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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청년들을 위한 교회가 없는 세태 속에서 그럼에도 염치 불고 청년들에게 말을 붙일 수 있다면...(이상철)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9. 4. 4. 22:56

본문

청년들을 위한 교회가 없는 세태 속에서 그럼에도 염치 불고 청년들에게 말을 붙일 수 있다면...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주간)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엡 2:17-20)

프롤로그: 너희가 청년을 아느냐?

교단이 정한 청년주일 설교문 의뢰를 받고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은 학창 시절 저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민태원의 ‘청춘예찬’이라는 수필이었습니다.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鼓動)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과 같이 힘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상은 ‘청춘예찬’의 첫 대목입니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 점점 사라져 가는 제게, 심장의 고동도 잠잠하고 피도 더 이상 끓지 않는 저에게, 열정을 지닌 청년들을 위한 설교문을 쓰라는 권고는 저로 하여금 묘한 설렘과 간만의 흥분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학교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만나는 현실의 청년은 기성세대가 그들의 환상속에서 만들어 놓고 전제하는 청년과는 다릅니다. 교회 청년들에게 물으면 본인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들(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시선이 무척이나 부담스럽고 부당하다 말합니다. 내일의 주역, 교회의 기둥으로 자신들을 부추기면서 청년의 열정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죠. 실례로 저는 작년(2018년) 연말에 “열정”을 주제로 하는 신학생 논문 발표 심사위원 및 패널로 참여한 바 있습니다. 한신, 장신, 감신, 서울신, 연신, 이대 등 각 신학교에 재학 중인 신학생들이 기독청년의 열정을 주제로 소논문을 썼는데, 글을 읽으며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더 이상 교회청년들에게 열정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에서 5포 세대(3포+취업, 내 집 마련)를 지나 7포 세대(5포 + 인간관계, 희망), 심지어 9포 세대(7포 + 건강, 외모관리)까지 다다른 청년들에게 교회가 도대체 무슨 희망이 되었냐고 그들은 따지더군요. 교회 세습, 부당거래, 부정축재, 성적 불평등과 폭력 등의 문제에 있어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처지에서 우리에게 왜 이 사회의 적폐인 교회를 위한 열정을 강요하느냐며 청년들은 반문합니다.

교회에 청년이 없다고 푸념하기 이전에, 요즘 청년들은 열정과 패기가 없다고 비판하기 이전에 과연 기성세대들이 오늘의 청년을 바로 보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교회의 기성세대들이 청년들에게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당장 저부터가 오늘의 청년에 대해 무지했고, 21세기 청년의 열정을 쌍팔년도 시선에서 낭만화, 대상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청년의 꿈과 가능성은 꼰대가 되어버린 기성세대들의 성공신화를 위해 동원되는 인정투쟁의 산물이지, 그것이 결코 현실의 청년들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풋풋함과 포텐이 지금껏 찬양되는 이유는 모두가 어떤 청년에 대한 도착적 환상, 즉 관념 속 청년상에 집착하기 때문 아닐는지요. 이런 이유로 거의 대부분의 현실 청년들이 겪는 절망과 시련은 언제나 생략되고 심지어 미화되기까지 합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류의 청년 갱생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프면 환자지 왜 청춘입니까. 우리 사회는 아픔의 근원이 되는 치부를 감추고 무조건 청년들에게 열심히 참고 견디다 보면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해도 안 된다는 것을, 개천에서 이제는 용이 안 난다는 것을 어른들만 모르지 청년들은 다 압니다. 그 현실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라는 말을 하는 기성세대들을 청년들은 이제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청년들은 도저히 ‘지금-여기’에서 불안해 못 살겠다고 하면서 약을 먹고, 자해를 하고, 급기야 자살까지 감행합니다.(20대 사망 중 원인 중 1위가 자살이고, 그 비율은 수년간 40%~50%를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암울한 21세기 청년의 실존 속에서 우리는 청년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오늘의 청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는 것입니까? 지금부터 금주의 본문인 에베소 2:11-22 말씀을 통해 지혜를 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에베소를 둘러싼 이야기

에베소는 로마제국이 식민지 아시아 주의 수도였습니다. 에베소는 항구도시였고, 동방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중요한 상업도로가 있었던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 못지않은 로마제국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가 바로 에베소였던 것이죠. 어쩌면 에베소는 제국의 질서, 로마의 이데올로기가 널리 퍼지고 적용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21세기 제국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의 원리에 철저히 종속적이고 충실한 대한민국과 그 중심부 서울을 연상시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극한 작업으로 죽어가고, 집을 내쫓긴 철거민이 자살하는 디스토피아적 상황속에서 한국은 모든 세대의 자살률에서 단연 세계적입니다. 한국 사회 청년의 문제는 이러한 거대한 자본의 음모 속에 움직이는 퍼즐과 같아서 좀처럼 완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n포 세대 청년들이 등장한 이유는 현실의 절망적 상황 때문이겠지만, 청년들이 체감하는 더욱 암담한 사실은 미래에도 별다른 희망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렇듯 자본의 논리에 삶의 안전망이 무너진 한국과 로마제국의 그늘 아래 놓여 있던 바울 당시 에베소는, 21세기 제국이라는 할 수 있는 자본과 2천 년 전 세계를 호령했던 로마제국의 강압 속에서 동일한 제국의 고통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닮았습니다. 그 로마제국의 한 복판에 위치한 도시가 바로 에베소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첫 번째 선교여행에서 안디옥으로 가다가 에베소에 잠시 머물렀습니다(행 18:18-20). 두 번째 선교여행 중에는 3년간 머물렀습니다(행 20:31). 그때 바울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았던 자들에게 세례를 주었고(행 19:1-5),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했으며(19:8-10), 병든사람을 고치고 악귀도 물리쳤습니다(19:11-12). 마술사가 개종하고(19:17-20),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장사꾼들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19:23-24). 그리고 바울은 세 번째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감동적인 고별연설을 하였습니다(행 20:13-35). 이렇듯 바울과 에베소 교회 사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만큼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도 각별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에 분란이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입니다.

3. 초대교회에 묻다. 왜 초대교회인가?

오늘 에베소서 본문 2장 11-12절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고 쓰여 있는데, 이때 ‘여러분’은 이방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전에는 하나님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 된 자”(2:13)라고 바울은 정의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평화로 오신 그리스도로 인해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을 하나 되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2:14-18)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인 교회는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의 공동체”(2:15)이어야 한다고 바울은 힘 있게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 안에 분란이 일어나고 있음을 바울은 안타깝게 여기면서 눈물로 교회의 일치와 화해를 위해 지금 에베소를 향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말 많네 해도 교회처럼 말이 많고 탈도 많은 곳이 있을까요? 당장 한국교회만 둘러봐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할 정도로 한국교회는 말이 많습니다. 이런 교회의 역사는 비단 오늘의 일이 아니라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가 분열과 환란에 빠질 때 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고 말하지만, 엄격히 말해 초대교회는 우리가 굳이 돌아갈 만큼 평화로운 공동체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만 봐도 그렇고, 바울이 교회를 향해 쓴 서신들을 보면 당시 교회는 한마디로 위기의 공동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왜 초대교회로 돌아가라, 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에 나와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비록 지금은 분열되어 있지만 막힌 담을 허물고 화해가 이루어지는 역사가 교회를 통해 발생할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에 있었던 공동체입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갈라져 있지만, 비록 지금은 우리가 부족해서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지만, 우리 가운데 성령이 오셔서 다시 우리를 하나 되게 할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그 소망을 간직한 공동체가 바로 초대교회였던 것이죠. 특별히 바울은 좌절과 환란 가운데 있는 현실의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그 안으로 도래할 새로운 미래를 소망하는 믿음을 지녔던 사람이었고, 그의 믿음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교회가 어려움에 바질 때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4. ‘산 돌 Living Stone’로 지은 교회의 ‘모퉁이 돌 Corner Stone’

신약성서에서 초대교회를 말할 때 마다 자주 언급하는 것이 교회의 물리적 건축재료인 돌에 대한 묘사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퉁잇돌(2:20)’이 대표적이고, 베드로 전서에는 모퉁잇돌과 더불어 ‘산 돌’(벧전 2;5)이라는 표현도 더불어 나옵니다. 성서에서 교회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돌은 구체적으로 교회를 이루는 개체, 즉 성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을 짓는 데는 여러 가지 형태의 돌이 필요합니다. 모든 크기와 형태의 돌이 필요하다는 말은 각각의 권리와 주장을 고집할 수 있다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각각의 돌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릿돌’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마가 12:10-11) 교회가 교회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릿돌을 기반으로 다양한 살아있는 돌들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각자의 목소리와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의 신분이나 성격의 다양성은 그리스도라는 머릿돌 위에서 발현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하는 봉사와 선교가 다른 사회단체가 하는 그것들과의 다른 점입니다.

‘죽은 돌’은 움직이지도 변화하지도 않습니다. ‘산 돌’은 ‘죽은 돌’에 대한 대립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는 교회를 ‘산돌로 지은 집’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무슨 뜻 일까? 어떻게 돌이 살아있지,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산돌이란 목수의 아이디어에 자기를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살아있는 돌만이 자기를 깎아 다른 돌을 옆에 설 수 있게 하고, 자신도 다른 돌 옆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갈등적 상황을 말하는 가운데 ‘산 돌’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특정세력을 염두에 둔 말일 텐데, 그들을 ‘산 돌’과 대비되는 ‘죽은 돌’이라 가정한다면 이해가 쉽겠습니다. 교회 안에서 오해와 불신과 갈등은 자신을 깎아내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죽은 돌’ 같은 성도들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것은 초대교회뿐 아니라 현대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에베소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예수가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2:20) 산돌에다가 모퉁잇돌이 부가된 셈이죠. 즉 교회의 성도는 살아있는 돌이 되어야 하고,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에서 모퉁잇돌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퉁잇돌을 끌어들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리서 성전이 됩니다.”(2:21) 모퉁잇돌 되신 그리스도로 인해 건물 전체가, 즉 교회가 연결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연결하게, 서로를 통하게 했으니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 역시 교회에서 화해와 소통과 평화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모퉁잇돌이 함의하는 바입니다.

5. 두루누리, 잇다

이 문구는 기장청년회전국연합회가 정한 2019년 표어입니다. ‘두루누리’는 국립 국어연구원에서 '어디서나 어떤 기기로든 자유롭게 통신망에 접속해 자료들을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을 뜻하는 유비쿼터스(ubiquitous)의 대체어로 만든 용어입니다. 국어연구원에서 누리꾼(네티즌)들을 대상으로 행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선정된 것이라 하네요.

기청에서 왜 ‘두루누리, 잇다’로 올해 표어를 삼았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언제 어디에 있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이어져 있음을 말하고 싶었나? 혹은 우리는 각자가 처한 그곳에서 사람들을 잇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나? 오늘 에베소서 본문에서 이야기했던 막힌 담을 허물고 화해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어 이쪽과 저쪽, 이 사람과 저 사람을 연결하고 마중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볼 때 기청이 정한 2019년 표어 ‘두루누리, 잇다’는 오늘의 에베소 본문과 연결됩니다.

문제는 이제부터 교회가 ‘두루누리, 잇다’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어떤 결단과 행동을 해야 하는가, 입니다. 앞서 서두에서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청년들이 겪는 좌절과 절망에 대해 논하면서 기성세대들을 향해 청년에 대한 오래된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촉구한 바 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청년의 위상과 청년을 둘러싼 환경이 변했으니 이제부터라도 교회에서 청년을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에 변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청년들을 교회의 중직들이 결정한 일을 단순 수행하는 피동적 존재로 여기지 말아 야 할 것입니다. 청년들을 교회의 중대한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케 할뿐 아니라, 실질적 권한과 집행의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청년 스스로가 위상을 제고할 수 있도록 기회를 보장해 주면 어떨까요. 이러한 노력이야 말로 기성세대가 보여야 할 모퉁잇돌과 같은 역할이라 봅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쌓이고 쌓일 때 교회를 떠났던 청년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 모든 세대가 다시 교회 안에서 이어지고 관계가 회복되는 역사가 발생하리라 믿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청년들에게 당부합니다. 우선, 이런 세상을 여러분들에게 물려주어 미안하고 송구할 따름입니다. 기성세대의 믿음이 부족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과 섬기는 교회를 하나님 보기시게, 그리고 젊은 청년들이 보기에 안타깝고 실망스러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을 회개합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역사는 늘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썼던 에베소 교회도 마찬가지였죠. 열정적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세웠던 교회는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 먹었던 마음을 잃어버리고 교회 안에서 분란이 생기고, 반목과 시기와 차별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 여러분들이 지금의 사회와 교회를 보면서 느끼는 실망감과 절패감 못지않았던 그것이 에베소교회를 짓누르고 있던 때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를 씁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의 화해와 연합을 몸청껏 외치면서 교회의 교회됨을 호소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2:13)라고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2:14)로 인해 우리가 하나가 되었다고 바울은 선포합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고, 단절된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화해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영어로는 atonement(속죄)라고 합니다. 이 단어를 분절하며 ‘at-one-ment’가 됩니다. 단어 한가운데 ‘one(하나)’이 자리 잡고 있죠. 어떤 의미일까요? 만날 수 없고 화해될 수 없었던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오늘 에베소 본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2: 16-17)

6. 에필로그: 기독청년에게 바란다

사랑하는 기독청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안에 임하기 바랍니다. 그 평화가 전해지는 바람에 “이방사람과 유대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2:19)고 오늘의 본문 에베소서는 말합니다. 오늘의 말씀에 의지해 갈라진 민족을, 갈라진 세대를, 갈라진 계층을 하나로 잇는 모퉁잇돌 역할을 여러분들이 해주십시오.

남.녀간의 갈등, 성소수자와 난민에 대한 차별, 우리 안으로 들어온 이방민족에 대한 괄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반목 등 우리 사회 안에는 다름과 차이로 인한 억압과 폭력이 난무합니다. 이 모두가 기존의 냉전적이고 분파적이며 배타적인 문화 속에서 성장한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이런 산적한 문제들을 장차 해결할 수 있는 주인공은 여러분, 기독청년들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의 역사를 일구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신 몸을 내어주면서까지 갈라진 세상을 하나 되게 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의 친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의 조건과 상황이 어렵다고, 절망적이라고 낙담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갈라져 있지만, 비록 지금은 우리 안에 평화가 없지만, 우리보다 먼저 갈라진 세상을 잇는 화해의 역사를 일구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이기에 이대로 주저앉아있을 수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날이 올때까지 하나 되게 하는 성령이 우리를 지킬 것이고, 우리가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역사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신앙이고 그것을 믿기에 우리는 세상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을 통해 우리 사이 막힌 담을 허물고 그 사이를 잇는 놀라운 역사가 벌어질 것입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으며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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