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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할 수 없는 대립들(정용택)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20. 2. 27.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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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할 수 없는 대립들*

정용택(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과 사실상 대립되는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 충분히 강력한 한 율법이 주어졌다면, 그렇다면 의롭게 되는 것[사람들을 살려내는 것]이 율법으로부터 왔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경유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도록, 성경은 모든 것을 죄의 세력 아래에[죄가 통치하는 감옥에] 가두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의 세력 아래에 제한되어 있었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믿음이 침입적으로 계시될 때까지 지속된 시대 동안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가 도래할 때까지 율법은 우리의 제한하는 관리자였다.
그러나 믿음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그 제한하는 관리자의 세력 아래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너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너희 모두가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너희는 마치 그가 너희의 옷인 것처럼 그리스도를 입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고, 노예도 자유인도 없고 ‘남자와 여자’도 없다. 왜냐하면 너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3:21~28)

 

1. 구원=해방=자유

오늘 우리가 그 일부를 함께 읽은 성서는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그리스도교회의 독립선언서’, ‘그리스도교 자유의 대헌장’(the Magna Carta of Christian freedom)으로 불리어왔습니다. 그런 별명이 붙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서신에서 바울이 그리스도교적 구원사건의 의미를 해방 또는 자유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서신의 인사말에 해당하는 1장 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개역개정).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신 이유입니다. 개역개정판과 표준새번역판 한글성서에서 ‘건지시려고’/‘건져 주시려고’로 번역된 단어는 ‘에크셀레타이’(ekseletai)입니다. 원어 기본형은 엑사이레오’(exaireô)인데, ‘~에서’를 뜻하는 ‘ek’라는 전치사와 결합하여 사용되고 있고, 그 의미는 “~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다” 또는 “~으로부터 구출하다, 구조하다”입니다. 아울러 이 단어는 바울이 사용하는 또 다른 단어인 ‘엑사고라조’(exagorazô)라는 동사와 문맥상 그 의미가 일치합니다. ‘엑사고라조’는 한글 성서에서는 ‘속량하다’로 주로 번역되었는데(갈 3:13; 4:5), 직역하면 “~의 노예 상태에서 사들이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1장 4절은 원어의 의미를 보다 신중히 고려했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동하여 현재의 악한 시대/세대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구조해 내시려고 우리의 죄들의 치명적인 결과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셨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사건 또는 구원사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지배하는 악으로부터, 또는 악이 지배하는 노예적인 상태로부터 우리를 구출해내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의 관점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악한 세력은 ‘혈과 육’, 즉 ‘피와 살’을 가진 구체적인 적(敵)이 아니라 그보다 더욱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현재의 악한 세대/시대’ 그 자체입니다(엡 6:12 참조). 바울은 종종 자신이 살았던 당대를 시간적인 차원에서 현 시대/현 세대로 표현하지만, 때로는 그와 동의어로 ‘세상’(kosmos)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출해내는 조건이란 결국 악한 세계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바울이 구원사건을 노예로부터의 해방, 지배로부터의 자유라는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갈라디아서에서 전반부(1~4장) 신학적 주장 부분에서 후반부 윤리적 권면 부분(5~6장)으로의 전환점 역할을 하는 5장 1절에서 보다 명확히 확인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그 자유 안에 계속 머무르도록 노력해야 하고, 다시는 노예의 삶을 우리 자신들이 반복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를 악한 시대/세대의 손아귀에서 구해내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죄들의 치명적인 결과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점에서,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은혜이자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과 자유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면서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을 직접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하느님의 구원사건은 더 이상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을뿐더러, 사실은 율법으로 상징되는 그 어떤 노예상태, 예속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요컨대,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사건, 또는 구원사건이란 결국 해방의 사건, 자유의 사건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제 오늘의 본문인 갈라디아서 3장 21~28절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본문을 선택한 이유는 바울이 여기서 인간이 처해 있는 노예의 상태, 예속의 상태가 무엇이며,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구원사건이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자유의 실현인지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2. 율법의 행위 대(對) 그리스도의 신실함

3장 2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느님의 약속들과 사실상 대립되는 것이냐?” 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충분히 강력한 한 율법이 주어졌다면, 그렇다면 세상을 정의롭게 만드는 것, 즉 사람들을 살려내는 것이 율법으로부터 왔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약속(언약)을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하는 것을 확실히 거부합니다. 우선 율법도 약속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창조해서 인간에게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율법은 약속과 달리 생명을 결코 줄 수 없기 때문에 약속과 경쟁 관계에 있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약속에 대립하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율법에 관해 긍정적인 말, 또는 약속에 대한 율법의 보완적인 기능, 또는 약속과 긍정적인 관계가 제시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식으로 논지를 전개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의 부정적 기능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죄의 세력 아래에[죄가 통치하는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단 바울은 성경을 율법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율법이든 성경이든 중요한 것은 그 기능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율법/성경은 “모든 것을 죄의 권력 아래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왜 율법이 그렇게 했냐는 것입니다. 22절 상반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기초하는 약속이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바로 그 목적 때문에 율법/성경은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버렸다고 말입니다. 

제가 2017년 12월에 설교하면서 다른 본문(롬 3:21-26)을 가지고 말씀 드렸던 적이 있는데요. 오늘 읽은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서도 ‘피스티스 크리스투’(π́ιστις Χριστου̑)라는 어구가 등장합니다. 피스티스는 보통 믿음, 충성, 충실함, 신실함 등으로 번역되는 명사이고, 크리스투는 크리스토스(Χριστος), 즉 그리스도의 소유격 형태입니다. 문제는 이 두 개의 명사를 조합했을 때 문법적으로나 성서 용례상으로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피스티스 크리스투에서 피스티스라는 명사는 뒤에 붙은 ‘크리스투’라는 명사에 종속되어 있는데, 피스티스에 대한 크리스투의 지배 관계를 주격적으로 보느냐 목적격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격적 속격으로 번역하면 피스티스 크리스투는 ‘그리스도의 믿음’이 되고 목적격적 속격으로 번역하면 ‘그리스도를 믿음’이 됩니다. 

자, 그럼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즉 세상을 정의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약속이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선물로서 주어진다고 했을 때, 그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믿음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믿음일까요? 하느님의 언약이 모든 믿는 이들에게 은혜로서 선물로서 주어질 때 그 근거, 그 기초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일까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신실함일까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무언가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에게 속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될 때, 피스티스는 단순한 지적 동의나 신앙 혹은 신뢰보다도 더 강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것은 군인들의 충성심, 권위에 대한 복종, 자녀에 대한 부모의 성실한 관심, 가족에 대한 헌신처럼 좀 더 친숙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자아의 전적 서약이라는 측면에서 신적인 ‘신실함’을 뜻하는 언약적 용어로 받아들여집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정의롭게 하는 수단, 즉 잘못을 바로잡는 수단으로 선택하신 ‘피스티스’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일까요? 참고로, 바울이 로마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에서 율법과 대조를 이루는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말하는 대목에서 뚜렷하게 등장하고 있는 이 피스티스 크리스투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를 두고 근래 수 십 년 동안 현대 신약학자들이 광범위한 논의를 해왔고, 때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길게 설명드릴 여유는 없지만, 바울서신에서 등장하는 피스티스 크리스투에 대한 번역으로 전통적인 입장인 ‘그리스도를 믿음’보다 ‘그리스도의 믿음’을 지지하는 쪽으로 점점 학자들이 합의에 도달하면서 갈라디아서 3장 22절도 갈라디아서 2:15-21절과 로마서 3:21-26과 빌립보소 3:2-11과 마찬가지로 언약적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이해되는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로 널리 해석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바울은 지금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삶과 죽음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 사람을 노예상태와 예속상태로 쥐고 있었던 불의한 세계가 이제 정의롭게 되었다고, 그 잘못이 바로잡혔다고 선고받는 것은 유대교적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메시아에 대한 인간의 어떤 지적 동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과 이 세계 앞에서 드러난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을 통해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 그분이 우리의 믿음의 주(主)가 되시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그의 신실함이 죄인인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이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듯이, “우리는 유대 율법을 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메시아의 신실함에 근거하여 정의롭게 되었다고 선고받을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는 어떤 피조물도 ‘정의롭다’는 선고를 받을 수 없습니다”(N. T. 라이트). 이처럼 바울은 갈라디아서 2:16에서 그리스도의 신실한 죽음이라는 하느님의 행동과 ‘율법의 행위들’이라 불리는 사람의 행동을 대립시키면서, 오직 전자만이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즉 우리를 둘러싼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정의롭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율법의 행위들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그리스도의 신실함과 대립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일까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제 3장 23절로 돌아오겠습니다. 3장 23절에서 바울은 앞서 22절에서 했던 말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데요. 그는 ‘이 믿음’이 계시되기 전까지, 또는 ‘그 신실함’이 도래하기 전까지 우리는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지속되고 있었던 율법의 시대에 우리가 갇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24절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율법은 그리스도가 도래할 때까지만 그 역할이 제한되어 있는 우리의 관리자, 보모, 감독 후견인, 개인교사, 몽학선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믿음, 그리스도의 신실함이 왔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그 제한하는 관리자의 지배하에 있지 않게 되었음은 물론입니다(25절).

사실 3장 25절까지만 보면 지금까지 바울이 이야기해온 율법/성경이 종교적 구원과 관련된 계율이나 도덕률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갈라디아서 2장 16절의 ‘율법의 행위들’(works of the law)이라는 표현 역시 같은 맥락에서 개인의 선행으로 하느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한 선한 공적들, 즉 선행으로 구원을 얻어 보려는 자기 의의 행위들(즉, 선한 행위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성서학계의 전통적인 견해였고, 지금도 교회 강단에서 그렇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통적 해석은 근래에 많은 학자들에 의해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갈라디아서 2:16의 그리스도의 신실함 대(對) 율법의 행위라는 대립구도의 문맥적 배경을 형성하는 예루살렘 회의 사건(2:1-10)과 안디옥 사건(2:11-14)에서 불거진 쟁점의 본질이 이방인의 할례와 유대인의 음식법(식탁교제)에 관한 것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바울이 2:16에서 말하는 ‘율법의 행위들’ 역시 직접적으로 할례와 음식법(식탁교제), 그리고 안식일법 같은 당시 유대인들의 몇 가지 특수한 관행을 가리키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들이란 하느님의 의롭게 하심을 얻기 위한 인간의 도덕적 행위도 아니며 율법조항들의 성실한 준수라는 일반적 행위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유대인을 이방인들과 구별해주는 정체성 표지(identity marker)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행위들을 준수하는 것은 의로움을 얻기 위한 도덕적 선행이나 종교적 구원을 얻기 위한 종교적 수행과 무관합니다. 대신에,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하느님에 의해 세워진 언약공동체 속에 계속 머물기 위해 누구나 율법에 복종하고 율법의 행위들을 준수해야 합니다. 율법은 보상의 수단을 제공할 뿐입니다. 곧 언약 관계의 유지가 그것입니다.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준수를 의(義; righteousness -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과의 언약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여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공유했던 신념체계에 따르자면, 적어도 아브라함 때부터 이미 언약의 백성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출생과 동시에 하느님과의 언약관계 안에 자동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남은 과제는 그 언약관계 속에 계속 ‘머무름’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할례와 음식법(식탁교제), 안식일법 같은 특정한 율법의 행위들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 분리하는 사회적 중요성과 기능을 갖고 있는 일종의 ‘정체성 표지’가 된 것입니다. 바울이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할례’와 ‘무할례’라는 말로 요약할 만큼 할례는 계약 백성의 근본적인 정체성 표지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안식일 준수는 언약의 백성의 정체성 및 그 소속에 대한 충성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표지였기 때문에, 안식일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습니다. 이처럼 할례, 음식법, 안식일로 특정되는 일종의 범례로서의 율법은 정하고 부정한 음식, 정하고 부정한 짐승들을 구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도 구별하는 데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내부에서까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정(淨)한 것과 부정한 것,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좋은 것과 혐오스러운 것을 구별 짓는 기준으로 율법의 행위들이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와 바울이 살았던 제2성전기 유대교 시대에 이르러서 율법의 행위들은 “이스라엘의 계약적 지위를 유지시킬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특권적 지위와 배타적 특권을 보호하는 것”으로, 즉 구원의 기득권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실함이라는 새로운 구원의 근거를 제시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정체성의 표지를 통해서 구원 또는 언약의 백성의 축복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있던 것에 반대한다는 함의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행위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해서 정의롭게 됨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차별과 배제와 혐오를 강화하는 배타적 정체성주의를 반대하는 다른 형태‧다른 논리의 ‘삶의 양식’(Modus Vivendi)을 제안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읽은 갈라디아서 3:26-28절에서 그 다른 삶의 양식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 메시아 안에서 하나 된 세계

갈라디아서 3장 2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율법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지를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암 계약 안에 있는 율법의 행위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것과 대조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3장 27절의 본문을 통해서 드러나듯이 바울은 여기서 갈라디아인들이 세례받을 때 ‘하느님의 아들들’이라 불렸던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 당신들이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모두가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너희는 마치 그가 너희의 옷인 것처럼 그리스도를 입었기 때문이다.” 메시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메시아를 옷입은 사람들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의 특성,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목적을 취하여 그분과 같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우리가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서 옷 입음의 은유는 매우 특별한 종류의 변화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컨대, 데살로니가전서 5:8-10, 고린도전서 15:53-54, 로마서 13:12절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과 사랑을 가슴막이로 하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쓴다”거나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할 때, 그는 언제나 이러한 옷 입음의 은유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묵시적 전쟁, 종말론적 투쟁, 시간의 종말을 향한 투쟁의 긴장 가운데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결론적으로 3장 28절에 이르러 바울은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종교적 정체성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님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이기 때문에,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고, 노예도 자유인도 없고 ‘남자와 여자’도 없는 그런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세계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갈라디아서 3:26-28절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세례의식에서 사용되던 일종의 신앙고백문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추정 하에 3장 28절의 이러한 완전한 평등과 통일의 선언은 그저 교회 안에서 성별과 계급과 인종의 차이를 넘어 신앙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협력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권면하는 ‘좋은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미 현실의 교회 안에서도 무수한 차별과 불평등과 위계와 지배가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해석은 말 그대로 기만적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선언은 그런 윤리적 권면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이야기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사건 또는 구원사건이란 하느님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노예상태 및 예속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를 정의롭게 하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정의롭게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를 둘러싼 억압과 지배를 깨뜨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그 세계를 정의롭게 바로잡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구원의 근거가 율법의 행위들로 상징되는 특정한 정체성 표지도 아니고, 더 나아가 인간의 편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믿음도 아니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모든 구원사건, 세계를 정의롭게 바로잡는 하느님의 행동은 인간의 어떠한 협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자면, 이 세계에는 더 이상 인간과 인간을 가르는 그 어떤 차별의 기준, 배제의 표지도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구별짓기에 기초한 대립관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는 우리의 삶을 규정짓는 새로운 삶의 양식과 가치에 비추어 본다면, 이 세계 안에서 인간과 인간을 나누는 것, 더 나아가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자연을 나누는 모든 것들이 무효화되었습니다. “이 대립쌍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바로 세계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다”(J. Louis Martyn). 앞서 말씀드렸듯이, 갈라디아서 3:22-24절에서 바울은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을 통한 약속이 오기 전까지,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저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율법은 정확히는 율법의 행위들을 가리키며, 이는 구원을 얻기 위한 도덕적 계율 같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정체성 표지라고 설명 드렸습니다. 그 예기인즉슨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해 정의로워진 세계는 율법의 행위들과 같은 정체성 표지에 의해 갈라지고 찢겨진 세계를 바로잡은 세계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수많은 정체성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계급, 젠더, 인종, 민족성, 섹슈얼리티, 성적 지향, 국적, 지위, 정치적, 종교적 입장 등에 따라서 정체성의 목록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들의 무한한 다양성과 얽혀 있는 수많은 차별과 배제, 혐오와 적대, 위계와 지배 역시 엄연히 현실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들을 무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가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엄연히 현실적으로 지니고 있는 각자의 다양한 정체성이나 개성들을 모조리 부정하고 획일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으로 모두가 환원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각자의 사회적 정체성들은 교회 올 때는 잠시 집에 놔두었다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만 가지고서 일시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그런 의미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잠시, 자기 자신을 정의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정체성들, 역할들, 지위들, 관계들의 명단을 작성한다고 가정해보지요. 이 명단을 얼마나 길게 늘이든 간에 언제나 거기에 더 추가되어야 할 무엇인가가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 느낌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내 주변에서 나를 부르는 많은 이름들, 내가 생각하기에 나를 정의해주는 많은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로도 나를 온전히 정의할 수 없다는 불길한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 언제나 나의 상징적 정체성, 역할 따위를 초과하는 것이 바로 나이며, 언제나 상징화/정체화/사회화에 저항하는 내 안의 어떤 딱딱한 이물질 같은 것이 계속 남아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간극, 이러한 불일치, 이러한 공백, 이러한 잉여가 바로 ‘나’ 아닐까요?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으로 상징되고 있는 사회적 정체성의 표지들이 결국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제 아무리 확고한 사회적 정체성의 표지들을 가진다고 해도 나는 그 어떤 것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존재의 진실’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정체성, 역할, 지위, 계급, 성별, 인종, 신분을 초과하는 그 이상의 무엇이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어 만물이 주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 불일치, 그 분열, 그 간극, 그 잉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도 헬라인도 … 노예도 자유인도 … ‘남자와 여자’도 …”, 그 어떤 사회적 정체성과 역할과 지위와 관계도, 나를 나로 온전히 정의 내려줄 수 없다는 율법의 진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비로소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그러나 동시에 진짜 ‘나’로 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나’로 우리들 모두가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 됨을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빈 터를 채울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발견을 우리는 ‘연대’(solidarity)라고 부릅니다. 연대는 정체성의 획일적인 통일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빈 터와 마주하게 하는 사건에 우리가 함께 참여함으로써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연대의 실현을 또한 그리스도사건/구원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끝으로 히틀러 암살 작전에 동참하였다 나치에 체포되어 수감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사형으로 순교하기 전에 남긴 시(詩)를 읽어드리는 것으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선 천박하게 우는소리 잘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으스스한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느님!

(Dietrich Bonhoffer, “나는 누구인가?”)

 

 

 

 

* 이 글은 2020년 2월 23일 천안살림교회 예배 설교문을 기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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