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시선의 힘] 민수야 미안해, #iamsorry(조영관)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8. 11. 28. 23:47

본문


민수야 미안해, #iamsorry[각주:1]


조영관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중학교 학생들에게 노동인권 교육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노동법이 나름 전공분야이긴 하지만 강의 대상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중2 100명이라고 하니 처음엔 망설여졌다. 하지만 얼마 전 한 학생이 고깃집에서 몇 시간 동안 불판을 닦았는데 시급이 아니라 불판 하나당 100원으로 쳐서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겠다고 했다.

일하는 청소년에게는 정확한 법률지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부당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사장’이라는 힘 센 어른에게 ‘쫄지 않고’ 따져물어볼 용기가 더 필요한 경우가 많다. 교육을 하면서도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그냥 참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짧고 강렬한 e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선생님 혹시 주민등록번호 좀 빌려주실 수 있나요?”

민수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보이스피싱 같은 대화로 시작되었다. 친구 소개로 프랜차이즈 떡볶이 집에서 2주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던 민수는 손님에게 음식을 쏟아 알바비를 한 푼도 못 받고 잘렸다고 했다. 못 받은 돈을 포기하려다 교육을 통해 ‘임금체불진정’ 절차를 알게 돼 고용노동부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맨 먼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라는 것. 자기는 주민등록번호가 없어서 좀 빌려달라는 취지였다.

주민번호가 없었던 사정은 이랬다. 민수의 부모님은 오래전 몽골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는데 복잡한 사정으로 체류자격이 없는 상황에서 결혼을 했고 얼마 뒤 민수가 태어났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아이를 낳은 경우 한국정부에 출생신고를 할 수는 없고 오로지 자국 대사관에 직접 방문하여 신고해야 하는데 등록된 체류자격이 없는 외국인의 경우 대사관 방문을 기피하게 된다. 결국 민수는 출생신고를 하지 못한 채 15년을 한국에서 살아 왔다.

합법적인 체류자격을 가진 부모라고 하더라도 자국의 박해로부터 피신해온 ‘난민(신청자)’의 경우에는 본국 대사관에 방문해 출생신고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외국인 부모 중 일방의 국내 또는 본국의 혼인 관계가 정리되지 않아 태어난 아이의 출생 신고를 오랫동안 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반드시 외국인에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얼마 전 언론에 보도된 사례처럼 한국인 부모가 아이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고 무려 18년 동안 방임하기도 했다. 출생신고에서 배제된 아이는 의무교육은 물론 예방접종 등 국가의 기본적인 의료혜택도 받지 못했다.

모든 아동은 자신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자기의 부모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 권리가 있다. 외국인의 아이라서, 난민의 아이라서, 방임하는 부모의 아이라서 이러한 권리가 보장되지 못한다면 이는 심각한 인권침해이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한국정부에 “부모의 법적 지위나 출신에 상관없이 모든 아동에게 출생등록이 가능하도록 보장할 것”을 수년째 권고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동안 ‘이주민센터 친구’를 비롯한 여러 시민단체들이 ‘보편적 출생신고제도’ 도입을 꾸준히 요구해왔고 얼마 전 더불어민주당 원혜영 의원이 관련 개정안을 발의하였다. 보편적 출생신고 네트워크(UBR)에서는 그동안 생일을 허락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보편적 출생신고 입법을 위한 I’m sorry’ 캠페인과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많이 늦었지만 올해에는 꼭 실질적인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결국 민수는 고용노동부의 온라인 임금체불 진정절차를 이용하지 못했다. 대신 우리는 민수가 일했던 떡볶이집에 찾아가 합법적으로 항의해 밀린 임금과 이자까지 받았다. 민수는 그 돈으로 자격증을 따고 싶다고 했다. 왜냐고 묻는 질문에 민수는 흐릿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제 사진과 이름이 들어간 신분증을 가지고 싶어서요.”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2018. 11. 18 경향신문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린 칼럼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1182040015&code=990100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