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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긴 여행에 앞서 드리는 짧은 제언 : 2019년 연구소의 활동을 시작하며(김윤동)

시평

by 제3시대 2019. 2. 2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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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에 앞서 드리는 짧은 제언


 - 2019년 연구소의 활동을 시작하며



김윤동
(본 연구소 기획실장)

 

대형마트가 빚어낸 생활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연례행사로 가던 대형마트를 자주 가는 편이다. 더구나 내가 사는 은평구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대형마트 정도가 아니라 대형마트의 대형마트, 아니 쇼핑의 신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들이 세 군데나 들어서게 되었다. 은평구 진관동에 들어선 롯데몰 은평점, 고양시 동산동에 들어선 스타필드 고양, 그리고 고양시 도내동에 이케아 고양점이 바로 그것인데, 이들은 서로가 앞다투어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장했다. 롯데몰은 “다양한 체험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원스톱 쇼핑 플레이스, 놀라움이 가득한 쇼핑몰과 롯데마트, 롯데시네마, 키즈파크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라는 캐치프레이즈에서 볼 수 있듯이 롯데라는 그룹 아래 판매되는 다양한 쇼핑몰과 롯데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월등한 키즈파크 컨텐츠가 압권이다. 이케아 고양은 “낮은 가격과 실용적 디자인이”라는 홈퍼니싱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도 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업으로 평가받아 한국에 상륙하기 전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매장이었다. 스타필드 고양은 ‘FAMILY IS EVERYTHING’이라는 모토를 내걸었다. 말 그대로 가족이 함께 와서 어느 한 명 빠짐없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쇼핑의 기본인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 뿐 아니라 스포츠, 쇼핑, 일렉트로까지 ‘모든 것’이라는 이름이 결코 부끄럽지 않게 소위 영혼까지 끌어모은 쇼핑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세 군데를 통틀어 은평구와 고양시 일대를 몰세권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아이들을 주요 멤버로 하여 소비에 극대화된 생활양식을 보이는 중산층 가족들이 살기에는 이 근처가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특화된 지역이 아닐까 생각해볼 정도다.

정말이지 이런 곳들에 머무르고 있으면 ‘전지전능한 것’, ‘신적인 것’이란 수식어가 그저 우리의 상상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물질화되고 현실화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한에 수렴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세차게 흘러가는 인파들의 일거수일투족, 작은 손짓과 표정변화 속에 들어 있다 보면 단순히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눈이 빙빙 돌고 숨이 가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일종의 임사체험(臨死體驗)에 가까운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자주 그런 곳을 방문하는 노력을 경주함으로서 공황장애의 증상과 같은 불쾌하고 날카로운 찔림들을 애써 무디게 갈아 버린다.

남김없이 체험하고 남김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 세상에서는 더이상 ‘이것 바깥의 다른 것’ 즉, 잔여(殘餘)가 없을 것이라는 그 환상을 준다. 너무 넓어서 신령하기까지 한 그 공간은 너무나 아득하지만 아찔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렇게도 다양한 천태만상의 인간 군상들이 한 시공간 안에서 빙빙 돌며, 거대한 생명체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 ‘내가 모르는 것, 나 아닌 것들’이 없다는 바로 그 느낌은 이 세상에 이유 없이 외로이 던져져서 삶의 근거를 정초할 곳 잃어버리고 떠밀려 다니기에 바쁜 개인에게, ‘전체’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신비의 실과, 선악과가 주어진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모든 곳’에 ‘모든 것’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혼종성이라는 악성코드는 어떻게 ‘꼰대’라 명명된 거대한 장애물을 헤치고 끝내 이길 수 있었나?


이는 비단 우리 삶의 ‘소비’라는 영역으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근본적인 ‘앎’의 영역, 즉 지식의 형태와 관련한 영역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밤의 기록>에서 두 가지의 나쁜 지식의 형태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바로 비평가와 전문가라는 앎의 양식이다. 그의 말을 요약해봤다.


비평가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모든 것에 대해서 한 마디씩 거들 수 있어야 한다. 온갖 것들, 그 ‘모든 것’에 대해 “그거야 알고 있지. 이러이러한 거잖아, 그건 그런 것에 지나지 않아”라고 반사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에 의해 메타 레벨에 서서 자신의 우위성을 보여주려는 것. 그것이 비평가의 지식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전문가는 어떤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중략) 꼴사납게도 정보에 토실토실 살이 찌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비평가가 될 것인가, 초라하게 자기 진영에 틀어박혀 비쩍 말라가는 전문가가 될 것인가. 혹은 각 자리에 어울리게 그 두 개의 가면을 재빨리 교체하며 살아갈 것인가.


이에 덧붙여 나는 한국 사회에서는 비평가적 지식과 전문가적 지식이 결합한 ‘슈퍼 울트라 자뻑’ 지식인들, 자폐적으로 자신의 시야가 닫힌 채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여기는 소위 ‘이명박근혜’들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자기만의 잣대이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최악의 먹깨비들 말이다.

이런 논지와 더불어 최근 연구소가 기획한 책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에서 ‘모든 곳’에 ‘모든 것’으로 있다는 정경일의 신자유주의의 ‘혼종성’에 관한 분석은 주목해 볼만하다.


신자유주의의 혼종성은 체제나 국가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한 사회 내부에서도 – 한층 더 복잡한 방식으로 – 나타난다. 사실 사회적 영역에서의 혼종성이 신자유주의의 더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유혹 방식이다. 그것은 시장논리를 경제영역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관철시키려는 기획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과거에는 시장논리가 통하지 않았거나, 설령 통하더라도 어느 정도 사회적 견제와 감시가 있었던 삶의 영역까지도 모두 ‘시장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두 이야기를 종합해볼 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이명박근혜’라는 최악의 케이스로 전락하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적대적 공존을 수행하며 적절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모든 곳’에 ‘모든 것’ – 처럼 위장된 것 - 으로 존재하는 비평가적 존재 방식은 매우 매력적인 존재양식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지렛대의 중심축으로 포지셔닝함으로서, 게임의 은폐된 주최자, 시상자의 맨꼭대기의 위치로 자처하는 것으로서 꼰대를 피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그 성취를 달성한 – 달성했다고 믿어지는 - 고매한 ‘민.주.주.의’가 말하는 ‘주권적 주체’의 모습인가 의심이 될 정도다.

비단 지식인의 영역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요즘은 자기를 갖가지 팔색조의 미를 갖춘 사람인마냥 포장하여 자신을 표명하기에 능숙하다. 위의 사사키 아타루의 말에 언급되는 ‘비평가’적 지식 양태라든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어떤 ‘교양인’으로서 말이다. 그러니 지식인들도 홀로 단단하게 서서 ‘나는 줄곧 이런 사람이었고, 지금도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정치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일은 요즘 매우 가벼운 일이고 믿음직스럽지 않은 일로 전락해버렸다. 맹세하는 일, 곧 ‘너는 그래서 문빠냐? 너는 그래서 종북이냐?’ 라는 질문이 스스럼없이 아무런 부끄럼없이 아카데미 현장 안에서도 일어나는 사건이다.


우리는 긴 여행을 함께할 사람을 찾는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이미지에는 ‘급진좌파 신학자들의 소종파적 모임이다’, ‘고차원적이라 어렵다’, ‘진보꼰대, 진보 아카데미의 한계가 여실하다.’ 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 붙는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도 신앙과 신학과 지식과 앎, 그리고 삶의 여정이 단순하거나 허망하게 끝나버리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은 자명하지 않은가? 비단 그렇게 육체적인 삶이 허망하게 끝나버린다 해도 늘 그 ‘끝’이라는 밝은 빛이 어둡고 초라한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게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악과적 효능’이지 않은가? 단순히 단편적이고, 일회적으로 지금 돌아가는 ‘정세’를 분석해주는 일은 조금만 전문가라면, 조금만 비평가라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과연 어떤 ‘앎’이 우리의 삶을 통째로 뒤바꿀만한 사건이 된 적은 없지 않는가?

혼자 읽고, 생각하고, 추론하는 일을 '공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빠지는 것들이 많다. 공부할 때 단순히 지식을 얻고 몰랐던 정보를 늘려나가는 작업은 얼마든지 개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잘 이해하고 있는지 서로 눈치도 보고, 몰입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연습 등의 수행이 결과적으로 개인에게 남는 더 큰 훌륭한 공부의 결과물이다. 일종의 '공론'과 그 공론의 '장'을 만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유무형적인 여러 가지를 교환하는 것 말이다.

한 해 강좌를 기획하면서 짧게 기획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필요를 충분히 알고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고, 할 수 없었다. 우리의 ‘앎과 삶’이라는 긴 여행을 부디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 사실 우리 자신의 깊은 내면에 물어본다면, 우리는 답을 몰라서 이 여행을 헤매고 있는 게 아니다. 목적지를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답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답은 삶이 변화될 때 사후적으로 내세우는 간판에 불과할 수도 있다. 오직 용기가 없을 뿐이다. 용기는 어디서 오나? 함께 결정하고 함께 행동하는 도반들의 부단한 ‘주고 받음’ 안에서 온다.


<연구소는 2. 25 오후 7시에 연구소 회원의 밤을 "장벽 저편 사람들의 시선으로"라는 주제 아래 개최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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