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의 환대와 방문의 환대

 


김혜령[각주:1]
(이화여대)


 

          얼마 전 우연히 EBS <다문화 고부열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캄보디아에서 시집온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는 한 시어머니의 곤란한 이야기를 보았다. 며느리의 아버지인 사돈어른이 한국에 일을 찾아오게 되었는데, 몇 달 되지 않아 공장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오갈 데가 없는 신세가 된 사돈어른을 아들과 며느리, 손주와 함께 사는 자기 집에서 지낼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마음에 사돈어른의 동거를 허락한 첫 마음은 날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편한 마음으로 변하게 되었다. 더운 기후를 갖고 있는 캄보디아 문화를 따라 사돈어른이 유난히도 더운 올 여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웃통을 훌러덩 벗어버리고 거실 한가운데를 떡 하니 차지한 채 TV 삼매경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집주인 시어머니는 아들 며느리 모두 일하러간 낮이면 웃통 벗은 사돈어른이 민망하여 자기 방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속앓이를 하게 되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사돈어른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 불편했던 시어머니의 20대 딸은 아예 견디지 못하고 당분간 친구 집에서 지내겠다며 짐까지 싸서 나가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 것은 눈치 없이 거실 한 가운데에서 웃통을 벗도 TV를 보는 캄보디아 사돈어른을 보며 나도 모르게 ‘뻔뻔함’이라는 느낌과 ‘못마땅함’이라고 불러야 하는 감정이 본능처럼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평소 스스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졌다 자부했던 윤리적 자만 때문이었을까?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는 거친 마음결을 다시금 확인하며 여전히 내 자신이 진보 코스프레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 고아, 과부, 외국인 등 약자라 불릴 만한 이들에게 따뜻한 호의와 나눔을 베풀라는 사랑의 명령이 그리스도인 모두를 향한 예수의 명령임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신약학자 바이런은 이러한 사랑의 명령이야 말로 사회적 기피대상으로 취급받던 약자들에 대한 예수의 ‘환대 선교’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는 이방인과 약자들을 공동체의 울타리 밖으로 내치고 그들과 더불어 살기를 거부하는 반(反)환대주의자인 것이다.  

         낯선 이방인, 과부, 어린이, 병자, 몸 파는 여인 등 다양한 이유에서 사회적으로 주류 공동체의 외부에 있을 수밖에 없는 약자들에 대한 무한 ‘환대’가 예수 선교의 중요한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캄보디아 사돈어른의 예에서처럼 우리는 예수를 따라 현실에서 타자를 환대하는 일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열매 맺지 못한다는 것을 종종 경험하고는 당혹감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호의를 베풀었으나 자신에게 제공된 은혜를 당연한 것처럼 누리는 이들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결을 거칠게 만드는 못된 감정들의 발생원인을 금세 ‘배은망덕’이라는 사자성어로 아주 자연스럽게 합리화한다. 

          선한 마음을 그릇이라고 비유한다면, 우리의 선한 마음은 바닥이 그리 깊지 못한 그릇인가보다. 시원한 물을 퍼주다가도, 계속 상대방이 요청을 하게 되면, 금세 아... 이거 내가 먹을 물까지 다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기게 되고, 눈치 없이 물을 더 달라고 요구하는 상대방이 야속해 지기도 한다. 선한 마음으로 분명히 다가간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이가 요청을 계속해서 더 하거나, 고마운 마음을 내가 충분히 만족할 만큼 표하지 않을 때, 어느새 우리는 그를 환대한 것에, 그에게 나의 것을 나누어 준 것에 후회를 하게 되고 만다.  

          이러한 현실적 경험들이 쌓이게 되면 사람들은 아무나 환대하기를 바라지 않게 된다. 우리가 환대하면 그 환대에 예의바르게 반응할 사람, 또 우리가 환대한 만큼 자신을 변화시켜서 가난이나 어려움에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성실한 사람, 우리의 환대에 진심으로 고마워 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을 우리는 환대하기를 원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거리의 술 취한 노숙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선한’ 환대를 마땅히 받을 수 있는 요건에 부합하지 않은 사람들, 보다 야박하게 말해서 그러한 환대를 받을 가치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러한 현실적 환대의 아이러니를 정치적 영역으로까지 확대하며 설득력 있는 분석을 보여준다. 그는 앞의 예와 같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환대받을 만한 사람을 환대하는 것을 ‘초대의 환대’라 부른다. 즉 환대받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조건을 따져서 선별적으로 환대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선택된 환대, 즉 ‘초대의 환대’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한 공동체에서 누구를 선택하여 초대의 호의를 베풀 것인가라는 문제는 ‘우리 공동체에 이익이 될 것인가, 안될 것인가’를 따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정치적 문제이고, 환대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구별한 법적 절차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현실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환대할 만한 공간적, 물리적, 경제적 여유가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초대의 환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최근 몇 년간 유럽의 난민 유입과정에 있어서, 난민으로 수용될 수 있는 사람들의 자격을 따지는 것도 사실을 ‘초대의 환대’의 대표적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난민을 수용하되, 우리 공동체의 해가 되지 않는 이들만 수용할 것! 고마워 할 줄 아는 이들만 받아들일 것! 우리 공동체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수용할 것! 테러와 같은 위험 요소를 가진 이들은 철저하게 배제할 것! 이 모든 것이 결국 조건을 따져서 선택적으로 환대하는 ‘초대의 환대’의 정치적이고 법적인 조건인 것이다.  

          물론 데리다는 이렇게 초대의 환대라도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매우 고무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실제로 난민 수용을 거의하지 않는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자면, 까다로운 조건이나마 따져서 난민 수용을 할 수 있는 만큼 최대치로 하려는 일부 서유럽 국가들의 난민정책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진보한 것들 중에 하나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데리다는 환대가 이렇게 ‘초대의 환대’에만 머물게 될 때의 위험도 잘 짚어낸다. 초대의 환대는 결국 선택된 이방인이나 약자가 환대를 베푸는 사람이나 공동체의 규칙과 문화를 침해하지 않고, 그것을 아주 잘 따르겠다는 암묵적이고 심지어 법적인 동의 아래에서만 이루어지기에, 그 선택을 받는 이의 입장에서는 – 당장은 고마운 일일 수 있으나 – 결국 자신을 이제까지 구성하였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존재방식을 일정부분 혹은 전체를 포기해야하는 것의 다름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선택적 환대는 정확히 말해 환대를 받는 이의 모든 다름을 인정하고 그가 내 집이나, 우리 공동체에서 완전히 동등하게 활동하게 하는 권리까진 주진 않는다. 그래서 데리다는 이러한 ‘초대의 환대’가 약자에 대한 강자의 ‘관용’(tolerance)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 속에서 누구를 환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벌일 때, 성서와 예수의 복음은 우리의 논쟁을 근본부터 흔들어 놓는다. 레위기 19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국인을 환대하라고 하시는데, 여기에는 어떠한 조건이 달려 있지 않다. 어떠한 종교를 가진 외국인인지, 어떠한 피부색을 가진 외국인인지, 어떠한 신분의 외국인인지 그 단서가 달려 있지 않다. 유일한 환대의 단서가 있다면, 그것은 환대받는 자에게 있지 않고 환대하는 자에게 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외국인으로 떠돌아 다녔던 경험이 환대의 단서가 될 뿐이다. 예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헐벗은 자, 굶주린 자들을 환대하던 자들이 최후에 날에 복을 받을 것이라 말했다. 여기서 예수는 그들이 굶주리는 이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이 게을러서이건, 병들어서이건, 부모를 잘못 만나서이건, 노력하지 않아서이건 가난의 이유가 언급되지 않았다. 그들이 헐벗고 굶주린다는 사실 하나만이 환대의 충분조건을 갖춘 것이다.  

          오직 도움이 필요하다는 상황만이 환대의 조건이 되는 ‘무조건적 환대’에는 주도권이 환대받는 이에게 있다. 낯선 피부색과 언어를 사용하며 다가오는 이, 굶주림에 배를 움켜잡고 손을 내미는 이. 그들 자신이 우리에게 자신을 환대하라고 요청하고 명령한다. 그들이 우리의 호의에 배신하지 않고 우리 공동체에 이익을 줄 것인지, 배은망덕하지 않고 충분하게 우리에게 고마워 할 것인지 먼저 선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도움을 요청하고, 우리는 그 요청에 조건 없이 환대하고 도와야 하는 명령만이 있을 뿐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무조건적 환대를 초대의 환대와 구별하여 ‘방문의 환대’라는 다른 이름을 붙여준다. 초대와 달리, 방문은 예기치 않게 다가올 때가 많다. 방문의 환대는 그들의 갑작스런 방문에 문고리를 쥐고 방범구멍으로 그 얼굴을 탐색하지 않는다. 방문의 환대는 조건 없이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조건 없이 문을 열어 우리의 공간 안에 받아들이는 호의는 환대받는 자의 태도를 예상할 수 없기에 큰 두려움을 동반한다. 실제로 캄보디아 사돈어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 아니 이러한 예 정도는 아직은 감당할 정도일지 모른다 -, 혹은 유럽에서 테러를 일으키는 소수의 이민자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방문의 환대는 우리의 공간과 삶, 심지어 생명의 손해까지 감수해야하는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데리다는 ‘방문의 환대’는 현실적이라기보다 ‘이념의 환대’에 불과하며, 법적으로도 명시화 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방문의 환대’는 ‘이념의 환대’일 뿐이라는 데리다의 선언은 자칫 무조건적 환대의 전면적 포기로 보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무조건적 환대의 현실적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환대를 끊임없이 이념적으로 생각하고 추구하는 인간의 무한한 윤리성에 매우 큰 의미를 둔다. 인간이 무조건적 환대의 현실적 어려움에 더 이상 그러한 환대를 논하고 생각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는 ‘초대의 환대’의 대상과 범위마저 야박해지기 십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방인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굶주림이라는 단 한가지의 사실만으로도 그를 환대해야 한다는 성서의 명령을 하늘나라에서나 통하는 예외적 법쯤으로 외면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하는 야박하고 소심한 선택적 환대 행위에 스스로 만족하고 안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현실적 최선이라고 자위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어쩌면 환대받는 이의 배신이나 배은망덕은 우리가 타인에게 선택적으로 베풀고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호의이자 최고의 환대라는 우리의 윤리적 자만이자 자아도취에 기인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어찌 보면 우리의 호의와 친절에 더 큰 호의와 친절을 요구하고 감사한 마음을 충분히 표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도움을 받는 이가 사실은 그 나름의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는 ‘자유인’임을 증명하는 것일 수 있다. 친절한 환대에 대해 감사해야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지만, 그래도 그러한 도리가 의무로 강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구속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감사가 신앙의 자유에서 기인할 때에만 참된 의미가 있음을 유비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초대의 환대’와 ‘방문의 환대’, 다시 말해 ‘선택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의 아이러니를 앞에, 우리는 ‘나는 베풀고 너는 고마워해야만 한다’ 식의 태도, 요즘말로 ‘답정너’(답은 정해져있고, 너는 대답만 하라는 뜻의 줄임말)의 태도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번 쯤 신중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 웹진 <제3시대>

  1.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신학박사(윤리)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서울 향연감리교회에서 점심봉사를 하며 가끔 설교를 맡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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