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신학정보] 神학, 시대와 通하라! - ‘데리다로 신학하기’를 위한 서론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0. 5. 13. 20:43

본문


, 시대와 하라!
: 데리다로 신학하기를 위한 서론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시카고 통신: 여기는 시카고…


시카고는 전미 최대의 신학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며 단일지역으로는 가장 많은 신학생들이 배출되는 고장이다. 시카고 지역의 가장 큰 신학적 특색은 초교파적으로 구성된 11개의 신학교가 연합체(ACTS: The Association Of Chicago Theological Schools)[각주:1]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ACTS에 속한 신학교의 모든 학생들은 어느 학교에서든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노스웨스턴대학, 로욜라대학, 드폴대학, 위튼대학, 시카고대학 등에 있는 종교학, 철학과와도 연관을 맺어 필요에 따라 언제든 수강이 가능하다.[각주:2]

ACTS에 소속된 학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Mainline진영(진보적)의 학교와 Evangelical 진영(보수적)의 학교, 그리고 천주교 학교에 이르기까지 신학적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ACTS에 소속된 전임 교수는 400여명, 학생은 3천 여명, 1년에 개설되는 강의는 총1000여 강좌에 육박한다. ACTS는 또한, 11개의 멤버 학교 외에 Zygon Center (Religion & Science), LGBT Center (Queer theology), Christian-Muslim Studies, Christian-Judaism Studies, Center for Study of Black theology, Center for Study of Korean Christianity 등 신학과 각 분야 연구를 위한 10여 개가 넘는 센터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연구소들을 중심으로 쟝르와 주제를 넘나드는 신학적 대화와 공방이 일년 내내 현기증 날 정도로 펼쳐지고 있다. (갑자기 제가 시카고를 홍보하는 약장사가 된 느낌이네요)

그러나 이토록 풍부한 신학적 토양에도 불구하고 시카고 한인교회의 현실은 너무나도 척박하다. 대부분 70년대 말 80년대 초 중반에 이민 온 세대가 시카고 한인교회들의 주된 회중들이다. 본토보다 더 강한 반공의식, 더 철저한 가부장제도를 바탕으로 교회가 운영되고, 그러한 (한국) 전통의 고수가 한인교회의 identity가 되어버렸다. 70~80년대 한국교회의 정서가 그립다면 시카고 교회에 한 번 방문해 보기를...

특별히 요 근래 시카고를 대표하는 몇몇 대형(?) 교회들이 (30년 가까이 시카고 이민 1세대를 목양했던) 1대 목회자들의 은퇴 후, 2대 목회자로의 transition과정에서 혹독한 교회분쟁에 휘말려 있는데, 이 과정에서 시카고 한인이민교회의 고질적 문제들이 불어져 올라오고 있다. 필자도 그 교회 중 한곳에서 유학생 사역을 하고 있는데, 교회분쟁 과정에서 30년 이민 생활을 함께했던 교우와 친지들끼리 순식간에 편이 갈려 서로를 비방하고 저주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이러한 시카고 한인 교계의 현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도모하는 기획 (인터뷰)기사를 시카고에 있는 한 기독언론사에서 시리즈로 연재하고 있다. 첫 회가 시카고 보수적 진영의 신학교를 대표하는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목사의 인터뷰였고, 두 번째 차례로 시카고 진보신학교에 속한 인물 중에 어쩌다 필자가 선정되었다. 인터뷰의 내용은 최근 진보 진영 기독교 윤리학의 동향과 시카고 한인 교회를 위한 기독교 윤리적 대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기자가 질문을 하면 이에 답하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인터뷰 기사 밑에 달린 보수진영 사람들의 댓글에서 발생하였다.[각주:3](아래에 댓글 일부를 소개한다.)

케리그마님: 목사님 말씀 중에 신의 다차원적인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동의 할 수가 없군요
흠흠 님:  이상철 목사님은 동성애, 이슬람의 테러에 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유일신자님: 타자의 윤리에 포커싱하다 보면 윤리적 기준이 상실된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말씀으로 바로 알고 경험으로 바로 믿자는 것이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는데 혹시 이 의견에 코멘트가 있으신가요?

 
난 지금 이 댓글들에 댓글하기 위하여 30분이 넘게 노트북 앞에 앉아있다.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의 퇴행적 보수주의와 현실 세계에서 진행되는 자본과 테크놀로지의 결합,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탈경계/해체적 사유들이 서로 다른 포물선을 그리는 이 분열된 21세기 사회속에서 신학은/교회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 글이 끝날 무렵 난 위에 있는 저 괴물같은 질문들에 대해 답을 달수 있을까?

혜자, 장자에게 길을 묻다.

지난 ‘웹진 22호’에서 ‘동양적 전통에서 기술이 어떻게 도의 경지로까지 상승하는가?’를 설명하면서, <장자> ‘양생주’에 등장하는 포정이 소를 잡는 이야기를 소개한바 있다. 이번 호에서는 <장자>의 첫번째 장인 ‘소요유’에 나오는, 대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혜자와 장자의 대화를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하였다.
"나 있는 곳에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개똥나무라 부르오, 그 줄기는 흙투성이어서 먹줄을 칠 수가 없고, 그 작은 가지들은 뒤틀려 있어서 자를 댈 수도 없소.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소."

 장자가 말하였다.
 "지금 당신은 큰 나무를 가지고 그것이 쓸데가 없다고 근심하고 있소. 어째서 그 곁을 왔다 갔다 하거나 그 아래 노닐다가 드러누워 낮잠을 자지 않소? 쓸데가 없다고 하여 어찌 마음의 괴로움이 된단 말이오?

혜자는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위나라의 재상까지 올랐던 실용주의 정치가였다. 그가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도대체 쓸모가 없다고 푸념하면서, 은근히 장자의 사유가 지닌 비현실성과 허황됨을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장자는 ‘그 나무 아래서 노닐다가 드러누워 낮잠을 자라’는 말로 응수한다. 장자 특유의 무위자연에 입각한 현실논리를 비트는 답변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장자의 대답은 현실주의자인 혜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절대 수긍이 가는 답이 아니다.

혜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장자가 말하는 가치란 세상 안에서, 현실세계에서 운영되는 원리가 아닌, 세상 밖의 질서이다. 무한질주와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느림을 이야기하고 탈속적인 이상을 언급하는 장자의 괴변에 혜자는 아마도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것은 장자도 마찬가지다. 왜 그렇게 스스로를 현실원칙에 매여 학대하느냐고, 왜 그렇게 갑갑하게 세상 속에 갇혀있냐고 하면서 혜자를 이해 못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장자와 혜자는 서로 다른 대척점에 서있다. 장자에 의하면 혜자는 세상 안으로만 수렴되는 존재이고, 혜자에게 장자는 세상 밖으로만 발산되는 존재다. 혜자는 세상 안에 갇혀있다는 측면에서, 장자 역시 세상 밖에 갇혀있다는 측면에서 둘은 내용은 다르지만, 동일한 방식으로 운동을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를 닮았다. 

둘의 대립은 기독교적으로는 초월과 내재의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철학적으로는 주관과 객관/ 내용과 형식이 어떻게 화해될 수 있는가에 대한 오랜 물음이기도 하다. 둘의 갈등은 또한 무속의 견지에서 보면 시간과 공간이 지니는 한계를 초월하지 못하는 육체와 이제는 육체를 벗어난 혼이 더 이상 육체에 스며들지 못해 구천을 떠돌며 육체와 대립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애초부터 소통보다는 불통이, 통일보다는 차이가 삶을 지배하였던 운영원리 아니었나싶다. 그렇다면 신학은 이런 불통과 차이에 대해 어떤 답변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시대에 답했던 신학의 대응들

20세기 신학자들이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How to explain what happen to you?’, 즉 ‘신학적 대상(what)’과 ‘신학적 방법(How)’에 대한 문제였다. 지난 20세기는 실로 야만과 광기, 그것에 맞서는 투쟁과 싸움이 신학적 긴장의 원천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근대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반기를 들었던 신정통주의신학, 20세기 초반 발생한 미국의 경제공항은 자본주의의 패단에 대한 신학적 문제제기를 일으켜 Social Gospel운동으로 이어졌다. 2차 대전은 신학적으로 많은 물음과 고민을 던져주었던 사건이었다. 서구신학은 아우슈비츠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은 악에 대한 문제, 인간의 고난에 대한 문제, 그리고 신에 대한 물음에 있어 전면적인 도전과 이에 걸맞는 새로운 답변을 신학자들에게 요구하였다.

2차 대전 이후 지속된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정치신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기독교와 맑시즘과의 대화를 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인간해방과 자유, 사회정의를 위한 포괄적 물음으로 번져나갔다. 이는 구체적 context에 기반한 신학적 답변을 낳았는데, 흑인신학, 여성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등 소위 ‘눌린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서로 다른 경험들이 소중히 발굴되어 진지하게 이야기되기에 이른다. 20세기 말 불어 닥친 냉전의 종식과 신자유주의로 요약되는 자본의 전 지구적 승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본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이에 대한 신학적 응전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남겼다. 이상에서 잠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난 세기는 사태와 진상에 대한 분명한 이슈와 선명한 대책을 요구하는 신학적 글쓰기를 요구했고, 이런 까닭에 당대의 문제의식들에 대해 (어느 입장에 서있든) 신학적으로 ‘무엇을(what)’ 과 ‘어떻게(how)’를 밝히는 것이 급선무였던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 세기는 그 어디에도 신학이 가야 할 바가 전시대처럼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21세기 (자본과 결합한)테크노피아 세계속에서 우리의 치열했던 신학은 점점 생기와 긴장을 잃어가고 있고, 테크노피아에 길들여져 그 안에서 기쁨을 얻는 ‘행복의 신학’ 만이 만개하고 있다. 그 결과 본래 신학이 붙들고 있었던 시대와의 대립과 긴장은 시대착오적 발상이 되어버렸고, 이러한 정황 속에서 신학하는 우리는 다시 신학함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형국이다. 

신학, 다시 답하라!

앞서 언급했던 시카고의 여러 연구기관 중 Religion & Science분야를 다루는Zagon Center가 있다. 매 학기 월요일 저녁Zagon에서 주관하는 세미나가 열린다. 2006년 봄학기 때 ‘Religion & Ethics’이란 과목이 개설되었는데,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과학자(혹은 종교학자)들이 펼치는 종교무용론을 다루면서, 이러한 주장들을 오히려21세기 새롭게 등장한 ‘종교현상’이라 결론지으며 다음과 같은 과제를 남겼다: 과학과 종교의 활발한 통섭으로 인한 존재와 기원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통찰, 전 지구적으로 전개되는 자본의 일방적 전횡과 그로 인한 (이념적, 지역적, 문화적) 장벽의 제거는 21세기 삶의 지형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변화된 종교상황 속에서 지금 시대 신학적 methodology의 문제는 ‘what’과 ‘how’ 가 아니라, ‘왜 (why)’의 문제, 즉 (21세기형) 신학함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교회 문을 열고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신앙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였고, 신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계속 그 물음을 갖고 씨름하였는데, 그래서 어느 정도 나름의 대답들이 확립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왠 새삼 정체성 타령인가? 라고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이는 신학자와 목회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왜 선포하는가?/쓰는가?’의 문제이고, 신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왜 읽는가?/듣는가?’이며, 일반인(크리스챤이 아닌)들에게 있어서는 ‘왜, 한국의 기독교가 개독교인가? / 그것은 정확한가?’ 의 문제이다. 총체적으로 ‘왜 우리는 신학하는가? 왜 우리가 신앙인인가?’에 대한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최첨단의 테크놀로지와 합리성이 만개하는 시절에 이런 질문은 너무 나이브하고 신비적이지 않느냐?’고 반문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암흑의 시대였던 중세에나 가능했던 질문이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합리와 효용과 속도가 강조되는 시대에 왠 종교적 신비? 하지만 너무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종교적 신비에 대한 일반인들의 호기심은 시대와 문명이 발전하고 진보할수록 퇴색하는 것이 아니라 더 확고하게 그 가치가 빛을 발하고 있다.

신학, 데리다를 초대하다

이 대목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은 신비주의를 전시대와 같은 현실로부터의 이월(도피) 내지 영적 황홀경에 대한 동경으로만 몰아가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 말하는 신비주의란 저 피안의 세계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의 가치는 신학적 도그마와 신앙고백적 환상이 무엇이고, 그것이 과연 실재하는가에 대한 몰두가 아니라, 어떤 ‘메시아적인 것 a messianicity’[각주:4]이 나를 떠다니게 하고, 나를 한곳에 정주하지 않게 하며, 나를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런 ‘메시아적인 것’에 휩싸인 우리는, 체제가 완성한 메트릭스(예: 신자유주의, 일방적 성공만을 추구하는 영광의 신학, 뉴타운, 빨갱이….등)를 향해 침 한번 “찍!” 뱉으며 딴지를 거는 우리이고, 혹은 그(것)들을 상대로 너무 격렬하지 않게 “놀고들 있네!” 혹은 “지랄하고 자빠졌네!!”라고 읊조리면서 살짝 비열하게 비웃어 주는 우리이며, 또는 절정을 구가하는 무소불위한 현 자본주의체제에 흠집을 내기 위한 위험하고 불온한 상상을 하고, 그것을 스멀스멀 감행하고 도발하는 우리이다. (데리다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유령처럼 말이다. 이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지금까지 필자가 독해한) ‘a messianicity without messianism’[각주:5] 속에 숨겨진 음모이고, 그 음흉한 속삭임이 지금 우리를 유혹한다.

ⓒ 웹진 <제3시대>


 

  1. 아래주소를 클릭하면 ACTS 홈페이지로 연결됩니다. http://www.actschicago.org/ [본문으로]
  2. 특별히, 데리다와 레비나스에 관한 미국내 권위자들이 시카고에 몰려있다. How to read Derrida로 유명한 도이처 교수(노스웨스턴 철학과), 미국내에서 데리다의 후기 저작들을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는 마이클 나스 (드폴대 철학과), 최고의 레비나스 권위자라 평가받는 페이퍼 젝(로욜라대 철학과), 그리고 미국내 인문학도들 사이에서 여신처럼 추앙받는 사회철학의 대가 누스바움(시카고대)까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학자들이 시카고 시내에서 30분내 거리에 몰려있다. [본문으로]
  3. 기사에 대한 내용은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chi.christianitydaily.com/view.htm?id=184373&code=pd [본문으로]
  4. 시카고 신학교의 Ted Jennings 교수는 2005년 출판된 그의 저서 Reading Derrida/Thinking Pual (CA: Standford Univ, 2005))에서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적인 것’을 전횡적 합리주의에 대한 의식적 ‘딴지 걸기’ 내지는 ‘무화 하기’로 읽어낸다; “데리다는 법의 테두리를 넘어선 정의와 경제적 원칙을 넘어선 선물, 그리고 환대와 호의에 대한 그의 해석에 있어 메시아주의가 아닌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해석의 중요성을 언급한다.”(163) 이에 대해 좀 더 상상하자면, 이는 현실 논리에 대한 장자식 대응과도 관련이 있다. 개똥나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장자와 혜자의 인식, 즉 합리주의를 대변하는 혜자는 개똥나무의 무용론을 주장하지만, 오히려 장자는 개똥나무가 제공하는 그늘에서 낮잠 자는 것을 유토피아(메시아적인것)라 받아치면서 자본의 현실적 실용 논리를 무너뜨린다. 이 대목에서 장자적 사유와 데리다의 해체가 만나는 접점을 가늠해 볼 수있는데, 김형효 선생의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1999, 청계출판사)이 이에 대한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다. [본문으로]
  5. 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Edited by anidjar (NY: Routledge,2002), 56 : 데리다의 전기사상이 언어적 전회를 통한 서구형이상학 전반에 대한 다시보기(해체)를 시도한다면, 후기 데리다는 이를 바탕으로 각론으로 들어가 종교적, 사회적, 윤리적 이슈들에 대한 적용을 감행한다. ‘a messianicity without messianism’은 데리다 후기철학을 대변하는 구절이다.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에 대한 오해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신학적/윤리적 함의를 말하는 것은 녹녹치 않은 작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데리다는 오랜 세월을 돌아 그의 생의 마지막 얼마를‘메시아적인 것’이 어느 때 도래하는가? 그리고 ‘메시아적인 (것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신학적 물음앞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바울을 다시 독해하고, 죽은 맔스를 다시 되살리며, 레비나스와도 화해를 하게 되는데… 이상은 필자의 논문 주제이기도 하다. (아직은 배움이 짧아 변변하게 말할 것이 없지만, 차차 공부가 되어지는 것을 보며 이 공간을 통해 성과와 미흡한 부분들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