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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퀴어] 지금은 잠시 우산을 쓰려 합니다.(유하림)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9. 8. 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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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잠시 우산을 쓰려 합니다.

유하림*

오늘 토론에서 손희정 선생님,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고민은 “계속 해나가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올해로 페미니즘을 5년차 공부하는 학생인데요, 페미니즘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계속 해야 되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 마음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 지속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싶어요.

가끔씩 페미니즘 버리고 돈 많이 버는 남자한테 취집해서 순종적인 여자로 살자고, 친구와 그런 농담을 주고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인데, 이 말은 100퍼센트 농담입니다. 저는 남자랑 결혼 할 생각이 일단 없으며, 더군다나 취집이라니. 그렇게까지 경쟁력 있는 남자도 세상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순종적인 여자’. 저는 지금의 어떤 남성 집단이 강력하게 바라는 순종적인 여자의 모습이 전혀 아니고, 될 수도 없습니다. 그건 어떤 이상에 가까워서 계속해서 타의적으로 씌워지는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여자들을 그렇게 프레이밍 하는 남자들이 있긴 하지만요.

쨌든 이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한다는 건, 그 만큼 페미니즘이 나를 골치 아프게 한단 소리입니다. 그래도 공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도저히 설명되지 않던 저의 경험을, 그 경험에서 비롯한 불안과 상처를 해석할 수 있는 힘과 언어를 줬습니다. 이를 테면 그 때 그 사건이 성폭력이었다는 것을, 나의 외모와 신체에 내가 만족할 수 없는 것은 내가 구려서가 아니라, 사회에서 제시한 기준 자체가 폭력적이었던 것이었음을, 수업 시간에 아무리 말 하고 싶어도 꾹 참는 버릇은, 여자에게 실수 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인 것을 알게 해준 게 페미니즘 이었습니다. 제게 페미니즘은 눈물이 나도록 좋은 거지만, 솔직히 페미니즘 하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꼴페미’나 ‘메퇘지’라고 욕을 먹기도 했고, 친구를 여러 명 잃기도 했고, 온라인 상에서 조리돌림도 당해봤고, 가족들과 소리 지르고 싸우며 몇 달 동안 말을 안 해보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나는 왜 아직도 ‘한남’들의 문학이나 영화나 예능을 재밌어하는지 스스로 구박하며 족쇄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말로 늘어뜨려 놓는다면 와닿지 않을 수 있겠지만,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온 농담입니다. 페미니즘 너무 힘드니까 이제 그만하자고. 그런데 그 말이 100퍼센트 농담에만 머무는 것은, 제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이만큼 힘들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해도, 페미니즘을 공부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페미니즘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가끔은 그런 농담이 나올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특히나 요즘에는 많이 무기력합니다. 저도 사회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긴 합니다. 낙태죄 헌법 불합치를 비롯해 최근 개봉한 <미성년>, <걸캅스> 같은 영화들이 여성 주연에 페미니즘 요소를 가지고 있고, 티비 매체에서도 여성들이 나오는 드라마나 예능들이 하나 둘 씩 등장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학교 안에도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수업에서도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다루며 다들 호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은 너무 더디지 않은가 싶을 때가 있어요. 네이버 댓글창이나 에브리타임 같은 학내 커뮤니티를 보면 낙태죄가 헌법 불합치 되었다는 기사에 “이젠 콘돔 안끼고 섹스해도 되겠네” 라는 댓글이 달린다던지, 영화 <걸캅스>를 보지도 않고 별점 테러를 한다던지, “여혐, 남혐은 똑같이 나쁘다”던지 그런 말들을 보고, 듣게 되면 꾸준하게 쌓아오던 마음의 탑이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습니다. 스치 우는 바람에도 마음의 탑은 깎이곤 합니다. 이런 온도 차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범죄들, 여성혐오 이슈들을 볼 때마다 제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곳이 아니라 그곳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제가 하고 있는 것들이 무용한 일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 이 포럼이 진행되는 사이에도 여성혐오 관련,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룬 기사가 분명 새롭게 쓰여 졌을 것입니다. 끝나지 않는 장마를 우산 없이 걸어가는 기분입니다. 저는 보통, 그 비를 멈추게 하는 방법을 열심히 고민하고 실천하며 살았는데 솔직히 요즘에는 잠시 우산을 쓰고 싶습니다. 매일같이 보게 되는 폭력적인 사건들은 저를 피로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리고 솔직히 저도 좀 무던해집니다. 아, 여자가 또 회사에서 잘렸구나. 아, 여자가 또 맞았구나. 아, 여자가 또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페미니즘이 학문이면서, 이론이면서 그리고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한테 운동이라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가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실천입니다. 그런데 (몰카를 찍거나, 강간을 하거나, 여성을 죽이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상한 댓글을 달고, 여전히 페미니즘과 메갈도 구분 못하고 나한테 너 메갈하냐고 묻고, 이제는 여성이 더 뛰어나다며 유리천장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굳이 같이 가려고 애써야 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이 폭우 속을 걸어가는 게 가끔은 너무 벅찹니다. 저도 압니다. 장마는 우산을 쓴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 우산을 쓴다고 썼지만 이미 몸이 잔뜩 젖어있다는 것. 그래서 이런 고민을 하더라도 결국 우산을 던지고 함께 비를 맞을 친구들을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쏟아지는 사건과 폭력과 말들에 의해 무기력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무기력은 상태이지 정체성이 될 수 없다고 믿고, 지금은 잠시 우산을 쓰려고 합니다. 손희정쌤과 여러분께서는 이러한 무기력을 겪은 적이 있으신지, 그 때마다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려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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