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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여성의 몸과 민주주의(김하야나)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9. 6. 7.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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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과 민주주의

김하야나(Northwestern University 박사과정)

저는 시카고에서 광주로 유학을 있습니다. 소속은 Northwestern University, 노스웨스턴 대학교이고, 전공은 Interdisciplinary PhD in Theatre and Drama, 명칭이 길지만, 연극 전공이란 뜻이며, 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작년 여름 광주에서 일년 취재를 하고 여름 돌아갑니다. 논문의 제목은 Embodying Democracies: The Politics of Mourning and the Gwangju Uprising, 1980~2019, 번역하자면 민주주의 체현하기, 혹은 몸으로 민주주의 하기, 애도의 정치학과 광주항쟁, 1980~2019입니다.

논문 제목에서 ‘민주주의’가 단수형의 democracy 대신 democracies라는 복수형인 것은 항쟁 이후 지난 39년간 민주주의의 개념은 하나로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기도, 또 그것에 영향을 받기도 하며, 수정되고 변화하는, 그리하여 최종의 어떤 완결적인 상태로 있는 대신, 언제나 과정 속에서, 개념의 경계를 허물어 새로 빚고 또 허무는 동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반영합니다. 민주주의가 이처럼 부단한 변화의 과정 속의 것이라면 여성의 몸은 이 과정에 어떻게 관계하는가? 특히 항쟁 당시 그리고 그 이후의 한국 현대사를 만들고 바꾸어 나가는 데 여성의 몸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논문을 통해 답하고자 하는 어렵지만 중요한 질문입니다.  

문예 이론가 일레인 스캐리(Elaine Scarry)는 저서 The Body in Pain: The Making and the Unmaking of the World(한국어로 번역된 책 제목은 『고통받는 몸: 세계를 창조하기와 파괴하기』입니다)에서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권력은 국민의 신체에 고통을 가함으로써 권력을 확립한다고 말합니다. 스캐리에 따르면 몸은 허구에 불과한 권력을 실재로 변환시키기 위해 국가에 의해 포획된 전쟁터가 됩니다. 일례로 고문이 있습니다. 고문은 고통을 통해 허구적인 권력이 실재인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살과 근육에 가해지는 극한의 고통은, 당하는 자에게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내 몸에서 벌어지고 있기에 그 실체가 명확하고, 그 고통을 받아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저히 그 내용과 경험을 정확하게 공유 가능한 형태로 복제・전달할 수도 없는, 그러나 나의 신경계를 극한의, 견딜 수 없는 지경의 날카로운 힘으로 지배했던 그 시간은, 없던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현실 중 최악의 현실입니다. 스캐리는 고통의 이러한 구체성, 비공유성, 몸에 기반한 실재성을 강조하며, 국가에게 고통은 정치 도구라고, 폭력에 노출당한 자로 하여금 허상에 지나지 않을 그 권력을 실재하는 현실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도구라고 말합니다. 

스캐리의 생각대로라면 항쟁 당시 계엄군의 폭력은 그 정도가 잔혹할수록 도리어 신군부 권력이 정당성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 되고, 폭력의 강도가 강할수록 권력에 대한 그들 스스로의 불안증 또한 누설합니다. 그토록 잔혹한 군사 작전을 수행해야만 실재하지 않는 권력의 윤곽을 억지로 간신히 그려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도시 전체가 범죄 현장이었던 1980년 광주에서 피해자에는 남녀가 없었으나 적어도 현장의 가해자는 전원이 남성이었습니다. 가해자가 모두 남성인 항쟁 기간 동안 여성의 몸은 국가의 힘이 가장 잔혹하게 구체화된 전쟁터였습니다. 항쟁 당시 성범죄를 말단 사병의 일탈쯤으로 축소해서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남성들이 국군의 이름으로 광주에 투입되었다면 군사 작전 도중이었던 늦은 시간 휴식 중이었던 여성의 몸에 대한 이들의 범죄는 개별적 일탈이 아니라 국가가 허가해준 조직적 범죄입니다.   

제가 몸이라는 화두에 집중하는 이유는 잔혹한 피해 때문만이 아닙니다. 항쟁 당시 여성의 몸은 피해만 입은 것이라 아니라 국민주권을 표현하는 절대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사진 기자 나경택이 촬영한 궐기대회 사진의 모습을 기억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모습은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비디오와 일본 NHK 방송국의 기자의 비디오에 영상으로도 담겨있습니다. 

1980년 5월24일 토요일 제2차 분수대 궐기대회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두 비디오가 비추는 짦은 영상 속, 분수대 무대 위 화자는 우연히도 세 명 전원이 여성입니다. 한 명은 시국 선언문을 낭독하는 이현주 씨, 다른 한 명은 시민 자유발언 시간에 올라와 자식을 찾는 한 중년 여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읽고 있는 최인선 씨입니다. 카메라가 각도를 바꿔 청중의 모습을 비추면 그곳에는 더 많은 여성들이 보입니다. 할머니들, 여학생들 그리고 어린아이를 안고 나온 젊은 엄마들이 남성 시민과 섞여 앉아 있습니다. 두 영상은 여성들이 궐기대회의 중요한 화자였고 또 중요한 청자였음을 생생히 보여줍니다. 

철학자 자끄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그의 저서 The Politics of Aesthetics: The Distribution of the Sensible(한국어로 번역된 책 제목은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입니다)에서 미학 행위란 공공 영역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감각의 구조를 해체하고 교란시키는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궐기대회에 참여해 발언하고 경청한 여성들은 공공 집회라는 공동의사결정의 장에서 어떤 성별이 무대 위의 화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지, 또 어떤 성별이 공적인 행사의 핵심 참여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지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바꾸게 합니다. 눈을 뜨고 전면을 보았을 때 분수대 위 다수를 향해 결연하게 서 있는 자가 여성인 시각적인 경험, 귀를 열고 소리를 들었을 때 고막의 벽을 두드린 소리가 여성의 목소리인 경험, 2019년 현재에도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 1980년에는 더더욱 부족했을, 랑시에르라면 익숙한 감각의 경험 혹은 사회적으로 당연한 것이 무엇인지의 구조를 재분배시킨다는 의미에서, 미학 행위라고 불렀을 모습이었습니다. 

 집회라는 행위는 힘 있는 집단 수행이자 발화입니다. 수려한 문자적 언어만 유의미한 언어라고 여기는 편견을 내려놓는다면 연단 아래의 시민들도 사실은 모두 화자입니다. 어쩌면 더 우렁찬 화자입니다. 분수대를 둘러싸 앉은 수천수만의 여성의 몸, 남성의 몸,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의 편협함이 담아낼 수 없는 더 다양한 여러 성별의 몸, 이 몸들 전체가 모여 궐기대회에서 보여준 것은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기꺼이 길과 광장에 내어놓은 몸을 통해, 나의 몸과 너의 몸의 경계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허물어 일렁이게 하는 확장된 몸이 되었고, 이를 통해 광주는 거대한 집단 군무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단 군무의 장에 참여한 여성의 몸은 역할이 충분히 조명받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합니다.

촬영_나경택

일렁이는 군무에 몸을 실어본 이들은 광주항쟁 이전의 그들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경험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개념에 질문을 던지게 했습니다. 항쟁의 체험은 시민들로 하여금 국가가 무엇이냐, 민주주의는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질문들은 새로운 정치 체계를 상상하게 하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켰습니다. 몸의 경험이 신체의 물질성을 넘어 문화와 지식과 같은 비물질적인 영역에 가닿는 지점입니다. 광주항쟁이 우리나라 현대사의 어떤 새로운 시작이라면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쟁 이후 생산된 새로운 정치, 법, 역사, 문화를 포괄하는 ‘포스트 광주’의 지식이 몸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연구는 진행 중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그럴듯할지 허무맹랑할지 더 공부하겠습니다. 제게 발화 시간을 주셔 감사합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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