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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일년 살이(김난영)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8. 12. 2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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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살이



김난영

(한백교회 교인)

 

 


단풍 없는 첫 가을을 맞이하고서야 비로소 남국 제주에 왔음이 실감난다. 활활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단풍 대신 여름내 폭염에 숨죽였던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을의 문을 연다. 12월이 되도 날이 좀처럼 추워지지 않는다. 쨍한 여름은 오히려 육지와 다를 바 없었는데, 가을도 겨울도 아닌 그 어디쯤에 몇 달째 머물러 있는 듯 묘한 느낌이 아주 색다르다.

지난 봄의 제주는 ‘육아섬’이었다. 아이의 초등입학과 남편의 회사 이전 일정이 맞지 않아 한동안 남편 없이, 평생 비빌 언덕인 친정엄마 없이, 끈끈한 전우애를 불태웠던 육아동지들 없이 홀로 아이들과 지내야, 아니 버텨야하는 섬이었다. 게다가 입도 하자마자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눈뜨는 아침부터 화를 내고 동생을 때린다. 큰 아이의 학교적응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어 둘째의 어린이집은 알아볼 엄두도 안 났다. 엄마의 불안과 아이의 부적응이 환상의 콜라보를 이뤄 환장하겠는 나날들이었다.

산후우울증의 기억을 되살려 일단 집 밖으로 나가 누구든 만났다. 육지에서는 있는지도 몰랐던 한살림 마을모임, 소모임을 찾아가고, 아이의 친구 엄마라도 만나볼까 어색한 반모임도 꾸역꾸역 나갔다. 주말마다 집에 오는 남편에게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 만난 이야기를 조잘대니, 대단한 적응력이라며 칭찬한다. 남의 속도 모르고 말이다. 육지에서 아이를 키우며 취향도 생각도 비슷한 사람만 고르고 골라 만나왔다. 낯선 엄마 역할로 몸도 맘도 지치는데, 나와 ‘다름’이 너무 귀찮고 불편했다. 그러나 섬에서는 평소처럼 까탈스러울 여유가 없었다. 겹겹이 쌓인 눈의 필터를 하나씩 거두며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도 나름의 짜릿함이 있었다. ‘오늘 만남에서는 나를 어디까지 보여주게 될까? 나의 첫인상은 어떤 느낌일까? 이 사람 혹시 나를 알지는 않을까? 어디선가 만났던 거 같은데?’ 혼자 밀고 당기느라 바쁘다. 오랜만의 긴장감 있는 만남, 나쁘지 않았다.

육지에서 대안교육공동체 생활에 흠뻑 젖어있던 터라, 아이를 같은 학교에 보내는 엄마를 만날 일이 가장 망설여졌다. 공교육에 불만 가득한 내 시선을 어떻게 생각할까? 입학 한 달 만에 아이를 전학시킨 이유를 뭐라 설명해야할까? 첫 반모임을 앞두고 체기부터 올라왔지만, 다행히 내 아이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첫 학교생활에 고충을 갖고 적응 중인 시기라 서로를 다독이며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종종 학교나 교육과 관련한 이야기에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삐딱하게 나와도 다들 육지것이 뭘 몰라 그러는가 싶어 하니, 외려 모르는 척 거침없이 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은근하게 나를 드러내며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한 일 년이었다. 이국적인 기후가 주는 신비로움 못지않게 섬의 원주민과 이주민의 묘한 기류도 매력적이다. 다가오는 두 번째 봄에는 잠복기를 풀고 ‘다른’ 사람들과 이 섬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고민을 해봐야겠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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