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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박소은과 고강동(심정용)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9. 9. 20.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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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은과 고강동

심정용*

0.

얼마 전에 가수 박소은의 공연에 갔다 온 이후 줄곧 그의 노래에 빠져 살고 있다. 솔직하고 거친 가사말, 거기에 깃든 매력적인 자의식, 그러면서도 사이사이에 스며든 관념어를 통해 추상성으로 도약하는 포인트, 기타 소리와 목소리와 멜로디가 어우러지는 탄탄한 실력 등 그를 설명할 말은 많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에게 처음 빠지게 된 노래인 <고강동>을 이야기하려 한다.

1.

<고강동>은 박소은이 살던 동네인 부천시 고강동과, 거기에 얽힌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노래이다. 컨트리한 멜로디로 이루어진 곡의 구성은 단순하다. ‘나는 아주 아주 돈을 많이 벌어서’, 혹은 ‘나는 아주 아주 많이 유명해져서’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엄마에게 고강동과 백화점을 통째로 줘 버린다는 벌스 부분은 ‘엄청 비싼 나라’, ‘엄청 비싼 비행기’와 ‘엄청 좋은 비행기, 카메라, 컴퓨터'를 막 살 거라는 후렴구로 이어진다. 2절도 구성은 비슷한데, 대충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따로 출발하라고 차를 한 대씩 사 줄 것이고, 정말 유명해져서 여러 명이 동시에 자신을 사랑하지만, 자기는 한 명만 사랑할 거라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이 터무니없이 솔직한 내용이 참 순수하고, 그런 면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자전거를 타다가, 얼마 전에 교회에서 함께 읽은 글이 생각난 것은 왜였을까? 김주대 시인의 <영혼의 인간>이라는 시인데, 참 독특하면서 좋았다. “공격은 1차원 선의 세계이다/무지몽매 달려가 어느 끝에 다다르면 공격은 완성되고 파괴만 남는다/그리고 세계는 닫힌다.” “그리움은 2차원 면의 세계이다/견딜 수 없는 갈망으로 천지를 두루 헤맬 때 그리움의 아득한 넓이는 완성된다.” 사람의 속성과 차원을 엮어 풀어놓는 이 글을 읽으며, ‘사람’을 공간적으로 상상하는 공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를 사로잡은 것은 2차원에서 3차원으로 넘어가는 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2차원은 '기호'로 이루어진 소년만화같은 세계이다. 항상 적이 등장하고 갈등이 발생하며, 이 장애물과 맞서 싸워 이기면 하나의 세계가 닫힌다. 공격으로 이루어진 1차원적 세계와 같은 소년만화는 끝나지 않는 일상 속에 끊임없이 더욱 강력한 적과 갈등을 투입함으로써만 이어진다. 전후 일본 만화의 대부분은 이 무조건적인 갈등의 인플레이션 가운데 정작 성취되지 않는 내면의 '성장'을 그려내려는 노력에 할애되었고, 거의 모두가 실패했다. 이에 대해 비평가이자 만화 원작자인 오쓰카 에이지는, ‘기호’에 불과한 일본 만화 속에서는 그만큼 ‘죽음’을 오롯이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어떻게 보면 소년만화 속 끝나지 않는 일상은 기껏해야 2차원적인 ‘그리움’의 세계만을 넓혔을지도 모른다. 가져본 적이 없는 성장을 희구하고, 변주와 외연 확장으로만 넓힐 수밖에 없는 납작한 세계. 하지만 넓이를 가진 세계에 3차원의 깊이를 드리우는 것은 ‘슬픔’이다. “슬픔은 3차원 입체의 세계이다/그리움의 아득한 넓이를 가진 사람이/생을 온전히 지고 위를 향해 꿈으로 솟구치다가도/수직으로 떨어져 고통의 구덩이에 빠지면/그의 생은 마침내 3차원 입체를 가지게 된다/사람다워 보이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기호’가 생의 상승과 하강을 입어 ‘사람’이 되는 지점이다. 

<고강동>에 있어 차원의 도약은 두 번째로 공연에 가서 들었을 때 일어났다. 박소은은 노래를 시작하기 전, <고강동>에 관하여 단순하지만은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는 무언가를 받기보다 주는 데에서 행복과 사랑을 느끼는 편인데,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 ‘준다’는 행위가 쉽지 않아진다는 것이다. 주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은 물질이 필요하고, 바라는 크기와 현실의 간극은 그만큼 단단하게 다가온다. 나는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공격적으로 베풀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 빈틈이 있고, 3차원의 공간으로 들어찬 그 빈틈에는 슬픔이 스며들기 너무 쉽다. 이런 이야기와 함께 박소은은, 만약 고강동을 사는 것이 안 된다면 꿈에서라도 이루겠다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그 문장을 들은 이후, <고강동>에는 순수한 애정에 추가된 모종의 처절함이 슬픔을 촉매 삼아 어우러졌다. 지금까지 <고강동>을 라이브로 두 번 들었고, 그 때마다 듣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두 번의 결이 모두 달랐다.

2.

어째 글을 쓰는 두 달 주기로 멘탈리티와 상황이 변검처럼 바뀌는 것 같다. 대학원 생활 끝에 마주한 회한과 무기력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 보기로 하는 담담한 다짐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요새는 또 적당히 용돈벌이와 생계의 중간쯤 되는 돈을 받으며 주기적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수업과 연구와 발제, 가끔 학회로만 이루어져야 할 것 같은 대학원생의 일상이 이래도 되나 싶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이럴 수밖에 없다. 내가 전공하는 분야는 지독하게 모호하고, 구체적인 텍스트에만 질척거리며 들러붙거나 이론의 미궁에서 붕 떠버리기가 너무 쉽다. 아버지의 은퇴는 다가오지만, 대학원은 학기를 채운다고 무조건 졸업이 되지 않는 불합리한 곳이다. 그 와중에 내 글에 비교적 합리적인 값어치를 매겨주는 곳을 발견했고, 어떻게든 글로 먹고 살아볼 생각을 하는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일단은 다시 학교를 다니고, 서로 다른 분야를 오가며 읽고 쓰는 일들 사이에 균형을 맞추어 보려 발버둥을 치고 있다. 이제는 책과의 선형적인 씨름에도,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 같은 평안한 일상에 대한 그리움에도 머무를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연휴가 지났고, 개강하고 2주가 지났으며, 9월의 중간을 넘어가고 있다. 그렇게 내가 서 있는 시공간을 헤아려 보면 그 광막함에 슬퍼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그나마 비로소 사람다워 보이기 시작하는 모양일텐데, 역시 사람답게 살기란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3.

그런데 시인은 거기서 또 한 차원을 이야기한다. “꿈을 가진 사람은/시간과 공간 이동이 가능한 4차원의 세계로 갈 수 있다/나열된 3차원의 세계들을 연속적으로 관통하는 것은/꿈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최종적으로 인간의 삶은 꿈을 통해 과거든 미래든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여기서 나는 역설적으로, 단순한 공격과 막연한 그리움까지 길어올린 슬픔만이 꿈의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고강동에 영원을 넣을거야/아무도 사라지지 않을거야' 구체적이고 직설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던 박소은의 노래는 마지막 후렴구에서 과감하게 추상성으로 도약한다. 그리고 현실의 촘촘한 슬픔을 인식하는 상태에서 부르는 <고강동>은 꿈의 차원을 슬쩍 엿본다.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가고, 발을 질질 끌고 나아가며 악착같이 시간에 보조를 맞추려 할 때, 슬픈 제자리걸음처럼 보여도 뭔가가 나오지 않을까? 글을 쓰면 돈이 나오고, 책을 읽으면 학기를 지낸다. 간간이 슬픔에 빠지더라도 생각을 하면 논문이든 생계든 미래를 한 움큼씩 파내려간다. 시인의 마지막 두 줄은 이렇다. “그리고 이동에는 반드시 영혼이 동행하게 된다/영혼의 인간은 그렇게 탄생한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이상 '이동'은 참 무거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영혼이 함께 한다면, 대충 괜찮지 않을까? 하다못해 대충이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대충 괜찮은 그 정도씩이라도 계속 살아 볼 것이고, 아마도, 부디 박소은도 계속해서 노래할 것이다. “나는 아주 아주 많이 돈을 벌 거고, 또 나는 진짜 지독하게 유명해질 거야.”

 *필자소개 

비교문학은 대관절 뭘 공부하는 건가요? 늘 질문받지만 매번 잘 대답 못하고 나도 모르고 심지어 아무래도 계속 모를 것만 같은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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