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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오후의 프리랜서(문재승)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9. 7. 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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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프리랜서

문재승 (가족신문 월간 제주살이 편집장)

오늘도 여행가방을 챙겨 집을 나선다. 매일같이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나를 두고 동네에선 항공사 직원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근무시간과 휴가 그리고 심지어 급여도 자유로운 나는 프리랜서다. 

오후 두 시의 지하철 객실에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어째 이들의 얼굴에서 해방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출퇴근시간대 서로의 몸뚱이에 눌려 지친 직장인들보다 더 흐리고 초점을 잃은 눈빛들이다. 왜일까. 쏟아지는 졸음 탓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도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가며 분위기를 살폈다. 역시나 늘어진 분위기. 그 와중에 작달만한 한 남자가 구걸도 아니고 위압적인 눈빛을 쏘아대며 칸칸의 부녀자들에게 강요된 적선을 요구한다. 반응이 신통치 않자 그의 목소리가 커진다. 

"아니 씨바, 여긴 그지 깽깽이 밖에 안탔어" 

고요한 공기를 휘저었던 깽깽이가 사라진다. 사람들은 희미하게 웃는다. 똥은 그저 더러울 뿐이니까. 

이제 내가 나설 차례다. 나는 이 칸에서 제일 활기만발한 남자다. 그러나 내가 지금부터 일궈내는 사연들 마저 그저 유쾌하게 들려서는 안된다. 시중에 나가면 이만오천원에 살 수 있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천원짜리 두장만 받고 파는 이유는 뭔가 그럴듯 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백화점에 납품을 하던 중소기업이 부도가 났다거나 판로가 막혔다는 식의 예상치 못한 외부적 파고를 언급해야 함은 물론이다. 요즘은 애프터서비스도 기본이다. 제품 겉면에 070 번호 하나는 남겨두어야 한다. 

이미 깽깽이가 한차례 휘젓고 나간 후라 그런지 느껴지는 눈빛들이 서늘하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톤을 좀 높였다. 한두바퀴나 더 돌았을까,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드디어 누군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안내말씀 드립니다. 지하철 안에서는 물건을 팔 수 없습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지하철 안에서는 허가없이 물건을 팔 수 없습니다. 물건 파시는 분께서는 지금 바로 하차해 주십시오."

이제 나는 이 칸에서 가장 주목받는 남자가 되었다. 늘어진 객실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던 학생의 눈동자는 더이상 바쁘게 굴러가지 않았고, 전화로 업무협의를 하던 아저씨의 입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곁눈질만은 나를 향하고 있다.  

다시 여행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다보니 문득 신세 한탄이다.

"안한다, 안한다... 또 어떤 할 일없는 놈들이 전화했는 모양이구나...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먹고 살기가 얼마나 힘든데 전화를 하고 그래..." 

사람들은 나를 잡상인이라 부른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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