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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비평] 십계명,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모색(박규진)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20. 8. 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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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모색

박규진*

그 대중의 정체는 오클로스다. 그들은 마을에 속한 농민이 아니다. 마을의 질서를 통제하는 회당에서 배제된 이들이다. 회당을 지배하는 바리사이에게서 마을 밖으로 배제된 존재로 해석된 자들이다. 해서 예수가 회당 안에서 바리사이와 안식일 논쟁을 벌인 후 바리사이가 예수를 적대하기로 하자, 예수는 더 이상 회당 안에서 활동할 수 없었고 마을 외부의 공터인 ‘호숫가’에서 활동했다. 바로 그곳에는 오클로스가 있었다.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김진호, “운동의 신학”에서 “고통의 신학”으로

 

안병무가 마가복음을 해석하면서 지배체제 안에서 고난과 억압을 당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무리들이란 의미로 오클로스(헬라어- 무리)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그리고 서양의 신학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공간 이동의 첨부사항 정도로 생각했던 외부 공터로 대표되는 “호숫가”를 예수 활동의 중심지로 변모시킨다. 예수 역시 이곳에서 활동하고 이곳의 사람들에 의해 오히려 더 깊은 예수 이야기가 전승된다. 나아가 예수 역시 오클로스가 된다.

복음서의 하나님 나라는 결코 로마의 힘을 등에 업은 헤롯의 궁정이나 종교지도자들의 힘이 중심이 된 성전이나 회당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경의 이야기는 늘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탄생시킨다. 수리아와 베니게라는 시돈과 두로의 수로보니게 여인도 그렇고, 나인성의 과부도, 가나의 혼인잔치도, 벳세다의 오병이어도 갈릴리 호숫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펼쳐진다. 여기까지만 보면 오클로스를 찾아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클로스의 하나님만이 아니다. 힘 있는 자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늘 눌린 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자유를 찾는다. 우리나라의 근현대 역사가 그랬다. 대부분의 농민운동이나 노조운동, 민주화운동이 억눌린 자의 자유를 향한 외침이었다. 그리고 소위 운동권이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 오클로스의 이야기가 대변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오클로스 또한 거대한 힘이 되어 또 다른 오클로스를 만들고 말았다. 

결국 힘이 많고 적음을 오클로스의 판별기준으로 상정한다면, 오클로스를 찾아가고 위하는 이런 종류의 모든 운동은 스스로 자멸하는 귀결을 가지고 있기에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Verfallen(퇴락)을 막을 수가 없다. 지금 민중신학도 그러하다. 여전히 새로운 오클로스를 찾아내지 못하면 사멸할 것처럼 어딘가에 있을 약자들을 붙들려고 한다면 이미 이런 민중신학은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잡아야 하는 것은 오클로스가 아니라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약자는 없다. 아니 영원한 약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소외된 약자들을 앞세운 힘 있는 내지는 힘이 필요한 자들은 늘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소외된 약자들은 그 어떤 시대에도 동시대인들과 동등한 입장의 시민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피해자가 되고, 그 피해자들을 돌보는 힘들의 뒤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닐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노예들이었다. 전형적인 약자들이다. 모세가 처음 찾았던 대상은 오클로스였다. 그의 손에는 왕자라는 힘이 있었고 자신이 생각한 오클로스를 위해 힘을 사용했다. 그리고 동족인 노예들을 관리하는 애굽인을 쳐 죽인다. 그는 오클로스의 해방을 위해 살인자가 된다. 그런데 그 다음날 동족끼리의 싸움을 본다. 결국 그가 생각한 오클로스 안에서도 분열이 있고, 강자와 억울한 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더 약한 오클로스를 찾아 도와줄 것인가? 그러면 덜 약한 오클로스를 죽여야 하는가?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는 더 약한 오클로스를 찾은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오클로스로 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바꾸었다. 회당의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논쟁이라는 오클로스에 대한 접근을, 병든 자에게는 병 낫는 기적 행함으로, 억눌린 자에게는 자유의 공간을 가지고 나아갔다. 예수는 모든 오클로스에게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밝혀 가르쳐 주었다.

모세가 오클로스를 찾아 덜 약한 오클로스를 죽임에 반해, 예수는 모든 이를 오클로스로 보고 다가갔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시공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 양쪽의 오클로스 모두에게 죽임을 당했다. 결국 남은 것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와 그 세계에 대한 자신생명의 내어줌이다. 모세의 십계명도 마찬가지다. 그가 광야의 40년을 보내고 마지막 설교를 통해 홍해도하를 알지 못하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소외된 오클로스를 찾음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다.

모세는 그가 출애굽 3개월 만에 시내광야에 이르고 거기서 11개월을 지내며 십계명을 받는다. 그리고 출애굽기 20장에서 17절이라는 짧은 구절을 통해 10가지 계명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물론 부가되는 설명이 몇 장 더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가 광야의 40년 인생을 보낸 후에는 그가 이끌려고 했던 오클로스는 허상이었음을 철저하게 깨닫는다. 그래서 신명기의 마지막 설교에서는 12장부터 26장까지 길게 이 열 가지의 계명을 하나하나 풀어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십계명은 지켜야 하는 법칙에 관한 설명이 아니다.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벌을 받는 계약을 넘어서는 어떤 정신이 흐르고 있다. 그 정신은 바로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이야기다. 토지는 여호와의 것이다(레25:23). 그래서 그 토지에는 생명력이 있다. 만약 땅이 더렵혀지는 일이 생기면 땅이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 버린다(레18:24-25). 그래서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레18:28)는 경고의 말씀이 이어진다.

십계명은 그래서 법칙과 규율이 아니라 시공간에 대한 생각이요, 사상이다. 오클로스들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도 똑같은 생각으로 살면 그 곳은 더 이상 이상의 땅, 가나안이 아니다. 그러니 십계명은 들어가서 복받는 삶에 대한 안내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들어와도 지켜야 될 그 땅에 대한 존중이며, 그 땅을 만들고 모든 오클로스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禮)다. 

십계명의 특징은 10가지 계명 안에 약한 자와 강한 자를 나누어 이분법적으로 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대신계명과 대인계명으로 명확하게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우리가 흔히 하나님에 대한 계명으로 알고 있는 4계명까지의 결론도 모세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로 막을 내린다. 모세는 4계명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내용으로 전반부 계명의 설교를 마무리 하면서 신명기 16장에서 안식일과 절기, 정하신 곳에서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요 정신인데 온전하고 기쁘게 즉, 고민하지 말고 지켜야 하며, 그 방식이 빈손으로 나오지 말아야 함을 밝힌다.

이런 모습은 새 세상이 열리는 모습이다. 안식일로 대표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의 귀결은 서로 함께 나누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신16:14). 결국 모든 이를 먹이고 입히려는 하나님의 방식이 바로 안식일이라고 통칭되는 절기의 준수가 지향하고 있는 정신이다. 같이 나누어 잘 먹는 일, 그 일에 기쁘게 드리는 것, 이것이 절기 준수요, 이것이 예배다. 다같이 살아가는 정신이 나타나는 삶이다. 다같이 잘 사는 것이 예배라는 말이 너무 이상적인 구호라는 생각이 들면 이미 우리는 땅이 토해낼 정신으로 살고 있음이 확실하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인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역시 좋은 예가 된다. 마지막 계명을 설교하는 모세(로 대표되는 전승자들)는 네 이웃의 소유를 이렇게 정의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신26:2)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 가서 이렇게 얘기하도록 명령한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 왔나이다(신26:10).”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 두고 레위인과 객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상식이 아니다. 소유의 개념이 완전히 뒤집힌다. 기존 생각의 해체가 일어난다. 그래서 이런 구절을 우리들은 태생적으로 싫어하며 몇몇 사람들에게 그 숙제를 전가한다. 내가 열심히 일한 토지소산의 수확물에는 이미 다른 이들, 나를 포함한 모든 오클로스들을 위한 몫이 있다는 정신이다. 내가 열심히 벌어들인 것에 이미 그들의 몫이 있기에 하나님께 그것을 인정하고 가져 나가야 함이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이 정리하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열리는 정신이다. 

이런 정신은 시카고 신학대의 테드 제닝스가 데리다에 대해 내린 해석에서도 나타난다.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환대를 이야기하며 “해체는 정의”라고 했던 것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고 환대하는 정신은 부채를 넘어선 의무, 경제를 넘어선 선물, 그리고 법을 넘어선 정의로 나타나며, 이것은 「다른 방향」에서는 이타성이 인정받고 받아들여져야 함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환대는 해체의 이름과 예가 된다.” 예수 역시 그 당시 유대교를 해체했기에 세리와 친구가 그에게 들어올 수 있었고, 이물감있는 자들의 예배와 구원이 이루어졌다.

내가 이미 가진, 기득(旣得)의 지식이든 힘이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든 해체가 일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열림은 요원하다. 데리다가 「코스모폴리타니즘에 관하여」에서 “윤리는 환대이다. 윤리는 환대의 경험과 너무나 철저하게 공외연적(coextensive)”임을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십계명의 정신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시공간을 동일한 확장범위로 생각하여, 그 시공을 공유하려면[coextensive] 기존의 생각과 운동, 진리에 대한 철저한 해체가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새것이 들어올 수 없다. 그래서 십계명의 정신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된다. 이 시공간이 오히려 붙들어야 할 오클로스가 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지 않는다. 어떤 신학을 하며 외친다고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로 축소되는 이상지향의 윤리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열가지의 정신을 하나하나 톺아볼 수 있다면 이 정신은 예수의 말대로 영원한 나라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삶에는 연결점이 있다. 연속성이 있다. 그런데 그 연속성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정신이 만드는 시간과 공간은 지금도 영원하다. 단 하나 내가 그 영원을 선택하고 살아가는가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 선택이 구원이다. 지금도 누군가는 이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다.

*필자소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사람 안에 장막을 세우신 하나님께 관심이 많은 목회자. 서울 충무교회를 섬기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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