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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늙음을 사랑할 수 없는 세계(유하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9. 2. 2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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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을 사랑할 수 없는 세계



유하림*

 


올해로 스물네살이 되었다. 그런데 친할머니는 아직도 내가 어렸을 적의 얘기를 한다. 집에 혼자 있는 게 무서워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던 모양인데, 할머니는 자주 그 날을 생각한다고 했다. 그 날을 생각하면서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이 얘기를 열 번쯤 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나 이제 겁 없어. 아마 우리 집에서 내가 제일 겁이 없을 거야. 우리 가족 중에 아무도 혼자 살아본 사람이 없잖아. 나는 혼자 살면서 밥도 해먹고 청소도 잘 하고 공부도 해. 이제 스물네살이야. 나도 나이 많이 먹은 것 같지 않아? 했더니 할머니는 그러네 그러네 두번 말했다.


우리는 손님이 우리뿐인 프랜차이즈 찜닭 집에서 순살찜닭을 시켜놓고 마주 앉아있었다. 친구들과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나는 할머니를 공항까지 모셔다 드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찜닭 집은 작년 여름, 할머니가 다시 서울로 이사 올 때 이미 밥을 먹었던 곳이었다. 식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할머니는 한 손으로는 무릎을, 한손으로는 벽을 짚으며 천천히 올라왔다. 그 때 처음으로 2층에 있는 식당을 올라가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힘든 일이라 밥 먹기를 포기해버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할머니는 늙는 게 죽기보다 싫어. 할머니는 할머니인 게 싫어. 할머니는 찜닭을 뒤적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얼마 전에는 라면을 다 끓여놓고 실수로 모조리 엎어버렸다고 했다. 나도 그런 실수는 자주해 할머니, 하고 말했지만 할머니의 실수와 나의 실수에는 늙음이라는, 나는 아직 알 수 없는 세월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집안의 어둠도 견디지 못할 만큼 어렸던 내가, 혼자서 있을 때 오히려 평화를 느끼는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할머니는 더 늙어가고 있었다. 밤마다 할머니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할머니는 할머니를 위해서도 기도를 할까? 혹시 늙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더 늙기 전에 죽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건 아닐까?


걸음이 나보다 한참 느린 할머니 속도에 맞춰 걷다보면 가까운 지하철역도 너무 멀게만 느껴져서 많은 것을 탓하고 싶어진다. 할머니의 늙음이 아니라 가파른 언덕을, 평평하지 못한 길을, 단의 높이가 너무 높은 계단을, 우리의 속도를 기다리지 못하고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을.


할머니도 할머니의 늙음을 탓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 늙음이 무엇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젊어서 자신의 늙음을 탓하는 게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늙음을 사랑할 수 없어도, 늙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할머니의 늙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려면 할머니의 기도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 있을 것이다. 내가 앞으로 할머니와 2층에 있는 찜닭 집을 가지 않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일이 있을 것이다.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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