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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퀴어] 자발적 '아싸' 되기(김정원)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9. 7. 19.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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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아싸' 되기

김정원*

“인간은 역시 궁극적으로 고독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극복할 수 없는 고독, 풀어낼 수 없는 고독 즉 절대적 고독이 있다…. 나는 사선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주지도 못하고, 내 대신 죽지도 못한다.나의 부모, 내 아내, 내 자식들, 의사, 돈, 권력 그리고 전지 전능하신 신도 나에게 닥쳐오는 죽음, 나에게는 모든 것의 마지막,절대적 적막, 어둠, 허무를 의미하는 나의 죽음으로부터 나를 도와 나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도 내 삶과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 나의 삶은 나 혼자 만이 살 수 있고, 나의 죽음은 나 혼자 만이 당해야 한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고독하다.”- 박이문, 철학 에세이 ‘혼자됨과 고독’ 중 

‘우리는 근원적으로 고독하다’라는 박이문의 말 앞에서 당신은 괜찮은가? 

‘나는 결국 혼자다’라는 사실 앞에 울어본 적 있는가? 만약 그래 본 적 있다면, 박이문의 성찰은 당신에게 기쁜 소식이다. 결국 너나 할 것 없이 인간은 혼자고,그러니 그 혼자라는 사실에 마음 에너지를 들입다 쏟아 붓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꼭 죽음이 아니고서라도, 다달이 앓는 생리통이나, 구린 월급통장이나, 더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내 인생 역시도 오롯이 나의 것이며, 이러한 것을 나만큼 걱정하는 이도 나밖에 없으며, 내 대신 앓아주고 나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이도 여전히 나 밖에 없다. 나를 대신해 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말은 좀 씁쓸한 데가 있지만, 인간의 본디가 그러하다니 차라리 위로고 차라리 복음이다. 맞다. 난 지금 외로운 당신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혼자 됨’은 결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있고, 없고, 다가오고, 떠나가고의 과정과 관계하지 않는다. ‘혼자 됨’은 본래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사람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혼자다. 그러나 인간만이 고독하다. 삶의 의미를 묻고, 자발적으로 생을 끊을 수 있는 존재, 오로지 인간만이 고독을 느낀다. 고독은 ‘혼자 됨’의 상황에서 경험하게 된다.그런데,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여행을 가고, 혼자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로서 고독은 채 충족되지 않는다. 이는 보다 은밀하게 파고든다. 고독은“혼자됨의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나에 대한 타자들의 무관심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나는 우는데, 저이는 웃는다. 나는 박박 기며 사는데, 저이는 두둑하게 산다. 나는 마음을 쓰는데, 저이는 업신여긴다. 본래적으로 혼자라지만, 내 사회적 소외의 상황에, 내 축제의 상황에, 내 억울함의 상황에, 내 배고픈 상황에, 내 기쁨의 상황에 저이들의 무관심이 짙어질 때, 우리는 고독해진다.고독은 우울감, 슬픔, 외로움 이라는 정신적 고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고통을 좀 나누어 보고자 결혼을 택한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 살면 고독감 없이 살아 갈 수 있을까? 수필의 한 구절로 답을 대신해본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도 충분히 불행했고 여러 가지 문제에 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 복잡하고 문제에 넘친 불행한 양인이 모였다고 해서 돌연 인간의 행복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일까? 대답은 물론 부정 내지는 회의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인류 사회에서 과연 ‘적당한 배필’을 찾았으며 신과 자기 앞에서 자기의 결혼을 축복해 마지않았을 것인가? 아니 그보다 소극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결혼을 자기 내면에 대한 끊임없는 방해로 파악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인가?아니 단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결혼에 의해 불행해 지지 않았을까? - 전혜린<목마른 계절> 중

두 사람이 한 이불을 덮기 시작했다고 돌연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막 함께 살기로 한 연인들에게 행복이라는 의무감을 불어넣지만, “우리는 혼자 있을 때도 충분히 불행했고, 여러 가지 문제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한 이불’은 웨딩드레스만큼이나 덧없다. 결국,다시 고독이다. 결혼의 무의미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결혼의 유의미함을 논하는 것 역시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내면세계에만 완전하게 머물러 있을 수 없기에 고독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완벽하게 ‘자기’의 세계에 머물 수 있다면, 다시 말해 ‘혼자 됨’에 계속적으로 놓여 있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괜찮을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늘 ‘만남’ 속에 노출되어 있기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늘 타인에게 열려 있는 상태로 존재하며, 타인들로 인해 제약되기도 구속되기도 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의 ‘혼자 됨’에 무관심한 타인을 필시 의식하게 되어있고, 그렇게 타인을 즉, 외부세계를 의식함에 따라 우리는 또 아프고- 또 외롭고- 또 고독해진다.    

고독의 씁쓸함, 그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사람들은 사람들 속으로 뛰어든다. 그 속에서 씨알이 빠진 “빈말” 가득한 이야기를 나누다, 마음에도 없는 동의를 하며, 하하 호호 웃는다. “말함과 들음”이 과연 그 속에 있는지 의문을 품지도 않은 채, 무리들 속에서 외로움을 달랜다. “빈말”은 존재자를 발견하는 것을 가로막는 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을 안다고 한들, 그것을 쉬 그만두지 못한다. 호기심 가득한 이야기들 속에 고독한 자기를 묻으며 우린 안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 이야기인가? 만일 당신이 빈말만이 가득한 곳에 당신의 존재를 묻고 있다면, 어서 나오라. 뿌리 깊지 않은 이야기에서 얼른 뛰어 나오라. 그 세계로부터 빠져 나와 다른 세계로, 그러니까 내면 공간으로 들어가자. 모든 인간의 불행은 방 안에 조용히 혼자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한 한 철학자를 믿어볼 때이다. 우리는‘만남’과 ‘공동’ 속에 (안쓰럽게도) 내던져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나’ 속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됨’을 자처하고, 좀 고통스럽겠지만 고독 속으로 의연하게 걸어 들어 갈 시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만날천날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이니, 애를 써가며 고독해져야 한다.

어떤 현상이든지 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의 존재는 발견될 수 없다. 군중과 빈말과 호기심에서 벗어나‘나’에게 주의를 기울여, 숨겨져 있는 나를 구원해 와야 한다. 그 구원은 하늘에 계신 그 님도 하실 수 없고, 공의와 사랑의 그 님도 하실 수 없다. 그것은 떠들썩한 기도원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고, 여름 날의 뜨거운 수련회에서도 얻을 수 없다. 사랑을 말하는 종교 공동체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살 붙이고 사는 연인이나 배우자도 대신 해 줄 수 없다. 나의 발견과 내 존재의 구원은 ‘혼자 됨’과 그것에 따른 고독으로만 경험될 수 있다. 아픈 고독이 주는 은택이다. 

어느 젊은 시인 지망생이 릴케를 찾아와 자신의 시를 평가 받으려 했다. 아래는 그 지망생을 향한 릴케의 단언이다. 

당신은 자기의 밖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보다도 그러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충고를 해주거나 당신을 도와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 한가지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하십시오. -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

릴케는 외부 세계의 평가에 대한 궁금증과 두려움을 거두고, 자신 속으로 깊이 몰입해 들어 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 오케바리, 웰컴 투 앗싸월드. 

- 이 글은 필자의 지난 글(에큐메니안 2016년 8월 ‘나는 기꺼이 혼자입니다’)을 필자의 현 정신상태에 맞춰 수정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했다. 현재 향린교회에 맘을 풀고 '다시 목사'가 되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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