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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무더위를 견디는 의식의 흐름 (박여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8. 8. 1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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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를 견디는 의식의 흐름

 


박여라*




입맛이라는 게 참 이상해서 사람마다 맛있는 게 다르다. 나는 신맛 나는 새콤한 과일이 좋은데 달달한 과일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향이 화려하고 이쁘고 뒷맛이 쌉쌀한 페일 에일 맥주가 좋은데 그는 아무 맥주든 맥주가 있기만 하면 좋단다. 입맛은 선천적이기도 하고 후천적이기도 하다. 신체의 생리작용이 사람마다 다르고, 자라며 먹은 음식, 살아온 문화 영향을 받는다. 개인 성격차이도 있고. 내가 느끼는 이 맛이 니가 느끼는 그 맛과 꽤 비슷할지언정 100% 똑같지는 않다. 그러니 남더러 니 입맛이 어쩌구 할 일은 아니다.


날이 하도 더우니 울엄마가 해주는 가지냉국이 자꾸 떠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학교 다녀와 뭘 먹고 싶냐고 엄마가 물으면 나는 가지냉국 해달라고 했다. 엄마는 내가 손 많이 가는 것을 해달라고 한다고, 쪘다 식혀야 하니 많이 기다려야 한다고 그랬다. 이렇게 더운 날 별미다. 엄마가 만들 때 옆에서 많이 지켜보았기에 내가 자신 있게 엄마표 맛으로 만들 수 있는 것 중 하나다. 여름엔 가지냉국이지.




어른이 되어서야 나는 많은 이들이 가지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아무 맛도 안 나고 미끄덩한 식감이 싫다고들 한다. 특히 어렸을 때. 난 왜 좋아했지? 여린 씨가 도돌도돌 박혀있는 가운데 부분, 부드럽고 밋밋한데 결이 있는 속살, 쫄깃한 껍질을 함께 씹으면서 슴슴한듯 간간한듯한 국물을 후루룩 같이 먹는 맛이 좋았다. 물론 어린이 때는 이렇게 표현하지 못했지만, 이게 가지냉국을 좋아하는 이유다. 남들이 가지를 싫어하는 그 이유가 나에겐 정반대로 좋아하는 이유로 작용하다니. 내게 별루인 것들을 남이 되게 매력있어 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신기하고 재밌어해야겠다.


가지냉국을 별미라 꼽는 또다른 이유는 먹고 싶을 때 아무때나 먹을 수 있지 않아서다. 그러고 보니 별미라는 것들은 대개는 발효음식이고 시공 제한이 있다. 취두부, 피단(삭힌 오리알), 치즈, 스웨덴 삭힌 청어, 영국 마마이트, 된장, 김치, 홍어… 지난번에 ‘홍어 과다’상태에 대해 괜한 푸념을 늘어놓았듯 난 홍어가 맛있다고는 여기지만, 떠오르면 막 그립고 먹고 싶은 그런 건 아니다. 게다가 시공의 제한이 있어야 할 그것을 시도때도 없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먹어서 문제였던 거구나!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와인도 별미다. 와인은 수천 년 동안 그 땅과 기후에 따라 만드는 방법이 다양하게 발전해왔다. 이런 와인 역사는 중동에서 북아프리카까지 포함하는 지중해 인근과 유럽에서 만든 와인을 구세계 와인(old world wine)이라 부른다. 그것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신세계 와인(new world wine)은 의도적으로 와인종 포도나무와 기술을 옮겨온 아메리카 대륙과 오세아니아에서 만든 와인이다. 아직도 이 구분이 유효하기는 하지만 엄밀하게는 지역만으로 와인을 구별하기 점점 어려워진다. (“어? 프랑스 론 밸리 와인인 줄 알았는데 이거 캘리포니아?! 놀랍당…”) 두 세계 양쪽에서 자연과 기술, 전통과 혁신의 조화가 활발히 교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상기온으로 와인 지역 기후가 달라지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와인 지역 중에서 특별히 뜨거운 남유럽, 지중해 섬, 이베리아반도, 대서양 섬에서는 포도주 발효 중간에 알콜 농도가 높은 브랜디를 섞어 주정 강화 와인(fortified wine)을 만드는 전통이 발달했다. 셰리(스페인), 포트(포르투갈 도루) 마데이라(포르투갈 마데이라) 마르살라(이탈리아 시칠리아), 뱅 두 나튜렐(프랑스)이 이런 와인이다. 이런 방법이 발전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와인을 먼 길 보내(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변질하지 않도록 발효를 멈추게 하는 방법으로 알콜농도 높은 증류주를 섞는 방법을 썼고, 그렇게 시공간의 제한을 뛰어넘게 했다. 그뿐 아니라 뜨거운 온실에서 몇 년 숙성시키기도 하고, 지역의 고유한 효모에 노출시키며 일부러 산화시키기도 한다. 이런 와인들이야말로 딱히 첫입에 맛있진 않다. 즐기는 방법을 익혀야 하는 맛이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맛있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취향이니까.)


중부 캘리포니아 템플턴에 있는 로타(Rotta) 와이너리는 백 년도 넘은 와이너리다. 1900년대 초 미국연방 금주법 당시에도 성례전을 위한 와인을 만들며 문 닫지 않고 계속 운영해왔다. 큰길에서 이 와이너리로 들어가는 길에 밑동이 아주 굵은 거목의 포도밭이 이어졌다. 그런데 2003년 캘리포니아 중부를 강타한 샌 시미온 지진으로 와이너리가 크게 무너져 2006년에 모든 시설을 다시 지었다. 이 역사를 알지 못했다면 시설은 새것이고 주변 포도나무가 어려 새로 생긴 와이너리로 알 뻔했다. 여러 해 전 방문했을 때 와인메이커가 아주 소량의 ‘셰리' 스타일 와인을 만들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선 흔하지도 않고 하여 한 병 사면서 셰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와인메이커가 나더러 느닷없이 “너 그 셰리 만드는 거 볼래?” 하더니 구경시켜 주겠다며 건물 뒤쪽으로 데려갔다. 오크통을 땡볕에 내놓고 숙성시키고 있었다. 가득 채워 60갤런으로 시작하면 2년 뒤 45갤런만 남는다며, "그래갖고, 니가 오늘 가져가는 그 병에 담긴 거라고!" 하고 설명해준다.


땡볕을 고스란히 쬐고 있는 오크통 생각을 하다 보니, 그리고 연일 이어지는 무더위로 약간 혼이 비정상이 되는 가운데 뜬금없이 수백 년 이집트 생활 끝에 나와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 광야에서 헤맨 이스라엘 민족이 떠올랐다. 한낮에 30-40도를 넘나드는 시내 반도 날씨는 결코 친절하지 않다. 만나! 하나님께서 내려주셨다는 만나는 무슨 맛이었을까.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만나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성서는 아침에 안개가 걷히고 나니 땅 위에 서리처럼 보이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있었다, 해가 뜨겁게 쪼이면 다 녹아버렸다, 고수씨(깟씨)처럼 하얗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다, 가나안에 이를 때까지 40년을 먹었다고만 전한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뒤에 만나의 맛을 그리워했을까.


여러 해 전 이렇게 더운 어느 여름 가리왕산에 갔다. 간단한 산행을 하고 내려왔는데 하루에 몇 번 들어오지도 않는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았다. 땡볕에 읍내 방향으로 걸어 나가다 식당에 들어갔는데 영업하지 않는다 하여 들어갈 때 탄 택시를 다시 불렀다. 가면서 기사분께 식당 하나 소개해달라고 했더니 나더러 정선에 오셨으니 곤드레밥을 먹고 가라 권하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본인은 가난하던 시절에 지긋지긋하게 먹던 거라 곤드레밥이 싫단다. 그런데 대처에 나가 사는 형제들은 고향 오면 모두 그렇게들 곤드레밥을 찾는다고. 사람마다 처지마다 다른 듯.


가을의 문턱 입추도 지나 말복이다. 더위가 물러서기 시작해서 아침저녁으로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완연하게 느끼게 되는 처서까지는 조금 더 가야 하지만, 더위는 지나간다. 그럴 것이다. 지난달 중순쯤부터 몰아닥친 무더위에 비도 거의 없이 도대체 어떻게 지냈나. 하루하루가 그랬지만 돌이켜보아도 기가 막힌다. 지구를 구하기나 할 것처럼 올여름도 집에선 고집스럽게 선풍기에 의존해 겨우 보냈다. 내년 여름엔 더 더울까. 생각만 해도 이미 아찔하다. 어쩔 것인가.


* 필자소개_ 박여라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썼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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