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거울과 예수의 지팡이

송진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박사과정)


 

영국인은 인도를 점령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인도를 넘겨준 것입니다. ... 어떤 영국인들은 칼로 인도를 점령하고 보유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틀렸습니다. 칼은 인도를 보유하는데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들을 붙들어 두었습니다. ... 돈이 영국인의 신이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수많은 문제들을 풀 수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우리의 비천한 이익을 위해 영국인을 인도에 붙들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가 그들과 교역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그들은 자신들의 교묘한 술책을 통해 우리를 유쾌하게 만드는 대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 간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입니다.

『힌두 스와라지』(1908년) 中.


   대영제국의 지배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고취하기 위해 간디는 먼저 인도가 영국에 패배한 이유를 알아야한다고 했다. 그는 패배의 동인(動因)이 동인도 회사의 지배, 즉 영국인들의 물질과 세계 식민화의 야욕만큼이나 이에 부합했던 인도인의 물욕과 협력에 있다고 보았다. 그 원인에서 규명되는바 영국의 지배 권력이 인도인의 협력에 의한 것이라면, 역으로 인도인의 비협력이야말로 영국의 지배를 무력하게 한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그는 비협력, 비폭력의 저항운동을 펼쳤다. 간디에 따르면 ‘진정한 힘은 물리적인 능력이 아닌,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비폭력의 저항은 약자들의 저항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윤리적인 측면까지 아우르는 강력한 형태의 저항인 것이다. 그의 저항 운동은 비단 인도의 정치·경제적인 독립뿐만 아니라 인도의 문화와 사상 나아가 정신적인 측면의 독립까지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항운동의 이면에는 영국으로 대변되는 강압적인 중앙정치권력과 대량생산의 산업문명체제가 얼마나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파괴하는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서려있었기 때문이다. 간디가 역설했던 인도의 ‘자치’ 혹은 ‘자립’이라는 의미의 “힌두 ‘스와라지(Swaraj)’”는 이러한 맥락에서 인도인 개개인의 정신적인 각성과 성찰을 촉구했다. 따라서 무지, 비겁함, 이기심, 나태함, 부정직함을 버리고 인도인의 자발성과 정신적인 자립, 이를 토대로 한 그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마을의 자립이라는 이상적인 현실을 실현하고자 했다. 물론 간디의 봉건적인 사상의 한계와 현실적인 대응방식의 괴리를 두고 시비를 거는 이들도 있지만, 간디가 세계흐름 속의 인도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식민현실에 눌린 민중에게 인간의 고귀함과 내면의 힘을 북돋우며 인도의 혁명과 구원이 별개의 길이 아님을 보여준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쯤 되니 1세기 로마 제국의 지배아래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민족의 식민지 현실과 갈릴리의 예수운동이 20세기 초 인도의 상황과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역사의 서재 어느 한 켠의 책을 꺼내더라도 반복되는 주제에서 벗어날 수 없듯. 당시 지중해 전 지역에 걸친 로마제국의 질서와 통치는 피정복민의 무질서와 파괴를 야기했다. 복음서에서 들려주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팔레스타인의 식민지배 현실의 농민의 삶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로마의 대리 통치자들과 예루살렘 지배자들의 수탈은 농민들을 가난과 굶주림의 아수라장으로 내몰았다. 갈릴리의 마을 공동체가 로마제국의 정치·경제적인 제도 속에 유린되면서 이스라엘 고유의 전통문화와 사회 구조는 와해되었다.

   해체되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예수는 로마제국의 질서 앞에서 이스라엘의 계약정신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여 가족과 촌락공동체의 전통적인 삶을 부활시키고자 했다. 예수는 부자들의 착취에 날선 비판을 가했고 부패한 예루살렘에 가차없는 심판을 선언했지만, 주리고 병든 사람들에게 몸소 먹이심과 치유의 행위를 통해 새로운 희망의 온기를 불어 넣었다. 그는 갈릴리의 민중으로 하여금 제국의 질서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확신하며, 정의와 연대의 원리들과 계약전통의 가치를 실천하는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을 요청했다.
  
   뒤돌아보면 지난(至難)한 역사의 사건들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할 뿐 같은 거푸집에서 찍어낸 듯 그 행태가 닮았다. 연말까지도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접고 새해의 눈을 떴지만 우리 앞에 산적한 현실의 문제는 오히려 한 자나 자란 것 같다. 한반도의 좌와 우, 남과 북의 내적인 갈등과 이에 기묘하게 얽혀있는 주변 열강들의 꿈틀대는 힘겨루기에서 숨쉬기 벅차게 뛰어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신문 한 자락을 깔고 앉은 칼럼들이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새해의 정치·경제적인 구도를 침 튀기며 전망하여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올 한해의 삶도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안다. 성장 이데올로기는 산소마스크로 연명하게 생겼고, 대기업들의 승승장구에 비견되는 서민들의 신음 가득한 사회 경제적인 불만은 극에 달한 듯 보인다. 게다가 일자리 창출과 서민 경제 활성화를 모토로 밀어붙이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이러한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 명약관화하다.

   우리 대다수는 각자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한다. 생존이라는 근본적인 불안으로 시름하면서 우리사회의 마음의 병은 깊어간다. 그러나 더 이상 간디 혹은 예수와 같은 고결하고 맑은 소리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자본 권력의 광기에 편승해 무력한 협력과 안일한 기대를 품었던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고, 보통의 우리가 스스로 현실을 직시하고 연대하여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서로 독려해야한다. 갇힌 소리는 문을 열고, 때 묻은 소리는 몸을 닦고, 덜 자란 소리는 함께 성숙하여 ‘다르게, 다함께’ 하는 소리로 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역사라는 여정에서 간디의 ‘힌두 스와라지’라는 거울을 들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라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우리 안의 깊은 병을 몰아낼 굳은 힘을 발견하고 보통의 우리가 연대하고 상생할 희망의 전거(典據)를 끌어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보통의 우리가 가진 역사의 힘은 종국에는 휩쓸리는 대로 끌려가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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