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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권세정,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리뷰 (下)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9. 7. 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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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정,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리뷰 ()

권세정, 아그네스 부서지기 쉬운 바닥≫, 인사미술공간, 2019.4.19 – 5.18

조은채

권세정, <232CB54A51A63D4501.jpeg>, 캔버스에 아크릴, 2018-2019.

각도와 시야의 문제

심즈의 플레이어는 NPC인 아그네스를 결코 플레이할 수 없고, 따라서 아그네스의 속마음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알 수 없다. 심즈는 플레이어에게 지금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성격과 야망, 추억이나 속마음을 이미지와 텍스트로 간명하게 정리해서 보여준다. 어쩌면 이 게임은 어떤 인물을 몇 가지 설정값으로 단번에 파악할 수 있으며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부추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플레이어를 안심하게 하고 때로는 만족하게 하는 이 시야각은 아그네스를 볼 때는 허용되지 않는다. 아그네스를 보이는 그대로 고집스럽고 불평이 많은 노인으로만 여길 수도 있다. 혹은 주어진 각도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캐릭터에 관해서 마음대로 넘겨짚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시에서 권세정이 어머니와 밤세, 여성, 그리고 피해자의 이미지를 대하는 방식은 주어진 각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아그네스 크럼플보텀이라는 캐릭터를 다시 보려는 시도와 유사하게 느껴진다. 발화의 이면을 넘겨짚거나 세부적인 차이를 지우고 하나의 이해할 수 있는 결론을 내리는 대신, 권세정은 관찰하고 또 수집하면서 대상의 불가해하거나 미처 포착할 수 없었던 지점을 낱낱이 드러낸다.

예컨대 2층의 영상 작업 <리액션>(2019)을 통해 작가의 어머니를 마주하게 되는 방식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리액션>은 어머니의 몸에 부착된 카메라의 시각을 담고 있는데, 작가는 촬영의 진행 방향을 미리 정해 놓거나 녹화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 영상에서는 집의 구조, 다른 가족의 반응, 어머니의 일상 등 어머니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정작 어머니의 얼굴이나 표정을 볼 수는 없다. 플레이어의 시야각에서 아그네스 크럼플보텀의 속마음을 결코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작가는 <리액션>에 어머니의 표정이나 얼굴을 담을 수 없는 각도를 선택한다. 공백으로 남겨진 어머니의 모습은 관객이 어머니를 하나의 이미지로 환원할 수 없도록 만든다.

권세정, <232CB54A51A63D4501.jpeg>, 캔버스에 아크릴, 2018-2019.
권세정 , < 가슴 - 배 >,  우레탄 , 2018-2019.

1층의 회화 연작 <232CB54A51A63D4501.jpeg>은 웹에서 무분별하게 공유되고 구경거리가 되었던 미제사건의 여성 피해자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이 사건에 대한 분노에서 작업을 시작했지만, 왜 그것이 문제인지 직접 메시지를 던지는 방법을 택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원본 이미지를 실물 크기로 확대해 그 해상도를 현저히 낮춰버리고, 이를 다시 800개로 쪼갠다. 원 상태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워진 이 이미지들은 작가에 의해 손수 덧그려져 32장의 그림으로 탈바꿈하여 조금씩 틀어진 각도로 배치된다. 이미지 속의 대상이 한눈에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구조로 구현된 것이다. 피해자의 이미지는 인터넷 상에서 그저 유희거리인 것처럼 조각났지만, 오히려 <232CB54A51A63D4501.jpeg>에서 32장의 이미지 조각은 피해자의 이미지를 단번에 간파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으로 대하는 작가의 윤리나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

전시의 지하 1층과 2층에는 <1/2 커뮤니티>라는 같은 제목의 다른 작업이 각각 놓여있다. 지하 1층의 <1/2 커뮤니티>의 경우 바닥에 깔린 카펫에, 그리고 2층의 경우에는 책과 벽에 여러 이미지와 텍스트가 인쇄되어 있다. 이 이미지와 텍스트의 출처는 여초 커뮤니티이다. 2층의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작업에서 관객은 인쇄된 내용의 강렬함에 압도된다. 그러나 작가는 내용에 동조하거나 가치평가를 하지 않는다. 표면 너머의 의미나 의도를 지레짐작하지도 않는다. 웹상에서 작가가 이 이미지와 텍스트를 마주하게 된 각도 이상의 것에 대해 함부로 말을 얹지 않는 것이다.

작가의 늙은 개 밤세는 <4.1kg>, <어깨-팔꿈치>, 그리고 <가슴-배>에서 조각 난 형태로 구현되어 있다. 이때 지하 1층의 우레탄으로 만들어진 <어깨-팔꿈치>와 <가슴-배>가 거의 투명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작가는 덩어리에 사포질하는 방식으로 밤세의 조형을 정교화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포질이 반복되면 될수록 밤세의 어깨-팔꿈치와 가슴-배는 더 투명해질 수밖에 없다. 닿으려고 하면 할수록 밤세는 도리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버릴 것이다. 허락되지 않은 각도 너머의 것을 넘겨짚다가 오히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크럼플보텀에서 부서지기 쉬운 바닥으로

관객이 보지 못하고 지나치기도 했던 2층의 <동그랗고 빛나는 것>은 여러모로 이질적이다. 다른 작업이 최근 2년간의 작업이라면, <동그랗고 빛나는 것>은 2013년 작업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전시의 세 키워드였던 어머니, 여성, 피해자의 이미지, 밤세와도 가장 관련 없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이질적인 작업은 어쩌면 이 전시의 제목이 ‘부서지기 쉬운 바닥’이 되게 하는 또 다른 시작이자 끝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이 단 채널 비디오에는 제목 그대로 하얗게 빛나는 동그란 것이 등장하는데, 얼핏 보면 움직이지 않는 달을 촬영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이 하얀 표면 위로 하루살이와 같은 곤충의 사체가 계속 쌓여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완벽하게 이상적으로 보였으나 실은 죽음으로 착실하게 이행하는 과정이었던 이 작업을 통해 허상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전시의 주어진 키워드로도 포착될 수 없는 작업. <동그랗고 빛나는 것>은 이 전시의 총체성 역시 부서지기 쉬운 바닥 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넌지시 내비친다. 권세정이 관찰만이 가능한 각도를 유지하며 대상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결론짓지 않으며 만들어낸 이 전시의 토대는 오히려 그 부서지기 쉬운 속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변함없이 돌아오고야 마는 아그네스 크럼플보텀처럼.

*이 글은 추후 보완을 거쳐 상, 하편을 합친 하나의 글로 블로그(http://eunchaecho.tistory.com)에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같은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영상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미술에 특히 관심이 있다. 블로그(http://eunchaecho.tistory.com)를 드문드문 운영 중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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