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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사회적 고통의 관점에서 민중을 이해한다는 것(정용택)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8. 12. 2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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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고통의 관점에서 민중을 이해한다는 것[각주:1]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분도출판사, 2018)에 수록된 글(「왜 고통이 중요하며, 왜 고통이 문제인가?」)의 제목을 지을 때 필자가 염두에 두었던 영어 단어는 ‘matter’였다. 그 단어가 고통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단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matter는 ‘중요하다’, ‘문제(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동시에 ‘물질’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데, 그 글에서도 바로 그 세 가지 차원에서 고통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선, 민중신학에서 고통은 세계를 이해하는 준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모든 민중신학자들은 고통을 신과 인간이 함께 겪고 있는 반복적인 사건이라는 견지에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 역시 고통의 세계관에 입각하고 있는 포스트-신(神) 죽음의 신학 가운데 하나임을 부정하긴 어렵다고 본다. 반면에 아도르노 이후 현대 비판이론에선 고통을 세계관의 준거점이나 세계 비판의 입지점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은 사라져야 할 것, 즉 그것을 강제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회형태들과 더불어 반드시 폐지되어 할 대상으로 이해된다. 민중신학자들에게 고통이 세계관 차원에서 ‘중요하다’면, 비판이론가들에게 고통은 비판의 대상으로서 ‘문제시되는’ 것이다. 비슷한 것 같아도 둘은 학문적으로 전혀 상이한 기획을 함축한다. 한쪽은 고통을 세계 비판의 입지점으로 삼는 데 반해, 다른 한쪽은 고통을 비판의 대상 그 자체로 삼고 있다. 고통을 설명하는 matter의 중의적 용법이 민중신학과 비판이론에선 각기 다르게 적용될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 matter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물질’이라는 의미도 있다. 고통이 물질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고통이 철저하게 사회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필자의 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의 경험 가운데 많은 부분이 시장과 조직으로 대변되는 제도적 차원에서 사회 행위자들 간의 ‘물(物)’적 관계를 매개로 생산‧구성‧표현된다고 주장했다. 그런 고통이 아닌 고통들도 당연히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민중신학이 관심 갖는 고통은 개인적‧자연적‧초역사적 성격이 아닌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제도적 성격을 띠고 있는 이른바 ‘사회적인 것’(the social)으로서의 고통, 특히 지배적 권력관계를 통해 강제되는 ‘사회적 고통’(social suffering)이라는 점에서, 민중신학의 고통은 (안병무의 ‘사건’이 그러하듯이) 철저하게 “존재 내재적인 동시에 역사사회학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김진호, 2000: 90).


 고통의 물질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오늘날 ‘포스트-87년 체제’의 민중신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87년 체제를 배경으로 탄생하여 ‘포스트-87년 체제’를 향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던 “제3세대 민중신학은 2010년대가 끝나가는 현재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김진호, 2018: 325)는 주장의 이론적 근거가 바로 사회적 고통의 발견에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사회의 공론장에서 87년 체제에 대한 수많은 담론적 개입이 이루어져 왔고, 관련하여 다양한 이론적‧실천적 쟁점들이 도출되었지만, 정작 민중신학자들 가운데서도 ‘3세대 민중신학’이 87년 체제론에 개입하는 데 있어서 어떤 독창성을 지니고 있는가는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던 것 같다. 마침 최근에 “1987년 이전의 기대가 세계를 바꿔 놓을 주체가 되고자 하는 운동가의 시선을 전제하는 것”이었던 데 반해서 “1987년 이후의 기대는 민주화된(그리고 소비 중심이기도 한) 세계의 주체를 자임하는 시민의 시선을 전제하는 것”이 되어 버렸고, 이러한 ‘시민의 시선’이 어느새 민중신학 3세대를 넘어 ‘포스트-87년 체제’의 민중신학에 관한 논의에도 은밀히 스며든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나왔다(황용연, 2018). 그 답변은 질문을 받은 해당 저자들의 몫이라고 보지만, 적어도 민중신학 3세대가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전개에서 이룩한 성취는 민중신학적 사회비판의 논점을 누구의 시선으로(“민중이냐, 시민이냐?”) 세계를 비판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비판의 대상으로(“고통의 시대”) 삼느냐로 전환시킨 데 있다는 사실만큼은 상기시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3세대 민중신학이 ‘87년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응답으로서 출현했다고 했을 때, 도대체 87년 체제의 무엇을 문제 삼은 것일까?


 일반적으로 19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특질을 총괄하는 용어로 ‘87년 체제’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보통은 87년 체제를 민주화체제로 평면화해서 말하곤 하지만, 기실 ‘87년 체제’는 단순히 민주화체제로만 이해될 수 없고, 오히려 ‘민주주의의 심화’와 ‘경제의 자유화’라는 상호모순적인 헤게모니 프로젝트가 적대적 긴장 속에서 동시에 추진된 체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즉, 87년 체제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동학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와 민주주의 프로젝트 사이의 대립과 교착”상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김종엽, 2010: 73). 그래서 ‘민주주의의 확장과 심화 프로젝트’와 ‘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는 87년 체제가 근본적으로 내장한 두 개의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김정훈, 2010: 40). 87년 체제는 처음부터 한국사회의 핵심적인 권력블록인 독점재벌부문과 민중부문 각각이 자유화와 민주화라는 두 개의 프로젝트를 적대적으로 주도해 나가되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벽하게 압도하지 못한 상태에서 두 프로젝트 간에 잠시나마 역동적인 힘의 균형이 유지된 그런 체제였다(김종엽, 2009: 20). 아무리 독점재벌부문이 가진 권력자원이 민중부문의 그것에 비해 거대해도 그들이 민중부문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전체 사회구성원들로부터 체제 유지의 적극적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 만큼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화 프로젝트’가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로 본격화되면서 87년 체제 안에서 작동하던 두 프로젝트 간의 역동적 균형은 내파되고 만다. 그리하여 일각에선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를 ‘87년 체제’가 아니라 ‘97년 체제’라 부르자고 주장하기도 했다(손호철, 2017). 그러한 논의에 따르면, 1997년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규제완화,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개방화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양극화와 사회 해체와 빈곤과 불평등 같은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우리사회에 가져온 결정적 전환점이다. 바꿔 말하자면, 사회·경제적 수준에서 불평등 심화와 극단적 경쟁을 조장하는 시장 권력이 민주주의를 압도하기 시작한 분기점이 바로 1997년이라는 것이다(이병천·신진욱, 2014: 13-14). 실제로 한국의 지성계 전반에서 87년 체제에 대한 논쟁이 본격화된 것도 1997년을 거치면서였고, 흥미롭게도 “‘1987년 체제’라는 당대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응답”으로서 민중신학 3세대가 출현한 시점 역시 정확히 1997년이었다. 예컨대, “김진호는 1997년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 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전망하며」(『시대와 민중신학』 4, 1997)에서 ‘민중신학의 제3세대’를 천명했다”(김진호, 2018: 324).


 따라서 “‘1987년 체제’를 비판적으로 대면하면서 출범했다”고 자임하는 민중신학 3세대가 하필 87년 체제가 10년이나 진척된 1997년에야 비로소 출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민주화의 시대는 소비자본주의의 시대와 겹친다. 그리고 지구화도 거의 함께 찾아왔다”는 사실에 대한 뒤늦은 자각이 가능해진 시점이 바로 그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IMF 외환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던 1997년 5월경에, 그러니까 아직까진 소비사회화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보다는 민주화가 87년 체제를 설명하는 주된 키워드였던 민주화 시대의 한 가운데서, 소비사회화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흐름이 민주화의 흐름을 압도하는 현실과 마주하며 87년 체제의 정당성을 문제제기하는 민중신학 3세대가 출현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로서의 87년 체제가 아닌 비판적 담론으로서의 ‘87년 체제’는 97년 이후에 사후적으로 실현되어 87년으로 그 기원을 소급하여 실행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민중신학 3세대가 87년 체제의 현실을 진단하는 데 있어서 소비사회화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를 민주화만큼이나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곧 이어 87년 체제를 “민주화-소비사회화-신자유주의화의 시대”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87년 체제에 대한 여타의 이론적 개입들과 비교했을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단적으로 말해서, 민중신학 3세대는 87년 체제를 정치체제의 관점에서 제한적 정치적 민주주의로 규정하는 기존의 주류적인 시각을 넘어, 자본주의 축적체제의 관점에서 소비사회를 바탕으로 한 신자유주의적 체제로 파악해왔다. 특히 IMF 구제금융이 실행되기 전부터 이미 1990년대 민중신학자들은 당대 한국사회를 소비사회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자본주의적 체제전환을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전개에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87년 체제를 정치체제뿐만 아니라 경제체제이자 사회문화적 체제로서 문제시했던 것이다. 이는 포스트-‘1987년 체제’의 민중신학을 논의하는 맥락에서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지점이다.


 민중신학 3세대의 지평을 열었던 1990년대의 민중신학자들에게 한국 소비사회란 상품 물신 메커니즘이 외부와 타자의 공간을 완전히 소멸시키면서 직접적으로 우리의 삶과 일상을 권력의 시각 하에 가시화·식민화하고 있는 시공간적 맥락을 의미했다. 자본의 침투력이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파고들게 되었고, 권력의 양생술이 상품화된 욕망 속에서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김진호, 1997: 24). 권력에 대한 재인식이 그러한 권력이 작동하는 현장으로서 일상이라는 시공간에 관심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1990년대를 거치는 동안 한국 소비사회에서 “권력이 미치는 영향력은 이제 고전적 의미의 정치 영역(단일국가적 민족적 영토성에 결부된 정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사람들의 일상의 영역을 무대로 하여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운동은 범지구적인 자본 운동과 절합 관계를 이루며 전개된다”(김진호, 1997: 25). 결국 1990년대 민중신학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었던 87년 체제의 주된 문제점을 이미 한국에서 소비사회의 전면화, 즉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조절양식의 완성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기에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진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로의 전환 앞에서도, 섣불리 87년 체제를 97년 체제로 대체하지도, 그렇다고 87년 체제를 단순히 정치체제로 환원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민주화‧소비사회화와 더불어 87년 체제를 규정하는 제3의 요소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를 수용하는 이론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타의 ‘한국 사회체제’론들(87년 체제론-97년 체제론-08년 체제론-2017년 체제론 등등)과 비교했을 때, 이와 같이 87년 체제의 사회성격에 대한 통합적이고도 유연한 이해야말로 민중신학 3세대가 현 시대의 특징을 ‘고통’이 체계적으로 생산‧구성‧표현되는 메커니즘에서 찾도록 하는 준거점으로 작용했다. ‘민주화 20년 민주주의는 누구의 이름인가?’라는 부제를 달고 87년 체제 20주년을 둘러싼 논의가 무성하게 진행된 직후에 발표된 어느 글에서 김진호는 민주화와 지구화의 제도화 과정 속에서 사회적 고통의 불균등 배분이 초래한 산물로 빈곤계층을 조명한 바 있다. 그 글에서 흥미로운 것은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지구화는 분리할 수 없이 얽힌 제도화의 구성 요소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전체적으로 거대자본을 추동력으로 하여 정책화되는 신자유주의적인 지식기반경제(knowledge-based economy)로의 재구조화”가 제시된다는 점이다. 특히 저자는 “이러한 재구조화가 노동시장의 분할을 동반하면서 진행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오늘날 한국의 지식기반사회의 특징을 “지식기반경제 아래에서 ‘하향의 회색지대(going-down gray zone)’가 광범위하게 구축된 것”으로 설명한다.


이 하향의 회색지대의 주된 사회심리 중 하나로 우리는 시민사회의 ‘무능력에 대한 공포’를 이야기할 수 있다. 이때의 무능력은 ‘역할기대’에 비해 ‘행위수행’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자타의 이해가 낳은 행위자의 자기의식과 관련된다. 이것은 최근 ‘무능력’이라는 말의 용례가, 역할기대나 행위수행 모두가 매우 낮은 상태를 가리키는 전통적인 무능력 개념과는 다르게 위와 같은 함의(역할기대>행위수행)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는 데서 이끌어낸 해석이다. 그런 점에서 이는 일종의 ‘예감된 무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예감은 자기 전 존재를 생존을 위한 총력전 속으로 몰아간다. 즉 하향의 회색지대의 사회심리는, 홀거 하이데(Holger Heide)등이 신자유주의적 노동재구조화의 현상으로 제안한 것처럼, 일터와 쉼터의 이분구조가 해체되고 ‘노동으로 회수된 존재’로의 행위 지향성을 낳았다는 것이다. (김진호, 2008: 240)


이는 “‘87년 체제’에 대한 논의의 핵심이 민주화와 사회갈등의 제도화라는 측면으로 모아지고 있는” 반면에, 민중신학 3세대는 일찌감치 민주화를 넘어 한국 자본주의 축적체제에 관한 논의로 ‘87년 체제’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켰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축적체제 및 그것과 결합된 조절양식의 차원에서 이른바 포드주의로부터 포스트포드주의로의 이행, 즉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서 ‘적시’(just-in-time)로 불리는 유연한 생산과 유연한 유통으로의 이행에 근거하여 설명되어 왔다. 특히 물질적 재화나 비물질적 서비스를 상품으로 생산함으로써 가치를 축적하던 산업자본주의에서 언어, 소통, 지식, 정보, 기호, 가상, 관심(주목), 정동(정서), 인정, 관계 등을 가치생산적 요소로 전유하는 새로운 생산양식으로의 전환에 대해 주목하는 연구들이 방대하게 제출되고 있다. 재화를 생산하는 데에서, 그리고 재화가 경제적 가치를 획득하는 방식에서 언어와 정서가 주요한 요인이 되어가고 있는 이러한 현실은 이른바 신경제, 지식기반경제, 디지털네트워크경제, 정보경제, 신자본주의, 인지자본주의, 정동경제, 주목경제, 기호자본주의, 플랫폼자본주의 등, 사회문화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우리 삶들의 분산된 파편들을 구조화하고 통일할 수 있는 “상징적 질서”의 부재로 특징지어지는─의 토대로 지목되는 20세기 후반 이래의 자본주의의 변화와 긴밀히 연관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본의 전지구적 보편화와 자본주의적 “탈영토화”의 정점에 도달한 바로 지금 이 시대에 민중신학 3세대는 지식기반경제를 사회적 고통 생산의 메커니즘으로 재규정한다는 사실이다.


 현대자본주의의 지식기반경제로의 전환에 대한 적극적인 좌파적 대응물로서 유효한 이론 체계를 제공해온 것이 바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맑스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인지자본주의’(cognitive capitalism) 이론이다. 인지자본주의론은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로 규정한다는 점에선 일단 지식기반경제론과 입장을 같이 한다. 인지자본주의론자들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확실히 17세기와 18세기의 상업자본주의와 지난 200년 동안의 산업자본주의(포드주의 및 포스트포드주의체제) 이후를 대표하는 ‘제3의 자본주의’다. 그러한 인지자본주의는 세계화한 시장, 금융화한 소비, 비물질적 노동, 비물질적 자본을 토대로 성립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지자본주의 가설은 지식기반경제라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다”(Vercellone, 2007: 14).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지식기반경제 개념이 인지자본주의 개념으로 대체될 때, 지식과 권력 간의 갈등의 역사적 동학이 구체적으로 명시된다는 점에서 둘의 이론적 지향점은 매우 다르다고 주장한다. 특히 인지자본주의 이론가들은 노동의 인지적이고 비물질적 차원의 증대는 인지자본주의로서 지칭되는 새로운 단계의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착취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강조한다(Ahn and Rieu, 2013: 204). 그렇다면, 지식기반경제, 아니 인지자본주의는 정확히 무엇을 착취하는가?


인지자본주의론에 의하면 이 경우에 착취되고 있는 것은 일반지성이다. 왜냐하면 인지자본주의에서 생산성은 지식에서 유래하며 지식은 노동과 구분되지 않고 집단적으로만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지자본주의론에 의하면 지식이 생산과정을 변화시키나, 자본주의적 속성으로 인해 노동과 자본의 적대가 여전히 유지되며 변용된다. 그러므로 초과이윤으로 인한 자본의 이득은 기존의 적대를 해소한 것이 아니라, 적대의 형태를 변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 결국 노동력의 착취는 사회 전체의 착취로 확대된다는 것이 인지자본주의론의 주장이다. (안현효, 2012: 131)


문제는 이렇게 사회전체의 일반지성을 착취하기 위해 이제 자본이 우리의 영혼 그 자체를 노린다는 점이다. 인지자본주의 하에서 “통제사회는 노동자들에게 생산뿐 아니라 정서도 요구한다”(피셔, 2018: 72). 따라서 인지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주관적인 정체성의 특징화 및 역량의 조직화를 통해 자본의 착취는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된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독립과 자기-기업가정신의 벡터들로서 나타났던 신자유주의적 가치들은 사회적 불안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리적인 파국을 낳는 새로운 노예제 형태의 현현들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일찍이 종잡을 수 없고 예측불허였던 영혼은 이제, 생산적 총체를 구축하는 조작적 교환체계와 양립하기 위하여 기능적 경로들을 따라야 한다. 영혼은 경직되고, 자신의 부드러움과 유순함을 상실한다. 산업 공장들은 신체들을 활용하고, 영혼을 조립라인 외부에 두도록 강제했다. 따라서 노동자는 영혼 없는 신체처럼 보였다. 그와 달리 비물질적 공장은 우리의 바로 그 영혼—지성, 감각, 창의성, 언어—을 마음대로 하겠다고 요구한다. (베라르디 [비포], 2012: 266)


그렇다. 자본은 이제 우리의 영혼마저 통제하고자 한다. 오늘날 고통이 일상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장소는 바로 여기, ‘노동하는 영혼’이다. 이는 비단 부가가치가 크고 숙련노동에 의해 구성되는, 즉 통상적인 의미의 지식기반노동이 두드러지는 1차 노동시장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전통적인 ‘근력기반노동’(brawn-based labor)이 중심을 이루는 2차 노동시장뿐만 아니라 2차 노동시장에서 하향 분해된 또 다른 차원의 노동시장인 ‘빈곤노동시장’(working poor labor market)에서도 정보 흐름들을 읽을 수 있고 소통하면서 노동할 수 있는 다중작업 노동력이 요구되기 시작한지 오래이다(마라찌, 2014: 20). 이처럼 고도로 소통적이며, 높은 수준의 언어적 능력들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 일반화될 때, “끊임없이 신속하게 쳐내야 하는 업무, 많은 업무량, 업무 연속성의 단절, 멀티테스킹은 수면 장애, 소진, 정신‧육체 부담과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바우어, 2015: 77). 언어와 소통과 정서가 생산의 영역에 들어옴으로써 도구적 영역과 소통적 영역의 이분법은 전복되었고, 노동과 여가의 경계 역시 붕괴되었다. 노동시간을 제외하면 삶에서 빈틈이라고는 거의 없는 상태가 일상이 되어버린 상황, 우리의 영혼이 시장과 조직이라는 자본주의적 제도의 힘에 완전히 포획된 그런 상황이 목하 진행 중이다.


 따라서 민중신학 3세대가 “민주화-소비사회화-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는 세 가지 요소를 자신의 시대인식의 결정적 문맥으로 설정하고 있는 한, 그리고 이 세 가지 요소가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사회진단의 범주로서 동시대 민중신학에서도 타당성을 유지하는 한, “‘1987년 체제’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고 그 내외적 위기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1987년 체제’를 향한 제3세대의 문제제기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인정할 수 있다(김진호, 2018: 326). 물론 그러한 3세대 민중신학의 문제설정이 계속해서 유효성을 갖는 것은 민중신학이 누구의 시선으로 87년 체제를 이해하느냐, 즉 민중신학은 정치적으로 시민들의 편이냐 아니면 민중들의 편이냐를 따지는 데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느냐,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 비판을 수행할 것이냐는 물음에 집중한다는 전제하에서일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고통이 생산‧구성‧표현되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어떻게 분석할 것이냐는 문제의식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사회적 고통의 관점에서 민중을 이해한다는 것은 민중론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첫째, “우리는 어떤 인간의 삶은 다른 이들의 삶보다 더 취약하고 따라서 어떤 인간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보다 더 슬픔이 되는 그런 조건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런 조건에 반대할 수 있다”(버틀러, 2008: 60)는 사실이다. 민중신학에서 민중은 바로 이러한 조건에 놓여 있는 주체를 가리킨다. 제도적 틀 안에서 규범적 기대와 어긋나는 현실의 문제들을 그야말로 폭력으로 인지‧지각‧체험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상대적으로 더욱 취약한 조건에 놓여 있는 어떤 사회적 존재의 이름이 ‘민중’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고통을 겪는다는 것, 즉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상처에 대해 성찰하고, 상처를 배포하는 메커니즘을 찾아내고, 튼튼하지 못한 성긴 국경, 예기치 못한 폭력, 탈취, 공포 때문에 누가 어떤 식으로 고통을 겪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같은 글, 12). 그럴 때 사회적 고통은 민중적 존재의 삶, 즉 사회적 고통에 더욱 취약한 존재의 삶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작동 원리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민중은 사회적 고통에 특히 취약한 삶, 또는 그런 삶을 사는 존재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사회의 구조와 제도와 관행들 내부의 균열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민중은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가 사회 자체에 대해 갖는 내적인 차이, 사회가 사회 자체의 규범이나 규칙, 이데올로기, 정당성과 갖는 자기모순을 지시하는 기표이다.



참고문헌

김정훈(2010), 『87년 체제를 넘어서』, 한울. 

김종엽(2009), 「서장: 87년체제론에 부쳐」, 김종엽 엮음, 『87년체제론』, 창비, 11-26. 

김종엽(2010), 「87년체제론의 관점에서 본 사회체제논쟁」,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통권 17호, 53-89. 

김진호(1997),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 『시대와 민중신학』 제4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편, 6-29. 

김진호(2000), 『예수 역사학』, 다산글방. 

김진호(2008), 「타인의 고통으로 지은 체제는 오래 지속된다고 해도 그 죽음의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다」,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 산책자. 

김진호(2018), 「‘운동의 신학’에서 ‘고통의 신학’으로: 포스트-‘1987년 체제’의 민중신학」,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분도출판사, 321-342. 

마라찌, 크리스티안(2014), 『자본과 정동』, 서창현 옮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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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출간을 위한 포럼, 열한 번째 마당으로 열린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제218차 월례포럼(2018.12.3.) 발제문의 결론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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