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신학비평] 뻔한 공간에서 이성애적 중력 퀴어링하기!(유영상)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9. 12. 18. 20:04

본문

뻔한 공간에서 이성애적 중력 퀴어링하기!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원, 한신대 신대원 성정의위원회 위원장

벌써 한 달 전 이야기군요. 어느새 학교 뒷자락에 버티고 있는 북한산도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북한산이 훌쩍 지나간 시간을 보여주고 있지만, 학교교정에 남아있는 여운은 여전히 또렷합니다. 북한산이 노란 옷을 입고 있을 때 있었던 성정의위원회 주관채플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성정의위원회 동지들과 함께 채플을 준비한 당사자/활동가분과 찍은 단체사진입니다.>

채플을 준비하기까지

무슨 채플을 드려야 할까. 그윽한 조명과 십자가가 있는 뻔한 채플실에서 신앙의 언어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라, 전능함이라는 헤게모니에 고통 받는 하나님과 함께 드릴 수 있는 예배, 그리고 ‘정상성’이라는 중력으로 충만한 이 사회에서 정상성과 대항하며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를 준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저희의 예배, ‘차별과 혐오에 대항하며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의 첫발을 내딛게 됐습니다.

차별과 혐오에 대항하는 이들을 예배에 초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국게이인권단체 ‘친구사이’ 활동가 터울님, 성공회 교우이신 설하님, 한국감염인커뮤니티 ‘알’ 활동가 소성욱님을 초대해 터울님에게는 특송을 부탁하였고, 설하님과 소성욱님에겐 임보라 목사님과 하늘뜻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당사자/운동가들을 ‘타자화’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저희는 이 다짐을 왜 하게 됐을까요? 계기는 무엇일까요? 혹시 그들을 ‘타자화’했기 때문에,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착상된 다짐일까요? 네. 맞습니다. 항상 스스로 타자화를 경계했지만, 예상치도 못하게 그들을 타자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을 한 ‘대상’으로, 어쩌면 해석의 대상으로 인식하려는 안 좋은 습관이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그런 저희의 잘못은 채플 제목을 결정하면서 드러났습니다. 본래 제목으로 ‘정상성에 의해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채플 구성과 진행에 관해 함께 의논한 임보라 목사님께서 그들을 ‘고통받는 이들’로 규정할 경우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우려가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참 후회됐습니다. 매번 사회운동, 특히 기독교 진영의 사회운동 동력이 ‘연민’으로 ‘퉁’쳐지고 있는 동향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뛰어넘는 동력으로 무엇을 제시할 수 있는지 고민하곤 했는데, 정작 그 고민의 결과를 제시할 수 있는 자리에서 남들과 똑같이 ‘연민’으로 ‘퉁’치려는 잘못을 했으니 말이죠. 그래서 채플에서 부를 찬송을 선정할 때 더욱 신경 썼습니다. 찬송을 찾다 보니, 의외로 ‘연민’을 호소하는 뉘앙스가 현장에서 부르고 있는 몇몇 찬송/노래들에 짙게 베여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하여 더욱 기민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연민’으로 ‘퉁’치는, 고통을 전시하는 그 시장을 활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상상해야 함을 절실히 느끼게 됐죠.

뻔한 공간에서 뻔뻔해지기

그렇게 예배가 시작됐습니다. 긴장됐습니다. 하지만 시계바늘은 저흴 기다려 주질 않았죠. 뻔한 공기가 자욱한 채플실에 (기존 구성원들에겐) 낯선 공기가 들어왔고, 중력을 묘하게 비틀었습니다. 

“차별과 혐오에 대항하며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에 오신 여러분께 하느님의 평화가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이들의 운동을 외면하지 않고, 연대와 지지로 함께할 것을 다짐하는 마음으로 1분정도 침묵으로 기도합니다.”

예배의 부름으로 예배는 시작됐습니다. 채플실에 들어온 모두는 이제 죄인이 됐습니다. 이들의 운동을 외면한 죄, 혐오와 차별에 무감각한 죄. 그렇게 우리는 이런 죄들에 대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너그러운’ 하늘나라 재판부에 딴지를 걸었습니다.

 <설하님, 성욱님, 임보라 목사님이 하늘뜻을 전해주고 계십니다>

당사자/운동가 분들의 이야기가 하늘뜻에, 그들의 이름을 성찬에 올렸고, 그들의 손과 체온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가장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죄인으로 낙인찍던 (기호로써의) 그리스도인들, 신학생들은 오히려 그들에 대한 폭력을 외면한 죄를 고백했고, 동행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또 그들의 몸과 피로 가득한 빵과 포도주를 먹었습니다. 바깥에서 보기엔 아이러니한 상황. 하지만 고조되는 신앙의 역동을 오랜만에 느끼게 됐습니다. 동시에 채플실의 온기는 따뜻하게 데워져 갔습니다. 저희는 그 온기를 느끼며 예배는 자알 마무리 했습니다.

<임보라 목사님께서 성소수자와 함께 하는 성찬에 모두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성찬에 참여하고 있는 학생들>

누구는 차별과 혐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페미니즘과 퀴어 담론이 그렇게나 빨리 ‘급습’해 오면 오히려 ‘폭력’이라고 말들 하죠. 하지만 이런 소신엔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당면하고 있는 지금, 늦장부릴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시간에 조차도 혐오는 자신의 힘을 더욱 견고히 만들고 있습니다. 수많은 폭력이 ‘조회수’와 ‘댓글’, 그리고 ‘유머’의 이름으로 소비되고, 가해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준다는 것은 혐오의 시곗바늘을 용인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또 이성애적 중력으로 재편된 이 사회의 폭력 공장을 방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성애 공장이 노동문제를 생산하는 데 이어서 미세먼지까지 내뿜고 있는데 가만히 있어야만 합니까? 더욱 기민하게 반응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관용은 시간과 공간을 무기한 점유하고 있는 문화에 대한 긍정을 재생산하진 않을까요?

뒷 이야기...

채플 하루 전, 저희는 저희의 예배를 ‘편향된 예배’로 홍보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채플 하루 전, 그러니까 11월5일 화요일 채플시간이었습니다. 채플 담당 교수님께서 알림시간에 저희 주관채플을 ‘편향된 예배’로 소개했습니다. 이어서 ‘다소 불편할 수 있다’고, ‘앞으로 모두를 위한 예배를 준비하겠다’고 말을 마무리했습니다. 저희는 무방비 상태로 당했습니다. 성소수자 당사자/운동가 분들의 운동과 성정의위원회의 노력과 기대에 냉소하는 발언이었죠. 이 발언을 들은 많은 학생들이 동요했습니다. 예배 후 성정의위원회는 ‘어쩔 수 없이’ 이에 대응하기로 결의했고, 요런 피켓을 학교 곳곳에 부착하게 됩니다. 그렇게 성정의위원회 주관채플은 의도치 않게 ‘편향된 예배’가 됩니다.

발언을 하신 교수님으로부터 사과를 받긴 했습니다만, 여전히 분개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성적 지향에 대해 조심스러워하는 입장 자체도 문제라 생각하고요, 성적 지향을 논쟁의 식탁 위에 올려 놓는 것 자체도 문제라 생각합니다. 왜 이성애에겐 묻지 않는 질문들을, 우려들을 다양한 성적 지향에게는 아직도 묻고 있는 걸까요. 이제는 그 논쟁 구도를 뛰어 넘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할까요?

<채플 후, 학교 본관 엘리베이터에 부착한 피켓>

 

이제 시작이겠지요 

여태껏 ‘너그러운’ 마음으로 묵인되어왔던 고민의 시간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시간, 충분히 드리지 않았나요? 그래요, 이제 판단해야 합니다. 이 공간의 공기와 중력이 편향돼 있지는 않은지, 혐오라는 잡귀가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고 있지 않은지.

다양한 시도가 보장돼야 합니다. 하여 ‘편향된 예배’는 지속돼야 합니다. 다양한 이들이 존재하고, 편향된 중력과 공기가 이 공간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뻔한 결말일 수 있지만, 혹시 모르죠. 이제 시작이니 함께 해봅시다. 중력 또한 전복시킬 수 있다는 상상력으로.*

<채플 순서지>

▶ 성정의위원회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학생회 소속 자치기구입니다. 젠더 혐오와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을 모색하는 자치기구로 올해 창설됐습니다.

ⓒ 웹진 <제3시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