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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생기 없는 바다 (김진호)

시평

by 제3시대 2010. 5. 13.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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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 없는 바다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주님께서 그들을 벌하시어 멸망시키시고, 그들을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게 하셨으니, 죽은 그들은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사망한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서」 26장 14절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제국 이후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사회를 엮는 가장 중요한 고리는 ‘폴리스’였습니다. 이 고대 제국 시대의 폴리스들은 대체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왕성한 국제교역을 매개로 서로 연동되어 있었습니다. 배는 육로를 통한 운송보다 수십 배나의 운임비를 절감할 수 있었고, 또 비교적 안전하며 또한 대량수송을 가능하게 했지요. 하지만 그만큼 배를 소유하고 운용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합니다. 해서 지중해를 오가는 국제무역의 시대는 부자들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를 활짝 연 것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었습니다.

이제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는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였고, 바다를 이용할 줄 아는 이는 성공을 얻는 신의 축복을 받은 자였으며, 바다는 온갖 생기의 원천이었습니다. 오늘의 언어로 말하면 그 시대의 세계화는 ‘바다화’였고, 그것은 도시들의 폴리스화를 통해 구체화되는 것, 바로 그런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제국과 더불어.
 
제국 내의 여러 식민국가들도 이런 바다화, 폴리스화의 대열에 앞 다투어 나서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유대의 경우, 내륙 한 가운데 있고 고지대에 입지한 도시 예루살렘까지도 폴리스화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세계화라는 게 대개 그렇듯이, 폴리스화란 폴리스간 국제무역을 위해 사회적 제도들이 재구성되는 과정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그것 이상입니다. 폴리스간의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정향된 각종 교육, 스포츠, 패션 등이 활성화되며, 국제어인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어법들이 유행처럼 번져나갔고, 그리스풍의 외래어들이 범람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시대의 대세처럼 보였습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일부 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배층들은 이런 바다화-폴리스화의 대열에 열렬한 추종자였습니다.

알 수 없는 사고로 침몰한 천안함 병사들 46인의 장례식이 지난 4월 29일에 치러졌습니다. 전국에 분향소가 39개나 설치되었고, 군부대 내에도 220개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날은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되었으며, 전국 관공서에는 조기가 계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전 10시에 1분간 사이렌 소리에 맞춰 추모묵념시간이 있었고, 공중파 방송은 장례식을 생중계했으며, 공영방송은 추모모금방송을 편성하기까지 했습니다. 원인 불명의 사고로 죽은 군인들에게, 그것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와 같은 대단한 국가적 애도가 시행된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사망한 병사들은 ‘전사자’가 되었고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북한은 사실상 무력도발의 가해자로 규정된 것입니다. 하여 통일부장관은 타국외교관에게 대북관계를 재고하라는 내정간섭까지 서슴치 않습니다. 당분간 대북 지원 및 교류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되었고, 응징의 방법을 둘러싼 논의가 공론의 장을 주도합니다. 그리고 외국 언론들은 한국만의 이 뜬금없는 신냉전주의적 행보에 의아해 합니다.

그 수몰된 병사들이 아직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군이 공식으로 발표하고 대통령은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실상 정부는 구조에 그다지 힘을 쓰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은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실상 죽음으로 방치되었는데, 죽음이 확인된 이후 느닷없이 ‘열렬한 기억’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국가는 그네들의 생명을 기억하고자 하지 않았지만, 죽음은 열렬히 기억하고자 합니다. 국가는 살해 방조자였지만, 그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전 국민의 가슴 속에 부활하게 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국민이자 군인인 이들의 생명은 국가가 지켜야 할 공적인 생명이 아니었는데, 그 죽음은 ‘공적인 죽음’이 된 것입니다.

그런 이상한 결정의 주역인 청와대 지하벙커 모임은 부랴부랴 안보관련 위기관리센터로 급조되었습니다. 이는 지난 정권 때 존속했던 기관을 폐쇄했다가 다시 재건한 셈이지요. 하지만 이 급조된 기관이 하는 일이 바로 ‘죽음의 국가화’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정부가 진정 관심을 기울인 것은 대북정책이라기보다는 경제관련 위기관리 정책에 있었습니다. 큰 틀에서 얘기하면 이 정부가 치중한 것은 세계화 경제정책이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구체적인 전략은 ‘전 국토에 대한 토건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대북문제는 이러다 할 기조 없이, 지난 참여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데 몰두하는 듯이 보였을 뿐입니다.

이런 생각의 편향에 사로잡힌 이들이 사건 직후 청와대 지하벙커에 모여 긴급한 대책을 숙의했습니다. 부랴부랴 대북위기관리 모임을 급조했지만, 그것은 장기적인 안보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안보정치를 중심 기조에 의해 도구화할 우려가 농후합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현 정부의 정책적 중심 기조는 ‘전국토의 토건화’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의심하는 것처럼, 이 죽음의 국가화는 북한을 적대적 대상으로 재구축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최근 위기에 처한 4대강 사업 등, 전국토의 토건화 정책에 대한 반대의 여론을 다른 곳으로 환기시키리는 데 있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늘 그렇듯이 냉전주의적 안보논의를 이용해서 정권안보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국가는 종종 국민의 죽음을 도구화합니다. 하지만 국민의 생명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위기에 처하도록 방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천안함의 병사들은 바로 그런 전형적인 예가 되었습니다.

시민도 그럴 수 있지만 군인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쓸모없는 생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장이 소모품으로 이용할 뿐인 그런 대상에 불과합니다. 즉 자본주의적 생명력을 인정받지 못한 이들을 국가의 생명관리체계는 결코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른바 ‘천안함의 용사들’은, 국가가 그 죽음을 독점해 버리자, 이른바 ‘영웅’으로서 대단한 칭찬의 대상이 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생명으로보다는 죽음으로서만 이용가치가 있는 존재들로 전락해 버립니다. 우리의 생명권력은 그렇게 사람들을 대하고 삶과 죽음을 도구화하고 있습니다. 하여 권력의 시선에서 저들의 삶뿐 아니라 특별한 우대를 받는 죽음도 사실상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존재에게 부활은 없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적 질서에 영혼이 포박되어 있는 한 말입니다.

다시 성서로 돌아와 봅시다. 바다화-폴리스화의 주인공들은 도시들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풍요로운 도시 문화의 적극적 주역입니다. 그들은 부유하고 학식 있으며 지체가 높은 이들입니다. 훌륭하고 멋들어진 옷차림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세련된 말투로 사람을 대합니다. 그들이 가족은 교양 있고, 자녀들은 아름답고 건강합니다. 그들의 삶은 그 세상에서 의미가 넘칩니다.

그뿐 아닙니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그들에게 죽음 또한 예사스럽지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시신을 유기함으로써 내버려지는 몸이 아닌 존재, 무덤에 안장되고, 숱한 장신구 등이 썩어 사라져버린 몸을 상징적으로 대리하는 존재, 그런 이들의 죽음은 끊임없이 산 자들의 기억 속에 잔류합니다. 무덤을 보며 사람들은 그이를 기억하고, 제사의례를 통해 그이를 기억하며, 그렇게 기억한 이야기 속에서 회자됩니다. 하여 그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이들이 묻힌 바로 그곳에서 마지막 때에 그의 몸이 부활할 것입니다. 바다의 제국, 그 세계 질서 속에서.

그런데 한 익명의 예언자는 도리어 종말의 때에는 그런 이들, 기억에서 오래도록 남겨진 이들이 모두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아울러 그네들의 도시, 바다화의 권력에 사로잡힌 도시는 모두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반면 다른 죽음, 버림당하고 이용당하는 죽음들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 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이사야서」 26장 18~19절)

버려진 생명이 다시 되살아나는 꿈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아래, 바다화-폴리스화의 대열에서 체제에 의해 존재를 빼앗긴 이들의 부활, 이것이 그 시대 묵시적 예언자들이 외친 새 세계의 꿈입니다.

천안함의 생명들이 국가에 의해 버림받은 곳, 그 주검이 도구화된 곳, 리워야단의 권력, 저 물의 권력이 존속하는 바다는 생기가 없습니다. 한데 예언자는 꿈꿉니다. ‘그 날, 리워야단이 생명을 다하는 그 날’(27장 1절), 생명을 파괴하는 도시들이 잿더미가 되는 날(25장 2절), 주님은 죽음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25장 8절)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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