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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민중-투자자’의 야누스적 얼굴 (박치현)

시평

by 제3시대 2009. 9. 2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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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투자자’의 야누스적 얼굴

박치현
(CAIROS 대표)

1996년 한국은 OECD에 가입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2009년 9월 21일 한국 주식시장은 FTSE지수(파이낸셜타임즈스탁익스체인지)에 편입되었다. 내년에는 모건스탠리가 발표하는 MSCI선진국 지수에 편입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OECD에서 FTSE로? 증권거래소 이광수 본부장의 말에 의하면, “OECD 가입이 실물 경제에서의 선진국 진입이라면 FTSE편입은 자본시장(금융시장)에서의 선진국 진입”이라고 한다. 이제 선진국 국민들이 투자하는 펀드종목에 한국기업 주식이 자동적으로 편입된다. 다시 말해 한국이 투자하기에 믿음직한 나라가 된다는 것. 지수편입으로 인해 26조원 정도의 해외자금이 한국 주식시장에 신규 유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에서야 금융시장의 자율화 개방화를 모토로 하는 ‘자본시장통합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금융위기 이후 서구의 대처와는 반대인 거꾸로 가는 조치이다.) 이젠 금융의 시대이다. 이미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금융자본주의’라든가 ‘금융화’라는 수사로 수식되어 왔다. 도대체 금융화로 불리우는, 금융시장의 비대화는 이 시대의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미 2007년말 펀드 열풍으로 1가구 1펀드 시대가 열렸다. 너도나도 펀드 수익률에 열광했다. 왜 이렇게 되었나? 이미 2005년 노무현 전대통령은 부동산 자금을 주식시장으로 옮기겠다는 의지를 표하면서 몸소 8천만원을 펀드에 투자했다. 언론은 이 일을 대서특필했다. 노무현펀드의 수익률도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정부가 ‘주식시장은 도박’이라는 기존의 비도덕적 이미지를 벗겨준 것이다. 이런 정부의 부채질로 국민들은 더욱 안심하고 주식시장에 발을 들였다. 2년 뒤 1300대였던 코스피지수가 2000을 돌파하였고, 이러한 열기 가운데 지금의 대통령께서는 자신이 대통령되면 코스피지수가 3000 간다면서 기름을 부으신 바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찾아왔고, 주식과 부동산은 폭락했으며, 때맞추어 경제대통령 미네르바의 종말론적 예언이 네티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자유주의 금융화가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하지만 2009년 3월부터 한국의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현재(9월말) 코스피지수는 1700대에 이르러, 2007년 수준을 회복했다. “코스피가 500가고 부동산이 반토막난다”는 미네르바의 예언을 믿었던 사람들은 이제 미네르바를 원망한다. 점차 폭락과 붕괴를 예언했던 비관론자들과 진보인사들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데’라며 급속히 상승하는 주식과 부동산을 바라보며 투자 여부를 망설인다. 외국인들은 다시 기록적으로 한국 주식시장에 거액을 투자하며 상승세를 이끌고 있다. 이제 이명박 지지율은 50%에 육박하고 정운찬 서울대 전총장이 절묘하게(?) 총리로 지명되었다. ‘중도실용’이니 ‘친서민’이니 하는 수사들이 내세워지고 있다. 진보․개혁세력은 지지부진하다. 정치세력도 없으며, 대안도 없다. 2008년 광장을 달구었던 촛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제 아련한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다시 회의주의와 무관심의 기류가 지배하고 있으며, 집권세력은 취업 후 상환하는 등록금 대출이나 서민대출 정책 등 그럴듯한 ‘알맹이 없는 전시용 포장지’를 제작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현 정권의 출범에 결정적인 변수는 부동산(뉴타운 개발)이라고 지적한다. 자산시장에서의 기대가 물질화된 것이 현 정권이라는 것이다. 금융화의 가장 큰 의미는, ‘노동소득’에서 ‘자산소득’으로의 이행이다. 사람들의 삶에서 ‘자산소득’의 비중이 점점 비대해지는 것이다. IMF이후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노동유연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정상적인 노동으로는 서울에 내 집을 마련하기가 너무 어렵다. 노동유연화는 20대에게서는 <88만원세대>로 물질화된다. 파이는 적은데 경쟁자는 너무 많다. 직장이 불안정하고 노동소득이 부족하므로, 그 빈틈으로 노동소득이 아닌 ‘자산소득’(부동산, 주식 나아가 로또, 도박까지)에의 유인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이, 한국도 서구처럼 ‘금융화’가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러한 금융화는 이른바 ‘투자자 주체’를 양산한다. 노동자가 아닌 ‘투자자’. 편드에 투자하는 누구나 미국 주식시장에 신경을 쓰게 된다. 자연스럽게 투자자적 실천, 투자 문화가 확대된다. 재테크와 투자성공담이 사람들의 미래의 꿈을 주조한다. 이러한 ‘투자자-국민들’이 민주화보다는 자산소득을 보장해주는 정권을 출범시킨 것이다. 어쩌면 민주주의는 이제 웬만큼 이루었다고 안심했던 것일까? 작년 경제위기로 현 정권에 실망하는 듯하다가, 자산시장이 회복되고 있는 요즈음 ‘투자자-국민들’은 다시 정권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혹자는 이 투자자-국민들은 이른바 과거-IMF이후 몰락한-중산층들처럼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 아니냐고, 민중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투자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투자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재테크와 성공투자가 ‘삶의 모델’로서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부동산으로 이미 어느 정도 부를 획득한 중산층들이 아니다. 반대로 뉴타운 등 “나도 부동산·주식으로 뭔가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아직 성공하지 아니한 자들’이다. 이들이 지금의 정권을 뽑아준 게 아닌가. 어쩌면 과거 민중신학에서 말하던 민중이 바로 이런 사람들로 변모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렇지 않다면 민중신학의 민중에는 고작 빈민들만 해당될 것이다.(게다가 빈민들도 게임, 도박, 로또에 미쳐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투자자-민중들이 작년 광장에 나왔던 이들과 완전히 별개의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노동시스템의 불안이 투자자 주체를 낳는다는 위의 주장이 옳다면, 촛불시민과 투자자-민중은 구별되기 어렵다. 다시 말해 민중은 가난하지만 동시에 투자자이다. 아담 햄즈는 금융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은 투자자 주체로 구성하면서,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금융기업의 이해관계와 일치되도록 강력히 포섭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현대차 노조가 파업하면 소액주주들은 노조의 파업을 욕설을 섞어가며 비난한다. 자신이 투자한 주식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도 동일한 처지의 노동자인데 말이다. 한국 기업이 해외공장에서 타국의 노동자들을 형편없는 인건비로 착취하는 것도 찬성하게 된다. 자신의 해외펀드 수익률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도 동일한 처지의 제3세계 노동자였는데 말이다.

70년대 한국교회는 민중에 대해 두 가지 접근법을 개발했다. 도시산업선교회 등 진보진영에서 수행한 방식, 그리고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수행한 ‘기복신앙’ 접근법. 내가 보기에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은 상당히 이상화되어 있는 듯하다. (심지어 민중이 메시야라는 주장도 있었으니까) 그런 민중은 사실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민중신학은 여의도순복음 교회의 민중의 속성을 애써 무시한 것 같다. 민중에겐 야누스적 얼굴이 공존한다고 보는 게 맞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중의 생존 욕구를 탐욕으로 타락시키는 현 금융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의 실패 시점에서 기회를 포착하는 게 좋은 방법일 듯하다. 민중의 상승열망은 현재 자산시장을 가리키고 있다. 민중들이 계층 상승열망(생존욕구로부터 비롯된)의 덧없음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다.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진보적인 의식각성을 요구해 봤자, ‘먹고사니즘’의 위력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가 어렵고 삶이 불안정할수록, 먹고사니즘으로 인한 회의주의와 무관심은 더욱 강해지는 듯하다. 물론 민중들의 불안과 고통은 폭발의 시점을 기다리고 있다. 다만 상승열망이 아직은 꺼지지 않았을 뿐.

개인적으로 한국의 부동산시장의 거품이 꺼질 시점이 얼마 안 남았다고 본다. 워낙 오랜 기간 부동산이야말로 확실한 투자처였고 현 정권이 부동산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떠받치기 때문에 부동산 시장이 단시일 내에 붕괴하기는 어렵겠지만, 난 부동산의 질주가 20대~30대의 ‘저소득’ 구조(구매력 약화)에서 지속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까놓고 말해 부동산 위기는 현 집권세력의 위기나 다름없다. 그래서 이토록 건설에 올인 하는 게 아닌가? 집권세력은 부동산만 잘 하면 “만사가 OK”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부동산이 잘 안되면, 정확히 그 반대이다.

결국 거품은 꺼지기 마련이다. 노동도 대안이 아니고 투자도 대안이 아닐 때, 사람들은 무엇이 대안인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연대’라는 대안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기 시작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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