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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죽은 신의 인문학』전상서(황용연)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8. 9. 2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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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신의 인문학 전상서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Interdiscipilinary Studies박사과정(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후보생,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이상철 목사님. [죽은 신의 인문학]을 이곳 남가주에서도 잘 읽었습니다. 적지 않은 기사와 서평이 쏟아지고 있던데요. 그렇게 기사와 서평이 쏟아질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거기에 끼어서 목사님께 몇 마디 올리고 싶어졌습니다.


1. 

우선 ‘죽은 신’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 

물론 이 말에 대해서 불경이니 불신이니 하는 따위의 단어를 떠올릴 시절은 애저녁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은 드는군요. 죽은 신, 신이 죽었다. 그래서 어떻다는 걸까요.

오늘날 신이 죽었다는 말을 거리낌없이 넘어갈 수 있는 종교는 거의 없을 것 같지만, 이 책은 주로 그리스도교의 신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책이니 죽었다는 신도 그리스도교의 신일 터입니다. 혹 일반적인 신 담론을 염두에 두었더라도, 그 담론에 대한 추적 방식이 그리스도교의 신 담론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구요.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신이 죽은 신이다”라는 것은, 오늘날 한국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걸까요. 물론 그리스도교는 한국, 엄밀히 말하면 남한 사회의 주요 종교 중의 하나이고 많은 수의 신도를 가지고 있으니, 이 신도들이 믿는 신이 “죽은 신이다”라는 것이 사소한 문제는 아닐 법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니 그리스도교를 안 믿는 내가 무슨 상관이냐라고 해 버리면 솔직히 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일 것 같거든요. 

이 지점에 목사님의 키워드인 ‘인문/신학’이라는 말을 끌고 와 본다면, 개인적으로 이 말이 뭔가 비대칭을 내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학은 “신이 죽었다”라는 말이 나올 만한 위기를 감지하여 ‘인문/신학’으로 자기를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인문학이 ‘인문/신학’으로 자기를 확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냐는 겁니다. 인문학이 떠받쳐 온 근대성의 위기, 그 근대성의 핵심 중 하나인 자본주의의 위기를 감지하여 인문학이 자기 확장을 할 이유가 있다고 해도, 굳이 ‘그리스도교 신학’을 확장의 파트너로 삼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겠냐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문제일 뿐이라면 말입니다.

물론 목사님도 소개하셨듯이 오늘날 몇몇 반자본주의 사상가들이 성서에서 자신들의 사상의 새로운 실마리를 찾는 경우도 종종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대해서 한 가지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은, 이들이 사는 서구 사회에서 그리스도교란 근대성 이전의 주류 패러다임이자 근대성의 주요 카운터파트일 것이기 때문에 그 근대성의 핵심 중 하나인 자본주의 비판을 위해 우선적으로 끌어 쓸 생각이 날 자원이기도 하지 않을까란 생각입니다. 이들의 담론이 주는 매력과는 별도로, 이들의 담론이 ‘인문/신학’이란 구도의 설득력을 더해 주는가 하는 건 좀 더 생각할 문제가 아닌가 싶은 거지요.


2.

저는 책을 사면 될 수 있는 한 그 책의 띠지를 그대로 끼워 둡니다. [죽은 신의 인문학] 띠지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네요. “적대와 혐오의 중심지, 한국 극우 개신교를 향한 ‘인문/신학’의 복음!” 이 책이 한국 극우 개신교를 향한 복음이라는 점에야 이견을 달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앞의 말에 대해서는 좀 곱씹어 보고 싶네요. 적대와 혐오의 중심지라는 말 말입니다.

물론 지금 한국 극우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서 적대와 혐오를 가장 많이 보여 주는 집단의 하나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겠습니다. 그런데 그 적대와 혐오의 ‘중심지’라고 한다면 고개가 좀 갸웃거려지는 것은, 그 극우 개신교가 적대와 혐오의 근원이기도 한지, 아니면 남들도 하는 적대와 혐오인데 극우 개신교의 덩치가 커서 많이 보이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목사님이 여성 혐오에 관해 쓰셨던 글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두고 글을 쓰시면서 그 사건을 두고 한국 교회의 여성혐오를 반성하는 글을 쓰셨더랬지요. 물론 한국 교회가 여성 혐오 집단이라는 거야 두말하면 잔소리겠습니다만, 어째 뭔가 핀트가 살짝 안 맞지 않은가 싶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의 여성 혐오는 사실 개신교와 같은 특정한 세력이 조장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반 시민’, 정확히 말하면 ‘일반 남성 시민’이 스스로 주동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극우 개신교의 적대와 혐오를 싫어하기도 할 그 ‘일반 남성 시민’ 말이지요.

최근 인천 퀴어퍼레이드에서 극우 개신교는 또 난동을 부렸지요. 그렇게 거리낌없이 난동을 부릴 수 있는 건 물론 1차적으로는 그들의 신념이 그만큼 꼴통이기 때문일 겁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좀 어렵다 싶은 것이, 그들의 성소수자 혐오는 심지어 현재의 정부에게도 일정 정도 달래 주어야 할 대상이 되더라는 겁니다. 극우 개신교가 덩치가 커서 그런 거 아니냐라고 하기엔, 예컨대 ‘창조과학’ 같은 이슈에서는 그런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달래 주지도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거죠. 극우 개신교가 난동까지 부릴 정도로 성소수자 문제에 거리낌없는 건, 상대편이 그만큼 만만해 보인다는 거 아닐지 모르겠다고. 물론 성소수자 당사자들이야 말 그대로 소수자이니까 만만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들 이외의 ‘일반 시민’들 역시, 난동까지 부리는 걸 좋아할 리야 없더라도, 그래도 성소수자라면 뭔가 좀 이상한 여지가 있는 건 맞지 않느냐는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도 만만해 보이기도 하겠구요. 대통령후보가 극우 개신교의 성소수자 혐오를 어떻게든 달래 보려고 혹은 피해 가려고 성소수자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할 때, 그리고 그 말에 항의하는 성소수자들에게 왜 그나마 우호적인 대통령후보만 공격하냐고 심한 말들을 쏟아 부을 때, 그 만만함은 더욱 더 심화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쯤에서 올해 가장 큰 이슈 중에 하나였던 난민 이슈를 이야기해 볼까요? 난민 반대 시위의 메인 슬로건이 “국민이 먼저다”라고 하더군요. 국민을 사람으로 바꾸면, “사람이 먼저다”지요. 현 정부의 대통령 선거 때의 슬로건 말입니다. 

짓궂은 바꿔치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은 않겠다 생각이 드는 것이, 당장 현 정부의 지지자들 중에도 상당수가 난민 반대 입장에 섰다고도 들었구요. 그 지지자들 상당수가 이자스민 의원과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해서 혐오를 보이기도 했었지요. 한 걸음 더 나가면, ‘이명박근혜’ 정권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의 반대 담론 자체가, “정당한 자격이 있는 국민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골자로 구성되었다는 것도 짚어야 하겠고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혹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요. ‘적대와 혐오의 중심지’는, ‘일반 시민’이고, 극우 개신교는 그 ‘일반 시민’ 중 극단적인 케이스일 뿐이라고요. 아니 어쩌면 ‘극우 개신교’는, ‘일반 시민’의 혐오를 그렇지 않다고 호도하기 위한 핑계거리일 수도 있겠다고요.

보충하는 의미에서 조금 더 말해 보면, 사실 극우던 아니던 ‘개신교’ 자체가 ‘일반 시민’의 눈에 그리 곱게 보이는 대상은 아니지요. 악행 때문만이 아니라 이치에 맞지 않는 걸로 보이는 주장 때문에도 그렇구요. 그렇기에 위에서 말한 ‘핑계거리’가 쉽게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일반 시민’이 생각하는 표준에 맞지 않는 집단, 어떨 때는 극우 개신교나 자유한국당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진보정당이나 노동조합이나 페미니스트이기도 한, 그런 집단들을 혐오하는 것이 그 ‘일반 시민’들의 정치가 되어 버린 것 아닌가란 생각을 들게 합니다.


3.

“나는 확신한다! 이 쪽이다!”라고 외치는 람세스 이야기를 하셨더랬죠. 그러면서 그 외침에 드러나는 ‘확신’의 느낌을 경계하셨습니다. 물론 저도 고개를 끄덕였구요.

그런데 람세스 이야기 조금 앞에, 요단 강 물을 거침없이 전진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두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보니 이렇게 묻게 됩니다. 과연, 결과를 모르는 상황에서 두 이야기를 읽는다면, 어느 이야기가 ‘맞는 확신’이고, 어느 이야기가 ‘틀린 확신’인지, 알 수 있겠냐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답해 보란다면 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물론 제 느낌으로도 람세스의 확신은 무서워 보이긴 합니다만, 종교라는 것을 고려하는 지평에서는 스스로의 판단에 최선을 다했더라도 그 이유로 내 판단을 온전히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라면, 역시 ‘알 수 없다’고 대답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둘 중 어느 쪽을 택하는가는 각자의 결단과 성실함에 맡겨 두고요.

여기서 목사님의 키워드 중 하나인 ‘파국’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네요. 물론 파국에 대한 목사님의 견해에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다만 말을 좀 덧붙여 보고 싶은 것은, 성서나 민중신학의 지평에서의 ‘파국’이란 언어는, 누구나 지금이 파국적 상황이라고 할 때 말을 보태는 게 아니라, 어찌 보면 주류가 나름 잘 나가고 있어 파국이란 말이 쉽게 동의를 얻기 힘들 때, 오히려 그 때 외치는 언어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방금 말했던, 좋은 확신과 나쁜 확신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과 연관짓는다면, 파국이란 단어의 의외성은 더욱 더 강해지겠죠.

그렇기에 파국을 말하는 언어는 역시 ‘신학’이 조금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로 그 의외성을 감수하는 언어, 앞에 언급했듯 스스로의 판단을 위해 이성과 성실함으로 최선을 다했을지라도 의외성을 감수하는 언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렇기에 신학적 언어는 필연적으로, 목사님이 말씀하신 ‘해체’의 언어를 수반해야 하는 것이겠구요.

‘해체’의 언어를 수반하는 신학이란 언제나 동시에 ‘신학 비판’이기도 하겠죠. 마치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이 언제나 동시에 ‘정치경제학 비판’이듯이 말입니다. 비단 기성 종교에서 발견되는 신적 현상에 한정되지 않고, 지금 사람들이 신적 현상인 것처럼 여기는 것, 그리고 그에 따라 하는 행동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에서의 ‘신학 비판’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민중신학의 경우,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다”라는 언어로, 신학과 신학 비판을 동시에 수행하지요. 지금 이 때의 신학과 신학 비판을 수행하려면 아무래도 앞에서 쭉 써 온 것처럼 ‘일반 시민’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을 ‘촛불시민’ 역시도요. 그래서 한 번 말을 만들어 본다면, “꺼진 촛불의 신학”이란 말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꺼진 촛불의 신학”은, “죽은 신의 인문학”과, 동의어가 되겠습니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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