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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2010년 상도동(문재승)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9. 8. 29.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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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상도동

문재승 (가족신문 월간 제주살이 편집장)

눈을 떠보니 날이 느지막하다. 오전에 깨는 것은 기대도 안했지만 벌써 해가 중천이라니. 

햇빛 한줌 들지 않는 이 집에서 나를 깨운건 순전히 바깥의 웅성거림이었다. 가져갈 것이라곤 평생 내가 곁에 두고 썼던, 그러나 내 몸뚱아리와 함께 녹슬어가는 온갖 연장들인 뿐인 우리집인데 뭔일일까.  

"계십니까? 연탄나눔 운동본부에서 나왔습니다"

아, 오늘 공짜연탄 삼백 장이 들어온댔지. 아무리 그래도 나가보지도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싶어 주섬주섬 옷을 챙겼다. 그러고보니 연탄불도 꺼진 모양이다. 방바닥이 냉골이다. 나간 김에 불도 갈아야 쓰겄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일전에 말씀드린 연탄이 오늘 들어오거든요. 이리로 쌓으면 되죠? 아, 그리고 여기 싸인 좀 부탁드릴게요"

그러고 보니 지난번 집에 들렀던 청년이다. 내밀어진 종이위에 대충 이름 석자를 흘려놓고 죽어가는 연탄불을 들어내고 있자니 퍼런 조끼에 잠바때기를 겹겹이 입은 한 무리의 청년들이 추위를 녹일 듯한 젊음을 무기로 연탄배달을 시작한다. 이번치들은 여성비율도 많고 숫자도 몇 안되는걸 보니 족히 사십분은 걸리겠군. 커피나 한잔씩 타줘야 겄다.  

문득 퍼란조끼 한 녀석이 다가와 묻는다. 

"여긴 가스가 안들어오는 모양이네요. 연탄 보일러에는 연탄이 몇개나 들어가나요?"

질문을 듣긴 했지만 난 애시당초 대답할 뜻이 없었다. 

"이거 보일러 얼마전에 바꾼건데 시원찮아. 내 인생이 얼마나 엎어졌으면 요즘 세상에 아직도 연탄보일러를 때겠어. 흐이구..."

이렇게 겨울이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구두로 내 신세를 떨어내는 것이 아까 장부에 싸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어버린 탓이다. 그래야 적선을 받는 내 마음이 더 편하다고 해야할까. 

집안으로 들어와 덜익은 물로 샤워를 하고 인스탄트 커피를 달달하게 탔다. 어느새 물러간 연탄배달자들을 찾아 집앞 골목길로 나섰다. 어제 서울에 눈이 꽤나 내렸다는데 그새 다 녹아버렸는지 찾을 수 없다. 하여튼 이놈의 동네는 겨울날의 허튼 감상도 허용치 않는 곳이다. 

집앞 가로등 기둥에는 언젠가부터 "재개발하면 우리는 망한다"는 무시무시한 문구가 들어섰다. 이미 이주가 시작된터라 동네 주민들의 상당수가 떠나고 갈 곳없어 남은 자들이 게워낸, 절박했던 한 문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부터 밤이면 밤마다 켜지던 가로등 불빛이 돌아오지 않았다. 

주민들이 떠난 자리는 길고양이들이 와서 채웠다. 지붕과 지붕을 타고 어슬렁거리는 녀석들은 뭐 먹을게 있다고 이 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황량해진 동네에서 남은 사람들을 반기는 고양이들에게 정을 붙여 어떤 주민들은 일부러 마당에 먹이를 두었다. 평화롭게 식사중인 고양이 가족을 지나치자니 집이 있는 나보다 도대체 누가 더 행복한지 모를 일이다. 

잠시 쉬고 있는 파란 조끼 청년들에게 커피를 전해주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63빌딩과 여의도의 으리한 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동네가 목이 좋긴 한 모양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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