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페미&퀴어] 동성애와 여성혐오의 근거‘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전복적 읽기(이상철)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8. 11. 28. 23:47

본문


동성애와 여성혐오의 근거‘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전복적 읽기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프롤로그


동성애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동성애를 저주하는데 동원되는 성서의 구절은 대략 손으로 꼽습니다. 창세기 19장(소돔과 고모라), 레위기 18:22, 레위기 20:13, 로마서 1:27, 고린도전서 6:9~10, 디모데전서 1:10, 히브리서 13:4 등이죠. 그중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는 성서에 나와 있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 동원되는 기사입니다. 또한 소돔을 향해 뒤돌아본 롯의 아내 이야기는 여성의 어리석음과 나약한 믿음을 이야기 할 때 일부 보수적인 목사들이 종종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롯과 롯의 두 딸들이 무사히 빠져나온 다음, 창세기 19장 후반부에 가면 롯과 두 딸간의 근친상간이 일어납니다. 큰 딸과 관계해서 낳은 아기로부터 모압 자손이 나왔고, 작은 딸과 관계해서 낳은 아기로부터 암몬자손이 나오는 것 까지가 롯의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그러면서 20장으로 넘어가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고, 21장에 가서 이삭이 태어나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으로 4대에 걸쳐 이어지는 아브라함 가계의 이야기이고, 이 혈통은 다윗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예수로 이어지는 그리스도교의 메인라인, 즉 상층부의 역사를 담당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롯의 이야기, 롯을 거론하면서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정말 뜬금없이 들어온 에피소드입니다. 학자들은 창세기 19장 롯의 이야기는 2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삭으로 으로 이어지는 유대주류 혈통의 순수성을 돋보이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이스라엘 주변에서 이스라엘과 갈등과 긴장의 관계에 있는 이방신을 섬기는 모압과 암몬이 두 딸과 근친상간을 한 롯의 후손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 롯의 이야기와 그와 연관된 소돔과 고모라이야기가 삽입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다음 장에 나오는 이삭의 탄생을 돋보이기 위한 문학적 배열이라는 것입니다.

이글에서는 롯의 이야기를 둘러싼 이런 구약성서의 편집사적 논쟁에 대해서 다루지는 않습니다. 제가 의도하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한 다시 읽기를 통해 1) 소돔과 고모라에 가해진 동성애 관련 루머를 밝혀내는 것, 2) 그리고 탈출도중 뒤를 돌아봐서 돌이 된 롯의 아내에 대한 오명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한국 보수 개신교도들이 동성애 혐오를 강화하는데 도구로 쓰이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해체하고, 한국 개신교에서 여성 비하의 근거로 소환되는 어리석은 롯의 아내에 대한 전복적 성서해석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제가 이 글에서 의도하는 바입니다.


정말 이 구절은 동성애 혐오를 말하고 있는가?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할 때 마다 떠오르는‘나쁜 짓’이 있죠. 그것은 동성애입니다. 그런데 정말 소돔과 고모라에서 벌어졌던 나쁜 짓이 동성애였을까, 하나님은 정말로 그것 때문에 유황과 불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켰나? 그것이 아니라면, 정말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일어났던 나쁜 짓은 무엇이었나?

동성애를 반대하는 개신교도들에게 소돔은 동성애를 범한 형벌과 심판과 저주의 도시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소돔에서 유래한 “소도미(sodomy)”라는 단어는 이성 혹은 동성 간 성적교제에서 승낙없이 강제로, 특히 항문성교로 강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것은 후대에 형성된 동성애를 둘러싼 위악적인 이데올로기일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정작 성서의 기록들, 예를 들어 예수님이나 구약시대 예언자들이 소돔 혹은 소돔과 관련된 이야기를 거론할 때 동성애와 관련된 죄를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6장 49-50절에 소돔에서 일어났던 죄를 열거하는데 이렇게 적혀있습니다:“양식이 많아서 배부르고 한가하여 평안하게 살면서도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의 손을 붙잡아 주지 않았다.” 즉 소돔이 저지른 죄는 엄청난 부와 안락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은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역겨웠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보고는 그들을 없애 버렸다”라고 에스겔에는 적혀있습니다.

이사야 1장 10절~17절에서도 소돔과 고모라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너희 소돔의 통치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라.”(사1:10)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 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사1: 15)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들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사 1:16-17) 소돔이 저지른 죄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억압받는 사람들, 타자와 약자를 보살피는 것이 정의인데 그 정의를 실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애가(4:4)에서는 소돔의 죄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젖먹이들이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고, 어린 것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하여도 한 술 떠주는 이가 없구나.”이상은 구약성서의 예언서에 등장하는 소돔과 관련된 기사들이고, 거기서 주목하고 있는 소돔의 죄는 동성애가 아닙니다. 약자의 편에 서지 않고 현실의 논리. 맘몬의 논리에 영합하여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태도가 죄입니다.

예수님이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동성애에 대해 언급한 구절은 없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누가복음에서 한 구절이 있습니다: “롯이 소돔에서 떠나던 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려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 날에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자기 물건들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들을 꺼내려고 내려가지 말아라. 또한 들에 있는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눅 17:29-32)

예수가 소돔의 이야기 하면서 롯의 아내를 인용한 이유는 마지막 날에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행동원칙을 말하기 위함이지, 동성애에 대한 죄를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 것, 즉 현실의 원칙과 욕망에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실과 과거에 미련을 갖는 사람은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그것의 대표적인 예로 소환한 인물이 바로 롯의 아내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도 소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롯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동성애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이렇듯 성서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거론할 때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동성애 혐오를 취급하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앞서 다루었던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하는 예언서의 기록들, 예수의 어록에서도 명백히 드러나죠.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가 저질렀던 죄악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살피고 환대하라는, 타자와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베풀라는 율법을 어기고 두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고 해코지 하려고 했던 것이고, 집으로 늑달같이 달려온 동네 남자들과의 거래를 위해 여성(두 딸을)을 내어주면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이보게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네. 그 아이들을 자네들에게 줄 터이니, 그 아이들을 자네들 좋을 대로 하게. 그러나 이 남자들은 나의 집에 보호받으러 온 손님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게.”(창19:8) 이 대목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문제는 동성애의 문제에서 패미니즘 문제로 넘어옵니다.

저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동성애가 일어났는지 안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설사 일어났다고 해도 자기 딸을, 여성을 남자들 끼리 발생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내어주는 그 짓이 더 큰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저질러진 죄악 때문에 유황과 불을 내려 망하게 했다면, 가장 확실하게 성서에 기록된 소돔의 죄악은 여성을 문제 해결을 위한 성적 도구와 거래의 대상으로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소돔에서 벌어지는 이런 행태에 대해 하나님이 노해 불과 유황을 쏟아부어 망하게 한 것 아닐는지요.

“그러니 소돔과 고모라 본문을 가지고 동성애 혐오를 조장하는 여러분, 제발 이 본문을 가지고 문제를 호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성서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행위이고, 그것이야 말서 신성을 모독하는 죄악입니다.!” 이렇게 저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가지고 동성애 혐오를 조장하는 목사들, 교회들을 향해 소리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소돔과 고모라 하면 동성애를 떠올리는 것이 얼마나 비성서적이고 반그리스도교 적인지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돌아보지 마!’라는 제목으로 롯의 아내에 대한 변호를 도모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하면서 뒤를 돌아봐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구절은 여성을 어리석고 과거에 사로잡혀 미래로 나가지 못하는 미련하고 무능한 존재로 묘사할 자주 인용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롯의 아내에 대한 오독


한국 드라마가 인기죠. 한국 드라마의 흥행비결은 대강 다음과 요소들 때문입니다. 출생의 비밀(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신데렐라 콤플렉스, 재벌, 불륜, 불치병이 걸리거나 기억상실증, 요즘은 타임슬립이 첨가되었습니다. 이중의 상당부분은 신화적 상상력과도 연결됩니다. 종교학이나 신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지역을 떠나 각종 신화에 등장하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일종의 인류전체의 집단무의식이라 할 수 있고,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이야기의 원형’이라고도 하더군요.

첫 번째가, “그건 너!”입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유명한 오이디푸스가 대표적이죠.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찾아 떠나는데 결국 자기가 그 범인이죠. 창세기 선악과 이야기도 “그건 너!”와 관련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네가 벗었다는 것을 누가 일러주더냐?’라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묻는 대목이 나오죠. 그러자 아담이 ‘그 여자가 그랬습니다’라고 핑계를 대죠. 하지만, 정말 하와가 문제였을까요? 결국 아담이 한 것입니다. 뱀이 하와를 꼬실 때 그 현장에 아담 역시 있었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창 3:6)라고 적혀있습니다. 공범이죠. 그런 아담은 여자에게 그 핑계를 돌리죠. 많은 종교들에서 깨달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 역시, 모든 문제의 시작은 나이고, 그 문제의 실마리 역시도 내게 있음을 말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원형이 “그건 너!”라면, 두 번째로 다룰 이야기의 원형은 “돌아보지 마!”입니다. 오늘 성경과도 관련이 있는 내용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일본의 에니메이션 감독이 있습니다. 미래소년 코난(1978), 이웃집 토토로(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2000)등의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는 기술의 발전, 혹은 핵전쟁이후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에 대한 풍경이 영화전편에 깔려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기술, 인간과 문명 간의 갈등이 주된 소재이지만 그의 영화는 선악 이분법이나 교훈적 결말을 담지는 않습니다. 권선징악적인 결론이 아니라 화해와 공생, 환대를 이야기 합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열 살의 소녀 치히로, 그리고 식구들은 이사가던 중 길을 잘못들어 터널을 지나게 된다. 치히로는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돌아가자고 조르지만 엄마, 아빠는 아이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낯선 곳에 차려진 음식을 먹던 엄마 아빠는 돼지로 변해버립니다. 터널을 통과한 세계는 기상천회한 일들이 벌어지는 신들의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엄마 아빠를 다시 정상적으로 되돌려 다시 터널을 통과해 인간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치히로가 겪는 모험담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쿠의 도움으로 신들의 나라에서 돼지가 된 부모를 구출해 돌아가던 소녀 치히로는 바깥 세상을 나가는 통로에 놓인 터널을 지나는 동안“결코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는다. 무사히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다시 원래있는 그곳으로 돌아온다는 결말입니다.

“돌아보지 마!”를 주제로 하는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도 나옵니다. 저승까지 찾아가 아내(에우뤼디케)를 구해내는데 성공한 오르페우스에게 주어진 금기가 있습니다. 저승을 빠져나올때까지 절대로 뒤돌아보지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아내 손을 잡고 빠져 나오다가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만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이로 인해 아내를 데려오는 일은 마지막 순간 실패로 돌아가고 말죠. 우리나라의 경우도 충남 연기 장자못 전설. 어느 부자집이 물로 심판 받을 때 뒤돌아본 며느리가 바위가 된 전설. 이렇듯 금기를 깨고 뒤돌아 보았을 때 돌이나 소금 기둥이 되는 이야기는 도처에 널려있다. 구약성서 롯의 아내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나요? 어찌하여 이토록 다양한 문화와 시대 속에서 왜 그토록 많은 “돌아보지 마!”를 주제로 한 이야기들이 존재할까요? 그것은 혹시 우리 삶의 어느 한 단계에서의 마무리와 다른 단계로의 승화란, 결국 지나 간 시절에 대한 미련과 회한을 떨쳐버릴 때야 비로소 계급장처럼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처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치히로처럼, 우리나라 장자못 설화에 나오는 며느리처럼,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롯의 아내처럼 그것이 그리움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후회 때문이든 미련 때문이든지 간에 지난 온 시간을 되돌아 볼 때 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셈해야 하고 정리해야하고 화해하고 풀어야할 것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어쩌면 주인공들이 뒤돌아보는 바람에 생겼다는 소금기둥과 바위는 그 감정의 찌꺼기들이 쌓이고 쌓인 퇴적물들 아닐런지요. 과거의 그것을 가지고는 미래를 향해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이야기들은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결국,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명심해야 할 사실은 ‘가산의 철학’이 아니라 ‘감산의 철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살다가 획득한 명성과 부와 권력, 기억과 애착과 미련을 어떻게 한껏 지고 나가느냐가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적당히 삭제하면서 털어내고 가느냐에 종교적 성찰과 신화적 교훈의 주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정말로 뒤돌아보고 싶다면 산에 다 올라가서, 아니면 터널을 완전히 통과한 뒤에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삶이 계속되고 있다면, 그 삶의 지속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은 뒤돌아보지 않고 터널을 통과한 이후, 혹은 뒤돌아보지 않고 눈 꽉 감고 허겁지겁 산 위로 올라간 다음 업어져서 거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그 순간부터가 아닐까요. 그러니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이렇게 마무리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롯의 아내가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고, 시비를 걸어오는 것 같더라구요. 네가 뭘 안다고, 네가 그곳에서 무슨 일어 벌어졌는지 알기나 하니? 뭐 그런. 환청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다음 이야기를 하나 더 추가했습니다.



왜 내가 뒤를 돌아보았나?


미국에서 박사과정 할때인데, Biblical Hermenutics(성서해석학) 시간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성서비평 방법들, 전통적인 역사비평부터, (탈)구조주의, 해체주의, 포스트모던, 포스트콜로니얼, 페미니즘, 우머니스트, 퀴어, 해방신학, 흑인신학 등 여러 관점으로 성서를 읽는 읽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과제는 그동안 배운 것을 바탕으로 본문을 정하고 각자가 자신이 택한 방법론으로 자신이 택한 본문을 새롭게 바라보는 거예요. 그리고 수업 마지막날에 자기가 쓸 기말 페이퍼에 대한 소개를 하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온 학생이 있었는데, 이름이 솔로몬입니다. 그 학생이 포스트콜로니얼적인 관점(식민지 경험을 지녔던 사람들이 텍스트를 보는 관점)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해석하면서 지금부터 제가 소개할 글을 읽어주었습니다. 인도의 에큐메니컬 운동가 스탠리 사마르타의 글입니다. 그녀는 WCC에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주도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이 분이 어느 한 회의석상에서 발표했던 글이라고 하네요.


<왜 내가 뒤를 돌아보았나?   Stanley J. Samartha>


나는 어젯밤 우리 집에 온 두 나그네가 무서웠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좋은 사람이지만, “저들” 우리의 이웃은 나쁘다고 했다. 롯은 기뻐서 그들을 크게 “나마쎄”(환영)했더니 잔치를 베풀어 달라고 했다. 롯은 그들이 천사들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들이 무서웠다. 그들의 얼굴이 냉담하고, 눈길이 사납고, 화가 잔뜩 난 눈치였다. 


왜 내가 뒤를 돌아보았나?

나는 롯에게 화가 났다. 남자들이 우리 집을 포위하고 그 나그네들을 내어놓으라고 했을 때, 롯은 우리의 처녀 딸들을 내어주었다. 그러나 두 딸이 모두 약혼을 했었다. 나는 대단히 화가 났고, 분노했다. 나는 딸들을 뒤 쪽 창고에 급히 숨겼다. 나는 그들을 지키며, 죽을 각오를 했다. 저 남자들이 남자 나그네들을 원하는데, 어째서 우리 딸들을 내어주는가? 왜 롯 자신이 가지 않고? 왜, 그 천사 둘이 가지 않고? 그게 천사의 일일 텐데.


왜 내가 뒤를 돌아보았나? 

내 이웃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야. 내가 첫아이를 낳으며 진통할 때, 여자들이 거기 있었어. 내 손을 잡아주고,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마실 물을 주었어. 그리고 아기를 낳았을 때, 목욕을 시켜서 내 젖을 물려주었어. 그런데 롯은 어디 있었지? 밭에 나가서 하나님께 기도나 하고 있었겠지.


왜 내가 뒤를 돌아보았나? 

나의 사람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야. 작은 딸 아이가 돌부리에 발을 치어서 발톱이 부러졌을 때, 내 이웃이 짓이긴 풀잎을 가져와서 약을 만들어 주었어. 딸이 눈물 사이로 미소를 지었어. 그런데 롯은 어디 있었나? 밭에 나가서 하나님께 기도나 하고 있었겠지.


왜 내가 뒤를 돌아보았나? 

나의 자매와 형제가 거기 있기 때문이야. 나와 남편이 열병에 걸려 거동을 못한 채 신음하고 있을 때, 사흘 동안 물 한 방울도 없고 아이들은 울고 있을 때, 나의 형제와 자매들은 십 리나 걸어서 물을 길어다가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지.


왜 내가 뒤를 돌아보았나? 

왜나하면, 이웃을 팽개치고 나 혼자 구원받는 것 보다 그들과 함께, 그들과 더불어 그곳에 있어야 되는 것이 맞지 않나. 비록 내가 함께 죽더라도 말이야.


에필로그


롯의 아내는 왜 뒤를 돌아다 보았을까요? 나 혼자 살겠다고, 우리 가족만 살겠다고 달아나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던 것이죠. 그러기에는 남겨진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면목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여성의 어리석음이고 불신앙으로 그릴 수 있습니까? 저는 오히려 이 장면이 셈하여지지 않은 채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채 사라져가는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양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자기만큼은 그 아픔에 동참하겠노라고 다짐하고 결연히 그 대열에서 이탈하여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의 행위가 오히려 경외스럽습니다.

성서라는 텍스트는 어느 하나의 단일한 해석 안으로 그것을 가둘 수 없습니다. 어쩌면 성서가 전하는 진리는 우리들이 각자가 성서를 읽고 느끼고 고백하는 그것들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역사는 성서에 드리워져 있는 진리의 그림자를 없애고, 잡히지 않는 성서의 진리를 자신들을 위한 진리의 반석이라 호도해왔습니다. 온갖 자기 동일성의 논리로 성서의 진리가 탈바꿈 된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변질된 성서의 진리는 혐오의 메커니즘을 생산하는데 악용되었습니다. 차별과 배제, 폭력과 응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성서를 사용한 예는 무수히 많죠. 대표적인 것이 이교도혐오, 동성애혐오, 여성혐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슬람혐오, 빨갱이혐오, 동성애혐오, 여성혐오로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고 있고, 그것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성서의 진리를 잘못 해석한 한국의 대형 보수 교회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다룬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 그리고 롯의 아내 이야기는 대표적으로 잘못 알려진 반동성애, 반페미니즘 관련 성서구절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성서읽기에 대한 반론을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