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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내부의 거짓, 도래하는 진실(김윤동)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9. 8. 7. 16:02

본문

내부의 거짓, 도래하는 진실

김윤동
(본 연구소 기획실장)

예레미야 28장
1. 같은 해, 곧 시드기야가 유다 왕이 되어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째가 되던 해 다섯째 달에 일어난 일이다. 기브온 사람 앗술의 아들 하나냐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그가 주님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2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 버렸다.
3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에서 탈취하여 바빌로니아로 가져 간 주의 성전의 모든 기구를, 내가 친히 이 년 안에 이 곳으로 다시 가져 오겠다.
4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바빌로니아로 잡혀 간 유다의 모든 포로도 내가 이 곳으로 다시 데려오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반드시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 버리겠다."
그러자
5예언자 예레미야가 주님의 성전에 서 있는 제사장들과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예언자 하나냐에게 대답하였다.
6 그 때에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멘. 주님께서 그렇게만 하여 주신다면, 오죽이나 좋겠소? 당신이 예언한 말을 주님께서 성취해 주셔서, 주님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가 바빌로니아에서 이 곳으로 되돌아 올 수 있기를, 나도 바라오.
7 그러나 당신은 이제 내가 당신의 귀와 온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들으시오.
8 옛날부터 우리의 선배 예언자들은 많은 나라와 큰 왕국에 전쟁과 기근과 염병이 닥칠 것을 예언하였소.
9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가 예언한 말이 성취된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그를 주님께서 보내신 참 예언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오."
10 예언자 하나냐가 예언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무 멍에를 빼앗아 꺾어 버렸다.
11 그리고 하나냐는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이 년 안에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모든 민족의 목에서 벗겨서 이와 같이 꺾어 버리겠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 자리를 떠났다.



한창 후텁지근한 장마철입니다. 시원한 비가 오기도 하지만, 장마철은 빈번하게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기 때문에 그 중간의 고온다습한 시간은 갑갑합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뭔가 가슴에 있는 한서린 마음은 갑갑한데, 터져 나오는 것은 울컥하는 화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뭐 그런다고 시원한가요. 그러고 난 다음에는 또 ‘내가 왜 화를 냈나’ 자책감에 빠져 괴로운 시절을 보내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우리는 왜 이렇게 한껏 불만감과 자책감에 빠져 있습니까? 화를 낼 구석은 없고, 화를 냈다가는 너만 화나는 상황이냐? 되물어 올 것입니다. 그런 게 뻔한 상황에서 우리의 시대와 문화는 화를 내거나 울분을 터뜨려서는 안 되는 대범하고 쿨하고 아주 냉철한 사람이어야 함을 요구합니다. 정말 화가 가득하다 하더라도 적어도 “내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는 불평 한번 하면 안 되는 게 지금입니다. 지금과 같은 저성장 시대에서는 누구나 힘든 상태가 지속되고, 경기는 안 좋을 대로 안 좋고, 세상만사 만인이 만인의 뺨을 때리면 곧바로 주먹 날아갑니다. 누구든 ‘자기가 맡은 몫, 곧 자기 십자가’가 있으니 개인이 모두 책임지고, 다 떠안고 살자는 논리 아래에서는 어떤 불평도 어떤 화도 내면 안 되는 것이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문율입니다. 제가 만든 말이지만, ‘불평 금지의 평등’이 이루어졌다고나 할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목에는 지금 나무 멍에가 채워져 있습니다. 멍에란 것이자발적으로 멘다면 그것은 멍에가 아닐 것입니다. 메고 싶어서 멘 게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 시켜서 어쩌다보니 메어져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메라고 하여 멘 멍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생각나는 그런 것들이 하나씩은 있지요. 예레미야는 오늘 왜 멍에를 메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앞장에서 예레미야에게 멍에가 메어진 상황이 나옵니다.

오늘 읽은 본문 28장에 한 장 앞선 27장에서는 이 멍에에 대한 강력한 야훼의 촉구가 등장합니다. 야훼는 예레미야에게 나무 멍에를 메는 상징행위를 명령합니다. 이 멍에는 곧 바벨로니아 왕 느부갓네살 왕에게 부여된 야훼 자신의 멍에이며, 이것을 메지 않는 민족이나 나라가 있으면,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처벌해서라도 바빌로니아 왕에게 복속시키겠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곧 패망하고 말 것이며, 어떤 예언자나 점쟁이가 만약 바빌로니아에게 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27장 17절에서 야훼는 자기만을 섬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빌로니아왕을 잘 섬기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까지의 전형적인 예언자라면 더 이상 하나님 섬기기를 미루지 말아라, 우상을 척결하고 하나님만 섬기도록 해라. 야훼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다른 나라를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이게 모름지기 야훼의 예언자였을 것입니다. 왜 야훼는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도록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내렸을까요?

예레미야를 설명하고 있는 여러 단어가 있겠는데요. 일단 여호야킴과 시드키야 치하에서 주로 활동했던 유다국의 예언자라는 점입니다. 시드키야가 유다국의 마지막 왕이니, 엄청나게 격동의 시기를 살아갔던 사람이지요. 요시야의 개혁과 또 그의 죽음 이후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그리고 시드키야 이렇게 네 명의 왕이 세워지고 끌려가고 다시 옹립되는 것을 반복하면서 하룻밤 사이에 세워졌다가도 하룻밤 사이에 무너지는 허무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이런 와중에 신탁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달라지는 상황 속에서 말을 전하는 예언자라는 직분은 그만큼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민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냐와 예레미야의 싸움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레미야 28장에서는 하나냐라는 또다른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기브온 사람 앗술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언자입니다. 이 하나냐는 야훼의 신탁을 전하는 아주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공식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라고 전합니다. 이건 “내 생각인데,” 라고 머뭇거림이 없이 권위있는 예언자들의 신탁인 것처럼 천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냐는 실망스럽고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상황에 매우 고무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야훼가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었다고 말이죠.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이 유다국으로부터 빼앗아간 모든 것이 야훼에 의해 돌려올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고 유다 백성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비운의 왕’, ‘끌려가버린 왕’ 여호야김도 돌아올 것이고, 모든 포로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약소국이었던 유다국과 유다 백성들, 그리고 심지어 시드키야 왕까지 그런 상황을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사실 이런 메시지는 요시야왕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죽은 이후부터 이어져 온 암하아레츠들의 오랜 염원 중 하나였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언자 예레미야가 등장합니다. 바로 한 마디로 그 말에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정말로 바라오! 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무 멍에를 맨 체 바빌로니아왕에게 무릎을 꿇고 납작하게 엎드릴 것을 촉구한 예레미야로서는 보통 자존심이 상한 일이 아닐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자기의 메시지와 정반대로 ‘희망찬 내일’을 이야기한 하나냐 앞에서 자신 또한 야훼의 신탁이 아니었으면 그런 희망의 메시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투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갑니다. “주께서 그렇게만 하여 주신다면, 오죽이나 좋겠소? 나도 그렇게 되기를 정말로 바랍니다.”라고요. 하지만, 하나냐에게 예언자란 모름지기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고대로부터 있어왔던 수많은 예언자들은 대단했던 왕국들, 제국, 그리고 민족들에 맞서 전쟁과 기근, 그리고 염병이 닥칠 것을 예언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자는 대단했던 제국의 안녕을 빌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제국들이 원하는 말이란 무엇입니까?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앞으로는 어떤 나라도 우리 제국을 넘보지 못할 것이다. 물질적 번영과 풍요로움은 영원할 것이다. 라는 말들이죠. 하지만, 예언자들은 어떠했느냐? 목에 칼이 들이닥치는 상태에 있더라도 재앙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이 절대 오기를 바라지 않는 기근과 염병을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예언자가 기층 민중들이 정말로 전쟁, 기근, 염병으로 멸망하기를 바라서가 아니지요. 어느 시대든 권력은 폭주하였고, 권력에 의해 신음하는 자들이 있고, 어느 권력이든 배제와 차별의 패러다임으로 통치가 이뤄지고 있음을 고발하고 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그들이 말하는 영원한 평화, 영원한 번영이란 말이 얼마나 허튼 말인지를 고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엄중하게 9절을 내뱉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서 제가 가장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던 구절이기도 한데요. 우리 함께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가 예언한 말이 성취된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그를 주께서 보내신 참 예언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오.”

생각할수록 어찌 보면 애매한 말이기도 하면서 아주 무거운 진실을 담고 있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에 있는 8절과 비교한다면 이렇게 이야기해야 할 것도 같습니다. “선배 예언자들은 모름지기 참 선지자란 전쟁과 기근, 염병을 예언해서 엄중하게 왕과 백성을 꾸짖어야 한다고 가르쳐왔소. 하지만, 당신은 평화와 희망을 이야기하다니! 거짓 선지자인 것이 틀림 없소!”라고 해야 대구가 이뤄질 것 같은데요. 예레미야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화를 예언하는 자는, 그가 예언한 말이 성취되어야만 그 때서야 사람들이 인정해줄 것이오. 라고 이야기합니다. 평화를 이야기하려면, 희망을 말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엄중한 진실의 무게를 감당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성서해석에서는 이 두 구절을 오로지 평화와 축복만 이야기하는 거짓 선지자와 재앙을 이야기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참 선지자의 대비를 말하려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렇게 읽지 않았습니다. 8절에 나오는 선지자라는 단어와 9절에 나오는 선지자의 원문도 똑같은 ‘나비(nabi)’를 쓸 뿐더러 오히려 두 구절은 선지자론에 대한 연결로 읽어야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8절과 9절을 연결하여 제가 첨언을 하여 읽어보면, 선지자는 재난, 재앙을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더 나아가 그 재난 이면에 있는 야훼의 진정한 뜻, 곧 ‘평화’를 논하는 것은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 이렇게 읽을 수 있겠습니다. 재난을 예언하는 것은 어떤 자연적인 징조나 국제적인 정세, 그리고 사회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면 어느 정도는 그 예측이 가능할 것입니다. 재난을 이야기하는 선지자는 모든 것에 한 마디씩 거드는 ‘비평가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기 지식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사람들, 곧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 우리 사회의 불안한 요소는 이러저러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떠드는 사람들 말고! 진짜 ‘평화’라는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들은 그 말이 성취된 후에야 평가를 받을 만큼의 아주 요원한 일이다. 그걸 ‘감당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로 저는 읽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시절부터 활약했던 아주 오래된 예언자였습니다. 하나냐라는 선지자도 얼마만큼의 명망을 얻었던 선지자였는지 모르겠지만, 예레미야는 앞부분에 나온 것처럼 가족들에게도 버림을 받고, 살해의 위협을 넘기는 등 수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그날까지 살아 남은 선지자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무렇게나 외치는 타 선지자에 대한 연민이었을 수도 있고, 아주 칼날 위를 걷는 듯이 예민하고 엄중한 진실을 다루는 선지자가 대중의 지지와 환호를 한 몸에 얻기 위해 희망과 평화를 마구잡이로 선포하는 선지자를 향해 우아하지만 단호하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0절에서 하나냐는 결국 이런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경청하지 않았습니다. 더 자극적이고 강도 높은 퍼포먼스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메어 주신 예레미야의 목에 있던 나무 멍에를 자기가 꺾어 버렸습니다. 지금 메시아를 보내주어서 바로 문제를 해결해도 모자랄 판에 패배주의가 웬 말이냐! 하면서 말이죠. 대중들은 열렬히 환호했습니다. ‘진실’이라고는 하지만, 보고 있기에는 너무나 불편했던 눈엣가시 같았던 그 야훼의 멍에가 파괴되어버렸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결국 하나님은 하나냐의 이 행동과 말에 분노하였고, 결국 예레미야에게 나무 멍에가 아닌 쇠멍에를 다시 메게 한 후, 하나냐에게는 죽음의 처벌을 내렸습니다.

거짓과 진실의 문제

이 본문을 통해 거짓과 진실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연구소는 지난 5월, 한국민중신학회와 공동으로 “탈진실 post-truth 시대, 개신교는 어떻게 혐오를 생산하는가?” 라는 맑스코뮤날레 발표를 진행했고, 그 후속으로 진행했던 “탈진실시대, 역사적 진실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하는 역사 강좌도 잘 마쳤습니다. 한국 신학과 한국 교회의 이상한 징후들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이상징후를 포착해 오던 연구소는 혐오담론을 생산해내는 페이크뉴스에 관한 의제를 이미 2017년부터 제시하기도 했고, 지금도 그 문제를 탐구중입니다.

유독 진실과 거짓, 참된 것과 허위의 문제를 탐하는 분야가 바로 ‘종교’인데, 거기에다 역사적으로 이단과 정통의 갈등이 여느 종교보다 첨예했던 기독교, 개신교라서 그럴까요? 최근 한국의 교회들을 중심으로 하는 극우세력들은 동성애, 이슬람, 난민, 북한, 정치권 등과 관련한 ‘가짜 뉴스’를 생산해내는 공장의 진원지로 밝혀지기도 했고 지금도 그 상황은 진행중입니다.

이전에는 “이것이 바로 진실!”이라고 이야기하면 모두가 그 곳을 주목했습니다. 그 진실이라는 것의 실체를 모두가 인정하던 시기가 있었지요. 이 세상의 ‘진실’이 탄압받고 매맞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던 그 시절에는 반드시 ‘진실은 승리한다.’ 이 한 마디를 붙들고 하루하루를 견디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진실의 위상이 엄청나게 추락했습니다. 정보는 과거에 비해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공개되어 가고 있고,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거나 엘리트들에 의해 과점되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정보와 진실이 ‘공유’라는 깃발을 향해 전진 또 전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진실의 위상이 이렇게 추락한 것을 한탄하고 다시 진실의 위상을 복원하자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애초에 진실이란 건 없었던 것이니 다 허무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둘 모두 우리의 길은 아닙니다.

진실은 구성된다는 게 진실입니다. 진실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뭔가의 동일체, 그러니까 뭔가 우리가 떠올려볼 때, 마치 무흠하고 순수하게 결정체로 존재하는 보석의 원석 같은 것이 진실이 아니라, 다양한 사건과 문화 속에 놓여져 담론의 각축장 안에서 때로는 휩쓸리고 때로는 깎여 나가고 때로는 윤색되고 심지어 궤도에서 이탈되어버리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진실을 우리는 금과옥조처럼 집안에서 가장 안전한 어느 금고 같은 장소에 묻어 둔다던가, 또는 신전의 가장 중심에 놓고 숭배하는 행위는 진실을 더 훼손시키는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냐는 왜 실패했습니까? 첨부터 거짓을 의도해서 그렇습니까? 거짓 선지자가 되기로 마음 먹고 세상에 복수하기 위해 그런 희망을 말했던 건가요? 아닙니다. 진실의 본질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보통 생각들을 그저 대변하였기 때문에 틀린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내부의 논리 안에서만 상상하고, 내부의 이익 안에서 말을 짜맞추었기 때문입니다. 내부에 아첨하기 위해서는 말을 맞추어야 하는데, 그 함정에 하나냐는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말이란 것은 희한하게도 그 내부의 논리의 정합성만 따르면, 그 말 자체는 화려하고 유려해질지라도 대개는 진실에서 멀어져 갑니다. 사회 일반 시책 또는 정책의 장에서도 말의 앞뒤만 따지고 불순물처럼 보이는 것들을 제거하는 논리의 합만 추구하게 되면 그 말을 둘러싼 갖가지 삶의 정황들이 제거되고, 감춰진 진실은 잘려나가기 마련입니다.

즉, 내부에 갇히면 희한하게도 맞는 말은 하면 할수록 결국 진실이 아닌 말로 변합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다양한 진실들의 각축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곳에 놓여 있어야 할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고인 물은 썩고, 흐르는 물만이 그 청정도를 유지하듯, 진실이 굳은살처럼 굳어지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 소중한 것을 땅에다 묻어버려서 그것이 전혀 흐르지 않게 된 상태가 되면, 누구도 하나냐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의 길을 갔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말의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내 말이 무조건 맞아!” 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순간까지 지식을 얻고 자리를 얻고 자본을 얻으면 되는 것인가요? 물론 그런 방도들도 궁리해야겠지요.
그치만 그 모든 노력에 앞서 저는 오늘의 본문 속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11절에서 하나냐 선지자와 설전을 마치고, 수모를 겪은 예레미야의 마지막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자리를 떠났다. 라고요. 개역개정과 영문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길을 갔다. 두 말은 일맥 상통합니다. 그 자리를 떠나는 것과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은 한 행동이면서 두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고도 또 모진 말과 수모를 겪은 예레미야는 회한에 잠긴 것 같습니다.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나, 내 신탁이 잘못된 것일까, 이 깊은 어둠은 또 언제 끝이 날까 하고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떠났고 다시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아직도 그 깊은 밤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여기다!라고 결론 내리지 않고, 언제든 어디서든 ‘모두’라는 이름으로, 또는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배제되고 차별받는 사람을 찾고 또 찾겠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처럼 평화를 예언하는 자는 그 말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그것이 하나님의 말이었던 것을 인정받는다는 그 말을 붙들며 그 때를 인내하고 기다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최근에 읽었던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라는 책의 문장을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시간을 살고 느끼고 체화하고 좋든 싫든 시간을 자기 존재로 떠안아야 한다. 그러는 동아나 그는 평정심을 잃고, 서성거리고, 시계를 흘끔거리고, 무언가를 골똘히 쳐다보기도 한다. 기다리는 이의 마음은 늘 그렇게 동요한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꿈들과 가능성, 그리고 각자가 기다리는 그 진실이 완전하게 보여지고 도래하고 꽃피는 그 날까지 늘 흔들리며, 늘 동요하는 저와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이 글은 지난 7. 28에 천안살림교회에서 설교한 설교문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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