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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Deus Non Vult(황용연)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20. 2. 27.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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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s Non Vult

황용연 (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민다. 그러면서,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피 흘리게 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조상의 분량을 마저 채워라(마태복음서 23장 29~32절)

1.
오늘의 하늘뜻나누기 제목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혹은 도대체 이거 어느 나라 말이야 이게 궁금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말은 라틴어입니다. 라틴어라고는 손톱만큼도 알지 못하는, 신학박사인데 살짝 사짜끼가 있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는 신학박사가 왜 굳이 하늘뜻나누기 제목을 라틴어로 썼느냐 하는 것은... 영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상: https://youtu.be/JVk6SIj7lUE)
보여 드린 영상이 제5공화국 드라마 오프닝 영상이었습니다만, 물론 이 자리에서 새삼스레 전두환과 그 일당들을 비판하려고 이 영상을 보여 드린 것은 아닙니다. 
보여 드린 영상들에 깔린 노래는 결국 이런 내용을 반복한 노래입니다.


"인간은 역사를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말은 제가 신학을 시작하면서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마음 한 구석에 깊이 간직한 성서 말씀 하나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 성서 말씀이 바로 오늘의 본문, 마태복음서 23장 29~32절입니다.

2.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라는 인물이 지금 한국에서 활동을 한다면, 저는 이 사람에게 붙을 지칭 중에 이런 류의 지칭이 반드시 들어갈 거라 생각합니다. 키보드워리어, 아가리파이터.
가만 보면 예수는, 말꼬리를 잡아서 엉뚱한 데로 끌고 가는 능력이 상당히 뛰어납니다. 예를 들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마느냐란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의 대처 방식은 이랬습니다. 동전 하나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이 동전의 글자와 그림이 누구 것이냐 이렇게 물어서 황제의 것입니다 하니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바치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쳐라 이렇게 엉뚱한 말을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예수의 아가리파이터 능력이 잘 드러납니다. 예언자들의 묘비를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리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이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죽임을 당할 때 있었다면, 자기들의 조상들과는 달리 그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럽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그 '조상'이라는 말을 꼬투리를 잡습니다.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죽인 그들이 너희들의 조상이라면, 너희들은 그 살인자들의 후손이라고 스스로 자백한 셈 아니냐고 합니다. 그리고 한 술 더 뜨지요. 살인자들의 후손답게, 당신들은 당신들 몫의 살인을 하라고 말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항변을 할 수 있을 법도 합니다.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들의 명예를 지금이라도 회복시켜 주자는데, 살인자들의 후손이니 너희 몫의 살인이나 하라는 막말을 들어도 되는 거냐고. 아직도 그들은 억울하게 죽은 게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테 왜 그들이 아닌 우리 같은 사람들을 이렇게 비난하는 거냐고.  

본문에 위선자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묘비와 기념비를 꾸리는 사람들의 행위가, 마음에 내키지도 않으면서 겉보기로만 한 일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라는 집단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따져 본다면, 이들의 이런 행위가 '위선'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됩니다.

3.
이들의 행위가 위선이 아니라면, 이제 이 본문을 놓고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겠습니다. 이들이 진심으로, 과거의 예언자와 의인들의 기념비와 묘비를 세운 그 행위들이, 그들이 살인자의 후손이 되도록 만드는 한 원인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예언자와 의인들의 기념비와 묘비를 세우는 것은 분명 옳은 일입니다만, 그 옳은 일을 하는 현재의 자신들이 "나는 옳은 일을 하기 때문에 옳은 사람이니, 내가 기준이 되어서 세상을 판단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바로 지금 현재 또다른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구조의 공범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걸 두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살인자의 후손이라 할 수밖에 없겠지요.
사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당장 이 성서 말씀을 전승해 온 그리스도교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십자가를 예수의 기념비 삼아, 나만으로는 옳지 않아도 예수를 기념비 삼는 한 나는 옳다라고 한 것이, 그리스도교가 지금까지 수없이 살인의 공범이 되어 왔던 한 원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보여 드렸던 영상의 이야기를 다시 끌어온다면, 인간은 역사를 용서하려 하지만 신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언자와 의인의 기념비와 묘비를 세우는 일은 분명 역사를 용서하지 않는 하나의 예겠지만, 그 일이 그 묘비를 세우는 사람들에게 내가 옳은 사람이다라는 확신을 주는 근거가 된다면, 그것은 인간이 역사를 용서하는 또다른 예가 될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현재의 역사를 용서하는 빌미가 된다고나 할까요. 당연히 신은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가서, 신이 있다고 당연히 여길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신을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찾아야 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어쩌면 이렇게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신은 역사를 용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의 주어와 술어를 뒤집어서, 역사를 용서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리에서 우리는 신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말입니다.

4.
올해가 한국전쟁 70주년이라는 것을 환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전쟁 자체로도 그 직전직후의 일들까지 합쳐서 죽음의 역사이고, 그 후 지금까지의 70년간에도 죽음과 폭력이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 죽음과 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기념비와 묘비를 세워 주면 안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설령 보수라고 해도 이제 거의 없습니다. 물론 보수인 경우에는 이런저런 군말을 붙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아마도 현재의 정부를 요약하는 말인 "적폐 청산" 중에는 기념비와 묘비를 세우는 일이 많이 들어가 있을 법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렇게 한 번 물어 봅니다. 지금 여기, 2020년 남한에서, 기념비와 묘비를 세우는 일은, 살인자의 후손이 될 뻔한 함정을 피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조금 우회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오늘의 하늘뜻나누기를 마칠까 합니다.

5.
2003년, 부산의 한 조선소 크레인에, 노조위원장이 고공농성을 하러 올라갔습니다.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는 129일을 지낸 끝에, 결국 자결하여 죽어서 내려왔습니다.
8년 뒤인 2011년, 같은 조선소 같은 크레인에, 그 노조위원장의 동지였던 해고노동자가 고공농성을 하러 올라갔습니다. 이번에는 전국에서 희망버스가 와서, 그는 살아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2003년의 대통령은 지금 남한의 민주정신의 한 상징이 되어 있습니다.
2011년의 대통령은 나라를 자기가 돈 챙겨먹을 곳간으로 알았던 인간(?)입니다.
그러면, 2003년 그 민주적인 대통령의 시절이, 2011년 그 사기꾼 대통령의 시절보다, 사회적 연대라는 차원에서, 나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6.
그로부터 또 8년이 지난 작년 2019년,
어느 공기업의 특정 직군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함부로 비정규직으로 돌린 회사에 항의하여 파업과 농성을 합니다.
아시다시피 2019년의 대통령은 2003년의 대통령의 친구입니다.
그 대통령을 보좌하는 경제수석비서관이, 앞의 노동자들을 놓고 이런 말을 했다지요. 솔직히 없어질 직업인 거 눈에 보이지 않느냐고요.

그럼 여기서 다시 묻습니다.
2019년, 또다른 민주적인 대통령의 시절이, 촛불혁명을 거친 뒤라는 시절이, 8년 전인 2011년, 사기꾼 대통령의 시절보다, 사회적 연대라는 차원에서, 나아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백식구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한백식구의 일원인 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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