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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보잭홀스맨』과 자기만의 병(심정용)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20. 2. 8.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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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잭홀스맨』과 자기만의 병

심정용*

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하려 하는데 내가 자기만의 병이라는 말을 꺼낸다면 도대체 그게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설명하려 한다.

최근 참으로 시간이 흐른다고 느낀 건, 즐겨 보던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보잭 홀스맨>이 시즌6을 끝으로 마지막 에피소드를 공개했을 때였다. <보잭 홀스맨>은 과거 90년대 인기 시트콤의 주인공이었던 퇴물 배우 보잭 홀스맨을 주인공으로 하여 헐리우드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루는 애니메이션이다. 보잭은 전형적인 안티 히어로로서 과거의 영광만을 되풀이하며 인정욕구에 목말라 있는 말-인간이다(인간과 동물-인간이 공존하는 모습이 이 만화의 세계관이다). 작중에서 그는 술과 약을 달고 살면서 온갖 잘못들을 저지른다. 불행한 개인사와 감당 못할 인기는 보잭으로 하여금 변명과 자기연민을 거듭하게 만든다. 그는 유명인이기에 그만큼 쉽게 구설수에 오르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더욱 쉽게 용서받는다. 보잭은 스스로가 엉망진창이라는 사실과 세상이 자신에게 관대하다는 사실 모두를 알고 있고, 이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정작 문제를 마주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는 거짓과 변명을 꺼내들고 만다.

이 짜증나고 답답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굳이 좇아간 이유는, 보잭의 우스꽝스러운 희비극적 몸부림에서 언뜻 페이소스가 스쳤기 때문이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고, 그래서 하다못해 말뿐이라도 인정받고 싶어하는 보잭은 친구인 다이앤에게 애원한다. “늦지 않았다고 말해줘요. 제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줘요.” 한없이 음울하고 초조한 그의 표정은 소란스러운 표피 너머에 깊이 뿌리내린 공허와 불안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고투한다. “더 쉬워질 겁니다. 매일 노력해야지요. 꾸준히 하기는 힘들지만, 그것도 쉬워질 거예요.” 익명의 조언처럼 그는 조금씩, 처량맞을 정도일지라도 조금씩 나아진다. 보잭이 그렇듯, 어쩌면 우리는 더 나은 사람,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끝인가? 거듭났다 해서 그 이전의 모습은 잊혀지는가? <보잭 홀스맨>은 마치 진자운동처럼 지독하게 희비극을 오간다. 때로 둘은 한데 섞여 가혹한 블랙 코미디가 되기도 하고, 시간적 격차를 두어 롤러코스터처럼 분위기를 오르내리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고 사건을 거치며 보잭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떠나보낸다. 그의 못난 모습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사람이든, 결국 그의 곁을 떠나간 사람이든, 그 모든 과거는 고스란히 보잭의 현재에까지 잇닿아 있다. 작품이 진행될수록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장면과 카메라 시점에서는 줌 아웃이 늘어나고, 주변 인물들의 목소리가 비슷한 비중으로 들어차기 시작한다. <보잭 홀스맨>은 미래를 향하여 미약하게나마 변화와 성장을 이야기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과거라는 타자를 책임지는 고단하고도 비참한 일, 삶이라는 노동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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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초여름쯤 나는 무기력을 동반한 우울증과 성인 ADHD로 진단받았다. 약을 복용한지 1년 반쯤 된 셈이다. 정식 명칭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증후군인 ADHD는 간혹 성인이 되어서도 증상이 유지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짧은 주의력, 과잉행동, 충동, 꼼지락거리기, 우선순위 매기기와 시간관리 어려움 등 ADHD는 소위 ‘산만하고 즉흥적’이라 할 만한 증상들을 갖추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나는 병적일 정도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며 충동적이다. 그리고 대화에 집중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여럿이 대화하는 자리나 회의에서 도통 무슨 얘기가 어떤 흐름으로 오고 가는지 따라잡을 수 없다. 심지어는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도 어느 순간 못 듣곤 했다. 나는 이게 다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 나는 만성적인 지루함을 느껴서 길거리를 걸을 때면 주변의 모든 숫자와 간판을 훑어보고 머릿속으로 조합하며 놀곤 한다. 마지막으로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한다. 이르거나 늦기보다는 정시에 맞추는 일이 늘 더 어려웠다.

이게 ‘증상’이라고 느낀 건, 내가 대화에 집중하지 않는다며 들어온 문제제기를 접하면서였다. 인간관계에까지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게 된 상황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는 건지, 아니면 노력이 부족한 건지를 여러 번 생각했다. 친구는 나에게 혹시 성인 ADHD인건 아닌지 물어보았고, 나는 바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만약 이게 병이라면 진단과 치료를 받아서라도 고치고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증상이 차라리 병이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거듭했다. 현대의학의 과학적 진단을 좋은 변명거리로 삼고 싶지 않았다.

여하튼 진단을 받아 약을 지어 먹었고, 맞는 약을 찾기까지 이것저것 바꿔 가며 약 7개월 가량 상태가 오르내렸다. 약은 먹었을 때 티가 나지는 않지만, 먹지 않았을 때에는 확실히 티가 난다. 효과는 24시간동안 지속되고, 근본적인 치료가 아닌 일시적인 효과에 그친다. 나는 아마 집중해서 뭔가를 해야 할 날들, 그러니까 살아가는 대부분의 나날을 약과 함께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신체적 통증과 정신적 고뇌를 구분하는 문화에 익숙하지만 몸의 취약성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말한다. 꾸준히 약을 복용하는 입장이 되고 나니 저 문장이 크게 공감되었다. 생각해 보면, 증상은 내 삶의 일부였다. 나는 여전히 내가 가진 이 병을 필요 이상 비극적으로, 혹은 ‘덕분에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는 식의 자기계발-극복 서사로 여기지 않고 온전히 품는 일을 연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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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약을 찾아 복용하기만 하면 나를 둘러싼 골치 아픈 일들이 한꺼번에 해결될 것만 같았다. 이제는 이전 같은 잘못은 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한결 차분하고 일사불란하게 내 주변의 일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약은 증상을 ‘일시적으로’ ‘줄일’ 뿐 여전히 산만할 때가 왕왕 있었다. 게다가 약은 상황을 해석하는 데에 어려움을 더했다. 같은 잘못을 저지를 때 나는 ‘약효가 충분하지 않아서’라는 변명에 매달리고 싶은 마음과 ‘내 태도에 문제가 있어서’라는 자책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곤 했다. 결정적으로, 진단 이전의 잘못들이 헤아려질 수는 있어도 당시 당사자들이 겪은 상처까지 치유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앓던 병을 발견했다고 해서 무슨 커다란 시간축의 단절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병이나 약 자체는 내가 현실에 딛고 선 발을 한치도 띄워 주지 않았다. 그야 실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에게 병의 존재는 스스로 ‘정상성 바깥’이라는 인식과 함께 모종의 환상을 제공했다. 내가 위에서 말한 연습이란, 정상성이라는 선 안팎에 선 내 위치에서 이런 뜬구름 같은 환상을 걷어내는 일이다. 나는 여전히 과거에 잘못한 사람이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잘못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이 ‘자기만의 병’ 때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지만, 여하간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로 인해 떠났고, 누군가는 남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나는 꾸준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나 스스로를 보잭에 지나치게 대입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이야기가 품은 희비극에 공감하는 일 역시 일종의 연습이다. 그가 가진 자기연민, 자괴감, 열등감이라는 수영장에 잠겨 있으면 숨이 막히는 가운데서도 묘한 포근함을 준다는 걸 안다. ‘자기만의’ 부정적인 어떤 것들로 스스로를 감싸고 이를 고수하는 일은 비참하면서도 중독적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 타자와 더불어 살아간다. 바꿀 수 없는 과거,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내가 마주하는 시간, 함께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만의 병 같은 것들 말이다.

숱한 상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 않고, 오롯한 몸을 가진 채 책임지며 살아가는 일. 그건 “꾸준히 해야 하고, 그게 힘들지만, 점차 쉬워질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다. 연습은 계속될 것이며, 그래야만 한다.

 *필자소개 

비교문학은 대관절 뭘 공부하는 건가요? 늘 질문받지만 매번 잘 대답 못하고 나도 모르고 심지어 아무래도 계속 모를 것만 같은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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