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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퀴어] 지금은 쉽게 말하지만(유하림)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9. 4. 2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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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쉽게 말하지만

유하림

날은 풀리는데 몸은 점점 뻣뻣해지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깨와 뒷목이 뻐근해 냉장고 문을 여는 것도 힘을 들여야 했다. 고민을 하다 한의원에 갔다. 침대 위에 엎드려 누워 증상을 말씀 드렸다. 그러자 한의사 선생님은 내 뒷목을 주무르며 뒷목 잡을 일이 많았냐고 물었다. 2년 전에 갔던 한의원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간이 불가마 같다고, 간에 화가 쌓여있다고 일러주셨다. 시간은 흘렀는데 여전히 화가 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내 몸을 달구고 있었다.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잘 하고 있었는데...  

2년 전 가을이랄지, 겨울이랄지 했던 계절에 나는 집으로 완전히 돌아오게 되었다. 복학한지 두 달만에 휴학을 결정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이 무척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면 이주란 소설 『넌 쉽게 말했지만』의 주인공보다는 최진영 소설 『돌담』의 주인공처럼 뱉어진 것에 가까웠다. 뱉어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착지에서 온다. 제 발로 걸어나온 사람들은 착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등짝을 떠밀은 힘이 세면 셀 수록 불완전한 착지를 하게 된다. 나는 캭 퉤! 하고 뱉어진 처지였다. 그러니 착지라고 해도 될까. 뱉어진 건 정말 뱉어진 건데, 착지라는 말은 이미 안정적이어 보인다.

자취방 짐을 싸면서 눈물이 삐져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이렇게 빨리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큰맘 먹고 한 일들을 쉽게 물러버리게 될까 두려워 긴 한숨을 쉬었다. 그치만 별 수 없었다. 일단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지 공부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위태로웠다. 가장 쉬운 일도 할 수 없었다. 잠을 자는 것, 친구들과 카톡을 주고 받는 것, 책을 읽는 것, 영화를 보는 것, 대화할 때 눈을 보는 것(눈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일들이 너무 어려워져서 처음부터 다시 해봐야했다. 잠을 자기 위해 노력했다. 계절에 맞는 잠옷을 사고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 하루에 일정 시간은 꼭 운동을 하거나 몸을 움직였다.  

잠을 잘 수 있게 된 뒤에는 이런 일들을 했다. 처음으로 영화제에 갔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큰 돈을 내고서 보러갔다. 친구들 카톡에 답장을 미루지 않았고, 답장을 하지 못하겠으면 답장을 하지 못하겠다고 답장 했다. 너희들이 나를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나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앉아 있는 고양이 옆에 가서 가만 쳐다봤다. 안 입던 옷을 꺼내 매일 다르게 옷을 입었다. 베란다에 앉아 따끔거리는 소설을 읽었다. 넷플릭스를 다시 결제해서 미국 드라마도 봤다. 점심은 닭가슴살 혹은 고구마 같은 것으로 먹고, 저녁엔 엄마나 다른 가족들과 외식을 했다. 한 끼도 거르지 않았다. 신발은 사지 않았다. 그대신 반지를 네개 사고,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했다.

이런 것들이 하기 싫어질 때면 글을 썼다. 할 말이 꾸역꾸역 쌓였을 때 글도 써졌다. 학교 다니는 두 달 간의 시간 동안 꾸준했던 두통과 소화불량이 더 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다는 몸의 항복이었다면, 글을 쓴다는 건 더 이상 마음에 쌓아둘 곳이 없다는 마음의 항복이었다. 미세한 변화와 차이에도 쓰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이를테면 산책을 하다가도 낮에 걷던 거리를 밤에 걸으면 보이는 게 달랐다. 낮의 그림자와 밤의 그림자, 낮의 온도와 밤의 온도, 낮의 소리와 밤의 소리 같은 것은 낮에도 밤에도 와보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조그만 차이의 풍경을 마음에 담아뒀다가 꾸준히 글을 썼다. 그렇게 매일 일기를 썼다. 

일기에 '지금 여기에 있다'고 썼다. 과거를 반복해 살아가거나, 앞당겨 미래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그 때 거기에 있었다. 

'너무 쉬운 일들이라고 생각해왔지만 나는 이제 그런 일들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고 싶다. 나는 이제 그렇게 살고 싶다.' 는 이주란 소설 『넌 쉽게 말했지만』 주인공의 말에 한참을 멈춰서 엉엉 울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어서 한참을 헤맸다.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내가 지금 좋아하는 걸 어쩌다가 좋아하게 됐는지, 지금의 내가 왜 지금의 내가 됐는지 알 수가 없어서 자꾸 발을 헛디뎠다. 뱉어짐으로 인한 외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일단 했다.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내 뒷목은 딱딱하게 굳어있고 한의사 선생님은 열받느냐고 물어온다. 

'눈물 많은 사람은 눈물 많은 인생을 살게 된다'는 이제니의 구절이 있다. 나는 물론 눈물도 많지만, 화도 많은 사람이라 화가 많은 인생을 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주란의 소설에서는 아무것도 해결 되지 않았다. 애초에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 해결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주인공은 쉽다고 생각하던 일들을 했다. 자주 짜증을 내고 친구를 만나는 일을 미뤘지만 미룬 일들에 대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매일을 살았다. 

매일을 살았고, 매일의 일기를 쓰면서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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