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가이드1]

어거스틴을 벗고 루터를 넘어…

왜 바울신학에 다시 귀기울이는가?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여행을 계획할때 당신은 무엇을 제일 먼저 고민하는가? 장소인가? 아니면 날짜인가? 장소를 먼저 고민했다면 아마도 당신은 가고 싶은 어떤 곳이 먼저 생겼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소개를 받았거나, TV 프로그램에서 보았거나, 아니면 문득 옛날에 가보았던 어떤 곳이 참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날짜가 먼저라면? 아마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싶어서 가장 쉬기 쉬운 날짜를 고민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부라는 길도 여행과 비슷한 면이 있다. 때로는 공부할 소재가 명확해서 마치 장소를 먼저 선택하는 여행과 같이 될때도 있고 이곳 저곳 마땅히 갈 장소를 고르다가 날짜에 맞는 좋은 장소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필자가 바울서신을 공부하게 된 것은 위의 두가지 상황이 차례로 생겼기 때문이다. 원래는 역사학이나 조직신학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대학원을 가게되고 자연히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신약신학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성서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교를 할때도, 목회를 할때도. 당시에는 대학원 이후 (필자는 학부 신학과 출신에 신학대학원까지 한국에서 공부했다.) 공부를 계속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성서라도 잘 공부하는 것이 좋을것이라는 그야말로 막연한 생각으로 전공을 선택했다.

    대학원 생활이 반넘을쯤 다른 신학대학원을 다니던 학부 동기를 만나 우연히 책 한권을 소개 받게  되었다. 도서출판 시공사에서 출간된 E. P. 샌더스가 쓴 [바울]이라는 200 페이지 정도의 책이었는데, 이 책으로 인해 바울서신을 내 공부의 주제로 결정했고, 유학까지 결심하게 되었다. 단순한 생각으로 선택했던 대학원 전공이 평생의 학문에 대한 주제를 찾는 계기가 되었고 지루한 박사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 것이다. 앞으로 연재하게 될 바울신학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바울서신을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난 후 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나의 학문적 수행을 차례로 소개하는 형식이 될 것이다.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서, 그럼 왜 나는 이 웹진의 귀중한 지면의 몇 페이지를 차지하고 앉아서 이 길다면 긴 바울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보자. 나는 바울신학이 앞으로 상당한 시기동안 현시대 사회와 상당한 연관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신학자들의 책이 출간되면 교회나 신학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그 책들을 사서 보고 토론하던 시절이 있었다. 불트만이나 틸리히등이 살았던 시대에는 신학이 사회의 통전적인 삶과 정치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에 귀기울이던 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하지만 소위 포스트 모던이라는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모든 관심들이 한방에 사라졌다. 서점에서도 신학책들은 인문학중에서도 구석으로 밀려났고 자기개발도서나 유명설교자의 책들이 신학분과의 리더역할을 자처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신학이 다시 금의환양하는 시대가 되었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앞으로의 신학자들의 몫이다. 몇해전이었다. 필자가 공부하는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이웃에 위치한 Lutheran School of Theology라는 학교를 갔다가 시카고 인근의 에반스톤이라는 도시에 위치한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대한 공고문 앞에 한참을 서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컨퍼런스의 제목은 단 한단어 '루터'였다. 물론 그 밑에 여러 주제들이 나열되어 있었지만 미국의 종합대학의 인문학 컨퍼런스의 제목이 그저 '루터'라는 것은 현상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큰 것으로 느껴졌다. 첫째로, '루터'라는 이름만으로 몇일간의 컨퍼런스를 개최할 정도로 '루터'와 현시대의 상관성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 지식들이나 대학생들의 관심을 끌고 컨퍼런스에 참여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학회는 노스웨스턴 종교학과가 중심이 되어 이끄는 것이었지만 노스웨스턴의 국제규모의 학회중 하나로 개최되는 것이었기에 단순한 종교적 관심을 넘어서는 여러 이슈들을 다루고 있었다.

    왜 신학에 이리도 관심이 생긴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원인중 하나로 들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와 리버럴리즘이 역사의 종언, 즉 더이상 진보할 수 없는 인류의 완성이라는 후쿠야마의 사자후가 완전한 구라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를 공언하고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게 된 그 순간에, 세계는 전쟁과 테러, 기아와 경제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마치 911 테러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을때 안보국 국장이 나와서 말한 "Sorry, we failed you." (죄송합니다. 다 우리 잘못입니다.-의역-) 라고 말한것 처럼 이제 세계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계의 강대국에 왜 이시대가 이렇게 되었는가 질문하고 있다.

    만약에 현재의 자유시장경제체제 안에서 지금의 세계 위기에 대한 대안을 찾을 수 있다면 신학은 편안하게 뒷방에 앉아서 신앙서적이나 뒤적이면 되겠다. 그렇지 않다면 신학은 새롭게 대두되는 여러 대안들과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미래에 대한 청사진은 어려더라도 현대 사회에 대한 윤리적 가치정도는 구축해야한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역사의 흐름을 본다면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기독교 담론이 정치화되거나 교회 밖에서 구체화 되었을때 얼마나 폭력적이고 몰상식할수 있는지는 가깝게는 미국의 부시행정부가 일으킨 소위 이라크 성전이나 멀게는 십자군 정쟁등에서 확실히 나타난 사실이다. 영국의 식민정책과 미국의 인종차별 정책의 사상적 뒷받침이 된 것도 성서와 신학이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의 뿌리가 실은 성서에도 나타나는 반유대주의였다. 과연 성서안에서 우리가 다른 종교나 사상과 차별될 수 있는 미래를 위한 비전을 생산할 수 있을까? 필자는 바울신학에 대한 재고를 통해서 신학이 생산할 수 있는 비전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이고 그 여정을 이 글의 독자들과 함께 할 것이다.

    지금까지 앞으로 떠날 여행을 목적을 생각해 보았다. 목적지는 미래를 위한 비전이고, 그 과정중에 우리는 바울의 서신들과 1970년대부터의 바울신학의 한 귀퉁이에서 점점 크게 울려퍼지고 있는 목소리들을 살펴볼 것이다. 필자는 바울 서신에서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시대적 위기에 대한 상당히 적절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감히 덧붙이고 싶다.

 

스탠달이 바울신학에 미친 영향

    모든것에는 시작이 있다. 나는 바울신학 여정의 시작을 크리스턴 스탠달 (Krister Stendahl)이라는 학자로 시작하고 싶다. 하바드 대학의 교수로서 스웨디쉬 교단의 감독으로 깊은 신학적 통찰을 가졌던 그는 자신의 이전에 있었던 근대 바울신학의 흐름에 방점을 찍고, 새로운 바울이해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젖었던 사람이었다. 

    한 평범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 한 사람이 접근하여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불쌍한듯 평범한 이에게 말한다. "형제님 당신은 죄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당신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죄인임이 틀림없으니까.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심판에 잔뜩 겁을 먹은 이에게 전도자는 말한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분께서는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셔서 구원의 길을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해 이미 열어놓으셨습니다...." 이제 한순간에 죄인이 되었다가 살아난 평범한 이는 교회를 향해 발걸음을 돌린다. 필자는 이러한 구원론에 대해 통채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라면 그 이전에 살았던 기독교를 몰랐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복잡한 답안이 주어지기 시작한다. 연옥이라는 둥.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는 둥. 하지만 만약에 위의 이러한 구원에 대한 말들이 바울에 대한 오해라면?

    스탠달은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에 조금이나마 접근하기 위해서는 바울서신을 읽기전에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론 그에게는 서구인이었지만) 하나의 거대한 전제를 벗겨버릴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것을 간단히 말하자면 바로 "죄의식"이다. 필자가 고등학교때 읽었던 바울에 대한 책중의 한 표현이 기억난다. "10할 타자는 없다.” 무결점의 야구선수가 없듯이 죄없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하나님앞에 모두 죄인이다. 오직 우리의 죄인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율법으로 구원받을 것이 라고,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다고 믿은 것은 다 틀렸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우리는 의인으로 하나님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가면,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은 없으며, 교회 밖의 인간은 필연적으로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거대한 하나의 구원론이 기반하고 있는 것이 바울의 서신이다. 여기에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를 예수를 믿는 종교로 바꾸어 버렸다!"고 비판한 하르낙의 불만이 있고, 니체의 비판이 있다.

    인간은 죄인이며 바울은 “어떻게 죄를 용서받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바울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과 루터를 읽고 있는 것이라고 스탠달은 말한다. 최초의 서구적인간인 어거스틴은 자신의 영적 기록(고백록)을 기독교적 시각에서 저술한 최초의 서구인이자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어거스틴은 자신의 질문 “대체 어떠한 근거로 한 인간이 구원을 얻는가?”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의 이신칭의를 인간 개인의 죄의식에 대한 해답으로 해석했다.[각주:1] 사실 어거스틴 이전의 기독교 기록들에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한 언급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 믿기만 하면 되는가? 믿음은 행위라는 것을 수반하지 않는가? 어거스틴 이전에 이러한 질문에 관심을 기울인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스탠달은 그 이유가 초대 교회시절에는 바울의 의미를 잘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바울에게 칭의의 문제는 모든 인간 개개인의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열린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바울의 의견이었음을 이해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탠달은 바울의 서신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터나 어거스틴의 콘텍스트에서 이해된 바울이 아니라 바울이 살았던 콘텍스트에서 바울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거스틴과 루터에게 해결해야할 문제는 인간 개인의 죄와 구원의 문제였다면 바울에게 중요한 문제는 이방인 선교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정작 바울이 말하였던 율법을 행함에 대한 비판은 유대교의 할례와 음식법등의 문제였지 인간 개인의 노력을 통한 구원에 대한 존재론적 비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각주:2]

    유대인들이 거절하고 로마인들이 십자가의 형틀에 죽여버린 예수가 부활하여 자신이 메시아임을 확증하였음을 믿은 바울. 그가 고민했던 것은 과연 이 부활한 메시아의 의미가 당시의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였다. 예수를 거절하였으니 유대인들은 심판받을 것인가? 로마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으니 심판받을 것인가? 유대교를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 오랫동안 기독교는 하나님이 유대인을 버리고 이방인들중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 구원을 주실것이라고 바울이 믿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질문들이 바울이 고민했던 것이고, 바울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 것이 그의 삶이자 저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나 스탠달은 개신교 핵심 교리의 뿌리인 로마서의 핵심은 3-5장이나 6장의 구원론이 아니라 9-11장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유대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바울의 생각이고, 미래에 대한 바울의 신앙을 드러낸 9-11장이 로마서를 이해하는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선교사인 바울에게 당시 메시아 공동체와 유대 회당의 관계는 중요했는데, 9-11장에서 바울은 결국 이 두공동체가 하나님의 계획속에 함께 공존할 것이라고 말한다. 놀라운 것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은 없다는 것인데 스탠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때가 되면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고 말할 뿐이다.”[각주:3]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정의가 아브라함의 약속에서 부터 계속 유대백성과 함께 했고, 이제 이방세계로 메시아 예수를 통해 열려졌고 그 사건은 단순히 인간 개인의 의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기에 이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고 선물이였던 것이다.

    스탠달은 바울신학의 새로운 해석을 위해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의 기준을 제시했고, 이는 현재까지 학자들에게는 논쟁의 이슈로 또한 후학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개종이라기보다는 부름 (Call rather than Conversion)
    사도행전의 바울의 체험은 개종사건이라기 보다는 이방인 사도로의 부름받음이다. 내러티브의 구조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을 부르는 사건들과 비슷하며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면서도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바울의 이름이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겠지만 사울의 이름이 헬라지방에서 바울로 발음되는 예는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즉 사울에서 바울로의 이름의 변화는 종교적 정체성의 변화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바울은 유대교전통의 선진자였고 그의 책무는 이방인들에게 예수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도래함을 알리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이를 거절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거절하지 않고 구원의 약속을 이룰것이다.)

    용서라기보다는 의인됨 (Justification rather than Forgiveness)
    불트만의 유명한 명제인 ‘신학은 인간학’은 적어도 바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흔히 의인됨과 용서받음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놀랍게도 바울서신에서 용서라는 단어는 단 한번 (롬 4:7)에서 발견되며 이또한 시편 32편의 인용이다. 용서라는 것은 용서받을 것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이 용서받아야할 인간이라고 생각했을까? 언뜻 쉬운 질문인듯 하지만 실상 텍스트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말했듯이 ‘나’라고 표현되는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행한다. 그러한 자신을 보는것이 절박하고 괴롭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행하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안의 죄이다. (롬 7:20) 바울이 인간을 상황이 죄아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렇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다. 전통적으로 메시아의 도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를 쟁취하거나 세상이 완전히 타락했을때 이루어진다고 묵시전통에 서술되어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분노가 예수 그리스도의 드러나심과 함께 시작됨을 말했는데 의인됨은 메시아에 대해 충성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지 용서받음의 문제가 아니다. 바울의 죄악된 세상을 말할때 그는 세상의 만연한 죄악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지 용서받아야할 개인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닌것이다.

    죄라기보다는 약함 (Weakness rather than Sin)
    바울에게 죄가 큰 문제가 아니었다면 과연 왜 바울은 그의 많은 서술에서 자신의 괴로움과 부족함을 토로하며 힘들어 했을까? 서신들을 살펴보면 사도로서 바울은 자신의 과업을 충실히 행하지 못했다고 생각될때 즉,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기 힘들때 자신의 부족함을 토로했다. 결국 죄에 대해 괴로워하기 보다는 자신의 약함을 고민했던 것이고 그 약함은 자신의 사역속에서 오는 여러 고난들이지 개인적인 차원의 성찰이나 영적인 죄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통합보다는 사랑 (Love rather than Integrity)
    바울의 칭의가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맞춤형 계획이라고 해서 바울이 구원의 문제를 타인의 입맛에 맞게 생각했다면 오해이다. 여러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바울이 노력했을 지라도 바울에게 믿음보다 소망보다 사랑이 가장 중요했던 이유는 바로 사랑이 바울이 생각하는 기독교신앙의 정수였기 때문이다. 이때의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다. 스탠달은 이때의 사랑이라는 것은 세금을 내는 행위와 비슷한 것이라고 보았다. 즉, 공공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것이지만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행위가 바로 사랑인 것이다. (세금으로 정부가 뭘할지는 일단 예외로 해두자.)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의 내용이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공공을 위한 삶, 그것을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자신이 그 행위를 하는지도 잘 못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는 감정도, 인식도, 판단과도 다른 하나의 삶의 방식이며 이것이 메시아에 대한 충성, 즉 신앙의 결정체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모든 타인을 향해 열려있어야 한다.

    보편적이라기보다는 독특한 (Unique rather than Universal)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바울의 공동체 이전에 수많은 이방인 공동체들이 있었다. 바울은 로마에 가보기도 전에 로마의 교회들에 편지를 보냈다. 바울의 생각이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여러 다른 생각을 가진 독특한 공동체들이 있었을 것이다.


    짧게나마 스탠달의 다섯가지 기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스탠달의 기준들은 바울신학에 대한 이전까지의 연구들에 괄호를 치고 바울의 선교적 상황에서 바울서신을 새롭게 읽을 것을 학자들에게 종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바울을 연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후대의 학자들은 New Perspective라고 명명하였다. 다음 웹진에서는 소위 뉴페스팩시브라 불리우는 연구에 학문적 엄밀성을 부여한 E. P. Sanders라는 학자를 소개할 계획이다. 샌더스나 제임스 던, N. T. 라이트, 나노스, 캠밸, 엘리엇등의 학자들이 이름이 이미 익숙한 독자들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웹진의 글들을 통해서 개괄적으로 새관점주의를 정리하기 보다는 그들의 독특성을 살펴보고 나름의 비판적 해체와 수용이 함께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바울에 관심있는 분들의 열독을 기대해본다.

ⓒ 웹진 <제3시대>

 

  1. Krister Stendahl,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Fortress Press, 1976), 16. [본문으로]
  2. 스탠달은 소위 어거스틴과 루터의 introspective conscience(자아 성찰적 의식) 라는 것이 전형적인 서구적 생각이고 이는 바울과는 상관이 없는 인간관이라고 보았다. Ibid., 18. [본문으로]
  3. 로마서 20:25-26참조. Ibid., 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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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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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3.07.04 21:0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많이 배우고 갑니다. 앞으로 진행되는 연재 기대하겠습니다.
  2. 한수현
    2013.07.06 08:0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몇번 글을 겹쳐서 씀으로 해서 여러 오타가 있음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이상철목사님 격려 감사합니다....
  3. 꾸도리
    2016.10.19 07:0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러니깐 스탠달의 제안(?!)에 기본적으로 동조하며 새로운 바울 읽기를 시도한 이들이 마지막 부분에 열거해주신 사람들이고, 이들을 묶어서 "새관점학파"로 부르는건가요?^-^
    혹 연재 가운데 논의가 허락하신다면 왜 요즘 많은 철학자들(예컨대, 아감벤이나 지젝)이 바울에 관심을 갖는지도 짚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글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한스
      2016.10.28 17:0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새관점 학파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새관점에 관한 글, 샌더스와 제임스 던에 다루었습니다.

      철학과의 연결은 스티븐 무어에 대한 웹진을 참고하시면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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