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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존대의 일상(문재승)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9. 4. 2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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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대의 일상

문재승 (가족신문 월간 제주살이 편집장)

"네, ooo 고객님이신가요? 안녕하세요. 우선 그동안 저희 카드를 이용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 전화 드린 것은 우수고객님들께만 특별한 혜택을 드리기 위해서 이번 달에 한하여 카드사용 한도를 오백만원으로 상향조정해드리기...".  

"얼마요?"

"네, 카드사용 한도 오백만원이십니다."

또, 또 쓸 데 없이 말을 올리고 말았다. 아니 이번에는 그나마 이치에 맞는 올림이다. 돈을 숭배하는 건 모두가 끄덕이는 일 아닌가? 돈을 벌자면 아낄 줄도 알아야 한다는데 소중하다 못해 존대까지 하는 내가 바로 그런 류의 선구자 아닌가. 그래도 "예약이 꽉 차셔서요", "이번에 새로 나온 카드가 있으신데요" 라는 말보다는 낫지 않은가.   

"이거봐요"

"네 고객님,말씀하십시오"

흠, 아까 얼마요, 할때 말끝이 짧아 느낌이 훅 왔다. 녹음이 되는지 확인하고 급히 고객 응대 매뉴얼을 뒤적인다. 답이 있겠냐마는.  

"아니 나한테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할인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카드 사용한도를 높이는게 무슨 혜택이야. 그냥 돈 더 쓰라는거 아니야. 지금 나랑 장난쳐?"  

"고객님 그런 뜻은 아니셨고요, 이번에 카드 사용한도가 높아지신 후 실적이 좋으시면 이자율 할인 들어가신 후 추가적인 혜택으로 이어지시게 됩니다" 

매뉴얼에 이르기를 고객이 이성을 잃고 분개할 때는 최대한 존대하며 바짝 엎드리라 했다. 그땐 사람과 사물 가리지 않고,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존대하는 나를 보게 된다. 발화자는 물건보다 못한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럼 너나 해, 알았냐?" 

고객은 몇차례 험한 이야기를 내뱉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하긴 애초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돌린 것은 나였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후 감정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다음 고객과의 연결이 기다리고 있다. 난 언제쯤이면 내 자신을 높여 발언하는 날이 올까.

"마음이 닳고 닳으셔서 이젠 일 못하시겠습니다. 그만 두시겠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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