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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차별금지법을 許(허)하라!(이상철)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20. 10. 2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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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을 許(허)하라! *

이상철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3:16)

Intro

저는 요즘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을 지지하는 이런저런 모임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모임은 많지만 차별금지법을 지지하는 개신교 모임은 극히 미비합니다. 친분이 있는 비교적 진보성향의 한신 이외 신학교 교수들, 다른 교단 목사님들에게 차별금지법 지지를 위한 모임 참석, 내지 발언을 부탁드리면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난처하다. 교단과 학교의 입장을 거역할 수 없어서...고민하고(협의하고) 답장을 주겠다, 라는 말을 남기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이게 무슨 독립운동 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전복시키는 혁명을 하자는 것도 아닌데, 그냥 각자 생긴 대로 태어난 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인데, 그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고, 신앙적 결단까지 해야 되는 일인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 지금 발생하고 있습니다. 

1.

한국교회 메이저 교단이라 할 수 있는 예장 통합, 예장 합동, 감리교단은 차별금지법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을 공식화 했습니다. 이 세 교단을 합치면 한국개신교의 거의 2/3이고, 여기에 순복음, 성결교단, 침례교단까지 더해지면 수치상으로는 거의 모든 개신교교단이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한국 개신교인들 대부분이 반대하는가, 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많습니다. 반대목소리가 너무나 과대 대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이런저런 인식조사를 통해 감지 할 수 있습니다.  

    지난 6월 23일 국가인권위원회가 공개한 국민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이번 설문조사는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인권위의 의뢰를 받아 지난 4월 22~27일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 신뢰 수준 95%, 표본오차 ±3.1%포인트), 응답자의 88.5%는 한국 사회 차별에 대응하기 위해 차별 금지를 법률로 제정하는 방안에 찬성한다고 답했습니다. 지난해 3월 인권위가 실시한 ‘혐오차별 국민인식조사’에서 같은 질문을 했을 때, 응답자의 72.9%가 찬성 의견을 밝혔던 것에 비해 1년 후 찬성 비중이 15.6%포인트 높아졌다는 것은, 2019년 극우기독교의 태극기 집회, 4.15총선, 코로나 19등의 사회적 변화를 거치면서 혐오와 차별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에서 공격하는 ‘성적 지향∙정체성’ 항목과 관련해서도 응답자의 73.6%가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과 같은 성소수자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이런 데이터가 정의당을 비롯한 정치권을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개신교 진영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지점이 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코로나 19사태가 차별과 혐오에 대한 공감대를 넓힌 것으로 나왔습니다. 69.3%의 응답자가 ‘코로나19 국면에서 차별‧혐오가 일어났다’고 답했고, 차별‧혐오 대상이 된 집단을 묻자 종교인(48.3%), 외국인‧이주민(14.4%), 특정 지역 출신(13.6%) 순으로 응답이 나왔습니다. 또한 코로나19 국면에서 ‘누군가를 혐오하는 시선 및 행위가 결국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생각을 해봤다고 응답한 비중은 91.1%에 달했습니다. 즉, 언제든지 내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필요성이 급부상했다는 가설이 가능합니다. 

2.

그럼 좀더 구체적으로 개신교인들은 차별금지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올 초에 대한기독교서회에서 <개신교인인식조사통계자료집>이 기독교사상 2020년 1월호 별책으로 나왔습니다. 인식조사 항목에 젠더에 대한 물음 중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자가 많아진다’는 주장에 개신교인은 동의 39%, 비동의 37.1%로 동의율이 약간 더 높았고, 비개신교인은 동의 22.3%, 비동의 46.8%로 비동의율이 두 배 이상 높았습니다. 

  <표1>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자가 많아진다는 주장에 대한 의견

 ‘동성애는 죄’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개신교인은 58.4%로 비개신교인(25%)보다 두 배 이상 많아, 두 집단 사이 큰 인식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개신교인 23%가 ‘동의하지 않는다’, 18.7%가 ‘잘 모르겠다’에 표시를 한 것을 보면 개신교인 10명 중 4명은 ‘동성애가 죄’라는 주장에 부정 내지 의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향은 이전 통계와 비교할 때 점점 세지고 빨라지고 있습니다.  

<표2> 동성애가 죄라는 주장에 대한 의견

3.

제가 유의미하게 보는 항목은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을 물었던 질문입니다.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개신교인과 비개신교인 모두 ‘사회 보편의 인식’을 가장 많이 꼽았습니다. (개신교인 59.7%, 비개신교인 70.0%), 그 다음으로 개신교인은 ‘종교의 경전(가르침)’(43.2%)을, 비개신교인은 ‘개인적 학습 및 탐구’(35.1%)를 꼽았습니다. 개신교인들이 사회. 문화적으로 일고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개방된 인식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뚜렷하게 나타났고, 성서에 적혀있는 동성애 관련 내용보다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상식이 개신교들에게 영향을 더 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계들이 보수극우 개신교인들과 목사님들이 위기감을 느끼는 이유가 됩니다.  

      <표3>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

지인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했을 때 관계의 변화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친하고 잘 알고 있던 친구가 갑자기 성소수자임을 나에게 고백한다면? (Pause) 개신교인은 47.4%가 ‘변화할 것이다’라고 대답했고, 38.0%가 ‘변화 없을 것이다’라고 응답했습니다. 변화할 것의 응답이 개신교인들 사이에서는 10% 가까이 높았던 반면, 비개신교인은 ‘변화할 것이다’ 37.9%, ‘변화 없을 것이다’ 46.3%로 변화 없을 것으로 응답한 비율이 개신교와는 반대로 10% 높았습니다. 개신교인 중 변화할 것이라 응답한 비율은 여성보다는 남성이, 연령이 높을수록, 교회직분이 높을수록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표4> 지인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했을때의 관계의 변화   

4. 

제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왔던 인식조사 결과는 다음사항입니다. 예수님이 동성애자를 어떻게 대하실지 물은 결과, 개신교인은 ‘그의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한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38.4% 가장 높았고, ‘그를 이성애자로 변화시키고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한다’와 ‘그에게 죄에 대한 회개를 요구한다’가 각각 27.0%, 26.2%로 비슷했습니다. 반면, 비개신교인은 ‘그의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한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63.7%로 압도적이었습니다. 개신교, 비개신교를 가리고 통계만 보았을때는 당연히 사랑과 화해와 용서의 종교인 개신교가 63.7%로 ‘인정한다’를 찍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 결과를 통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비개신교인들이 예수라면 ‘그의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는 비개신교인들이 생각하는 예수의 이미지, 더 나아가 종교의 이미지가 반영된 결과이고, 비록 현실의 기독교는 그렇치 않지만 비개신교인들이 갖고 있는 상상속의 기독교는 혐오와 배척과 폭력보다는 환대와 용서와 사랑의 종교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 기뻤습니다. 개신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믿지 않는 것이고, 비개신교인들은 예수를 모른다고 하지만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부메랑이 되어 현실의 개신교에게 돌아가 제2의 종교개혁을 가능하게하고 요구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표5> 예수님은 동성애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

제가 성소수자관련만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해서 차별금지법이 성소수자만을 보호하는 법이다, 라고 오해를 할 수 있는데, 차별금지법에는 꽤 넓은 차별의 범위(항목)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연령, 장애, 병력, 피부색, 용모 등 신체조건, 인종,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출신지역 등 출생지, 기혼. 미혼, 별거, 이혼, 사별, 재혼, 사실혼 등 혼인상태,

출산형태 및 가족형태, 종교, 정치적 견해, 전과. 성적평등.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 고용형태 등 사회적 신분, 그 밖의 사유로 차별하는 행위”(제4조 차별의 범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항목들은 배제와 혐오의 이유들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작동되고 있는 현실의 원칙입니다. 누구든지 위의 이유를 다른 사람을 차별할 수 있고, 누구든지 위의 이유로 차별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차별금지법은 우리 모두를 위한 기본법이 아닐까 합니다. 

5.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을 썼던 사람들, 그리고 요한복음이 회람되면서 읽었던 요한공동체 사람들은 이러한 배제와 혐오의 사회속에서 차별금지법을 염원했던 대표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여러 번 요한공동체에 대한 상황에 대해 ‘하늘 뜻 나누기’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는 유대전쟁 이후 몰아닥친 로마의 공포정치 후 몰아닥친 유대교의 권력이동,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초기그리스도교의 변화 속에서 그 어디에도 끼지 못했던 방외자들었고, 요한복음의 작가와 수신자들은 그런 아픔과 시련에 직면했던 사람들입니다. 

    우선 유대교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전쟁 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고 성전중심의 유대교(사두개파 중심)가 종말을 고합니다. 그 후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유대교의 헤게모니가 재편되죠. 파괴된 성전이데올로기를 대체할 율법우선주의가 새로운 유대교의 이데올로기로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신흥 지배층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바리새파입니다. 유대교의 신테크노그라트가 형성되었고, 그들이 주도하는 강력한 원심력으로 유대교가 빠르게 재편됩니다. 

   이러한 유대교의 체계화과정, 조직 정비 과정의 정점이 제1성서 39권을 정경화하는 것이었습니다. AD 90년 율법학교가 있었던 얌니아에서 제1성서 39권이 정경으로 선포됩니다.  또한, 18개조 기도문을 만들어 유대공동체의 신앙을 표준화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문의 제12조에 이단자를 색출하여 단죄하는 내용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예수를 추종하던 회당 내 사람들인 ‘나사렛 도당에 대한 저주’가 실려 있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요한공동체는 유대교의 배제시스템에 의해 제거 당해 회당공동체에서 쫓겨난, 즉 유대사회에서 기표를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주민등록번호가 말소된 사람들, 타국에 입국하는데 여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요한공동체가 직면했던 첫 번째 딜레마가 유대 사회 내 배제와 차별,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들은 그리스도교 내에서도 이방인이고 외부인이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카톨릭화(공교회화)와 연관됩니다.  

6. 

초기 그리스도교의 카톨릭시즘은 주류 기독교, 사도계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은 새롭게 조성되는 유대교 시스템을 모방하면서 유대교와 체제를 경쟁합니다. 요한공동체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교권화 경향에 심각한 문제제기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회당의 방식을 모방하면서 무엇인가 개념화하고 규정짓고 법제화하는 과정에서 나사렛 예수의 역동성이 훼손되고 비역사화 되면서, 일상이 아닌 교리속으로 갇히는 예수가 되고 있는 것 아닌가? 라는 문제제기를 한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읽다보면 요한공동체가 반사도적 집단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선 다른 복음서들에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열두 제자들의 명단이 나오지 않으며, 열두 제자를 부르는 사건, 그들을 선교활동으로 파송하는 사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요한복음서에서는 열두제자, 또는 열둘이라는 말보다는 그냥 “제자들”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또한 요한복음서에서는 베드로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는 베드로가 처음 제자, 또는 수제자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가 한 것으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 고백도 요한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으며,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달리 큰 축복을 받고 천국의 열쇠까지 얻는다는 언급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요한공동체가 베드로와 야고보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적인 그리스도교 집단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고, 그로 인한 갈등이 이었으리라는 것을 가늠하게 합니다.   

7.

오늘 본문은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 나오는 대사입니다. 예수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니고네모에게 하였고,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한 후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말씀을 남깁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새롭게 급속하게 재건되기 시작한 유대교, 그와 함께 보조를 맞추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제도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믿음의 시스템 하에서 이루어지는 신앙방식에 대한 적대의 선언이고, 성령의 바람은 그런 시스템에 갇히지 않고 불고 싶은 대로 불어가는 자유로운 영을 상징한다고 저는 해석합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 요한복음 3:16이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저는 공동번역의 해당 구절이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공동번역) 

    제가 외우고 있는 성경구절이 거의 없는데 유일하게 자신 있게 외운다고 하는 성경구절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어렸을 때 주일 학교 시절 이 노래를 배우죠.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 그때는 몰랐는데 어제 밤에 원고를 쓰면서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참 은혜가 되더라구요. 특별히 울컥했던 대목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세상(the World)을 사랑했다는 구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독교인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성애자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백인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미국이나 유럽 사람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이 남자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집이 있고 나라가 있는, 즉 어디에 소속된 사람들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이 부자와 권력이 있는 사람, 그리고 건강한 사람만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냥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다, 이 당연한 말이 이렇게까지 가슴이 뛰고, 사무치게 고맙고 감사한 일이어야 합니까.  

    차별금지법 제정을 둘러싼 논의과정에서 사람에 대한 실망에 빠져있던 제게 오늘 본문은 큰 은혜로 다가왔고 저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는, 제가 이정도인데, 요한복음의 이 구절을 썼던 사람들, 이 구절을 접하면서 용기를 얻었던 사람들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다른 하나는, 이것이 성서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오늘의 성서구절은 2천년이 흐른 한국 땅에서 온갖 이유로 차별과 배제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찾아와 설움과 시름에 지친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연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또 다시 말합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십시오. 주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에필로그

돌이켜보니 저의 믿음이 성장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에 시선이 머물렀다면, 이제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제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했다는 말과 하느님이 누구든지 구원하신다는 그 말에 눈길이 꽂힙니다. 세상의 누구든지 하나도 예외 없이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 아닐까요. 아니 그 자체가 영생을 누리고 사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차별금지법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첫 발자국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주님의 역사가 이곳에 임하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오늘 하늘 뜻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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