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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퀴어] 몸과 수치심(유하림)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9. 7. 19.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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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수치심

유하림*

 나는 아직도 마르고 아름다운 몸을 가진 여성을 보면 ‘감탄’한다. 그 감탄은 ‘부러움’을 수반할 때도 있고,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다. 페미니즘 공부를 꽤 한 것 같은데도 그렇다. 조금 더 날씬하고 예쁜 몸을 가졌으면 어땠을까, 그 마음은 때론 간절하지만 페미니스트로서 하면 안 되는 고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빠르게 머리 속에서 지워버린다. 

 불과 몇 달 전에야 나는 내가 알몸을 하고 거울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를 집어 넣지 않고, 어깨를 활짝 피거나 움츠려 트리지 않고, 거울 속에 서있는 내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거울을 본 적이 없다. 거울을 제대로 보는 순간 내가 어떤 몸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될 것 같았고, 정말 그랬다. 거울 속의 나를 쳐다보면서 내가 거울을 똑바로 본 적이 없음을, 내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게 됐다. 그리고 수치심이 들었다.

 몸. 페미니즘은 ‘몸’을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파악하며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권력에 대해 말한다. 몸에 대해 말하지 않은 페미니스트는 없었다. 보부아르도, 파이어 스톤도, 버틀러도, 굵직한 페미니스트들은 모두 몸에 대해 말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몸을 여성 억압의 시작이라고 보기도 하고, 해방의 도구로 보기도 하고, 몸을 자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허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의 견해는 다들 조금씩 다르지만, ‘여성’의 몸이 ‘타자화’되고 ‘구별’되어 왔다는 사실에는 모두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근대적 개념으로, 남성은 정신, 이성과 등치되고, 여성은 육체, 감정과 등치되었다. 피 흘리고, 몸을 만들어 내고, 젖을 내는 여성의 몸은 이 등식을 증명하는 증거로 의미화 되었다. 여성은 몸 적인 존재로 열등화 되었다. (박이은실,2009) 좀 더 쉬운 말로 설명해보자면, 여성의 몸은 신비한 것이거나, 혹은 성 적인 것, 추하거나 불경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출산을 하는 신비한 몸, 가슴이 있고 허리가 들어간 굴곡이 있는 성적인 몸, 피를 흘리고 감정에 휘둘리는(꽃뱀이나 유혹에 능한) 추한/불경한 몸. 여성의 몸에 대한 이러한 가치화는 자연적인 게 아니라 권력에 의해 구성되어 온 것이다.

 페미니즘은 몸을 둘러싼 권력과 정치들을 맥락화 하여 역사를 새로 써나갔다. 이것을 공부하며 나는 해방감을 느끼곤 했다. 사회가 제시하는 여성적인 몸과, 아름다운 몸에 대해 이론적으로 반론하며 코웃음 칠 수 있다. 남성들이, 미디어가, 사회가 대상화하고 성 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여성의 몸에 대해 ‘그런 건 니들 상상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말’ 할 수는 있다. 머리로는, 말로는 잘 할 수 있는데 마음은 자꾸 그렇지 못하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나의 몸. 맥락을 제거 할 수 없는 나의 몸. 여기 존재하고 있는데, 이건 내 몸인데, 내 의지대로 인식할 수 없는 몸. 몸을 긍정하진 않아도 부정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로 인식하고 싶은데, 나는 내 몸을 볼 때마다, 옷을 입을 때마다 수치심을 느낀다. 그런 게 궁금한 적이 있다. 남자들도 몸에 대해 수치심 같은 걸 느낀 적이 있을까. 그 수치심이란 것이 심어진 최초의 순간을 기억이나 할까. 찰나의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수치스러움이 스스로를 꽁꽁 감쌀 때가 있을까.

 여자들은 몸에 관해 한 가지씩은 수치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한 가지면 다행이다. 어떤 몸을 가지고 있던 그럴 것이다. 가슴이 작으면 작아서, 크면 커서, 골반이 크면 커서, 작으면 작아서, 살집이 있으면 있어서, 없으면 없어서. 나는 내 가슴, 배, 팔뚝, 허벅지, 엉덩이, 피부색, 심지어 손가락 길이와 모양에도, 피붓결과 머릿결과 겨드랑이 털에 대해도 크고 작은 수치심 같은 걸 느낀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명확하지 않은 내 몸의 역사는, 나 혼자서 쓴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르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여성이 있다.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마라』라는 책을 쓴 해릴린 루소다. 그녀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고, 뇌성마비는 근육 조절 능력에 손상을 입히기도 해서 그녀의 오른손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라 ‘오른손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그녀는 오른손으로부터 수치심을 느낀 최초의 순간을 이렇게 썼다. “집에 손님이 오면 어머니는 내 오른손을 어머니의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어 보이지 않게 했다. 내가 느끼는 수치심은 어머니에게 배운 것이다.” 그녀는 장애를 치료해야 할 것이나, 나아져야 할 것으로 보지 않고 자기가 가진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몸에 대한 스스로의 혐오와 싸운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장애’에 대한 편견으로만 쌓여진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자꾸만 오른손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장애는 이겨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회로부터 쌓여진 혐오다. 

 장애인의 몸에 대한 혐오와 여성의 몸에 대한 혐오는 다르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몸으로 간주되는 권력의 양상은 비슷하다. 루소도 나도, 몸이 가진 수치심의 역사는 다른 사람들과 다 같이 쓴 것인데도, 그 수치심을 해결해나가야 하는 것은 우리 둘 다 자신 뿐 이다. 지나간 애인들이 너의 몸이 완벽히 예쁘다고 말을 해줬더라도, 엄마가 이제는 살 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도,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비만도 계산기에 내 키와 몸무게를 입력했을 때 정상체중이 나오더라도, 나는 아직도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니까 이 수치심은 단번에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몸이 누군가의 눈에 아름답게 보인다고 해서, 지금과 몸이 달라진다고 해서 나는 내 몸을 완벽히 긍정할 수 있을까? 역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갑자기 자기 몸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기 몸을 혐오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조금씩, 서서히 배워나가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그렇게 믿고 있다. 배울 수 있다고. 불과 몇 달 전이지만 나는 거울을 똑바로 쳐다봤다. 여태껏 거울을 쳐다보지 못했던 건 내 몸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건 거울을 보면서도 알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수치심이 내 삶의 고유한 경험으로써 다른 사람과의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여성화 된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공유될 수 있는 공통된 감정임을 느끼는 것. 그래서 나의 몸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 나의 몸이기 때문에 가지게 된 게 아니라는 것을 정말로 절실히 깨닫는 것. 어렵지만, 한번 해보고 싶다.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부정할 수 있는 실재로서 여기에 있는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싶다. 거울을 똑바로 보고서 건조하고, 담담하게 “살이 조금 쪘네”, “살이 조금 빠졌네”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러려면 일단은 거울을 보는 연습을 조금씩 해야겠다. 거울 속의 나와 눈을 마주치고 이것이 나의 몸이라고 인식하는 것부터 조금씩.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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