아니고서는 말해질 수 없는 무엇으로 남을 뿐이다. 맹세의 쇠퇴기에 정의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토록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김기석은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제9계명의 의미를 ‘참된 말을 하라’는 적극적 의미로 재해석한다.[각주:12]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에 이르는 참말을 하는 것이다. 참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의 말’로 환원되지 않는 말, ‘아마도’의 가능성을 철회하지 않는 말, 그래서 이웃을 살리는 희망의 말이다. ‘법의 말’을 통해 대중을 변혁의 주체로 호명해 내고자 했던 요시야 개혁운동의 이상은 우리 시대에 완수되어야 한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들, 할 말을 잃어버린 이들이 저마다의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되어 제 할 말을 하는 세상을 꿈꿔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입장과 처지가 다른 이들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는 신중함과 어리석게 옹호하지 않는 지혜가 모두 필요하다. ‘법의 말’을 넘어 참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보호를 위해 세워둔 확실성의 옹벽을 철거하고, 타자의 말(증언)이 놓인 맥락 속으로 용기 있게 걸어 들어가야 한다. ‘법의 말’을 넘어서 참말이 도달해야 할 곳은 나와 타자의 삶이 놓인 바로 그곳, 우리가 함께 서 있는 자리이다.


* 필자소개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강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객원연구원


** 이 글은 『지금 여기로 걸어 나온 십계』(가제)에 실린 원고의 일부를 수정한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경향신문, 「사장님 거짓말 2위 “가족 같은 분위기” 1위는?」, 2015. 4. 1. [본문으로]
  2. 한국일보, 「미혼남녀 10명 중 9명, 연인에게 거짓말 경험」, 2015. 12. 9. [본문으로]
  3. 한국일보, 「특임장관실 국민 여론조사 65%가 “사회 지도층 불신한다”」, 2011. 5. 5. [본문으로]
  4. 법률신문, 「법원·검찰에 대한 국민 신뢰도 경찰보다 낮다」, 2016. 3. 7. [본문으로]
  5. 조르조 아감벤, 『언어의 성사: 맹세의 고고학』,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 145쪽. [본문으로]
  6. 앞의 책, 89쪽. [본문으로]
  7. 앞의 책, 93쪽. [본문으로]
  8. G. 레이코프 ‧ M. 존슨, 『삶으로서의 은유』(수정판), 노양진 ‧ 나익주 옮김, 박이정, 2006, 270쪽. [본문으로]
  9.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37쪽. [본문으로]
  10. 앞의 책, 37쪽. [본문으로]
  11. 앞의 책, 59쪽. [본문으로]
  12. 김기석, 『광야에서 길을 묻다』, 꽃자리, 2015, 25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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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이후의 선교 2]



믿는 것과 의심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의 단상




홍정호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

    선교가 문제라는 지적이 새삼스러울 리 없습니다. 유럽에서의 선교와 식민주의의 협력관계는 근대의 서막을 여는 교황의 교서들에 이미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니콜라스 5세가 포르투갈의 알폰소 5세에게 발행한 ‘둠 디베르사스’(Dum Diversas, 1452)와 ‘로마누스 폰티펙스’(Romanus Pontifex, 1454) 등의 교서에는 새로운 식민지들에 대한 포르투갈의 배타적 점유권, 즉 노예무역을 포함한 식민통치의 권리인준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차 발견하게 될 식민지들에 대한 통치권을 미리 확립한 경우도 있습니다. 알렉산더 6세의 교서인 ‘인테르 카에테라’(Inter Caetera, 1493)는 앞으로 ‘발견’하게 될 식민지들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분할해서 통치할 것에 대한 교권의 인준을 포함합니다.


    식민 통치권에 대한 인준은 복음화의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민통치는 교회가 수행해야할 복음화 사업의 일환으로 여겨졌으며, 식민통치와 교회의 선교는 점차 불가분리의 관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교회로부터 통치권과 복음화 사명을 위임받은 이들의 임무가 ‘선교’(mission)였고, 그 임무를 수행하도록 (제도화된 교회로부터) 파송 받은 이들이 선교사였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선교사들의 관심은 식민지배와 복음화의 유착된 고리를 끊는 대신 협력의 증진을 통한 임무(선교)의 효율적 수행에 자연스레 집중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식민주의와 선교의 유착을 통해 개인적으로는 흠 잡을 데 없을 헌신적인 이들의 숭고한 실천을 통해 결코 숭고하다고 말할 수 없을, 흠으로 얼룩진 근대 선교의 역사가 비서구세계 곳곳에 새겨졌다는 데 있겠습니다.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에서의 빈곤과 폭력의 문제가 근대 선교의 식민주의적 실천과 과연 무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근대 선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숙고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식민통치에 대한 교황의 교서들이 발행될 무렵부터 식민주의에 대한 서구의 자기비판담론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20세기 말엽에 이르기까지 선교는 신학적 반성과 성찰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 에큐메니컬 총회들로 대표되는 20세기 그리스도교 선교의 변화와 쇄신을 향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교는 그 실천의 당위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재확인하는 역할에 머문 채 근원적 회의의 대상이 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종교다원주의 신학조차도 존재-신학의 형이상학적 구도 내에서의 관용의 포괄범위를 확장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 타자로부터 비롯되는 신학적 질문으로부터 선교를 재정의 하려는 시도에는 미치지는 못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임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집중하는 동안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은 괄호 안에 들어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20세기에도 선교를 ‘왜’ 지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적 물음이 제기되었을 때 선교학 전공자들로부터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계는 물론 자유주의 신학계에서도 오늘날의 선교신학은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각주:1]는 비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토록 중요한 선교가 현대인들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스캔들’로 남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더 많은 물음과 성찰이 단편적인 형태로나마 전개되어야 합니다.


**

    왜 선교는 여전히 ‘스캔들’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우리 시대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신을 믿는 것과 의심하는 것이 모두 불가능한 시대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어쩌면 이것이 선교가 스캔들로 남을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에 대한 믿음이 불가능하다는 건 인류가 지금껏 믿어왔던 방식대로 신을 믿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는 뜻입니다. 낭시(Jean-Luc Nancy)가 그러더군요.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하늘은 저 위에 있는 하늘이 아니고, 우리가 두 눈을 통해서, 또는 망원경을 통해 보는 그런 하늘이 아니”[각주:2]라고 말입니다. 이런 정도의 말은 꼭 낭시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당연한 이야기인데, 문제는 이 말이 당연하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시대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종교가 말하는 하늘이 더 이상 신이 거하는 장소일 수 없다는 사실은 하늘도, 그리고 거기에 거하는 신도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이 거하는 곳은 모든 장소와 다른 어떤 장소, 곧 “장소 아닌 장소”(Nancy, 같은 책, 19)라는 게 낭시의 말인데, 장소와 존재의 불가분리성을 생각한다면 신은 결국 “장소 아닌 장소에 없이 있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합니다. 저 어딘가의 ‘장소’에 그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장소 아닌 곳’에 ‘없이 있는’ 신이라니요, 발화자도 헷갈릴 각오를 해야 하겠지만, 언어를 통한 사유에 있어 개념으로 고착된 말의 껍질을 깨고 들어가 그것의 새로운 의미와 씨름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한편 신을 믿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과 더불어 의심하는 것 역시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에 대한 숙고도 필요합니다. 의심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논의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기록한 일련의 노트들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종류의 확실성도 앎을 보장할 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제 아무리 여러 단계의 의심을 거친 확실한 지식인 듯해도 실상 “가정에 대한 모든 검사, 모든 확증과 반증은 이미 하나의 체계 내에서”[각주:3]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를 두고 노야 시게키(野矢茂樹)가 든 재미있는 예시를 조금 각색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에 고양이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저것이 고양이임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한 번 의심해 보기로 합니다. 고양이임을 확인하기 위해 저것(고양이)을 데리고 와 마취제를 놓고, 죽지 않게 신중하게 해부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고양에 앞에 놓인 액체가 마취제가 맞는지부터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마취제가 아닌 마취제와 비슷한 색과 향을 지닌 다른 액체라면 고양이 해부는 시작도 못하고 망칠 테니까 말이죠. 일단 마취제라고 ‘믿고’ 고양이에게 투여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해부용 메스가 맞는지 의심됩니다. 확인을 위해 현미경을 가져와서 살펴봅니다. 이번에는 현미경에 든 렌즈가 해부용 정말로 렌즈가 맞는지 의심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렌즈에 관한 권위 있는 연구소에 렌즈를 보내보기로 합니다. 연구소에 보낼 렌즈를 포장하다가 렌즈를 담을 박스가 정말 박스가 맞는지를 의심합니다. 박스 모양의 단단하고 큰 과자는 아닌지 한 입 깨물어 봅니다. 중요한 건 아직 고양이 해부는 시작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박스가 과자가 아닌지 깨물어 보고 있는 중에 고양이는 마취에서 깨어나 도망가 버립니다.[각주:4]


    비트겐슈타인은 의심을 풀기 위한 증거가 또 의심의 대상이 되는 이런 상황, 의심이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상황을 두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려는 사람은 의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의심하는 놀이 자체는 이미 확실성을 전제한다.”(앞의 책, §115).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의심은 “검사되지 않는 어떤 것을 전제”(앞의 책, §163)로 할 때만 가능한 실천입니다. 시게키의 농담을 또 빌려와야겠습니다만, 축구선수가 ‘이것이 공인가?’라고 묻거나 ‘공 안에 폭탄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동안에는 축구를 할 수 없습니다. 의심을 멈추고 폭탄일지도 모르는 공을 힘껏 발로 차는 순간에 축구는 시작됩니다. 의심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의심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승인으로 중단되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앎은 결국 승인에 근거한다”(앞의 책, §378)는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

    앎이란, 혹은 ‘안다’는 느낌이란, 자기승인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무조건적) 승인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어느 순간 나에 대한 의심을 거둔 타인의 무조건적 환대와 인정 덕분에 내가 사회 안에 있습니다. 나에 대한 타인의 인정, 혹은 타인에 대한 나의 인정은 의심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순간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를 그냥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로부터 그냥 받아들여진 존재라는 사실에 있어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믿는 것과 의심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선교가 여전히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 선언—‘누군가로부터 그냥 받아들여진 존재라는 사실에 있어 예외인 사람은 없다’—의 충실한 매개자가 되는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필자소개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강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객원연구원


ⓒ 웹진 <제3시대>

  1. 장왕식,『종교적 상대주의를 넘어서』(대한기독교서회, 2002), 179. [본문으로]
  2. 장-뤽 낭시,『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갈무리, 2012), 18. [본문으로]
  3. 비트겐슈타인,『확실성에 관하여』(책세상, 2006), §105. [본문으로]
  4. 노야 시게키, “논리를 행위한다”, 고바야시 야스오 ‧ 후나비키 다케오 엮음,『지의 논리』(경당, 2008), 3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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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이후의 선교 1]



새로운 신학 운동의 전위대로서의 선교학




홍정호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공부모임에 가면 자연스럽게 전공을 묻는 질문을 받습니다. 보통 신학이라고 짧게 답하고 관심사를 나누는 대화로 이어지지만, 세부전공을 묻는 분들에게는 ‘선교학’이라고 말합니다. 간혹 발음을 잘못 듣고 “신학에는 그런 전공도 있느냐”며 화색(?)을 드러내는 분도 있지만, 대개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간혹 선교학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는 분도 만납니다. 한 마디로 ‘그런 것도 학문이냐’는 것이지요. 심지어 선교학은 식민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도구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말도 듣곤 합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나는 법이라니, 선교학을 두고 이런 거친 반응을 보이는 걸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경험에 의한 편견이 상식으로 고착된 결과일 테니까요.


    학문으로서의 선교학은 종교적 타자와의 만남을 신학적으로 주제화하는 작업입니다. 서양 근대 신학의 분과학문체계가 선교학에 할당한 역할은 주로 방법론적인 실천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선교학은 타자와의 만남이 일으키는 사건에 대한 성찰을 통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 신학, 종교간 대화의 신학, 종교다원주의 신학, 아시아신학, 세계기독교 신학, 상호문화 신학 등 연구의 주제와 대상에 따라 조금씩 그 이름과 내용을 달리하는 이들 신학의 바탕은 기실 선교학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학문들은 모두 종교적 타자와의 만남을 신학적으로 주제화하려는 시도, 곧 선교적 실천으로부터 비롯된 타자와의 만남에 대한 성찰과 관련 있다는 점에서 선교학의 연구와 분리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선교학은 그것을 하나의 방법론적 실천으로 제한하려는 근대 신학의 과학적 사유의 한계에 저항하면서, 분과학문의 전문성을 침범하는 통합적 사유를 촉진합니다. 선교학은 ‘모든 것으로서 아무 것도 아닌’ 신학적 정체성을 지향함으로써 근대 신학의 붕괴 이후에 도래할 새로운 신학의 탄생을 알리는 서곡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도 선교학이 그러한 역할을 하리라 기대할 수 없는 그곳에서, 선교학은 그 특유의 잡스러움과 탈경계적 지향성을 통해 하나의 ‘전공’으로 안착하는 데 성공한 근대 신학의 자기 완결적 주체성을 뒤흔드는 탈구축(de-construction)의 사도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합니다. 말하자면, 선교학은 신학(Theology)으로부터 신학적인 것(the theological)으로의 이행을 통해 존재-신학(Onto-theology)의 붕괴 이후의 신학적 사유와 실천을 주제화하는 일군의 새로운 신학 운동의 전위대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신학 운동의 전위대로서의 선교학의 역할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지리적 경계를 넘어 타자와 만나는 선교사의 실천과 상응합니다. 선교사가 이미 설정된 지리적 경계 너머의 타자를 향하듯 선교학은 근대 신학의 지리적이고 인문학적인 경계를 넘는 탈구축의 사유와 실천을 지향합니다. 이를 위해 선교학은 지적 세계의 소통의 문법으로 자리 잡은 익숙한 사유의 구조화 방식, 곧 과학주의적 사유의 문법과 결별하고, 그 체계 내에서의 권위를 스스로 반납함으로써만 선교적인 실천에 가 닿을 수 있다는 역설과 마주합니다. 학문성을 추구하지만, (그러한 방식으로는) 학문적이지 않아야 할 이중의 과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 신학에서 신학적인 것으로의 이행의 전위대를 자처하고 나선 선교학의 운명입니다.


   어쩌면 ‘새로운 선교학’(New Missiology)이라고 명명해야 할지도 모를 이 선교학은 시체 해부나 다름없는 존재-신학과 그 유산의 정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죽은 신을 두고, 그 구성과 체계를 논하거나, 애도의 담론을 재생산해 내는 따위의 일은 저들의 몫입니다. 선교학의 관심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와 다른 것으로서의 살아계신 하나님과 날것으로서의 신의 타자성이야말로 선교학이 관심을 기울이는 영역입니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은 대상에 대한 인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the Other)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그렇기에, 말해진 것(the said)으로서의 ‘존재’와 그것의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와 다른 것’의 말함(saying)에 대한 탐색, 그리고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와 다른 것)의 총체성을 더듬어나가는 타자성의 주제화야말로 선교학이 관심을 기울어야 할 영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어떤 분들은 그런 건 윤리나 종교철학이지 선교학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새롭다고 말해야 할 선교학이 실천신학의 범주에 오롯이 안착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텐데, 그런 분들에게 저는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미나마 모랄리아』의 한 구절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아카데미라는 사유의 조직체가 갖고 있는 권력은 너무나 커서 그 바깥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을 허공을 향해 외치는 불평꾼으로, 자화자찬하는 요설가로, 그리고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는 사기꾼으로 몰아간다.”[각주:1] 이 말을 뒤집어보면, ‘불평꾼’, ‘요설가’, ‘사기꾼’이라도 아카데미라는 사유의 조직체 안에 머무는 한 정통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하네요. 나아가 아도르노는 “자기 유지의 정신을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철학 본연의 임무”[각주:2]라고 말합니다. 모름지기 학문이라 이름붙일 수 있을 만한 것이라면 자기 유지의 정신과의 싸움은 불가피한 것이겠습니다. ‘선교’ 뒤에 따라붙는 ‘학’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선교학은 자기 유지의 정신과 보다 적극적으로 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연재의 제목을 ‘관용 이후의 선교’로 정해보았습니다. 선교가 관용은커녕 배타주의의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여전히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관용 ‘이후’가 웬 말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관용은 한 번도 ‘제대로’ 실천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억지로’ 실천될 수 있을 뿐입니다. 관용은 언제든 깨지기 쉬운 주체중심의 윤리, 즉 타자의 타자성을 주체의 효율적 관리 아래 두기 위한 자유주의적 기획의 도덕주의적 구현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용 담론에서 주체는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선 적이 없으며, 타자는 대상의 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관용 이후의 선교에 관한 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관용 담론의 신학적 내면화를 통해 주체 중심의 윤리가 재생산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주체의 지배가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자리매김할 것이 우려되기 때문입니다. 주체의 지배가 일으키는 문제는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한 것이라면) 서양적 주체를 한국적 주체로 자리바꿈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이 “자기 유지의 정신”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관용은 이 자기 유지의 정신을 통해 재생산되는 주체의 견고한 자기중심성의 지속을 위한 알리바이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관용이 문제가 아니라, 관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주체의 견고한 자기중심성이 문제인 것입니다.


    관용을 통한 주체의 지배가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른바 ‘종교다원주의’ 신학에서입니다. 자기중심적 배타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배타주의’와 자기중심성의 계기를 드러내는 ‘포괄주의’와 달리, ‘종교다원주의’는 관용을 전면에 내세우기에 그 은폐된 자기중심성을 망각하기 쉬운 기만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종교에 관한 자유주의적 관용 담론은 개별 종교의 정체성에 각인된 차이를 존재론화(ontologize)하고,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차이를 자연화(naturalize)하는 식민담론을 재생산해 냄으로써, 관용을 통한 주체중심의 통치의 지속에 기여합니다. 이 점에서 관용 이후의 선교에 관한 탐색은 ‘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선교’에 관한 모색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은 선교는 관용의 이념을 신학적으로 내면화하려는 주체중심의 실천을 넘어서는 선교(학)의 타자 윤리적 전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앞으로 그 이야기를 조금씩 해 보겠습니다.


* 필자소개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강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객원연구원


ⓒ 웹진 <제3시대>

  1. 아도르노,『미니마 모랄리아』, 96. [본문으로]
  2. 앞의 책. 10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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