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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정)현경의 ‘초혼제’와 성령의 다차원적인 임재방식(이상철)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9. 7. 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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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경의 ‘초혼제’와 성령의 다차원적인 임재방식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주간)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에베소서 4:1~4)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태복음 10: 34)

1.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제가 자라면서 제일 듣기 싫어했던 질문이 “성령받으셨나요?”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았는지 잘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네가 뭔데 그걸 묻니, 라는 이상한 반발심이 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을 의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교회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교회의 문제와 교회가 일으키는 모든 악행은 성령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 성령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단 색안경부터 끼고 봅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백교회에는 본인이 성령충만하다고 소리치는 사람은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성령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기독교 사상과 기독교의 역사에서 성령은 사라졌어야 하는 백해무익한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 물음에 저는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일부 성령충만한 사람들에 의해 교회의 역사가 불행했던 적이 있었지만, 역사의 고통스러운 시기에 일어났던 기독교의 변혁운동들을 우리는 또한 성령의 역사라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성령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묵상과 더불어 함께 지니고 가야할 신앙의 영원한 테마이고 수수께끼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와 같은 성령이 지니고 있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첫 번째 본문은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터키) 해안에 있는 도시로 그리스 와 소아시아 사이 에게해에 위치하는 도시입니다. 로마의 동방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선교여행 중 3년간 머물렀습니다. 그 만큼 에베소 교회 애정이 많았습니다. 이 서신서의 기록목적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말인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내려는 악한 교사들을 경계하라”(행 20:29-30)는 당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 내 거짓교사(영지주의적 성향의 사이비 종말론자)들 때문에 위기에 빠진 교회에 대한 걱정과 회복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위기는 비단 에베소교회에서만 일어난 현상은 아닙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그 밖의 서신서들을 읽어보면 교회는 초대교회부터 본성상 위기의 공동체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늘 위태로왔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습니다. 빛나는 선교의 역사를 이룩했던 예수의 제자들(직계제자...예수님의 12제자/ 방계제자...사도바울)이 사라진 초대교회 상황속에서 영적 리더십의 공백이 발생하였고, 그 텅 빈 공간을 차지하려고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던 곳이 바로 초대교회입니다. 그 가운데 교회를 지켜내려고 했던 사람들이 이러한 위기를 타개할 요량으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 입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는 한마디로 ‘성령’의 위상(격, status)을 신과 예수 그리스도와 동격인 상태로 끌어올리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이 삼위일체죠. 사도신경(3세기경), 니케아 회의(325),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등에서 중요하게 취급했던 내용이 성령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리고 공히 성령의 역할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하나 됨, 일치’입니다. (reconciliation, 화해, 조정, 일치). 

“우리가 비록 지금은 흩어져 있지만, 우리가 지금 비록 싸워서 관계가 소원하지만, 우리가 비록 지금은 서로가 달라서 상대방을 이해 못하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라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을 때, 교회 안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Pause)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본문은 이러한 맥락에서 선포되었던 성경이라 볼 수 있습니다. 즉 분열된 교회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일치와 화해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구절이라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성령에 대한 일반론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할과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초대교회는 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다, 라는 교리확립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교회를 지켜내고, 성장시키고,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많은 문제와 다툼에 대한 해결책으로 성령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3.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성령이 하는 일이 화해와 일치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본인 스스로를 세상에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성령의 역할과 배반되는 행동을 하러오셨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본문(10장)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 초기에 발생했습니다. 10장이 시작되는 대목에 보면 12제자를 호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12제자를 선교지로 파송하는데, 10장 전체는 파송직전 제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출정식을 하는 거죠. 요점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박해를 받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귀하다(value).” 그리고 등장한 말이 “나는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입니다. 이것이 박해의 원인입니다. 평화가 아닌 분쟁을 선동하는 사람은 트러블메이커니까, 블랙리스트에 들어갈 사람이니까 당연히 박해를 받겠죠. 삼위일체에 의하면 예수가 하는 일과 성령이 하는 일은 같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당신은 칼을 주러 왔다고 하셨으니, 성령의 역사 역시 화해와 일치보다는 분쟁과 선동을 일으켜야 되는 것 아닌가요. 이러한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게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라면 이 문제를 이렇게 해석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성령이 무엇인지,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지 관심하여 왔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이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와 일치의 역사였습니다. 그 대의명분 아래 모두가 아멘, 하였던 것이죠. 이에 대해 푸코는 질문을 바꿉니다. 누가 말하는 화해와 일치인가, 누구에 의해서 주도 되고 있는 화해와 일치인가, 어느 시점에서 누구를 향해 화해와 일치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나, 어떤 음모와 계략이 거기에 깔려 있지는 않나, 그렇다면 그 성령은 무엇인가? 어쩌면 그동안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 안의 문제와 모순과 어려움을 덮고 봉합하고 뭉개는데 사용된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는 아니었을까, 예수님은 이를 직시하면서 나는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왔다, 고 선포하신 것은 아닌가. 이렇듯 성령에 대한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양자사이에서 길을 잃게 만듭니다. 

4. 

20세기 현대신학의 역사에서 성령이 화두로 대두되었던 시기가 20세기 말입니다. 특별히 1990년 사회주의 붕괴 이후 신자유주의 열풍이 몰아닥칠 무렵입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조는 1980년대부터 이미 있었습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레이건 노믹스), 영국의 대처 수상(대처리즘)이 집권할 당시부터 공적인 것의 사유화가 강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광산파업, 철도파업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죠. 80년대 말 소련의 고프바쵸프 서기장이 페레스트로이카를 선언하면서 동구권의 개혁과 개방이 물결이 밀어닥쳤고, 그 여파로 공산권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패권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죠. 그때부터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습니다. 

시장의 원칙과 효율을 따라 자본은 무한정 브레이크를 상실한 채 이동했고, 자본의 흐름을 따라 사람들이 이주합니다. 이민문제, 난민문제, 외국인 노동자문제, 불법체류자 문제 등이 본격적으로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였습니다. 자본을 따라 우리 안으로 이방인이 흘러들어오고, 우리 역시 자본의 흐름을 따라 어딘가로 들어가 낯선 이방인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세계 모든 국가가 우리 안으로 들어온 타자에 대한 환대와 적대의 기술을 배우려고 지금 난리입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현대신학에서 성령(Holy Spirit)에 대한 논의는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논의로 둔갑해 새로운 시대에 요구되는 그리스도교의 답변으로 각광 받습니다. 성령의 역할이었던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화해와 일치의 구호는 신자유주의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는 역할을 하면서 자본의 흐름을 방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저는 솔직히 그런 의심이 듭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개최된 회의가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렸던 WCC(세계교회협의외) 제7차 총회였습니다.          

1991년 캔버라 WCC의 전체 주제는 “성령이여 오소서, 전 창조세계를 다시 새롭게 하소서”였습니다. 성령을 전체 주제와 소주제들로 내세운 캔버라는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전체주제에 대한 ‘기조연설’(keynote speech)을 하게 하였다. 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와 범 아프리카 동방정교회의 총대주교인 파르테니오스(Parthenios)였고, 다른 한 사람은 한국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였던 정현경 선생이었습니다.    

정교회 주교는 정통 삼위일체론과 정통 기독론과 정통 성령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정통 성령론이라는 말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통상적으로 main line(주류) church에서 통용되는 신학적 이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 첫 번째로 읽은 에베소서 본문에 나오는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성령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겠죠. 교회가 환란에 빠질 때 마다, 교회가 위기에 빠질 때 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교회를 하나 되게 이끄시는 일치와 화해의 성령의 역사말 입니다. 저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믿고, 우리들에게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임재해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정현경 교수는 성령의 또 다른 측면에 주목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의 갈등과 모순과 아픔을 치유하고 화해하고 봉합하고 덮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오히려 그것을 밝히고 드러나게 하고 소리치게 하고 울부짖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죠. 그리하여 지금의 현실을 가리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메커니즘을 들춰내고 폭로하는 것이 성령의 능력 아니냐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러면서 초혼제를 합니다. 그녀는 초혼 굿의 형식을 빌려서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으로 억압받고 소외되었으며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탄식과 울부짖음을 성령의 목소리와 동일시하였던 것이죠. 잠시 당시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 캔버라 총회 유투브 영상

5.

정현경 교수는 초혼제를 통해 역사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면서 그들을 현실의 우리들 앞으로 불러 세웁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창 21:15-21)인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하여 착취를 당하였고 버림을 받은 이집트의 흑인 여성 하갈의 영혼이여!

예수 탄생 시 헤롯왕의 군인들에 의하여 살해된 남자 아기들의 영혼이여!

잔다르크와 중세시기 동안 마녀심판으로 화형에 처해진 많은 다른 여성들의 영혼이여!

십자군 전쟁 때 죽은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여!

식민주의 시대와 기독교 이방선교 시기 동안에 대량 살상된 토착민들의 영혼들이여!

홀로코스트 동안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의 영혼들이여!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원폭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광주와 천안문광장과 리투아니아에서 탱크에 깔려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매일 같이 죽임을 당하는 아마존 우림의 영혼들이여!

인간의 물질과 금전에 대한 탐욕으로 강간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여 착취를 당하는 땅과 공기와 물의 영혼들이여!

피비린내 나는 걸프전에서 지금 죽어가고 있는 흙과 공기와 물의 영혼들이여!

십자가에서 고문을 당하셨고 죽임을 당하신 우리의 맏형 해방자 예수님의 영혼이여! 

.........................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에너지로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는 분열의 담들과 ‘죽음의 문화’를 무너트리십시다. 우리는 성령의 생명의 정치적 경제에 동참하여, 모든 생명체들과 연대하여 이 땅 위에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싸우고 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의 보존을 위한 공동체들을 건설하십시다. 성령의 거친 바람이여 우리에게 불어오소서! 우리는 그녀를 영접하여, 그녀의 거친 삶의 리듬에 동참하십시다. 성령이여 오소서! 전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소서. 아멘.”

정현경 교수의 퍼포먼스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총회에 참석한 총대들 중 1/2은 혼합주의(syncretism)라는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1/2은 새로운 성령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라면서 기립박수를 칩니다. 그 후 정현경 교수는 한국에 돌아와 한국 기독교계에서 마녀로 취급당합니다. 그렇게 시달리다가 1997년에 세계 진보신학의 메카라 할 수 있는 미국 유니언신학교 종신교수로 가셨습니다.  

정현경 교수의 초혼제, 91 WCC 총회 호주 캔버라

6. 

이제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우리 한백은 어떤 성령을 사모하는 공동체인가요? (Pause) 우리 한백의 신앙고백에는 두 가지 성령의 모습이 공히 다 들어있습니다. ‘천지 만물 안에 더불어 살아계신 하느님’, 에서는 ‘만물과 더불어’라는 표현을 통해 일치와 화해의 면모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생명 넘치는 세상을 함께 만드십니다’의 ‘함께’라는 표현도 역시 일치의 뉘앙스가 있죠. 하지만, ‘가려지고 잊혀지는 희생양의 얼굴과 모든 비통한 눈물을 우리가 외면하지 않겠다’는 다짐에서는 성급한 일치와 화해로 인해 은폐당한 개인 아픔과 상처에 대한 포기할 수 없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것들과 더불어 기쁘게 살겠습니다’라는 표현에서는 다시 일치와 화해의 메시지로 향합니다. 

저는 어디 가서 한백을 알리고 자랑할 때, 한백신앙고백을 꼭 소개합니다. 대부분의 신앙고백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일치와 화해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것이 은혜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한백이 고백하는 성령에 대한 이해에는 물론 일치와 화해를 존중하면서도, 전체화의 프로젝트에 의해 희생당하는 개인에 대한 발견과 회복 역시 성령이 일으키는 역사의 중요한 축임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서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성령 받으셨나요? (pause)

우리 한백교회 안에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일치와 화해의 영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한백교회 안에 전체화하려는 음모와 움직임에 분연히 저항하면서, 가려지고 잊혀지는 희생양의 얼굴과 모든 비통한 눈물을 외면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그 성령이 또한 함께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6월9일 한백교회 성령강림절 ‘하늘 뜻 나누기’ 원고를 수정.보완하였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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