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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나의 옛 남자친구에게(김난영)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9. 12. 1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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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옛 남자친구에게

김난영(한백교회 교인)

 잠시 아이들과 떨어져있을 틈이 생겨 우리는 영화를 함께 보러갔지. 《82년생 김지영》. 너는 아직 못 읽었다고 했지? 난 꺽꺽거릴 것이 분명해 휴지를 챙겨 무릎 위에 두고 앉았어. 예상대로 첫 장면부터 나의 눈물샘은 터졌고, 예상 밖으로 너의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어. 눈물을 닦으려는 너의 손이 내 무릎 위로 향했지.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손과 너의 손이 번갈아 바스락 소리를 내며 눈물을 훔쳤는데, 그 순간들이 묘하게 엇갈리더라. 

 맞아, 그랬어. 임신과 출산, 그리고 여전히 머물고 있는 육아의 터널 속에서도 우리는 그렇게 엇갈렸던 것 같아. 6년여 연애기간의 절반 이상을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우리의 마음은 두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 수없이 엇갈렸지.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이상한 걸까?’라는 질문으로 자책하기도 하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하며 너를 몰아세우기도 했어. 애꿎은 아이들에게 원망의 화살을 던지기도 했지. 날선 말과 눈빛들이 서로에게 꽂혀 상처가 반복되고 결국 곪아 터지기 직전으로 갔지. 비단 우리 부부의 이야기만은 아닐 거야. 

 그 시절 우리는 왜 서로에게 끌렸을까? 막 애기티를 벗은 아이들을 키우는 요즘 그 답을 알겠더라고. 우리가 홀딱 빠진 애들의 천진난만한 그 표정, 몸짓, 말들 있잖아. ‘이 빛깔 그대로 바래지 않고 자라줬음 좋겠다.’ 했던 녀석들만의 고유한 모습들, 내게도 네게도 이십대는 그 고유함의 정점이 아니었을까? 그런 서로의 모습에 끌렸던 것 같아. 내가 갖지 않은 너의 다름이 매력으로 다가왔지.

 오래 함께 하고 싶어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그 후 붙여진 아내, 남편 그리고 며느리, 사위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는 조금 어려운 숙제였던 것 같아. 너무 성실하게 그 이름에 걸맞게 살려고 노력했고, 때로는 서로에게 강요하기까지 했던 것 같아. 그래서 아프기 시작했을 거야. 

 ‘이건 아닌 거 같은데,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라고 느꼈지만 잠시 살필 틈도 없이 우리에겐 엄마, 아빠라는 너무 큰, 감당하기 벅찬 이름이 붙었어. 나와 너를 닮은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은 일상을 경이로 채우는 기쁨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본격적으로 나를 지우는 과정이었어. 

 정혜신의 책에서 읽었는데 유명 연예인들이 겪는다는 공황장애 있잖아, 그게 그렇대. 연예인은 스타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지우고, 대중의 취향에 맞추는 직업이라는 거야. 스타로 성공해 엄청난 부를 얻으면 뭐해. 결국 “자기 소멸”에 이르러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오는 공황발작으로 이어지는데... 엄마가 되는 순간, 내 이름은 사라지고 ‘○○엄마’가 된다는 게 꼭 그랬어. 다행스럽게도 난 발작이 아닌 발악을 했지만, 그걸 지켜보는 너도 참 답답하고 힘들었을 거 같아. 너도 나도 그렇게 아프게 되었나봐. 

 그런데 너무 걱정은 마. 그건 아픈 거지 병든 게 아니래. 잘 쉬면서 몸을 살피면 낫는 감기처럼, 마음에 이는 감정들을 잘 살피면 괜찮아진대. 주의할 점은, ‘우울’로만 진단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각자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야. 예를 들면, 병든 노모가 꺼내는 ‘죽음’이란 단어는 불쑥 찾아온 우울증이 아니라, 노년에 이른 삶의 과정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운 감정과 표현이라는 거지. 

 우리가 두 아이를 키우며 종종 느끼는 벽 앞에 선 것 같은 무기력함 역시 낯설고 두렵지만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지는 거 같지 않니? 난 마음이 푹 꺼지거나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칠 때, 이게 ‘아픈 감정’인지 수없이 스스로 물었어. 그런데 그냥 ‘어떤 감정’인지만 확인하고 그 근원을 파악하면 되는 거였어. 감정의 근원은 내 존재 자체이지, 우울증이라는 병이 아니거든. 

 네가 남자친구였던 시절을 종종 생각해. 사실 그보다는 너의 여자친구였을 때 내 모습이 그리운 거 같아. 통통 튀었던 우리의 생기발랄함도 그립고 무엇보다 서로를 살뜰히 대하던 눈빛들도 그립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두 녀석 때문에 그 시절만큼 바싹 붙어있을 순 없지만 이따금 거리를 좁히고 서로에게 묻자. “마음이 어떠니?”라고 말이야. 특히 네 등으로 향한 내 눈빛에 냉기가 돌 때는 반드시 내 옆으로 다가와 물어봐야해. 알았지? 성실히 사느라 피로한 우리의 일상에 피어오르는 감정들을 그렇게 서로 살펴주도록 하자.  

 아직도 못 잊겠는 나의 구(舊)남친아, 그동안 깨닫지 못해, 말하지 못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우리 앞으로 서로의 마음을 챙기며 잘 여물어가자. 

 

결혼 10주년을 바라보며,

당신의 옛 여자친구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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