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이유가 사라진 곳에서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개역개정)


    감사, 영광, 기쁨 찬양과 같은 송영의 언어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언어입니다. 이런 언어들은 그 무게로만 따지자면 사랑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도 같은 언어이지요. 감사와 찬양, 기쁨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그 분을 향한 무한한 긍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송영의 언어는 존재론으로는 하나님이 ‘신’으로서 누리는 독점적인 지위를 밝히 드러내는 말이며, 동시에 윤리적으로는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늘 상기시키고, 겸손해야 함을 일깨워주는 언어들입니다.


   그런데, 실상 지금 우리의 생활과 기독 공동체 안에서는 정작 송영의 신학은 천박한 인과율의 굴레 안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제 아들이 이번에 좋은 대학에 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 사업이 술술 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는 언어들은 우리의 주변에서 늘 맴도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송영은 번영신학과도 강력히 결합되어 우리의 기존 신앙 체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한데, 요즘 들어서는 그런 번영신학이 약간 변형된 형태로 송영의 언어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컨대 ‘하나님, 이번에 제가 일본여행을 계획했는데, 마침 다른 일로 취소되어서 못 갔더랬습니다. 그런데, 가려던 그 곳에 지진이 난 겁니다. 그 곳에 가지 못하게 막으신 당신의 계획이 놀랍습니다!’ 라든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인의 집안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만약 몰랐다면 저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와 같은 언어는 결코 우리의 귀를 거슬리게 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인과율의 송영이 녹아든 형태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18:11~13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인과율 송영’의 전형입니다. ‘불의를 저지르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는 바리새인의 기도 말이죠. 이는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 이미 천년도 더 이전에 부정하셨던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교회 안에서는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송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제대로 된 송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또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떤 감사의 제목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것은 온전한 감사가 아니라는 지적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하박국 본문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록… 할지라도’의 송영입니다. 내게 키우는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내가 먹어야 할 양식인 포도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올리브 열매는 달린 것이 없습니다. 내게 우유를 제공하고 고기를 제공해 주는 자산 중의 자산, 양과 소가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음에도 내게는 구원의 여호와가 계시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로 사건이 진행될지라도, ‘통념적인 감사의 제목’들이 사라질지라도 내게는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찬양과 감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록~ 할지라도’의 송영은 앞에서 살펴본 인과율의 송영보다는 훨씬 송영의 본질에 가까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 찬양 등 송영의 언어는 성서 곳곳에서 나타나듯이 어떠한 상황 속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고, 소망과 믿음을 통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선한 뜻’에 대한 깊은 신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러한 기도는 요한복음 9장에 나타나는 ‘날 때부터 맹인’을 고치시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 아비와 그 당사자의 죄악으로 인한 결과라고 여기던 인과율의 연줄을 끊어 버리셨습니다. 오직 그가 맹인인 이유는 그 날 그 순간에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건을 목도하고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의 찬송을 돌리게 하려고 생긴 일이라 설명하십니다. 즉, 송영이란 현실의 당면한 문제, 가시적인 개별 현상을 뛰어넘어 드려지는 것이며, 소망과 믿음의 이름으로 영원 불멸한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를 감사하라는 일종의 ‘정언명령’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다윗의 탄원 시편이라든지 오늘 읽은 하박국의 본문에서 등장하는 ‘비록 ~할지라도’의 신학은 현실을 뛰어넘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과연 오늘날의 우리 현실에서도 그러한 송영이 윤리적으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할지라도’의 송영은 신앙의 순전함을 강력하게 보장하는 송영이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최근의 신학에서도 이런 송영을 장려하지요.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녹록치 않아 보입니다. 마치 어디를 가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만이 ‘답’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겠지만, 하나님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라. 하나님이 계시는데 대체 불평할 게 무엇인가?”라는 당위적인 선언으로 그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과율의 송영보다 더 억압적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역사 속에서 긴 호흡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무화(無化)시키는 결과를 빚어냅니다. 이러한 송영과 송영의 장려가 지금 고난과 고통의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을 얼마나 매만져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당장 내 주머니에는 소유한 것이 없더라도, 하나님이라는 ‘백지수표’를 소유했다는 말은 마치 미래의 수입을 담보로 끌어 쓰는 신용카드와 무엇이 다릅니까! 현재 존재하지 않아서 끌어쓰는 감사는 스스로를 위무하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채우는 것’으로서의 감사라는 매커니즘은 더욱 공허한 종교적인 허무를 초래하지는 않을까요? 최근 횡행하는 힐링의 담론들,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 는 식의 이야기들은 그렇지 않아도 황폐한 우리 마음에 더욱 큰 구멍을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우리가 불러야 할 송영은 무엇일까요? 다시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있지도 않은 티끌만한 감사의 이삭을 줍고 또 주워 감사와 찬양의 제삿밥을 짓는 그런 류의 송영은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렇게나 다짜고짜 감사해야 합니까? 왜 감사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 이름만으로 감사하라는 공허한 기계적 감사를 해야 하겠습니까?


    이 시대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송영의 첫걸음은 송영에 대한 강박과 조급증을 버리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송영에 앞서 잠잠해지는 것, 달리 말하면, 그 감사의 제목, 그 자리가 비어 있음에 충만해져야 합니다. 섣불리 비어있는 송영의 자리에 하나님을 앉히지 않는 것 말입니다. ‘비록 ~할지라도’의 감사가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이며, 어서 하나님을 송영의 자리에 앉히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부정의 자리에 홀로 서서 송영을 멈추고 결연히 견뎌야 합니다. 이육사의 시 ‘광야’는 이렇게 불가능한 송영 앞에 서서 그 모욕과 부정의 시간을 견디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하여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친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고선 지고 

   큰 강물이 드디어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내 여기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 시에 대해 황현산 선생이 내린 해석과 우리가 모색하고자 하는 송영의 대안에 대해 연결지어 설명해보려 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현실은 산맥들도 차마 범하지 못한 그 광야, 바다를 연모하여 휘달렸지만, 결코 그 곳만은 길닦기를 포기한 그 광야를 닮았습니다. 송영이 가능할 리 만무한 이 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큰 강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큰 강물, 부지런히 계절을 피고 진 인류 전체의 고고한 역사의 강물은 흐르고 있음은 명백합니다. 마치 이소라가 노래한 것처럼,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고 고백할만큼의 고독이 강렬합니다. 그 강물 앞에서 나란 존재는 광야 앞에서 찌질한 삶을 견디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짧은 한 인생 살다 지는 티끌이 된 듯 합니다. 그렇지만, 화자는 말합니다. 눈은 내리고 있고, 매화 향기는 홀로 가득하다구요. 매화 향기는 작지만 고결하고, 단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 매화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 부끄러워하지만, 오히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된 세월의 아득함에 좌절하지 아니하고, 그 장구함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결국 현재로서는 별다른 힘을 지닌 것도 아니고 합창해주는 사람도 얻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화자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으로 결심하고 있습니다.[각주:1]

    가난한 노래의 씨, 이것이 우리가 불러야 할 송영이 아닐까요? 줍느니만 못한 감사의 조각들을 주워 연명하는 인과율적인 송영을 그만 두십시오. 가지지 못한 것을 ‘하나님’이라는 허구적 이름으로 치환하여 지금을 위무하는 ‘비록 ~할지라도’의 감사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에게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으로 족합니다. 감사할 수 없음에 감사하십시오. 오히려 우리가 송영의 자리를 비워 두고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다면, 천고의 뒤에 광야에서 목을 놓아, 진정한 초인(들)[각주:2]이 부를 그 송영을 꿈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웹진 <제3시대>


  1. 이 단락의 내용은 황현산의 책, 『우물에서 하늘 보기』(삼인, 2015), 18~19쪽의 내용을 요약, 각색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2. 이 ‘초인’에 대한 설명 또한 황현산의 해석으로 읽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 초인은 어떤 비범한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름지기 그렇게 되어야 할 인간이며, 저마다의 자유의지로 행동하게 될 미래의 인류다. 이 “초인”이라는 표현에는 고난의 극한에서 노래 부르기를 선택한 자의 의지에 대한 시인의 자부심과, 높은 정신적 경지를 확보할 미래의 인간에 대한 강렬한 기대가 겹쳐 있다. 이 새 시대의 새 인류는 지금 시인이 숨죽여 부르는 노래를 마음 놓고 “목 놓아 부르게” 될 것이다. (황현산, 『우물에서 하늘 보기)(삼인, 2015), 1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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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이 시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그 곳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마음 한 켠에 어떤 하나의 장소, ’그 곳’을 두고 산다. 이 문장을 접한 지금 당신이 떠올리는 ‘그 곳’은 행복하고 기뻤던 기억이 있었던 곳이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아프고 슬픈 기억이 있었을 수도 있다. 또한 시간이라는 축으로 비교해보면 과거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곳일 수도 있지만, 죽음 이후에 가는 ‘천국, 하늘나라’처럼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는 그런 장소일 수도 있다.  


       ‘그 곳’하면 떠오르는 그 장소가 좋았던/나빴던 기억이 있는 곳이든 혹은 과거 어느 한 때의 장소이든, 미래에 도달해야 할 그 장소이든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별개로 아주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장소에서 살아간다. 일상적인 터전을 —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로 — 잃은 유민이나 난민의 신세가 아니라면,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거의 비슷한 공간을 점유하고 경험하며 살아간다. 매번 같은 교통수단을 타고 출근을 해서 같은 공간에 가서 업무를 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같은 집 안에서 매번 해 오던 살림을 반복하는 것이 보통의 삶이다. 한데 왜 유독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은 일상적인 공간과 다르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일까?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은 세 가지의 의미에서 ‘시(이)기’ 때문이라 상상해본다.   


1. 그 곳은 시(Ti)다 : '결핍'으로서의 그 곳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는 계이름이 있다. 우리 고유의 오음계도 있지만, 근대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의 음계는 도(Do), 레(Re), 미(Mi), 파(Fa), 솔(Sol), 라(La), 시(Ti). 이렇게 일곱 개로 이루어져 있다. 서양의 7음계에서는 음정을 쌓아 화음을 만드는데, 서로 잘 어울리는 음끼리 쌓으면 ‘협화음’이라 부르고, 그렇지 않으면 ‘불협화음’으로 분류한다. 보통 1, 4, 5, 8도 화음을 협화음 중에서도 가장 잘 어울린다 하여 ‘완전’협화음이라 부르고 나머지는 완전하지 않더라도 어울리는 화음으로 분류한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관심하는 계이름 ‘시(Ti)’는 불협화음 중에서 ‘장7도’이라 불리는 화음을 생산한다. 그나마 ‘장 2, 3, 6도’ 화음은 우리의 귀에 완전협화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안정감을 주는 반면, 장 7도만큼은 가장 불안정한 화음을 들려준다.

  

        내가 ‘그 곳’을 ‘시(Ti)’라고 표현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시(Ti)’라는 계이름을 통해 불협화음이 발생하듯이 ‘그 곳’은 늘 우리 삶에서 불완전한 화음으로 한 켠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가 들어가는 major7 이라는 코드는 결정적으로 첫 번째 음인 ‘도’에서 ‘미’, ‘미’에서 ‘솔’까지 세 음씩 쌓을 때는 아주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화음이지만, 거기서 또다시 세 음째인 ‘시’음을 쌓으면 앞에 쌓았던 조화가 모두 무너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치 달리기 경주에서 1~3번 주자가 줄곧 선두를 지키다가 앵커 주자가 중간에 넘어져 모든 경주가 어그러지는 기분이다. 절룩거리는 시, 완벽을 깨뜨리는 이 ‘시’는 마치 미운 오리 새끼처럼 눈총을 받기 딱 좋은 녀석인 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성과 그 조화에 일침을 가하며, 조화로움을 깨뜨린다 비난받는 ‘시’는 기죽거나 위축되지 않고 자기 소리를 낸다. 발가벗겨진 채로 적나라하게 자기 자신을 내비치고 내던지는 기분이다. 협화음이 어렵사리 만들어 놓은 철옹성같은 완벽성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그 곳은 ‘시’음이 만들어내는 ‘major7’ 코드와 같지 않을까? 우리는 늘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진행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장밋빛 계획을 늘 세우고, 그렇게 실행해 가지만 그 행복한 삶 속에서 언제나 ‘시’가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이 거기에 끼어들어 절룩거리게 한다. 가난, 폭력, 이기심, 시기, 질투, 질병, 그리고 죽음 등 우리를 늘 괴롭히는 그 고통의 장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과거에 좋았던 기억을 가진 장소나 미래에 다다러야 할 그 장소들은 ‘지금 없기’에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하고, 나아가서는 우리가 현실에서 만족할 가능성을 지연시킨다.  


       이러한 ‘결핍’으로서의 그 곳, ‘시(Ti)’로서의 그 곳을 최근의 철학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는 용어, ‘타자(他者)’라고 바꾸어 부를 수도 있을까? 우리는 결핍들인 ‘타자’를 끝없이 사랑하고 성취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미워하고 어서 그것들이 사라지도록 바라기도 한다. 인간은 언제나 결핍으로서의 ‘타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아가며 그것이 곧 삶의 주된 동력이라고까지 부를 수도 있을만큼 강력하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깡은 오히려 그러한 욕망이 사라지면 우리가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서는 그 욕망의 성취를 우리가 자발적으로 지연시키기까지 한다고 말한 바 있지 않았던가!   


2. 그 곳은 시다(Sour) : 몸이 먼저 반응하는 '새콤한' 그 곳


       그 곳은 신 맛이다. 그 곳을 맛 중의 하나로 표현할 수 있다면 아마 ‘신 맛’과 가장 가까울 것이다. 비유의 언어일 따름이지만, 만약 그 맛이 짜거나 달콤하거나 맵다면 우리 기억에 강렬하게 ‘그 곳’으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신 맛은 매우 묘한 매력을 가진 맛이다. 신맛하면 무엇부터 떠오르는가? 노오란 색의 레몬 또는 집 안에 있는 식초가 떠오를 것이다. 이런 음식들은 생각만 해도 벌써 침부터 고이고, 미간이 찌푸려지곤 한다. ‘여우의 신 포도’라는 우화에서 나오듯이 인간에게 신 맛은 고대로부터 부정적인 맛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동시에 신 맛은 인간에게 사랑받는 맛이기도 하다. 인간은 생명이 뱃속에 잉태했을 때, ‘신 맛’을 찾기도 하고, 뭔가 깔끔하게 뒷맛을 잡아주거나 잡내를 제거하는 데에 신 맛을 이용한다. 심지어 가학적이라고까지 여겨지는 그 애증의 맛. 그 맛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곳’의 맛과 연결 지어볼 수 있다. 한 블로거가 표현한 ‘신 맛’에 대한 말을 인용하면서, 그 신 맛이 가지고 있는 묘한 매력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사실, 신 맛이 그렇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호사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달콤함의 옆에 어느새 능청스럽게도 자신의 성격을 죽이며 새콤함으로 다가가 달콤함을 보조해 주기도 하고, 온통 지치기 쉬운 미각을 흔들어 깨우며 식도락의 기쁨을 되새김질 하도록 격려해온 결과이다. 심지어 가끔은 단 맛에게 자신의 공적마저 양보하며 자취를 완전히 감추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 신 맛은 악착같다. 때로는 자신의 고개를 숙이기도, 때로는 쉽지만은 않은 일을 도맡아 오며 각고의 노력을 들여 악착 같게도 신 맛은 인정받고 있다.[각주:1]  


       우리가 기억하는 ‘그 곳’이 주는 맛도 레몬처럼 시큼하다. ‘그 곳’에 대한 기억과 향수는 언제나 우리 안에 잠복하고 있지만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곳’과 관련된 자극이 주어지면 불현듯 나타나 우리의 뇌와 몸을 쏘고 도망간다. 그 자극은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이성의 판단을 받을 틈을 주지 않고 빠르고 순간적으로 지나간다. 이성이 중지되고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일상이 무료하기 짝이 없을 때마다 ‘그 곳’은 자연스럽게 아무 일 없는듯이 흘러가는 일상을 중지시키고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로부터 왔는지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곳’은 그렇게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숨어 있으면서도 불현듯 나타나 우리의 존재를 건드리는 ‘신 맛’과도 같다.  


3. 그 곳은 시다(Poem) : '극단적'인 것으로서의 그 곳


        ‘그 곳’은 우리 삶의 ‘시(poem)’로서 존재한다. 그 ‘시’라는 것이 무엇일까? 무엇인지 딱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공감하고 있는 ‘시적인 무엇’이란 것이 있다고 우리는 공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학비평가 황현산 선생은 『우물에서 하늘보기』(2015. 삼인)에서 ‘시적인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에는 한 편 한 편마다 무언지 모를 극단적인 것이 있다.(…)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들에게 “무언지 모를 극단적인 것”이란 말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시는 늘 우리에게 이 세상의 시간이 아닌 것 같은 다른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 사람들은 저마다 제 심정이 한 자락 노래를 타고 날아오르듯 약동하고, 삶의 어떤 매듭이 물결처럼 밀려드는 몽환에 휩쓸리고, 정신이 문득 소스라치면서 도 하나의 새로운 각성에 이르던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시적인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동력과 연결된 모든 것들을 말한다. 그 동력은 정신이 집중된 시간에도 나타나고 심신이 풀려 자유로워진 시간에도 솟아올라 내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은 아님을 알려주곤 한다."[각주:2]


        ‘그 곳’은 그렇게 극단적인 무엇이다. 우리가 삶에서 있는 힘껏 치닫다가도 애써 발을 땅에 끄을며, 멈추어야 하는 거기에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바로 ‘그 곳’이다. 가고는 싶고 어디인지도 알고 있지만, 갈 수 없는 곳. 그래서 더욱 갈망하게 되는 곳이 ‘그 곳’이다. 그래서 ‘그 곳’은 시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곳이다. 너무나 원하지만, 갖가지 현실의 제약으로 갈 수 없는 곳, 그럼에도 ‘시’라는 극단적인 언어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거기가 ‘그 곳’이다.

       마치 신명기 34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모압평지에 선 모세의 느낌이라고 하면 어떨까. 분명히 자기 자신의 발로서는 넘어설 수 있지만, 하나님의 준엄한 소리가 계속해서 가로막는다. ‘너는 거기에 건너가지 못할 것이다.’(신 34:4)라고 말하기에 오히려 더욱 미치도록 건너가고 싶은 그 곳! 모세에게는 삶의 이유였고, 광야 여정의 최종 목적인 그 곳! ‘여기까지 그 많은 사람들은 데려온 게 나인데, 그깟 잘못 하나 때문에 이 선을 넘어가지 못하는가!’라고 울부짖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그 곳, 거기가 ‘그 곳’이다.


그 곳은 없다, 하지만...



        ‘시다’라는 말로 정리해 본 ‘그 곳. 과연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은 있는 것일까? 있다면 어디일까?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은 ‘그 곳’이라 말하는 게 가장 정확한 언술이겠지만, 나는 그럼에도 ‘그 곳’이란 ‘없음’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떠올리는 그 곳, 그리고 거기서 함께했던 그 ‘시간’, 그 ‘사람’ 그리고 ‘수많은 무언가들’은 이제 없기에 존재한다. 그 곳이 없기에 고통스럽고, 그 곳이 없기에 이성과 의식이 아닌 무의식과 몸으로만, 언어를 초월한 언어로만 갈 수 있다. 그래서 꿈에서나마 그려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곳’은 가려고 해도 결코 갈 수 없는, 어떤 극단적인 무언가로 남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삶을 움직이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훗날 우리가 미래의 그 순간에 기억할 ‘그 곳’은 언젠가 과거에 우리가 지나온 ‘현재적 공간’이었다. 없음으로 그리워하고 추억하기 이전에, 우리가 ‘그 곳’으로 만들어지기 이전 찰나와 같은 그 순간에 별과 같이 반짝이는 ‘그 곳’을 소중하게 만들려 몸부림친다면 시린 가슴으로 ‘그 곳’을 그리워하지는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을 것 같다고.


ⓒ 웹진 <제3시대>

  1. http://berkeleyopinion.com/440 [본문으로]
  2. 황현산, 『우물에서 하늘보기』 (2015. 삼인), 8~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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