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심범섭*



   몇 주 전 11월 5일 토요일 박근혜 퇴진을 위한 집회(“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에 참여하려고 광화문 광장에 갔다. 아직 오후 4시 전이라 광장에서는 이 집회에 앞서 백남기 선생 영결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는 중고등학생 약500명이 독자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었다. ‘중고생혁명지도부’라는 조직이 주최한 집회로 보였다. 이들은 집회를 마치고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원래 행진을 허락받은 한계 지점에서 길을 막아 선 경찰 때문에 멈춰서야 했다. 한참을 대치하다가 결국 해산했고, 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학생들은 이제 광장에서 진행되는 일반 집회에 참석했다.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외치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몇 번을 눈물이 솟기도 했다. 무엇이 이들의 맑은 한국어를 분노하게 했나 마음속으로 물어보기도 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날 열린 큰 일반 집회에서는 청와대를 향한 행진이 없었다는 점이다. 곧, 이날 짧은 거리나마 청와대 쪽으로 행진한 단체는 이들 중고등학생들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이런저런 현실적인 사정이 관여하고 있었지만 가장 어린 참여자들이 가장 과격한 행진을 실행했다는 사실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격동하는 최순실 정국에서 중고등학생들은 자기들만의 집회를 열거나, 일반 집회에 참여하거나, 일반 집회에서 무대에 올라 발언을 하거나, 대자보를 붙이거나 하는 등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학생 집회를 보고 감동을 받은 다음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 한 신문에서 중고등학생들의 의사표현을 훼방하는 어른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학교측에서 학생들이 붙인 대자보를 철거하거나, 대자보를 붙이는 것을 반대한 경우도 있었고, 공적인 장소에서 시국선언을 한 학생들을 교칙상 징계하겠다고 언급한 경우도 있었고, 촛불집회 등에 참석한 학생들을 사찰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대자보 뜯고, 막고, 사찰까지 . . . 탄압 받는 중고생들 ‘시국선언’, 경향신문, 2016년 11월 9일.) 이 가운데 가장 내 시선을 끈 내용은 대구의 한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대구 달서구 와룡고등학교 학생회는 지난 8일 오후 페이스북을 통해 시국선언문 대자보를 게시하겠다고 밝히고 이를 학교장에게 알렸지만 거부당했다. 학교 측은 ‘아직 미성숙한 가치관을 지닌 미성년자의 글이므로 게시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같은 기사)  


    학교 측이 제시한 이유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이 대구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표면적인 이유 뒤에 다른 이유가 숨어있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맥락을 제쳐놓고 그저 이 이유의 표면적인 표현만을 읽는다해도 이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왜 나는 동의할 수 없을까에 대한 생각은 우리 어른들이 다음 세대(아직 어른이 아닌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고, 이 글에서 나는 이 물음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소박한 답을 내놓고자 한다. 


1


    첫번째 생각을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강릉군 상산면 관음리에 사는 최영택의 집에는 출가했던 딸이 첫 아이를 해산하려 친정에 와 있었다. 딸은 아들을 낳았고 환갑이 지나 외할아버지가 된 최영택은 아기를 보러 들어갔다. 이때 그는 의관을 정제하고, 곧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있었고 갓난 아이에게는 큰절을 올렸다. 외손자에게 이런 예를 다한 것은 “새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때 외할아버지에게 큰절을 받은 아기가 우리 아버지이다. 곧 최영택이라는 특이한 인물은 우리 아버지의 외조부였다.) 최영택 어른의 이런 행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분에게는 갓태어난 아기의 새로움을 소중히 여기는 남다른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를 단지 외손자라는 아랫사람으로 본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태어남의 신비, 새로운 사람을 낳는 인간의 힘, 새로운 생명이 함축하는 가능성과 희망, 새 생명의 소중함과 기쁨 등을 구현하는 사건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창하게 말해서, 최영택 어른이 방금 태어난 외손자에게 큰절을 했을 때 그는 인류 역사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에게 절을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일화를 빌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어른들에게 새로운 생명, 어린 생명에 대한 경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아기든, 어린이든, 청소년이든 기본적으로 인간인 이상 우리 어른들과 동일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평등주의적인 생각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새로움과 이에 동반하는 더 큰 가능성에 가치와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새로움에 대한 경의는 창조에 대한 경의라고 할 수 있으며, 기독교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사역에 대한 경의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의는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기 위한 한 필수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부터,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한다면 당연히 어린 사람의 새로움에 대해 경의를 품는다는 생각을 끌어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으리라. ‘당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그렇다면 어린 생명도 경외하라.’ 


2


    둘째, 우리 어른들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강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내 아이를 키우지도 않고 일하면서 어린 학생들을 만날 기회도 없는 내가 이런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은 2014년 봄이었다. 그때 나는 일산 동구 장항동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라페스타라는 상업 구역에서 중고등 학생을 많이 보게 되는 동네였다. 하지만 그들과 나는 늘 서로에게 아무 상관없는 남이었다. 서로 말 한 마디 할 일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길거리에서 많이 마주치는 중고등 학생들이 이제 달리 보였다. ‘저런 애들이 죽은 거야! 저 생떼 같은 애들이 죽은 거야!’ 저런 애들이 더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이 어린 사람들을 위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에는 어떤 면에서 어른들이 우월하다는 전제가 들어있다. 어른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아직 어른 아닌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미숙하다고 할 수 있다.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판단이 사회 전반에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만18세가 되어야만 부모 동의 없이 결혼할 수 있고, 2종 보통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고, 극장에서 성인영화를 볼 수 있다. 또 만 19세가 되어야만 투표를 할 수 있고, 1종 보통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고, 인터넷 성인영화를 볼 수 있고, 자기 명의로 재산 등록을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게 제복을 입혀 그들을 통제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아직 20년 가까이 살지 않은 사람들을 미숙하게 간주하는 것에는 경험적으로 자명한 이런저런 근거가 있다. 이 경험적 근거는 많은 경우 국가와 문화의 경계를 초월해 공통된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더더욱 자연스럽게 ‘미성년자’라는 범주 설정을 수용하게 한다. 사실 많은 경우 인간의 몸 자체가 성장하는 방식이 이러한 공통점의 이유가 되는 듯 하다. 예를 들어 사람 뇌의 전전두엽 피질은 여러가지 정보를 종합해 판단을 내리고 충동을 억제하고 계획을 세우는 기능, 즉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가장 크게 구별 짓는 기능을 담당하는데, 물리적 성숙이 완전히 이루어지는데 약 25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이 부위가 사람의 몸에서 가장 늦게 성장이 완료된다고 하므로 사실 사람은 25세쯤 되어야 생물학적으로 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열 아홉살된 사람들이 스물 여섯 살 된 사람들보다 대체적으로 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에는 생물학적 이유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른들이 어린 세대가 더 나은 환경에서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도록 책임의식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 나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의 한 대목을 나름대로 해석해 이 생각과 연결시키려 한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 첫머리에 나오는 두 가지 창조 이야기 가운데 첫째 이야기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1:27-28, 1:31-2:3) 


    이 내용에 따르면 인간은 엿새 동안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 작업의 마지막에 창조된 존재였고, 하나님은 그 다음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이 이야기가 구축하는 세계의 논리를 따르자면 인간이 창조되어 처음 맞은 날은 안식일이었다. 곧, 비록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일하시고 안식일에 쉬셨지만 인간은 일한 것도 없이 우선 안식일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인간은 먼저 쉰 다음에 일을 시작한 흥미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함축하는 인간 존재의 이러한 전개 방식을 각 사람과 세대의 경험에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해, 새로이 태어난 세대는 안식일을 먼저 경험해야 하며, 우리 어른들은 그들에게 이 안식일이 하나님이 “복 주사 거룩하게 하”신 날로써 체험되도록 힘써야 하지 않을까? 


3


    셋째, 어른들은 어린 사람들에게 때로 어른보다 절대로 못하지 않게 (어떤 때에는 사실 어른보다 월등하게) 현실을 인식하거나 판단하거나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위에서 두번째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전반적으로 어른보다 미숙하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일반론일 뿐이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 많은 지식과 정밀한 분석력이 필요한 상황일수록 더 많이 살고 공부한 어른의 판단이 더 믿을만 하겠지만 어떤 현상의 선악정사 여부를 파악하는 것 같이 근본적인 가치 판단을 제대로 내리기 위해선 반드시 어른이거나 경험이 많을 필요는 없다. 

    사람이 더 많이 살았다고 해서 더 현명하지는 않다. 기독교 성서에는 나이가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사람이 나이가 많아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는 견해가 실려있다. 예를 들어 다음 두 구절을 보라.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시편 119: 98-100)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욥기 32: 6-9)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캇 펙(Scott Peck, 1936-2005)이 쓴 책 <잘 가지 않는 길을 더 따라가서 (Further Along the Road Less Travelled)>에는 저자가 처음 기독교 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말하는 내용이 있다.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백인으로 성장했지만 그는 열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교회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내가 처음으로 가보기로 한 교회는 우리 집에서 몇 블락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그 교회 목사는 당대 가장 유명한 설교자였는데, 그의 일요일 설교는 미국 전역에서 라디오로 방송이 되었다. 열 다섯 살이었지만 나는 쉽게 그가 가짜임을 간파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집에서 그 반대 방향에 있는, 처음 갔던 교회 목사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역시 저명한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에도 가보았다. 그의 이름은 조지 버트릭(George Butrrick)이었고, 

열 다섯 살이었지만 나는 그가 거룩한 사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간파하는데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열 다섯 살 된 내 빈약한 머리는 이 경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여기 당시 가장 유명한 기독교 목사가 있었지만, 내가 열 다섯 살 때 판단하는 한, 영적인 성장 면에서 나는 이미 그보다 많이 앞서 있었다. 그러나 똑같은 기독교 교회에 분명 나보다 여러 광년 앞선 또 다른 목사가 있었다.[각주:1] 


    이 글에서,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중학교 3학년 밖에 안된 아이의 내적 능력은 적어도 두 차원에서 어른들과 대조되고 있다. 우선 표면적으로 이 아이와 당대 가장 유명한 목사의 영적 수준이 대비된다. 그리고 암시적으로 목사의 수준을 파악하는 능력 면에서 이 소년과 기독교인 어른들이 대비된다. (이 어른들이 소년 스캇만큼 분별력이 있었더라면 가짜 목사가 최고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렇게 어른을 능가하는 소년의 영적 수준과 판단력은 그가 이전에 기독교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물론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하지만 열 다섯 살 난 스캇은 과연 열 다섯 살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착각하는 건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어린 소년은 알고 보면 사춘기의 격랑을 거치면서 과대망상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위 인용문의 내용과 앞뒤 맥락을 살펴볼 때 지금 50대 후반에 이 글을 쓰는 스캇 펙은 40여 년 전 자신의 판단을 승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신뢰할만한 어른으로부터 어떤 면에서는 중학생이 많은 어른들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성경 구절의 내용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소년 스캇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명철함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아직 미성숙한 가치관을 지닌 미성년자의 글이므로 게시할 수 없다”라는 대구 와룡고등학교 일부 어른들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주장의 가치를 그것이 어른에게서 나왔는가 아닌가를 따져서 판단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예를 들어 문학이라는 영역을 고려해 본다면, 한국 현대시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승무”는 조지훈이 열 여덟 살 때 쓴 작품이다. 요즘 학제에 따라 말하자면 고등학생이 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를 미성년자가 썼다고 해서 읽을 가치가 없다고 하지 않는다. 문학 작품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발언도, 그리고 어떤 분야의 어떤 발언도 마찬가지이다. 그 말이 맞는 말이면 받아들여야 한다. 초등학생의 표현이라도 말이 되면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고등학생들도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어른들에게 다음 성경 구절이 좋은 가르침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4). 이 구절은 표면적으로 한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문제를 다루지만 한 사회에서 어른들이 어린 세대를 교육하는 차원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 권면의 말씀에 담긴 중요한 전제 가운데 하나는 어린 세대에게 어른의 언행이 올바른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에 따른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이 있다는 견해이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에게도 기본적인 정의감, 선악판단 능력, 공정함에 대한 분별력이 있음을 암시한다. 더불어 이 말씀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언행에 노여워할 때 이에 귀 기울이고 무엇이 잘못되었나 파악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도 암시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번 국정농단 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어른들이 어린 세대를 노여워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와룡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은 노여움을 표현하는 아이들을 또 한번 노엽게 한 어리석은 짓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어른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할 지에 대해 간단하게 생각해 보았다. 나이 한 살 차이에도 의미를 두는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 먹을수록 자격 없이도 발언권이 강해지고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 의견이 존중 받지 못하는 문화가 있다. 그리고 특히 미성년자들의 생각과 느낌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원래부터 이런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와룡고등학교에서도 일부 어른들이 그렇게 답답한 소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어린 사람들)은 분명 미숙한 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미숙한 건 아직 새로워서이며, 이 새로움은 우리 안에서 잠든 생명력을 다시 일깨워준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미시킨 공작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면 영혼이 치유된다.” 

    그리고 신약성서 <골로새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3:21). 앞에서 언급한 <에베소서> 말씀과 비슷한데, 아이들을 노엽게 하면 “낙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낙심은 무거운 마음이요, 낙심한 마음은 안식하는 마음일 리가 없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노여움을 가능하게 하는 바른 분별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을 노엽게 하지 않도록, 그들이 먼저 안식일을 누리도록 책임감 있게 노력해야 하겠다. 우리 아이들이 낙심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Touchstone, 1998, p.120. 위의 인용문은 1998년에 나온 책에서 옮긴 것이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93년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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