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밖의 정의

바울의 메시아적 정치론에 대한 짧은 소개서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몇 년 전 하바드 대학의 한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을 펴들고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무장해제되어 정의가 가지는 복잡함에 주눅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저자가 슬쩍 끼워 놓은 답안에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공동체주의라는 살짝 매력적인 단어를 꺼내놓고 결국 정의의 실현을 국가 정치의 장으로 제한하고, 열린 토론에서 최선이나 차선의 선택이 바로 정의라고 하는 결론에 쉽게 수긍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저자는 그것이 자신의 완전하지 않은 의견이라고 밝히기는 하였다.)

물론 내용 중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있었다. 종교적 가치가 정치정의를 논함에 분리되기 어렵다는 부분이다. 하지만 종교적 가치가 갖는 편향성을 말하며 이내 화들짝 물러선다. ‘정의를 말함에 종교가 빠질 수 없다고는 하지만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말일까? 오히려 필자에게는 정의를 말함에 있어서 서양 종교의 뿌리가 된 유대교와 기독교를 논하지 않고는 서구 정치에서 정의를 말하기는 힘들다는 주장으로 들렸다. 근대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추구되어 오던 정교분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한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과연 종교, 또는 기독교가 우월한 인종주의나 전투적인 선교주의에 목숨을 거는 공동체만이 아니라 현대 정치사회에 대안이 되는 정치론이나 정의론을 생산할 수 있을까?

철학과 종교, 그리고 정치에 관한 담론들이 분리되기 이전에, 로마제국의 엄청난 패도 앞에 유대교의 한 지식인이 제국의 정의에 대항하여 새로운 정의를 외치며 나타났고, 그가 쓴 글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우리가 신약성서라고 부르고, 또한 그 안에 로마서라고 부르는, 바울이라는 쓴 사람이 쓴 서신. 바로 그 서신이 진정한 정의를 말하는 책이라고 테오도르 제닝스(Theodore W. Jennings Jr.) 교수는 말한다. 바로 이 글이 소개할 책, Outlaw Justice: The Messianic Politics of Paul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3)의 저자인 제닝스는 바울의 편지 중 하나인 로마서가 정의란 무엇이며 어떻게 구현해 낼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제닝스 교수는 바울 텍스트의 다양한 해석의 층위를 인정하면서도 정의론적 관점에서 읽는 것이 로마서를 바르게 접근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흔히 이신칭의(以信稱儀, justification by faith)라고 말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를 설파하는 교리적 근거로 사용되는 로마서가 제닝스 교수의 손에서 메시아에 대한 충성으로 구현하는 정의로 탈바꿈 되는 것이다.

바울 서신을 정치적 관점에서 읽는 것은 철학과 성서신학 내에 소위 트랜드를 형성하고 있다. 지젝, 바디우, 아감벤 등이 바울의 서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고 있고, 탈식민주의나 맑스주의 성서신학자들도 새롭게 바울을 읽는다. 그 핵심에 메시아 정치학에 대한 담론이 있다. 서구 지식인들과 신학자들에게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바울 새롭게 읽기는 크게 두 가지 즉, 기독교신학 외적인 흐름과 신학 내적인 흐름이 있고, 제닝스 교수는 정확히 그 두 흐름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 책을 썼다. 그 두 흐름을 살펴보자.

기독교 내에서 오랜 세월동안 루터와 칼빈 식의 바울 서신 읽기는 개신교신학의 근거로서 받아들여졌고, 이후의 바울 신학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칭함을 받는 사실성에 대한 연구와 논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과연 믿음으로 구원이 끝나는 것인가, 행함은 의미가 없는가, 율법적인 신앙은 의미가 없는가 등의 기독교가 인간 구원에 대한 단 하나의 유일한 대책이라는 식의 기독교 우월론을 생산하는 데 중요한 해석의 근거가 되어온 것이 바울 서신이었다. 정작 예수는 반()율법주의를 주장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이러한 해석은 필연적으로 반유대주의적 신학을 기독교에 불어 넣었다. 기독교는 율법적인 유대교를 뛰어넘는 고등종교이고 유교, 이슬람교, 불교 등도 이에 다르지 않다는, 그래서 오직 예수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이 바울에게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해석들을 극복하는 흐름들이 성서신학계에서 일어났다. 물론 아시아신학이나 민중신학에서 이미 있었던 흐름들이지만 서구사회는 2차 세계대전의 유대인들에 대한 대학살로부터 정신을 차린 이후에야 반유대주의적이고 종교우월주의적 해석에서 벗어나 바울 서신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도출된 성과들은 다음과 같다. 바울은 유대교적 전통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 아니다. , 바울은 반유대적인 가치로 기독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토록 혹독하게 비판하는 율법적 신앙 또는 율법적 정의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최근에 이르러서야 바울이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유대교가 아니라 로마제국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바울이 말하는 율법이라는 것은 모세의 율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법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보고 이를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보았고 그의 유대교적 전통에서 이를 새롭게 해석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는 작금의 경제 제국이 등장하는 시대에 새로운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신학 외적인 흐름에서 바울의 서신이 중요해진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자본주의의 끝도 없는 질주를 민주정치체제가 막아낼 수 없으리라는 의심이 확신이 되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레닌주의의 재조명이 이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자본주의 안에 살면서 자본의 힘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비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 어려운 질문에 레닌은 형식(form)이 내용(content)에 선행한다는, 당이 당의 정신과 목표보다 먼저라는, 다른 의미로 말하면, 새로운 비전이 먼저가 아니라 희망을 생산할 수 있는 형식(form), 집단, 또는 공동체의 창설이 먼저라는 해답을 내어 놓았다. 이에 착안해 루카치와 지젝은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하나의 당의 형태로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고 보았다. , 바울이 제국에 대한 대안적 정치학으로 새 정치를 생산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데 필생의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것이 바로 에클레시아, 소위 현재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집단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만이 제국의 정치학을 벗어난 형태의 정치적 비전, 정의에 대한 인식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바울의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엥겔스와 맑스가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 초기 공산당의 조직에 대한 영감을 얻었고, 바디우와 아감벤이 국민의 삶 자체를 통제하는 국가 형태에 유일한 탈출구를 바울에게서 찾는 것은 그래서 공감할 만하다.

이러한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제닝스 교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어거스틴부터 근대의 바르트, 현대의 지젝과 같은 철학자들과 브리짓드 칼과 같은 성서신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소개하며 로마서를 새롭게 읽어야 함을 제안한다. 아마 독자들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예수를 여호수아로, (righteousness)를 정의(justice)로 읽는 독해에 놀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희랍어 번역이고, 예수는 아람어로써 히브리식 이름인 여호수아를 말하는 것으로, 약속의 땅으로 신민들을 이끌 지도자를 의미한다. 또한, ‘라는 표현은 영어식 번역의 오류이며 이보다는 정의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에 익숙해지면, 로마서야 말로 바울의 새로운 정의론이라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론에서 제닝스는 바울의 시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바울해석의 역사와 정치론적 해석의 역사를 쉽고도 깊게 서술한다. 간단한 서론이 끝나면, 그야말로 로마서11절로부터 마지막까지 독자에게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며, 과연 새로운 정의와 그 정의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어떤 것인가를 생생한 바울의 증언으로 들려준다. 제닝스의 글의 장점은 쉽다는 것인데, 그가 사용하는 일차자료들의 고급정보에 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제닝스의 설명과 함께 새로운 정의의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신념을 듣다보면 로마서가 현대의 새 정치를 갈구하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외침임을 알게 된다.

그럼 도대체 정의가 무엇이냐고? 친절하게도 제닝스는 책의 제목에 이미 그 결론을 주고 있다. 첫째는 밖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으로, 또는 법치정치로 의롭다함을 받지 않는다는 뜻의 진의이다. 이른바 Law and Order, 법과 이를 실현하기 위해 만드는 질서의 정치는 결코 정의를 생산할 수 없다. 정치적 최선차선이 결코 정의라고 표현될 수 없는 이유다. 둘째로, ‘정의는 설명할 수 있고, 선택하는 무엇인가가 아니다. 그것은 정의를 살아내는 공동체가, 즉 메시아적 공동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그 공동체의 살아 숨쉼이 바로 정의이다. 이 공동체는 초법적인 기관이 아니다. 끊임없이 법과 인간의 정치로부터 소외되고 핍박받는 공동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공동체를 만들고, 이끌어가야 할까? 이 질문에 관심이 생긴다면 다시 한 번 로마서를 읽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바울이 일생을 통하여 하려고 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evangelism)이라기보다는 정의을 구현하는 공동체(planting the assembly embodying Justice)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예루살렘 교회와의 끝없는 불화 속에서도 곳곳에서 쏟아지는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에서도 끊임없이 서신을 보내며 자신의 생각을 전하려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메시지를 듣는 오늘날의 교회들은 어떤 식으로 응답해야 할까? 이모든 해석의 가능성에 대한 눈뜨임이 제닝스의 법밖의 정의를 통해 한국에서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웹진 <제3시대>

* 편집자에 의해 원글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글이 다소 수정됐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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