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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29살의 세례(차윤경)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8. 12. 2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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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살의 세례[각주:1]




차윤경*


세 번째 삶의 고백입니다

지난 삶의 고백을 하면서 종종 팔았던 가족이 이번에 함께 교회에 나오게 되어서 이제 더 이상 팔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팔아볼까 고민하다가 이제 그만 저 자신을 팔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한 번 팔아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번주부터 세례 교육을 받기로 했습니다. 유아기때부터 다녔던 교회가 침례 교회라 유아 세례도 받지 못했고, 교회 여기 저기 전전하며 탕아의 삶을 살면서 청년 세례 시기도 놓쳤으며, 그 동안 세례의 중요성에 대해 그다지 생각해 본적이 없던 터라 그냥 저냥 비세례에 교회도 안 나가는 가나안 기독교인으로 살았습니다.

이쯤 되면 쟤는 왜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생각하는 지 고민될 만도 합니다. 저도 이게 습관인지 두려움인지 미련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결혼 생각 없이 10년 넘게 연애만 해와서 어느새 가족 같아 버린 오랜 남자친구를 바라보는 느낌입니다. 같이 못 살정도로 미워하는 건 아니지만 평생 언약을 맺기엔 이것저것 찝찝한 게 많아 그냥 저냥 미루고 미뤄오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버지의 정년퇴직이라든지 집의 계약기간이 끝난 김에,라는 그냥저냥한 이유를 기회 삼아 떠밀린 듯이 또는 기다렸다는 듯이 결혼 서약서 앞에 서게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에이, 해보고 안 맞으면 이혼하면 되지 뭐, 라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제가 맺으려는 언약 - 세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어릴 적 교회에서 배운 내용에 따르면 세례는 물을 통해 그 동안의 죄를 씻어내고 진정한 주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남을 경험하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세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이 간구니라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3: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골로새서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세례는 저에게 이렇게 묻는 듯 합니다. 너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준비가 되었는가. 너가 정말 그 길을 정말 원하고, 가고 싶고, 갈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세례 후에 다시 태어남을 겪고 다른 삶을 살 준비가 되었는가.

장엄한 질문들 앞에 스스로 한 다짐도 삼일 이상 해내기도 어려웠고, 나와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곤 했던 부끄러운 과거들이 떠오릅니다. 세례를 받고 나서 달라지지 않으면 어쩌지? 그럼 결국 나는 새롭게 태어나지 않은 것 아닌가? 칼뱅의 예정설을 처음 배웠을 때 덮쳤던 두려움이 다시 엄습해옵니다. 내가 애초에 선택 받은 사람이 아니면 어쩌지?

다시 도망치고 싶어집니다. 새로운 다짐이나 변화에 대한 기대보다는 나에게 지겹도록 들러붙었던 실패의 예감과 나 자신과 주변 사람을 실망시키고 난 후의 싸한 공기가 떠오르고, 여태까지 미적지근하게 괜찮았듯이 앞으로도 미적지근하게 적당히만 살고 싶어집니다. 수능을 치고 나서 채점하기가 죽을 만큼 싫었던 것처럼, 눈을 감고 풀숲에 머리만 숨기면 괜찮을 거라고 믿는 어느 조류처럼 그렇게 꾸역 꾸역 살아가다보면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미룬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와야 할 것은 반드시 오고, 내가 마주해야 할 것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내 앞에 나타나 나를 마주시킬 것이라는 걸요.

아, 주님은 예전부터 제가 도망칠 구실들을 잔인하게 없애오셨습니다. 내 능력이 부족하여 못하겠다 핑계대고 싶을 때는 1달란트를 받은 종의 이야기(마태 25:14-30)가 떠오릅니다. 그 1달란트로 투기를 한 것도 아니고 사기를 친 것도 아니고 잃은 것도 아니고 그저 잘 보관하기 위해 묻어놨던 그 종을 "이 게으르고 악한 종아"라며 호되게 혼내시는 주님의 모습. 댈 만한 핑계를 미리 경고해놓으신 것만 같아 야속했습니다.

사람과 맺기도 어려운 평생의 언약을 주님과 맺기란 너무나 어려워보입니다. 내가 온전히 변할 수 있을까? 마치 시집 살이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노심초사 하는 것만 같습니다. 이래서 결혼도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주님 앞에서 변하겠다’는 다짐에 100% 자신을 가지고 언약 앞에 설 날은 오지 않겠지요. 저는 평생 실수하고 잊고 다시 변해야 할 사람이 되었다가 변화를 다짐했다가 또 실패하고 우울하고 언약 자체를 의심하고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 앞에 서고자 하는 것은 저와 같이 믿음 없고 의심하고 흔들리고 돌이키고 주저앉는 자에게도 주님이 함께 계시리라는 믿음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3주간 목사님과 함께하는 세례 교육을 받을 예정입니다. 제가 주님에게 소박맞지 않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필자소개

학사 콜렉터(현재 3번째 학위 취득 중), 9년째 학생, 프로 포기러



ⓒ 웹진 <제3시대>



  1. 12월 2일 한백교회 ‘삶의 고백’ 원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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