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비평의 눈] 법침범으로서 민중신학(윤인로)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9. 2. 21. 09:52

본문



법침범으로서 민중신학[각주:1]


윤인로

(문학평론가 / 파루시아 출판사 대표)

 


1. 삶. 생명의 고통을 인지하고 표출하고 위무하는 신학의 한 형태. 그 고통의 현장, 유혈적 상황을 통해 다시 정의되는 신적인 힘의 특정한 벡터를 개시하고 있는 신학. 이 책 <민중신학, 고통 의 시대를 읽다> 속의 신학은 내게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을 예전 보다 더 강하게 육박해오고 있는 신학정치적 테제로 사고하도록 강제했다. 이 책 속에는 폭력의 역사와 고통, 법의 효력과 사건적 상황의 발생사를 표현할 수 있을 원천적 용어들. 개념들이 들어있다고 하겠는데, 스케치 형식으로나마 그것들을 적출해 놓는 것으로서 이 서평을 대신할까 한다.


2. 그런 적출 작업은 다음과 같은 문장 속에서 가능하고 필요한 출발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민중신학이 고통 일반이 아니라 ‘사회적 고통’을 주목한다고 했을 때, 여기서 ‘사회적’(social)이란 제도적 틀 안에서의 규칙과 규범과 정체성의 인정을 둘러싼 상호작용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제 인간의 고통은 이러한 사회적 인정 관계의 구조 안에서 인정이 부정될 때 주어지는 경험이라는 의미에서, 자연적인 것도 초역사적인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역사적으로 특수하게 조건 지어져 있는 ‘사회적인 것’(the social)으로 규정될 수 있다.”(232쪽) 적대를 희석시키지 않기 위해 고통을 일반화된 고통으로 이해하지 않기. 달리 말해 고통을 사회적인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적대를 구조적 관례로서 감지하기. 나아가 그런 사회적 고통의 현장을 개시하려는 작업이 진리와 관계된 것임을 비평하는 일, 곧 ‘고통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모든 진리의 조건이다’(아도르노)라는 인용구절을 비평의 첫머리 제사로 달고 시작하는 일, 고통의 개시가 진리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정의의 조건이기도 한 사정을 거듭 사고하는 일. 이런 일들 끝에 내려지는 ‘민중’에 대한 정의를 눈여겨보게 된다. “민중은 사회적 고통에 특히 취약한 삶, 또는 그런 삶을 사는 존재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사회의 구조와 제도와 관행들 내부의 균열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민중은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가 사회 자체에 대해 갖는 내적인 차이, 사회가 사회 자체의 규범이나 규칙, 이데올로기, 정당성과 갖는 자기모순을 지시하는 기표이다.”(238쪽) 사회적 체제 내부의, 권력관계 내부의 균열.차이.자가충돌을 가리키는 기표, 유혈적 폭력의 텍스쳐 내부에 그런 폭력의 한계선 혹은 임계선을 기입하고 있는 폭력의 한계-텍스트로서의 민중, 민중적 생[명]. 이렇게 써두고서는, 다음과 같은 상황들에 초점을 맞추고 좀 더 생각해보게 된다: 균열과 임계로서의 민중적 생[명]이 현행 권력의 정당성 근거와 충돌하는 또 다른 정당성의 정초력일 때, 나아가 그런 힘이 권력의 정당성(정의)의 근거를 문제시하는 제헌적 폭력의 형태소로서 스스로를 보존해 갈 때, 달리 말해 민중적 생[명]이 사회적인 것으로서의 고통의 재생산. 축적상태를 설립하고 보위하는 법의 힘을 침범하고 효력정지시키려는 폭력으로 발현할 때. 그런 때, 때들, 그 사건으로서의 민중적 생[명]이라는 폭력의 발현상황과 그런 폭력의 정당성/정의는 위기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이름을 통해 어떻게 다르게 정초될 수 있을까. 민중적 생[명]의 폭력이 라는 정당방위권의 형질, 위법성을 구성하는 죄 구성요건의 전면적 말소는 “상황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295쪽; 312쪽)의 게발트벡터를 접선으로 삼아 어떻게 거듭 잔존할 수 있을까.


2-1. 그런 질문들에 대한 가능하고 필요한 응답의 단초를 찾는다면 먼저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될 것이다. 안병무의 <민중신학 이야기>에 나오는 한 대목: “하느님 나라가 실제로 뭐냐? 그것은 公을 公으로 돌리는 것이다. 사유화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나 경제나 모든 걸 포함해서 사유화함으로써 분열되고 찢겨진 그것을 다시 공으로 돌리는 일은 하느님 나라의 성취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거예요. ‘公은 公으로 돌려라’하는 말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는 말인데, 이것은 결국 민중의 언어로 바꾸면, 다 빼앗긴 사람들, 밭 한 뙤기 없이 거덜난 사람들에게 자기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에요. 이렇게 잃어버린 제 것을 도로 찾는 운동만큼 하느님 나라를 의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건 없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란 ‘公은 公으로’, 곧 사유했던 것을 다시 참주인에게 돌려주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249쪽에서 재인용) 언제나 이미 공공적이었던 것, 피의 입법 속에서 사유화된 그것을 원래의 공공적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 그 원상회복(아포카타스타시스)의 힘이 신국의 정초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 점에서 공 사상의 결정적 근거는 하느님의 주권에 있”으며, 그런 진정한 주인의 권력의 정당성/정의는 “공을 요체로 하는 사회적 관계의 형성을 뜻하는 것”(249쪽)으로 규정되어 있다. “여기서 ‘공’은 인간이 주어진 조건 안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하는 일체의 관계를 규율하는 규범적 표상이 된다. ‘하늘도 땅도 공이다.’ 안병무의 이 말은 그 진실을 선명하게 선포하고 있다.”(246쪽) ‘참주인’의 권력, 또는 신의 주권이란 그렇게 사적 소유 속에서 죽은 것을 공공적인 산 것으로 원상회복시키는 힘의 다른 말이다. 그렇게 되돌리는 신적 주권의 발현 속에서 체재의 균열이자 임계로 살고 죽는 민중적 생[명]은 자신의 권력과 권리를 수복한다: “‘공’ 개념은 기본적으로 현존하는 체제 내지는 국가권력의 합법성을 뛰어넘는 신학적 인권옹호의 정당성의 근거로 제시된 것이다.”(253쪽) 국가권력의 원천, 다시 말해 폭력의 독점상태를 보위하는 유혈적 합법성의 체제를 ‘뛰어넘는’ 법침범의 힘, 그 위법의 면제시키는 민중적 생명-권의 정당성근거가 저 공공적인 것의 원상회복이라는 신적인 정의에 의해 정초된다.


2-2. 폭력의 합법성을 ‘뛰어넘는’ 민중적 생명-권의 정당성/정의의 근거란 귀속성을 박탈 당한 무리/떼(오클로스)와 예수가 함께 하는 상황 속에서 구축된다. 민중신학이라는 상황신학/사건신학이 ‘말씀의 신학’과 대결함으로써 스스로의 표출시키고 있는 현장 하나를 인용해 놓고자 한다. 세밀한 분석을 가하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법침범의 신학으로서 민중신학의 형질을 사고하기 위해 필요한 한 대목이 아닐까 한다: “거꾸로지요.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사건이다. 말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최초에 사건이 있었다. 즉 나는 예수의 말 이전에 배고픈 예수의 민중이 밀이삭을 잘라먹은 사건이 먼저 있었다고 보아요. 예수의 말보다는 ‘배고픈 민중의 현장’에 주목하고 그것을 중심에 놓아요. 민중의 배고픈 현실, 안식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참다 못해 밀이삭을 잘라먹는 민중에 대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소위 기존체제의 법이라는 눈으로 그것을 보고 안식일법을 범했다고 단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가 배고픈 민중의 입장에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아야 예수가 한 말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납니다. [...] 사건의 빛에 비추어 볼 때만 드러나는 것입니다.”(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87, 31쪽)


2-3. 공공적인 것의 원상회복력, 신의 그 주권적 폭력은 ‘법의 정신이 소유’라는 한 문장 에서 드러나듯 공공적인 것의 사유화라는 법의 원리를 정지시키는 힘이다. 그런 신의 나라, 신국이라는 주권체제를 구성하는 중심성분을 표시하고 있는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예수는 오클로스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 사건을 일으켰다. 그 나라는 이들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부름 받는 나라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배척된 자들, 하여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자로 취급되는 자들, 그런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민(民)’이 되는 체제, 바로 이것이 안병무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다.”(330쪽) 귀속성을 박탈당한 오클로스로서의 민중, 그렇게 어딘가에 귀속될 수 있을 법권한을 박탈당함으로써 성문 바깥으로, 법의 문 바깥으로 내놓이는 무리. 오클로스의 몸과 정신에는 법의 안과 바깥의 경계에 관한 자유재량적 획정의 폭력이 새겨져 있다. 또한 동시에 오클로스는 역전적인바, 예수와 함께 할 때, 법 밖에 내놓인 그 무리는 신국의 사건을 발현시키는 삶-의-형태를 보존한다. 그것은 법의 안으로 재귀함으로서 법의 이윤을 분점하려는 삶의 상태가 아니라, 법의 안과 밖이라는 공모적 위 상체로서의 폭력의 바깥, 곧 폭력의 피안을 향하는 과정/소송으로서의 삶.생명이다: “1980년대에 제기된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이 오늘날 다시 주목되고 있는데, 그것은 ‘속할 곳을 잃어버린’ 오클로스가 바로 현대의 타자론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오클로스론은 그들 자신이 사회적 실어증의 한계를 돌파하여 구술체로서의 예수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나아가 마르코복음이라는 문서를 탄생시킨 것처럼, 타자화된 존재의 재주체화를 보여준다.”(340) 사회적 실어증을 뚫고 말-하게-되는 오클로스, 그 말은 다름 아 닌 ‘유언비어’의 형질에 관한 성찰과 함께 들리는 것이 된다. “1980년 5.18 광주의 경험을 거치면서 안병무는 실마리를 찾아낸다. ‘유언비어’(流言蜚語, rumor)에 대한 착상이 그것이다. 공적 언어가 아닌 말, 공적 언어에서 배제된 말, 그러나 공적 언어의 은폐를 폭로하는 말, 이것이 그가 발견한 유언비어다.”(328) 귀속의 가부를 결정하는, 그보다 앞질러 귀속의 경계를 임의적으로 결정하는 폭력, 그런 폭력의 바깥으로, 경계의 안팎 너머로 민중은 ‘자기초월’한다. “민중에 관해서 내가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한 가지 점은, 민중은 ‘자기초월’을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27쪽); “이러한 민중의 자기초월은, 합리적 계산법으로 해명할 수 없는, 종말론적 사건이다.”(340쪽) 합(리적 계산) 법의 체제와 적대하는 종말론, 종말론적 사건. 그것은 오클로스로서의 민중과 예수가 합작해 발현시키는 법의 피안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다.


3. 자유재량적 경계획정의 폭력, 그것에 대한 정지를 결정하는 민중적 산 생[명]. 이에 대 해 안병무는 말한다. “성서로부터 우리의 행동지침이나 사회윤리를 직접 끌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한다.”(297쪽에서 재인용) 신적인 주권이 결정하는 위기-상황의 형질, 말하자면 ‘모든 법은 상황에 따른 법’(C. 슈미트)이라는 정식을 다르게 관철시키는 오클로스적 민중-주권자의 결단. 그 속에서 “‘복음의 상황화’는 신학의 정언 명령”(310쪽)이며, 그것은 ‘신의 당파성’을 표출한다. “성서에서 보이는 하느님의 당파성은 민중이란 계층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고, 그 계층이 당면한 삶의 부당성을 심판하고 의를 실현하기를 요청하는 데 근거한다. 성서는 일관되게 창조 질서의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준다.”(296) 상황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 다시 말해 비상-상황에 관해 결정하는 신학, 어떤 위기-상황의 신학, 법침범-상황의 신학으로서 민중신학. 그 신학의 ‘결단’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성문 밖’이다. ‘상황에 따른 법’의 신 학으로서 민중신학은 “성문 밖으로 쫓겨난 이에게로!”의 결단의 정당성/정의를 정초하는 힘의 형질을 보여준다: “이천년 전 히브리서 기자는 ‘성문 밖으로’를, 즉 ‘Exodus’를 명한다. 내 교회, 내 교파, 이른바 방주로서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 아귀다툼을 일삼던 교회를 향하여 성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성문 밖으로 쫓겨난 이에게로! 여기가 하느님 선교의 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리스도교는 마침내 자신의 할 일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가난 한 자와 눌린 자의 입이 되고 손발이 되어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되찾아주고 지켜주려는 노력이다.”(312쪽에서 재인용(안병무, <기독교의 개혁을 위한 신학>)) 성문 밖으로의 엑소더스, ‘왕국과 경찰과 재판관’으로 편성된 법 바깥으로의(ek) 부름에 응답하는(klesia) 힘의 신학. 죽게 내버려두는 정치신학에 맞서는 민중신학, 곧 민중적 산 생[명]의 신학을 그렇게 ‘성(문) 바깥으로!’의 벡터 속에 놓을 때, 그것은 ‘폭력 비판이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으로 기립할 때에 법의 피안을 정초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처럼 폭력과 고통의 유혈적 역사를 중단시키는 힘으로 정초될 수 있다. 이 책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를 구성하고 있는 몇몇 글들은 그런 폭력의 역사 바깥을 향하려는 의지로 기립해 있다. 세대를 바꾸며 이어지고 있는 그 글들, 그리고 그 글들이 포착하고 있는 사건과 개념 곁에 인용해 놓을 문장은 다음과 같다. “예수사건은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민중사건으로서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마치 화산맥이 흘러가면서 계속 폭발하는 것과 같다. 즉, 예수는 민중사건의 거대한 화산맥입니다!”(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26쪽)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진보평론 <겨울호>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