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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험난한 가족 예배 도전기 1(차윤경)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9. 2. 2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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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가족 예배 도전기 1




차윤경*


이 글은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고민하고 망설였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쓰게 될 보고서가 될 것이다. 성공기로 끝날지 실패기로 끝날지 나도 알 수 없다. 시작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가족 예배 드리기>에 도전하고 있다.

나는 왜 가족 예배를 기획하는가라는 기획 이유에 답하려면 먼저 나에게 가족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 봐야 했다.

나에게 가족은 무엇일까. 혈연, 나를 낳고 키워준 공동체. 아직까지는, 생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첫 번째 인간관계들. 그들은 내가 미처 알기도 전에 관계가 정립된 존재들이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무지에서 서로를 알아갈 기회를 갖지 못했다. 가족이라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바라보기 더 어렵게 만든다. 엄마니까 아빠니까 자식이니까 언니니까 동생이니까 너무나 쉽게 역할 속에 그 사람을 우겨넣고 기대하거나 실망하거나 판단해 버린다. 아빠가 아닌 ㅇㅇ 씨, 엄마가 아닌 ㅇㅇ 씨, 동생이 아닌 ㅇㅇ, ㅇㅇ를 내가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와 굉장히 가깝지만 또 그만큼 가깝지는 않은 사람들. 내가 안다고 믿는 만큼 알지는 못한 존재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주고 받는 존재들.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을 줄 수도, 가장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존재들. 이미 그런 기쁨과 상처를 주고 받은 존재들.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나에 대해 아는 것이기도 했다.

<건강한 인간관계의 비결은 적당한 무관심. 적당한 가족관계의 태도는 무소식이 희소식>을 모토로 삼고 있는 나는 대체로 타인에게 무심하다. 남에게 무심한 만큼 기대도 하지 않는다. 기대를 하지 않는 만큼 실망도 하지 않는다. 이 공식은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나에 대한 원치 않는 기대는 적당히 넘겨버린다. 원치 않는 실망 또한 나와 무관하다. 나는 이것을 자유라고 칭했다. 적당한 무책임할 자유.

그 범위 안에서 나는 적당히 안전했고 적당히 행복했다. 그렇지만 균열은 아주 가까운 내부에서부터 일어났다. 대체로 타인에게 둔감한 편인 나를 항상 예민하게 건드리는 것은 가족이었다. 가족은 나의 느슨하고 적당한 원칙마저도 무시할 수 없는 굴레였다.

그들은 무심하고 싶은 나를 무심할 수 없게 만든다. 때로 사랑하기가 원수보다도 더 어려웠지만, 사랑하고 싶은 마음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들을 통해 나를 알고 싶고 또 그들 자체로 알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예배는 다른 신앙인들과의 예배도 아닌, 오랜 적국과의 예배도 아닌, 원수와의 예배도 아닌 가족과의 예배같았다.

나의 신앙심은 원초적인 가족애와도 맞닿아 있다. 며칠 전 한백교회 청년들과 섬돌향린 교회의 청년들이 함께 하는 모임에 참석했었다. 교회의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교회의 청년들과 나눈 첫 번째 질문은 ‘나는 왜 교회에 다니는가’였다. 모태신앙으로 생과 함께 신앙생활한 시작한 나는 교회를 한번 ‘끊었’었다. 고2, 일상이었다는 이유 외에 교회에 갈 이유를 찾지 못했던 나는 내 스스로 교회에 다닐 이유를 찾기 전까지는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일상, 습관, 익숙함, 관계 그 모든 것들을 하나 하나 버려가면서 나를 교회에 남아 있게 할 이유, 내가 버리지 못할 이유를 찾았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내가 버리지 못한 것은 아주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것이었다. 나와 우리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던 할머니들. 나의 양가 할머니들은 같은 교회의 권사님들이다. 신앙의 고리로 연결된 이 두 분은 매일, 매주, 새벽기도부터 주일예배를 성수하며 그저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다. 우리는 명절 때마다 가족들이 모여 앉아 성경 말씀을 읽고 찬양하고 우리의 이름 하나 하나를 부르며 축복을 구하는 할머니의 기도를 들었다. 내가 겪은 최초의 가정예배였다. 그 신앙은 내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난 그 신앙 속에서 보호 받고 정서의 뿌리를 두고 자란 사람이었다.


결국, 나는 나를 위해서 이 모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시작하기로 다짐하고 이렇게 빼도박도 못하게 선포하는 와중에도 두려움이 엄습한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걸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내는 것이 아닐까. 다들 그럭저럭 사는데 내가 오버하는 것 아닐까. 나 스스로의 신앙심도 간신히 있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내가 뭐라고, 이런 걸 하려고 하는걸까.

성경은 신과 인간이 관계를 맺으며 이어온 계보의 이야기이다. 피에서 피로 이어지며 전해지는 이야기들, 전통, 예식 그리고 약속들. 그 가정들이 하나같이 아름답고 건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치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의 이유로 불행한 것처럼. 오히려 온갖 기상천외한 불행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가정들이 많았다.

나는 우리 가족을 내 생각보다 더 믿고 싶은 것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결함과 불행 또한 신앙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최소한 다른 국면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조금이나마 더 괜찮아지는 방법, 화해할 수 있는 방법,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지금도 충분히 괜찮다고 하기엔 나는 아직 우리 가족은 더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나 보다.


*필자소개

학사 콜렉터(현재 3번째 학위 취득 중), 9년째 학생, 프로 포기러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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